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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한 끼 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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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제게 손을 내민 소녀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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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또래쯤으로 보이는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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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든 흔하게 볼 수 있는 연갈색의 머리칼은 시선을 잡아끌지 않았지만, 욕망으로 번들거리는 소녀의 눈동자는 시선을 잡아끌기에 충분했다. 샛노란 금빛의 눈동자는 보기 드문 것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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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그 눈동자에서 금화의 금빛을 떠올릴 것이고, 또 누군가는 뱀의 눈동자를 떠올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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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을 숨길 생각이 없어 보이는, 그렇기에 적나라하게 의도를 드러내는 눈동자. 눈동자에 담긴 소녀의 감정은 흥미였다. 눈동자를 마주 바라보던 나진은 이내 시선을 내려 그녀가 뻗은 손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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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하얀 장갑을 끼고 있는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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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그 손을 붙잡고 일어섰다. 그리곤 앞장서 걷는 소녀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한쪽 손은 허리춤의 칼자루에 얹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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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수상쩍은데. 따라가는 거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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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사준다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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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으로 그리 중얼거리면서도 나진은 경계를 풀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나진의 경계가 무심하게도, 소녀는 정말로 나진을 평범한 식당으로 데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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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브리아의 중앙 광장에 위치한 식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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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 보기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식당에 들어선 나진을 반기는 것은 흉악한 날붙이··· 같은 게 아닌, 굶주린 배를 비명 지르게 만드는 향긋한 음식 냄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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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앉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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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에 앉는 그 순간까지 나진은 경계를 풀지 않았지만, 테이블 위에 차례로 올라오는 접시 앞에서 마저 그리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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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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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도시에선 본 적도 없는 음식들. 따뜻하면서도 향긋한 음식 앞에서 나진은 괜스레 마른침을 삼켰다. 칼자루에 얹어놨던 손은 어느샌가 테이블 위의 포크를 붙잡으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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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프실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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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나진을 바라보던 소녀는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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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 먼저하고 이야기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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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전까진 속내가 구려 보인다고 생각한 음험한 웃음. 그러나, 지금은 마치 성인군자의 웃음처럼 보일 뿐이었다. 나진은 칼자루에서 손을 떼고 포크를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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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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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었다.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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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만의 제대로 된 식사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실로 감동스러운 식사였다. 잘 구워진 고기를 한 점 씹을 때 나진은 정말로 눈물 한 방울을 흘릴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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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윗동네 사람들은 평소에도 이런 걸 먹고 살았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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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도시에선 만찬이라 해 봐야 얼마나 오래된지 모르겠는 말라비틀어진 고기나, 윗동네에서 도축하고 남은 가축의 부산물을 한데 넣고 볶은 요리가 고작이었다. 그런 요리조차 이반이 큰맘 먹고 도시의 행사를 열 때나 맛볼 수 있던 것들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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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원이 다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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퍽퍽하지 않고 부드러우며, 기름지고 배가 든든해지는 윗동네의 음식에 나진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어렸을 적 쓰레기를 뒤지고 살다가, 이반의 눈에 들어 처음으로 제대로 된 식사를 해봤을 때와 비슷한 감동이 밀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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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식사를 마친 나진이 물로 입가심하고 있을 무렵이다. 나진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소녀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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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 괜찮죠? 제가 좋아하는 가게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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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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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심 따위는 이미 누그러진 뒤였다. 이런 식사를 대접해준 의도가 뭐든 간, 나진은 매우 긍정적으로 검토해 볼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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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나진이 이야기에 귀 기울일 준비가 된 것을 확인한 소녀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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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제 소개를 드리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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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품에서 명패 하나를 꺼내 나진에게 건넸다. 이반에게서 제국의 표준 문자를 읽고 쓰는 법을 배운 나진이었기에, 명패에 적힌 글자를 읽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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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 상단의 상단주라는 문장과, 상단의 정당한 권한을 인정하는 고위 인사들의 이름들이 빼곡히 적혀있는 명패. 그곳의 최상단에는 소녀의 이름으로 보이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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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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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에 적힌 글자는 알아볼 수 없었다. 명패가 오래돼서 글자가 지워졌다기보단, 칼로 난도질을 해 일부러 글자를 지운듯싶었다. 고개를 갸웃거린 나진은 명패를 도로 소녀에게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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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이름은 디에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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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에게서 명패를 돌려받은 그녀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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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패에서 적혀있는 것처럼, 캄브리아에서 ‘디에타 상단’을 운영하고 있는 상단주랍니다. 이 도시에선 제법 유명하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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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나진을 흘겨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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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아하니 이 도시에 처음 오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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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처음 도착하긴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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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명패 발급도 안 받으셨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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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급에 돈이 든다는데 돈이 없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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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도시에서 본격적으로 의뢰를 수주받고, 활동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명패. 하지만 명패를 발급받는데도 돈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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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진은 돈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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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도시를 빠져나올 때 오펜이 챙겨줬던 여비는 이 도시로 오는데 다 써버렸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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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맨몸으로 이 도시에 오신 모양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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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사연이 좀 많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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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도시에선 사연 없는 사람 찾기가 더 힘들긴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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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가 찻잔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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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로 목을 축인 그녀가 입을 열었다. 마치, 여기서부터가 본론이라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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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란하신 상황 같은데··· 저랑 거래 하나 하실 생각 없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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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래 말씀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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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거래. 저도 요즘 골머리를 썩이고 있는 문제가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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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직감했다. 이쪽이 본론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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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한 선의로 대접한 한 끼의 식사가 아닌, 바라는 것, 혹은 무언가 의도를 가지고 대접한 식사. 나진의 입장에서도 이쪽이 더 마음이 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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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한 선의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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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자의 쪽은 직관적이어서 이해가 쉬웠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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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전히 마음에 걸리는 건 있었다. 상단주쯤이나 되는 이가 뭐가 아쉬워서 자신에게? 디에타의 말에 귀기울일수록 나진의 눈매는 가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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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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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의 말을 경청한 나진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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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단의 장부에 장난질을 친 일당들을 잡아서 족쳐달라. 그 말씀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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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거죠. 장부에 장난을 치고 골목길에 숨어들었지 뭐예요? 신고를 해두긴 했지만 이 도시의 경비병들은 썩 믿음직 스럽지가 않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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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걸 왜 저한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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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의 의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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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상단의 규모가 크다면 사병은 물론이고, 굳이 자신같이 실력이 불분명한 인물에게 맡길 일 없이 다른 용병들을 고용하면 될 문제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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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가 그렇게 중요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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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질문에 디에타는 짧게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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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건, 제가 당신에게 좋은 기회를 주고 있다는 거고··· 이 의뢰를 받아들여서 당신도 손해볼 게 없다는 점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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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가 그렇게 중요하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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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아들이지 않아도 딱히 상관없답니다. 제안을 거절했다고 ‘밥값 내놓아라!’ 같은 옹졸한 짓거리는 할 생각 없으니 안심하셔도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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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는 처음처럼 미소 짓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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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웃음이 몹시 의심스럽긴 하지만, 나진은 깊게 파고들지 않기로 했다. 그녀의 말마따나 자신에겐 손해될 게 전혀 없는 이야기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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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매력적인 제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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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을 잡아 오면 디에타가 지불한다는 돈의 액수는 금전 감각이 덜 잡힌 나진이 보기에도 제법 묵직해 보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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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손해 볼 제안은 아니네. 네가 확인 해봐야할 건 하나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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귓가에 멀린의 목소리가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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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속으로 답했다. 아마도, 멀린이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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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이 잡아 오라는 놈들이 진짜 범죄자인지 아닌지, 그것만 확인하면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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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닐 경우 이건 함정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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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이 곧 법이었던 지하도시에서처럼 앞뒤 안 가리고 사람 담그고 다녔다간, 범죄자가 되는 게 한순간일 테니까. 나진은 그 점을 자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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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치가 없지는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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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만족스레 답하는 멀린을 뒤로하고 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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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착의 같은 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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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골라주시면 될 것 같네요. 전부 고를 필요는 없고, 원하시는 만큼 골라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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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가 나진의 앞에 수배서를 늘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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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펼쳐놓은 수배서는 대략 여섯 개. 수배서를 살펴보던 나진은 문득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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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개의 수배서 중 세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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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에게 몹시 익숙한 무대에 숨어들었다고 적혀있는 이들이 있었으니까. 그 석 장의 수배서를 나진은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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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로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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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장씩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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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놀란듯한 디에타를 뒤로 한 채, 의뢰에 자세한 내용과 그들의 인상착의가 그려진 수배서를 손에 쥔 나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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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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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자리를 뜨기 전에 디에타에게 질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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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뢰 대상들, 무력 수준이 어느 정도나 됩니까? 가령 마나를 다룬다거나··· 검기를 뽑는다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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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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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무해해 보이는 미소를 지은 채, 여태 표정 변화가 없던 디에타의 얼굴에 유의미한 변화가 생겼다. 나진의 질문에 디에타가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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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굳이 설명해야 하는가, 싶은 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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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내 디에타는 표정을 고친 채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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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기를 뽑을 줄 안다면 소드 엑스퍼트라는 건데··· 그럼 기사를 고용하거나, 전문적인 용병 집단을 고용하겠죠? 그리고 의뢰 비용에 공이 한두 개쯤 더 붙어야 할거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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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차근차근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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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기로는 호위를 몇 고용했다곤 들었는데, 날붙이를 다루는 수준에서 그칠 거예요. 검기를 뽑을 줄 아는 이들은 그리 싼 값에 고용되지 않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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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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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혹시 뭐 산속 깊은 곳에서 수행하시다 오셨나요? 이건 상식에 가까운 부분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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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속 깊은 곳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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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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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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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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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그리고, 잘 먹었습니다. 덕분에 배가 좀 든든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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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식당 바깥으로 나서려던 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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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시선을 늘어트렸다. 그 시선은 식당의 한구석에 앉아 있는 사내에게 닿았다. 이곳에 들어선 순간부터 줄곧 자신과 디에타 쪽을 관찰하고 있던 사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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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와 나진의 시선이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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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이었지만, 나진은 시선을 피하긴커녕 똑바로 사내를 바라봤다. 뭘 꼬라보냐는 듯이. 허공에서 시선이 맞부딪치기를 잠시, 헛웃음을 흘린 사내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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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를 뒤로하고 나진은 가게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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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를 나서기 전에 가게의 간판과 위치를 봐두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돈을 벌면 꼭 다시 와야겠단 생각을 하며 나진은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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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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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가게를 떠나고 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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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앉아 차를 홀짝이는 디에타의 곁에 사내 하나가 다가왔다. 디에타의 곁을 맴돌며 그녀를 호위하고 있던 기사, 파시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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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베니아 가(家)에서 가출하다시피 뛰쳐나온 그녀를 따라온 유일한 기사. 지금은 싸늘한 시신이 되어 무덤에 묻힌 제 어머니에게 은혜를 입었던 기사, 파시온을 흘겨보며 디에타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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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땠어요, 파시온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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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쁘진 않더군요. 이쪽을 알아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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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봤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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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기척을 숨기고 있었는데 눈치챈 모양입니다. 한참을 노려보고 가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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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온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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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돌한 애송이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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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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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좀 좋은 것 같긴 하지만, 그것 말곤 없는 것 같더군요. 그건 그렇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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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온이 한숨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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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말씀드리건대, 뒷 골목길에 처박힌 놈들을 상대하는 것은 삼가시길 바랍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놈들이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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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점이 재밌는 건데, 파시온 경은 뭘 모르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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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가 쿡쿡, 웃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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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없는 곳에서 빛나는 것들을 찾아내는 재미를 한번 느껴보면 파시온 경도 이해하실걸요? 가끔 골목길에서 빛나는 게 한두 개 튀어나오거든요. 겨우 식사 한 끼에 인재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 줄 수 있다니? 이거 완전 남는 장사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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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40명 가까이 밥을 사주셨고, 그중 딱 두 명만 밥값을 했단 걸 생각해 보면 참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업이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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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세 명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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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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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나갔던 그 소년까지 해서 셋이라고요. 마흔 명 중에 셋 정도면 나쁘지 않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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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신하는 듯한 말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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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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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온은 말없이 제 주인을 흘겨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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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베니아 가문에 속했다곤 하나, 그녀에겐 아르베니아 가문의 사람들과 같은 빛나는 금발은 없다.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 쪽의 유전을 강하게 받은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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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저 눈동자만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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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가치를 재단하고, 꿰뚫어 보는 뱀과 같은 저 샛노란 눈동자만큼은 아르베니아의 가주를 닮아있었다. 때로는 소름 끼치는 제 주인의 눈동자를 흘겨보며 파시온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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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주인이 저렇게까지 확신할 때는, 상대에게 무언가 있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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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전 그 소년이 제법 마음에 드셨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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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잘생겼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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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이유였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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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말고도 이유가 더 있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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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가 말끝을 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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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한다고 이해할 만한 건 아니에요. 그냥, 감각적인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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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의 모습을 떠올리며 디에타는 턱을 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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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카롭게 곤두서 있는 기세. 밑바닥을 기어 올라온 이들이 가지는 특유의 분위기를 소년은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눈동자만큼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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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에 물들지 않은 뚜렷한 빛을 가진 눈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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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년이 두른 분위기와는 다른 이질적인 눈동자. 그 눈동자에서 디에타는 흥미를 느꼈다. 소년은 아직은 더럽고, 때 묻고, 이제 막 도시에 발을 들인 사연 많아 보이는 초짜일 뿐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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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있어요. 잘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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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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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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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가 턱을 괸 채 쿡쿡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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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온 경, 저랑 내기할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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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으로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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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소년이 며칠 안으로 의뢰를 완수해서 가지고 올지. 며칠에 거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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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의 고민 후 파시온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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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온은 일주일을, 그리고 디에타는 나흘에 걸었다. 그것은 소년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반영된 기간이었다. 파시온이 말한 일주일이란 기간조차 ‘보통의 현상금 사냥꾼’ 들의 기준에선 꽤 빡빡한 기간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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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는 소년에게 결코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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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소년이 선택한 의뢰 대상의 무력은 별 볼 것 없다. 문제는 그들의 도주 실력이었다. 뒷골목 출신이었다는 그들은 이 도시의 미궁과 같은 골목길을 마치 제 집처럼 쏘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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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는 것은 어렵지 않을지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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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을 붙잡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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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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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정은 아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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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요. 미심쩍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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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에타라는 소녀가 내건 의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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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의뢰의 대상이 수배된 범죄자라는 것을 확인한 나진은 곧장 골목길로 향하고 있었다. 그들이 출몰하는 지역이라고 디에타가 점찍어 둔 거리가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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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거리에 발을 디디며 나진은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뒷골목 길의 탁한 공기는 나진에게 익숙한 것이었다. 햇빛이 들어오지 않아 골목길은 어두웠지만 이 또한 나진에겐 문제될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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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닿지 않는 곳에서 살아온 나진에게, 이런 어둠 속의 시야는 익숙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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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기회라는 건 부정할 수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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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좋은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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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도시에서 생활하기 위해서, 기반을 다잡고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라도 나진에게 필요한 것은 기초 자금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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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있어야 묵을 곳을 구할 수 있고, 돈이 있어야 굶지 않을 수 있다. 많을 필요까진 없지만 적어도 쪼들리지 않을 정도는 확보해 둘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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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빡세게 벌어놓고 시작하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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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최소한 사람이 쓰레기를 뒤지고 살진 않아야 할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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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그거 농담이었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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툴툴대는 멀린을 뒤로하고 나진은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가볍게 몸을 푸는 나진의 귓가에 멀린이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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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생각해 둔 방법은 있어? 이런 어두운 곳에서 찾긴 힘들 것 같은데. 왜 하필 그 세 장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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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물음에 나진은 미소 지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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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골랐던 세 장의 수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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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세 명의 수배범이 목격됐다는 장소는 다름 아닌 도시의 으슥한 골목길이다. 요컨대, 지하도시와 매우 유사한 환경이란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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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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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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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익숙한 일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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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쪽이 제 전문 분야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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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의 사냥개로 오랜 세월 활동해 왔던 조직의 처형인은 미소 지었다. 돈 떼먹고 잠적한 놈들을 잡아 족치는 건 예로부터 나진의 전문 분야였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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