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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채의 꼭대기에서 두 개의 별이 빛났다.
나진의 별은 떠오른 지 얼마 안 된 신성(新星)이다. 아직 때가 타지 않은 별은 새하얀 빛을 흩뿌렸다. 그에 비해 슐레인의 별은 낡고 낡은 옛 별이다. 마모된 별은 나진의 별처럼 빛날 수 없었다.
스스로 빛을 내는 것을 별이라 부른다면, 슐레인이 가진 것은 더 이상 별이라 부를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단지 빛나는 것을 별이라 부른다면······.
그것은 분명한 별이었다.
나진의 별이 만들어내는 빛을 슐레인은 받아들였다. 스스로 빛날 수 없다면, 다른 누군가의 빛을 빌려 빛나면 그만이었으니. 낡고 바스러진 별이라 한들 별빛을 반사할 수는 있었다.
그리하여, 두 개의 별이 빛난다.
슐레인은 수평으로 세운 검을 제 머리 옆으로 들어 올렸다. 무릎을 굽히며 숨을 가다듬었다. 그가 가장 자신 있는 기술이었으며 숱한 적들을 베어 넘긴 기술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슐레인이 가진 최선이었다.
최선에는 최선으로 답해야 하는 법.
나진은 기꺼이 자세를 취했다. 그 자세를 본 순간 슐레인은 그만 웃고 말았다.
“아탕가인가!”
슐레인이 외쳤다. 외치지 않고선 배길 수 없었다. 아탕가, 정말이지 그리운 이름. 슐레인의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그런가, 아탕가인가. 망가져 버린 기사의 최후를 장식할 상대치고는 너무나도 과분하지 않은가?
그러나 나진은 오른발을 앞으로 쭉 뻗었다. 기사를 벌하는 검이 아닌, 호적수를 상대하기 위한 아탕가의 검. 그 모습에 슐레인은 이제 웃지조차 못했다.
정말이지. 이렇게까지······.
둘의 시선이 교차했다. 신호는 필요 없었다. 대화는 더더욱 필요 없었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땅을 박찼다.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지며 서로의 눈동자는 오직 상대가 쥔 검만을 바라봤다.
나진도 슐레인도 소드 시커다.
하지만 둘의 경지가 같지는 않다.
본능에 몸을 맡긴 슐레인의 경지는 나진보다 낮았을지언정, 자신의 의지로 검을 휘두르는 슐레인의 경지는 결코 나진보다 낮지 않다. 그는 이미 발아(發芽)를 거친 무인이었으므로.
발아(發芽), 싹이 트는 것.
소드마스터가 제 심상으로 일대를 물들여 영역을 펼친다면, 소드 시커는 제 검기에 자신의 심상을 담는다. 그렇다면 거기서 한 발짝 앞으로 내디뎌 발아를 거친 무인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 답을 슐레인은 선보였다.
그의 검기가 거세게 타올랐다. 슐레인의 검기는 성화를 본뜬 것. 그의 심상에는 영원토록 타오르는 성화가 자리 잡고 있다. 그 풍경을 슐레인은 자신의 검기에 담아내며 검을 휘둘렀다.
검을 휘두른 궤적을 따라 세상이 붉게 물들었다. 검기는 단지 형상을 본떴을 뿐이지만, 그의 검이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타닥’ 하고 불길이 타오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검이 지나간 자리에는 성화(星火)가 남아 타올랐다.
소드마스터처럼 일대를 자신의 심상으로 물들이진 못하지만, 최소한 검이 나아간 자리에 자신의 심상을 피워내는 것. 그것이 발아를 거친 무인의 경지다.
아직 개화하지 않았으며, 만개하지 못했지만 싹이 튼 심상은 세상에 자리 잡았다. 그곳에서 타오르고 있는 불길은 슐레인이 마모되면서도 놓지 못한 풍경이다.
-나도 모른다, 그거 왜 지키는지.
그의 귀에 목소리가 들렸다.
-그거 딱히 신성한 불 아니야. 별이 깃들어 있지도 않고. 그냥 단순한 불이지.
그런데, 어째서 지킵니까?
-그 불을 사람들이 성화라고 여기니까.
그게 성화 수호 기사단의 긍지니까.
술자리에서 나눴던 대화, 그가 살아온 삶을 반추하며 슐레인은 검을 휘둘렀다. 그가 200년이 넘도록 지켜온 불이 성채의 꼭대기를 휩쓸었다.
사방에 가득하던 시체도, 시체들이 풍기던 악취도, 그것들을 삼키며 타오르던 성화도, 성화를 담은 성화대도, 그 모든 것을 슐레인의 검기는 집어삼켰다.
그러나 그 불이 삼키지 못한 것도 있다.
촤아아아아악!
파도처럼 밀려드는 불길을 걷어내며 번쩍이는 별이 있었으니. 불의 파도를 가르며 별은 슐레인을 향해 다가왔다.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슐레인은 그럴 줄 알았다는 양 다시 검을 휘둘렀다.
“와라!”
그는 과거의 영광에 취해 소리쳤다.
잊어버린 긍지를 떠올리며 검을 휘둘렀다. 검을 휘두르는 동안에는, 그의 칼끝에서 성화가 넘실거릴 동안에는 그는 기사일 수 있었다.
물론 그도 안다.
더는 자신이 기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건 하룻밤조차 되지 못하는 꿈에 불과하며 얼마 지나지 않아 꿈에서 깨어야만 함을. 그리고,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건 지독한 현실이라는 사실을 그는 안다. 하지만, 그게 어쨌다는 것인가?
자그마치 200년 만에 느끼는 홀가분함이다. 이걸 그따위 시답잖은 감정에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아아.’
슐레인이 신음했다.
온다. 불을 가르며 현실이 다가온다. 기어코 불의 파도를 뚫어내며 나진이 튀어나왔다. 그 몸에는 그을음이 가득하지만 소년의 눈동자는 선명했다.
카아아아아아아앙!
별자리와 불이 맞부딪치며 흩어졌다. 흩어지는 검기 사이로 검과 검이 맞부딪쳤다. 그 순간 나진의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슐레인의 몸 절반이 불에 타들어 가고 있었으니.
자신이 만들어 낸 심상이 자신을 해하는 경우를 나진은 처음 봤다. 도대체 어째서? 그 이유를 나진은 얼마 안 가 알 수 있었다.
슐레인이 생각하는 성화란 그릇된 것을 불태우는 불길. 슐레인 자신도 예외는 아니었다. 망자로 변해버린 부분이 타들어 가며 슐레인의 몸은 가벼워졌다. 당황하는 나진에게 슐레인은 그런 걸 신경 쓸 여유가 없을 텐데, 하고 말하듯 검을 휘둘러 나진을 몰아붙였다.
검과 검이 맞부딪치고.
검기와 검기가 충돌하며 반발을 일으킨다.
수차례의 공방이 오갔다. 나진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슐레인의 검을 받아냈다. 받아내는 데 그치지 않고 반격을 이어가며 나진은 슐레인을 똑바로 마주했다.
‘부전승은 줘도 안 받습니다.’
‘그런가.’
‘불에 타죽는 것보다 제 검이 더 빠를 겁니다.’
저 몸이 완전히 불에 타 검을 휘두를 수 없게 되기 전에 결판을 낼 것이다. 단지 시간을 끌기만 해도 승리하는 건 나진이지만, 그런 시시한 승리에 나진은 관심이 없었다. 더 적극적으로 슐레인에게 달려들었다.
검기의 출력이 밀리며 상대보다 검기를 잘 다루지 못하지만, 그것이 나진이 밀릴 이유는 되지 않았다.
부족한 부분은 메꾸면 됐으므로.
무엇으로? 순간적인 판단과 기술, 그리고 아탕가의 검으로. 검이 오가면 오갈수록 나진은 앞으로 나아갔다. 불을 걷어내며 하염없이 전진했다.
카앙!
나진의 검에 슐레인의 검이 튕겨져 나갔다. 기어코 정면에서 슐레인의 기술을 박살 내며 나진은 한 걸음 더 앞으로 내디뎠다. 영원히 이어질 것 같던 공방에 마침표를 찍었다.
서걱.
나진의 검이 슐레인을 베었다.
댕그랑, 하고 슐레인이 검을 놓쳤다.
그가 제 어깻죽지부터 심장에 이르기까지 길게 이어진 검흔(劍痕)을 손으로 매만졌다.
그의 몸이 빠르게 마모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건 망자가 되는 것과는 달랐다. 지금 그에게 찾아오는 것은 죽음이었다. 온몸이 바스러져 맞이하는 영원한 죽음. 이는 본래 슐레인이 가질 수 없는 안식이기도 했다.
다른 별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그 스스로는 얻을 수 없던 영원한 안식.
다가오는 죽음을 앞에 둔 채 슐레인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꿈에서 깰 시간이었다. 그는 불타버린 망자의 눈동자가 아닌 인간의 눈동자로 주변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그가 줄곧 외면해 왔던 현실이 있었다.
불의 파도가 한차례 휩쓸었다곤 하나, 그곳에는 아직 재가 되지 않은 시체들이 가득했다. 심장을 빼앗긴 시체들에선 악취가 진동했다. 그 모든 게 슐레인이 만들어낸 참상이었다.
꿈에서 깬 슐레인은 신음했다.
어떠한 말로도 변명할 수 없는 증거가 눈앞에 펼쳐져 있다. 잠깐의 꿈에 취한 대가는 무거웠다. 외면할 수 없게 된 현실을 마주한 채 그는 고통스러워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슐레인은 선택할 수 있었다.
그가 나진을 바라봤다. 나진 역시 슐레인을 바라봤다.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슐레인은 후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고맙다.”
슐레인이 말했다.
“미뤄둔 선택을 하게 해주어서.”
그가 떨어트렸던 검을 움켜쥐었다.
그리곤 제 몸을 불태우고 있는 불에 검을 가져다 댔다. 성화를 머금은 검이 타올랐다. 타오르는 불을 이끌고 슐레인은 고성의 아래로 뛰어내렸다.
나진은 그를 따라 고성의 아래로 내려갔다.
그곳에는 투구기사에 의해 나가떨어진 망자들이 가득했다. 아직도, 투구기사를 향해 달려들고 있는 망자들 역시 존재했다. 하지만 슐레인이 그들의 앞에 선 순간 망자들은 모든 동작을 멈추었다.
그들은 슐레인이 손에 쥔 검을 바라봤다.
슐레인의 검에서 타오르는 성화(星火)를 마주한 순간, 그들은 망자가 아닌 기사가 됐다. 철컥! 그들의 녹슨 갑옷이 요란스러운 소리를 냈다. 그들이 대열을 갖춰 슐레인의 앞에 바로 섰다.
망자들과 싸우던 투구기사는 제 창을 내렸다. 잠깐이지만 슐레인과 투구기사의 시선이 교차했다. 슐레인은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쓰게 웃었다.
“우리는 성화 수호 기사단.”
그가 외쳤다.
“성화를 지키고, 불과 함께 타오르는 기사들.”
슐레인은 줄곧 미뤄두었던 선택을 했다.
제 동료들을 놓을 수 없어서, 끝나지 않은 여정에 마침표를 찍는 것을 그는 미루고 또 미뤄왔다. 하지만 이제는 마침표를 찍어야만 했다.
“함께 나아가자.”
저들을 놓아줄 때가 왔다.
어쩌면, 자신을.
슐레인은 마지막 힘을 쥐어짜 검을 휘둘렀다. 검에서 터져 나온 성화가 기사들을 집어삼켰다. 성화는 그들의 몸을 불태우며 거세게 타올랐다. 성화는 성채의 꼭대기에 있지 않았다. 지금 그들의 눈앞에서 타오르는 불이야말로 성화였다.
물론 그건 별과는 전혀 상관없는 불일 수도 있다. 언제든 꺼질 수 있는 평범한 불에 불과하며, 딱히 신성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관 없다.
중요한 건,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이 이것을 성화로 여긴다는 사실이었으니.
기사들은 기꺼이 불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스스로를 장작 삼아 마지막 불을 피워올렸다. 그들의 몸에 남아있던 별빛을 집어삼키며 타들어 갈 적, 불길에는 백금색의 입자가 튀어 올랐다. 그들이 마지막에 피워낸 불길은 분명한 성화(星火)였다.
재로 변해가는 기사들을 나진과 투구기사는 말없이 바라봤다.
그것이 성화 수호 기사단의 최후였다.
살아있던 모든 시간이 아름답지는 않았을 테지만, 그들이 마지막으로 피워내는 불길만큼은 아름다웠다.
마지막까지 거세게 타오르던 슐레인의 시체가 소리 없이 허물어졌다. 잿더미 사이에는 그가 평생을 쥐고 있던 검 한 자루만이 남아 있었다.
“······.”
투구기사는 잿더미 사이에서 그 검을 꺼냈다. 그리곤 땅에 일자가 되게끔 꽂아 넣었다. 약식으로 만들어낸 검묘(劍墓)였다. 그 무덤의 앞에 짧게 묵례를 올린 투구기사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외륙에서 사람은 사람을 먹는다.”
그가 말했다.
요새에 도착하기 전에 나눴던 대화의 연장선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사람은 사람의 심장을 먹는다. 누군가는 명예와 긍지가 생존보다 우선되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외륙에선 살아남아야 그것들을 지킬 수 있지.”
투구기사가 나진을 돌아봤다.
“이곳에서 죽음은 안식이 될 수 없으니까. 망자가 되지 않으려거든 제 목숨을 소중히 여겨야 하지.”
“심장을 빼앗기면 영원히 죽을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야.”
그가 걸음을 옮겼다. 무언갈 찾듯이 요새를 돌아다니며 그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많은 별을 가질수록, 높은 경지에 오를수록 사람은 괴물이 되어간다. 심장과 별을 빼앗겨도 그 몸에 남은 별빛이 다 떨어질 때까지 움직이곤 하지. 별빛만을 탐하는 짐승이 되어서 말야. 운 좋게 별빛을 먹기라도 하면 그 삶은 더더욱 연장될 테고.”
하지만 그게 어디 삶이겠는가.
자아를 잃은 채 별만을 쫓아 움직이는 망자들. 그러고 보면, 심장을 잃고도 움직이는 망자들을 본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니 심장 없이도 움직이는 놈을 마주하거든 그놈이 어지간히 강한 놈이구나, 하고 생각해야 하는 거다. 생전에 높은 경지에 오른 놈일 테니.”
“그렇습니까.”
“그래. 슐레인도 마찬가지였지. 저 양반, 한때는 별을 4개까지 가지고 있었어. 지금이야 다 잃어버리고 약해졌지만··· 한때는 꽤 강한 기사였지. 그래서 혼자서 죽음을 택하지도 못한 거고.”
슐레인은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제 심장을 꿰뚫는다 하더라도 망자가 될 게 뻔했으니까.
“결국 그는 살아남기를 택했다. 자신마저 망자가 되어버린다면 성화 수호 기사단 전원이 망자가 되어버리는 것이니. 그 꼴만큼은 볼 수 없었겠지.”
“그래서······.”
“그래, 그래서 인간을 사냥한 거다. 그는 자신의 명예와 긍지를 내던져서라도 기사단의 긍지를 지키고자 했다. 미련한 짓거리지. 기사단장이 그런 선택을 한 순간부터 망자의 집단이나 다름 없게 된 것인데.”
투구기사가 요새의 안을 뒤졌다.
무언갈 발견한 그가 손을 뻗었다.
“넌 그 선택을 어떻게 생각하지? 그 선택은 옳은가? 그른가? 지탄받아 마땅한가? 슐레인은, 죄인인가?”
“······.”
나진은 침묵했다. 솔직히 말해서 잘 모르겠다. 슐레인이 지탄받아 마땅한 일을 한 것은 맞다. 하지만 선과 악으로 딱 갈라서 설명하기란 어려웠다. 적어도 나진은 그렇게 느꼈다.
“답을 내지 않아도 좋다. 단지 외륙에는 이런 인간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라. 최대한 다양한 것들을 보고 경험하고 또 고뇌해라. 그것이야말로 초월로 향하는 길이니.”
투구기사가 피식, 웃으며 나진의 등을 두들겼다. 그리곤 그는 요새의 안에 놓여있던 상자에서 무언갈 끄집어냈다. 그의 손에 딸려 나온 것은 깃발이었다.
성화 수호 기사단의 군기(軍旗).
그것을 꺼내어 펼치며 투구기사는 말했다.
“그래도, 네 덕에 슐레인은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다. 마지막만큼은 기사로서 선택할 수 있었어.”
“제 덕이라니?”
“새하얀 별. 마모되지 않은 찬란한 별만이 마모된 별에게 죽음을 선물할 수 있다. 영광스러운 죽음을 말이야.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말야.”
투구기사는 이유를 모른다고 말했지만, 그 이유를 알고 있는 사람이 나진의 곁에는 있었다.
-별은 순리(順理)의 상징이기도 하니까. 별은 기본적으로 신비, 악마, 마녀와 같은 세상의 규칙에 반하는 것들에 저항해. 그리고, 제대로 된 죽음을 맞이하지 못하는 망자들도 순리에 어긋난 존재인 거지.
그러니 순수한 별은 망자에게 완전한 죽음을 선물할 수 있다. 하지만, 하고 멀린은 말했다.
-별은 소유자에게 물들어. 악마나 마녀가 별을 가지고 있을 수 있듯, 소유자에 맞게 물들고 말지. 그럼 별이 가진 순수함은 사라지는 거야.
순수함을 잃은 순간부터 별은 순리에 저항하지 않는다. 오직, 자신의 멋대로 세상을 정의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내 별도 그렇고, 대부분의 별들이 그래. 처음에는 순수하더라도 마모되거나 별을 얻을수록 자아가 강해지고, 별의 본질과는 멀어지게 되니까.
딱 하나 예외가 존재하긴 했다.
아서는 13개의 별을 손에 넣고도 별의 본질을 유지했으니. 나진도 그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떠오른지 얼마 안된 나진의 별은 순수했다.
“역설적인 말이지.”
투구기사가 말했다.
“별이 마모됐기에, 더럽혀졌기에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어 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찬란함을 잃었기에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도 없게 돼. 온전한 죽음을 위해선 찬란한 별빛이 필요하니.”
그가 나진을 바라봤다.
“처음 봤을 때 혹시 싶었지만, 네 별은 역시 순수함을 아직 간직하고 있는 것 같군. 하기야 별을 얻은 지 얼마 안 됐을 테니까. 부디 그 순수함을 오래 간직하길 바란다. 외륙에선 그것만큼이나 값진 게 없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그가 성화 수호 기사단의 깃발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고개를 살짝 숙인 채 그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성화 수호 기사단. 로하스트 영지를 수호했으며 성화(星火)를 수호했던 기사단. 그들은 마지막까지 자신의 의무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건 추도사였다.
성화 수호 기사단을 향해 읊는 추도사.
“영지를 지키지 못했으나 그들은 책임에서 눈을 돌리지 않았다. 그들은 외륙으로 나아갔다. 물러설 수 없었기에 나아간 것이 아니다. 단지, 이들은 나아가기를 선택했다. 영원토록 투쟁하기를, 그리하여 책임을 다하기를 선택한 것이다.”
투구기사는 깃발에 감싸여있던 명부에 적힌 기사들의 이름을 읊었다. 크렌켈, 칼리아스, 토레스, 셀라체, 슐츠, 유벨, 칼센······ 그리고 슐레인.
“최후의 순간 그들은 기사였다.”
그들에게 안식이 함께하기를.
그리 말하며 투구기사는 성화 수호 기사단의 군기를 제 몸에 걸쳤다. 그제야 나진은 투구기사가 몸에 걸치고 있던 것들이 넝마가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다.
넝마로 보이던 낡은 천 조각들.
그것들 모두가 기사단의 군기였다.
수많은 군기 위에 성화 수호 기사단의 군기가 더해졌다. 투구기사가 자리에서 일어설 적, 그가 몸에 두른 깃발들이 바람에 흔들려 펄럭였다.
“가도록 하지.”
그 말은 나진에게 하는 것일까, 아니면 제 몸에 두른 깃발들에게 말하는 것일까.
아마도 둘 전부일 것이다.
제 주인을 잃은 깃발들은 투구기사의 몸에 묶여 여정을 계속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