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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한 끼 살게요.”
나진은 제게 손을 내민 소녀를 바라봤다.
제 또래쯤으로 보이는 소녀.
어디서든 흔하게 볼 수 있는 연갈색의 머리칼은 시선을 잡아끌지 않았지만, 욕망으로 번들거리는 소녀의 눈동자는 시선을 잡아끌기에 충분했다. 샛노란 금빛의 눈동자는 보기 드문 것이었으니.
누군가는 그 눈동자에서 금화의 금빛을 떠올릴 것이고, 또 누군가는 뱀의 눈동자를 떠올릴 것이다.
욕망을 숨길 생각이 없어 보이는, 그렇기에 적나라하게 의도를 드러내는 눈동자. 눈동자에 담긴 소녀의 감정은 흥미였다. 눈동자를 마주 바라보던 나진은 이내 시선을 내려 그녀가 뻗은 손을 바라봤다.
새하얀 장갑을 끼고 있는 손.
나진은 그 손을 붙잡고 일어섰다. 그리곤 앞장서 걷는 소녀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한쪽 손은 허리춤의 칼자루에 얹은 채.
-뭔가 수상쩍은데. 따라가는 거 맞아?
밥 사준다잖아요.
속으로 그리 중얼거리면서도 나진은 경계를 풀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나진의 경계가 무심하게도, 소녀는 정말로 나진을 평범한 식당으로 데려갔다.
캄브리아의 중앙 광장에 위치한 식당.
척 보기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식당에 들어선 나진을 반기는 것은 흉악한 날붙이··· 같은 게 아닌, 굶주린 배를 비명 지르게 만드는 향긋한 음식 냄새였다.
“거기 앉으세요.”
의자에 앉는 그 순간까지 나진은 경계를 풀지 않았지만, 테이블 위에 차례로 올라오는 접시 앞에서 마저 그리할 수는 없었다.
···꿀꺽.
지하도시에선 본 적도 없는 음식들. 따뜻하면서도 향긋한 음식 앞에서 나진은 괜스레 마른침을 삼켰다. 칼자루에 얹어놨던 손은 어느샌가 테이블 위의 포크를 붙잡으려 하고 있었다.
“배고프실 텐데.”
그런 나진을 바라보던 소녀는 미소 지었다.
“식사 먼저하고 이야기할까요?”
조금 전까진 속내가 구려 보인다고 생각한 음험한 웃음. 그러나, 지금은 마치 성인군자의 웃음처럼 보일 뿐이었다. 나진은 칼자루에서 손을 떼고 포크를 움켜쥐었다.
맛있었다. 정말로.
며칠 만의 제대로 된 식사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실로 감동스러운 식사였다. 잘 구워진 고기를 한 점 씹을 때 나진은 정말로 눈물 한 방울을 흘릴 뻔했다.
그런가, 윗동네 사람들은 평소에도 이런 걸 먹고 살았단 말인가?
지하도시에선 만찬이라 해 봐야 얼마나 오래된지 모르겠는 말라비틀어진 고기나, 윗동네에서 도축하고 남은 가축의 부산물을 한데 넣고 볶은 요리가 고작이었다. 그런 요리조차 이반이 큰맘 먹고 도시의 행사를 열 때나 맛볼 수 있던 것들이었는데······.
‘차원이 다르네.’
퍽퍽하지 않고 부드러우며, 기름지고 배가 든든해지는 윗동네의 음식에 나진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어렸을 적 쓰레기를 뒤지고 살다가, 이반의 눈에 들어 처음으로 제대로 된 식사를 해봤을 때와 비슷한 감동이 밀려오고 있었다.
그렇게 식사를 마친 나진이 물로 입가심하고 있을 무렵이다. 나진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소녀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맛 괜찮죠? 제가 좋아하는 가게랍니다.”
나진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경계심 따위는 이미 누그러진 뒤였다. 이런 식사를 대접해준 의도가 뭐든 간, 나진은 매우 긍정적으로 검토해 볼 생각이었다.
나진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나진이 이야기에 귀 기울일 준비가 된 것을 확인한 소녀가 입을 열었다.
“우선 제 소개를 드리자면.”
그녀가 품에서 명패 하나를 꺼내 나진에게 건넸다. 이반에게서 제국의 표준 문자를 읽고 쓰는 법을 배운 나진이었기에, 명패에 적힌 글자를 읽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디에타 상단의 상단주라는 문장과, 상단의 정당한 권한을 인정하는 고위 인사들의 이름들이 빼곡히 적혀있는 명패. 그곳의 최상단에는 소녀의 이름으로 보이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디에타 ■■■■■.
뒤에 적힌 글자는 알아볼 수 없었다. 명패가 오래돼서 글자가 지워졌다기보단, 칼로 난도질을 해 일부러 글자를 지운듯싶었다. 고개를 갸웃거린 나진은 명패를 도로 소녀에게 건넸다.
“제 이름은 디에타.”
나진에게서 명패를 돌려받은 그녀가 입을 열었다.
“명패에서 적혀있는 것처럼, 캄브리아에서 ‘디에타 상단’을 운영하고 있는 상단주랍니다. 이 도시에선 제법 유명하긴 한데···.”
그녀가 나진을 흘겨봤다.
“보아하니 이 도시에 처음 오신 것 같네요?”
“오늘 처음 도착하긴 했습니다.”
“아직 명패 발급도 안 받으셨고?”
“발급에 돈이 든다는데 돈이 없어서요.”
이 도시에서 본격적으로 의뢰를 수주받고, 활동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명패. 하지만 명패를 발급받는데도 돈이 필요했다.
그리고 나진은 돈이 없었다.
지하도시를 빠져나올 때 오펜이 챙겨줬던 여비는 이 도시로 오는데 다 써버렸기 때문에.
“정말 맨몸으로 이 도시에 오신 모양이네요?”
“제가 사연이 좀 많아서.”
“이 도시에선 사연 없는 사람 찾기가 더 힘들긴 하죠.”
디에타가 찻잔을 기울였다.
차로 목을 축인 그녀가 입을 열었다. 마치, 여기서부터가 본론이라는 것처럼.
“곤란하신 상황 같은데··· 저랑 거래 하나 하실 생각 없으신가요?”
“거래 말씀입니까?”
“예, 거래. 저도 요즘 골머리를 썩이고 있는 문제가 있어서.”
나진은 직감했다. 이쪽이 본론이군.
순수한 선의로 대접한 한 끼의 식사가 아닌, 바라는 것, 혹은 무언가 의도를 가지고 대접한 식사. 나진의 입장에서도 이쪽이 더 마음이 편했다.
순수한 선의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후자의 쪽은 직관적이어서 이해가 쉬웠으니까.
하지만 여전히 마음에 걸리는 건 있었다. 상단주쯤이나 되는 이가 뭐가 아쉬워서 자신에게? 디에타의 말에 귀기울일수록 나진의 눈매는 가늘어졌다.
“그러니까.”
디에타의 말을 경청한 나진이 입을 열었다.
“상단의 장부에 장난질을 친 일당들을 잡아서 족쳐달라. 그 말씀입니까?”
“바로 그거죠. 장부에 장난을 치고 골목길에 숨어들었지 뭐예요? 신고를 해두긴 했지만 이 도시의 경비병들은 썩 믿음직 스럽지가 않아서요.”
“그런데, 그걸 왜 저한테?”
나진의 의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렇게 상단의 규모가 크다면 사병은 물론이고, 굳이 자신같이 실력이 불분명한 인물에게 맡길 일 없이 다른 용병들을 고용하면 될 문제 아닌가.
“이유가 그렇게 중요할까요?”
그 질문에 디에타는 짧게 답했다.
“중요한 건, 제가 당신에게 좋은 기회를 주고 있다는 거고··· 이 의뢰를 받아들여서 당신도 손해볼 게 없다는 점 아닐까요?”
의도가 그렇게 중요하냐고.
“받아들이지 않아도 딱히 상관없답니다. 제안을 거절했다고 ‘밥값 내놓아라!’ 같은 옹졸한 짓거리는 할 생각 없으니 안심하셔도 돼요.”
디에타는 처음처럼 미소 짓고 있을 뿐이었다.
그 웃음이 몹시 의심스럽긴 하지만, 나진은 깊게 파고들지 않기로 했다. 그녀의 말마따나 자신에겐 손해될 게 전혀 없는 이야기였으니까.
확실히 매력적인 제안이다.
그들을 잡아 오면 디에타가 지불한다는 돈의 액수는 금전 감각이 덜 잡힌 나진이 보기에도 제법 묵직해 보였으니까.
-확실히 손해 볼 제안은 아니네. 네가 확인 해봐야할 건 하나 아냐?
귓가에 멀린의 목소리가 울렸다.
나진은 속으로 답했다. 아마도, 멀린이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이 사람이 잡아 오라는 놈들이 진짜 범죄자인지 아닌지, 그것만 확인하면 되겠죠.’
아닐 경우 이건 함정일 테니까.
이반이 곧 법이었던 지하도시에서처럼 앞뒤 안 가리고 사람 담그고 다녔다간, 범죄자가 되는 게 한순간일 테니까. 나진은 그 점을 자각하고 있었다.
-눈치가 없지는 않네?
그렇게 만족스레 답하는 멀린을 뒤로하고 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인상착의 같은 건 있나요?”
“여기서 골라주시면 될 것 같네요. 전부 고를 필요는 없고, 원하시는 만큼 골라주세요.”
디에타가 나진의 앞에 수배서를 늘어놨다.
그녀가 펼쳐놓은 수배서는 대략 여섯 개. 수배서를 살펴보던 나진은 문득 미소 지었다.
여섯 개의 수배서 중 세 개.
나진에게 몹시 익숙한 무대에 숨어들었다고 적혀있는 이들이 있었으니까. 그 석 장의 수배서를 나진은 가리켰다.
“이걸로 할게요.”
“···세 장씩이나?”
조금 놀란듯한 디에타를 뒤로 한 채, 의뢰에 자세한 내용과 그들의 인상착의가 그려진 수배서를 손에 쥔 나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지막으로 하나.”
나진이 자리를 뜨기 전에 디에타에게 질문했다.
“의뢰 대상들, 무력 수준이 어느 정도나 됩니까? 가령 마나를 다룬다거나··· 검기를 뽑는다거나?”
“······예?”
세상 무해해 보이는 미소를 지은 채, 여태 표정 변화가 없던 디에타의 얼굴에 유의미한 변화가 생겼다. 나진의 질문에 디에타가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걸 굳이 설명해야 하는가, 싶은 표정.
그러나 이내 디에타는 표정을 고친 채 답했다.
“검기를 뽑을 줄 안다면 소드 엑스퍼트라는 건데··· 그럼 기사를 고용하거나, 전문적인 용병 집단을 고용하겠죠? 그리고 의뢰 비용에 공이 한두 개쯤 더 붙어야 할거구요.”
그녀가 차근차근 설명했다.
“듣기로는 호위를 몇 고용했다곤 들었는데, 날붙이를 다루는 수준에서 그칠 거예요. 검기를 뽑을 줄 아는 이들은 그리 싼 값에 고용되지 않거든요.”
“그렇습니까?”
“예. 혹시 뭐 산속 깊은 곳에서 수행하시다 오셨나요? 이건 상식에 가까운 부분인데.”
산속 깊은 곳이라.
나진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슷합니다.”
“···네?”
“곧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그리고, 잘 먹었습니다. 덕분에 배가 좀 든든하네요.”
그렇게 식당 바깥으로 나서려던 찰나.
나진은 시선을 늘어트렸다. 그 시선은 식당의 한구석에 앉아 있는 사내에게 닿았다. 이곳에 들어선 순간부터 줄곧 자신과 디에타 쪽을 관찰하고 있던 사내.
사내와 나진의 시선이 마주쳤다.
자신을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이었지만, 나진은 시선을 피하긴커녕 똑바로 사내를 바라봤다. 뭘 꼬라보냐는 듯이. 허공에서 시선이 맞부딪치기를 잠시, 헛웃음을 흘린 사내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사내를 뒤로하고 나진은 가게를 나섰다.
가게를 나서기 전에 가게의 간판과 위치를 봐두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돈을 벌면 꼭 다시 와야겠단 생각을 하며 나진은 걸음을 옮겼다.
나진이 가게를 떠나고 잠시.
홀로 앉아 차를 홀짝이는 디에타의 곁에 사내 하나가 다가왔다. 디에타의 곁을 맴돌며 그녀를 호위하고 있던 기사, 파시온이었다.
아르베니아 가(家)에서 가출하다시피 뛰쳐나온 그녀를 따라온 유일한 기사. 지금은 싸늘한 시신이 되어 무덤에 묻힌 제 어머니에게 은혜를 입었던 기사, 파시온을 흘겨보며 디에타가 입을 열었다.
“어땠어요, 파시온 경?”
“나쁘진 않더군요. 이쪽을 알아봤습니다.”
“···알아봤다고요?”
“예. 기척을 숨기고 있었는데 눈치챈 모양입니다. 한참을 노려보고 가더군요.”
파시온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당돌한 애송이 같습니다.”
“특이점은?”
“눈이 좀 좋은 것 같긴 하지만, 그것 말곤 없는 것 같더군요. 그건 그렇고······.”
파시온이 한숨을 내뱉었다.
“늘 말씀드리건대, 뒷 골목길에 처박힌 놈들을 상대하는 것은 삼가시길 바랍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놈들이지 않습니까.”
“그 점이 재밌는 건데, 파시온 경은 뭘 모르는군요.”
디에타가 쿡쿡, 웃음을 흘렸다.
“빛이 없는 곳에서 빛나는 것들을 찾아내는 재미를 한번 느껴보면 파시온 경도 이해하실걸요? 가끔 골목길에서 빛나는 게 한두 개 튀어나오거든요. 겨우 식사 한 끼에 인재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 줄 수 있다니? 이거 완전 남는 장사예요.”
“지금까지 40명 가까이 밥을 사주셨고, 그중 딱 두 명만 밥값을 했단 걸 생각해 보면 참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업이로군요.”
“이젠 세 명이에요.”
“···예?”
“방금 나갔던 그 소년까지 해서 셋이라고요. 마흔 명 중에 셋 정도면 나쁘지 않죠?”
확신하는 듯한 말투.
“······.”
파시온은 말없이 제 주인을 흘겨봤다.
아르베니아 가문에 속했다곤 하나, 그녀에겐 아르베니아 가문의 사람들과 같은 빛나는 금발은 없다.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 쪽의 유전을 강하게 받은 탓이다.
하지만, 저 눈동자만큼은.
사람의 가치를 재단하고, 꿰뚫어 보는 뱀과 같은 저 샛노란 눈동자만큼은 아르베니아의 가주를 닮아있었다. 때로는 소름 끼치는 제 주인의 눈동자를 흘겨보며 파시온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제 주인이 저렇게까지 확신할 때는, 상대에게 무언가 있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조금 전 그 소년이 제법 마음에 드셨나 봅니다.”
“일단 잘생겼잖아요.”
“···그런 이유였습니까?”
“그거 말고도 이유가 더 있긴 한데.”
디에타가 말끝을 흐렸다.
“설명한다고 이해할 만한 건 아니에요. 그냥, 감각적인 거니까.”
소년의 모습을 떠올리며 디에타는 턱을 괬다.
날카롭게 곤두서 있는 기세. 밑바닥을 기어 올라온 이들이 가지는 특유의 분위기를 소년은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눈동자만큼은 달랐다.
무언가에 물들지 않은 뚜렷한 빛을 가진 눈동자.
소년이 두른 분위기와는 다른 이질적인 눈동자. 그 눈동자에서 디에타는 흥미를 느꼈다. 소년은 아직은 더럽고, 때 묻고, 이제 막 도시에 발을 들인 사연 많아 보이는 초짜일 뿐이지만······.
“뭔가 있어요. 잘은 모르겠지만.”
“감입니까?”
“그런 셈이죠.”
디에타가 턱을 괸 채 쿡쿡 웃었다.
“파시온 경, 저랑 내기할래요?”
“무엇으로 말입니까.”
“저 소년이 며칠 안으로 의뢰를 완수해서 가지고 올지. 며칠에 거시겠어요?”
잠깐의 고민 후 파시온은 말했다.
파시온은 일주일을, 그리고 디에타는 나흘에 걸었다. 그것은 소년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반영된 기간이었다. 파시온이 말한 일주일이란 기간조차 ‘보통의 현상금 사냥꾼’ 들의 기준에선 꽤 빡빡한 기간이었으니까.
디에타는 소년에게 결코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실제로, 소년이 선택한 의뢰 대상의 무력은 별 볼 것 없다. 문제는 그들의 도주 실력이었다. 뒷골목 출신이었다는 그들은 이 도시의 미궁과 같은 골목길을 마치 제 집처럼 쏘다닌다.
찾는 것은 어렵지 않을지언정···.
그들을 붙잡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므로.
-함정은 아니네.
“그러게요. 미심쩍긴 하지만···.”
디에타라는 소녀가 내건 의뢰.
그 의뢰의 대상이 수배된 범죄자라는 것을 확인한 나진은 곧장 골목길로 향하고 있었다. 그들이 출몰하는 지역이라고 디에타가 점찍어 둔 거리가 있었으니까.
그 거리에 발을 디디며 나진은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뒷골목 길의 탁한 공기는 나진에게 익숙한 것이었다. 햇빛이 들어오지 않아 골목길은 어두웠지만 이 또한 나진에겐 문제될 게 없었다.
빛이 닿지 않는 곳에서 살아온 나진에게, 이런 어둠 속의 시야는 익숙했으므로.
“좋은 기회라는 건 부정할 수 없네요.”
확실히, 좋은 기회였다.
이 도시에서 생활하기 위해서, 기반을 다잡고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라도 나진에게 필요한 것은 기초 자금이었으니까.
돈이 있어야 묵을 곳을 구할 수 있고, 돈이 있어야 굶지 않을 수 있다. 많을 필요까진 없지만 적어도 쪼들리지 않을 정도는 확보해 둘 생각이었다.
“빡세게 벌어놓고 시작하자고요.”
-그래. 최소한 사람이 쓰레기를 뒤지고 살진 않아야 할 거 아니야.
“그러니까 그거 농담이었다니까요.”
툴툴대는 멀린을 뒤로하고 나진은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가볍게 몸을 푸는 나진의 귓가에 멀린이 속삭였다.
-그런데 생각해 둔 방법은 있어? 이런 어두운 곳에서 찾긴 힘들 것 같은데. 왜 하필 그 세 장이야?
그 물음에 나진은 미소 지을 뿐이었다.
나진이 골랐던 세 장의 수배서.
그 세 명의 수배범이 목격됐다는 장소는 다름 아닌 도시의 으슥한 골목길이다. 요컨대, 지하도시와 매우 유사한 환경이란 뜻이었다.
“그야.”
익숙한 무대.
그리고, 익숙한 일감.
“이쪽이 제 전문 분야거든요.”
이반의 사냥개로 오랜 세월 활동해 왔던 조직의 처형인은 미소 지었다. 돈 떼먹고 잠적한 놈들을 잡아 족치는 건 예로부터 나진의 전문 분야였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