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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구기사와 동행하게 된 가운데, 나진은 투구기사에 대해 별로 알고 싶지 않았던 사실을 몇 가지 알게 됐다. 무게감 있고 매사에 진지할 것 같던 첫인상과 달리, 그는 나진의 생각보다 가벼운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일단 말이 많았다.
“세상 모든 사람을 ‘인간’이란 단어로 뭉뚱그려 표현하는 건, 굉장히 편협한 시각이라 생각하지 않나?”
“갑자기 뭔 소립니까.”
게다가 그 말들의 대부분이 뜬구름을 잡는 소리이며, 심히 철학적인 질문이었다.
“생각해 봐라. 나진. 동물이 동물을 잡아먹는다. 이 문장에서 어색함을 느끼나?”
“당연한 말 아닙니까?”
“그렇지. 그럼 인간이 인간을 잡아먹는다. 이 문장에선 어떤 느낌이 들지?”
“좀 그렇군요. 야만인이 가장 먼저 떠오르고요.”
“그래! 바로 그거다.”
투구기사가 손가락을 튕겼다.
“동물은 동물 안에서도 수많은 종(種)으로 나뉘지. 맹수는 동물을 사냥한다. 그 사냥을 보고 아무도 의문을 가지지 않아. 그건 당연한 일이니까. 당연하게도 사자와 사슴을 같은 종족으로 보는 이도 없다. 하지만 인간은 어떻지?”
그가 목소리를 높여 떠들었다.
“민족이 다르다. 국가도 다르다. 하지만 그들 모두를 ‘인간’이라는 단어 하나로 뭉뚱그려 부르지. 그렇기에 인간이 인간을 잡아먹는다는 단어는 ‘동족상잔’처럼 느껴지곤 해. 본능적인 거부감을 불러일으키지. 사실은 전혀 다른 종족일 수도 있는데 말야.”
“동물은 동물을 먹어야 살 수 있지만, 인간은 인간을 먹지 않아도 살 수 있지 않습니까? 필요에 의해 먹는 게 아니니까 혐오스럽게 느끼는 거겠죠.”
“흠. 그것도 맞는 말이지.”
하지만, 하고 투구기사가 말했다.
“외륙에선 어떻지?”
“예?”
“외륙에선 인간의 심장을 먹어야만 살 수 있는 이들이 있다. 그렇다면, 그들이 인간을 잡아먹는 행위는 혐오스러운 것인가? 생존을 위해선 필수적인 일이니 눈감아줘야 하는 것인가? 네 논리에 따르면 ‘문제가 없다’ 라고 답할 수 있겠군.”
“그건······.”
“바로 답하려 들지 말고 조금 더 고민해 봐라.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말야.”
그가 피식 웃었다.
“시간은 많으니까.”
투구기사가 앞장서 걸었다.
그는 외륙의 지리에 무지한 나진에게 수준에 맞는 전장을 소개해 주겠다고 말했다. 이 땅에 오래 떠돌다 보니 이리저리 아는 게 많다면서.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진은 문득 제 옆을 바라봤다.
-으음.
멀린이 입술을 우물거렸다.
-기분 탓인가? 왜 내 역할을 뺏긴 거 같지?
‘기분 탓 아닙니다.’
-······.
투구기사가 ‘길잡이’ 역할을 자처한 가운데 멀린은 침묵했다. 그녀가 나진의 옆에 딱 달라붙어 나진의 목에 제 팔을 감았다. 변명하듯 그녀가 나진의 눈앞에 종이를 들이밀었다.
-그, 나도 알려주려 했거든? 나도 뽑아둔 목적지가 좀 있어. 이것 좀 봐볼래? 외륙 탐방 10선! 네 성장을 가속시켜 줄 완벽한 루트야. 대륙에서부터 내가 고심하면서 짠 루트······.
‘나중에 볼게요.’
-그, 그래? 알았어. 나중에 꼭 봐야 해?
시무룩해진 멀린을 뒤로하고 나진은 계속해서 걸었다. 멀린이 추천한 목적지도 들르긴 할 테지만, 지금은 눈앞의 투구기사가 이야기한 목적지가 더 흥미로웠다.
“저걸 봐라.”
어느 언덕의 꼭대기에 선 투구기사가 손을 뻗었다. 그 손가락 끝이 향하는 곳에는 버려진 고성이 있었다.
“저 고성이 우리의 목적지다.”
그 고성의 이름을 투구기사가 발음했다.
“아툴라 요새.”
그리고, 하고 그가 덧붙였다.
“성화(星火) 수호 기사단이 점거한 요새지.”
나진은 아툴라 요새를 바라봤다.
외륙에는 저런 식의 ‘요새’가 많이 존재했다. 여기까지 걸음 하며 본 고성의 숫자만 해도 꽤 됐으니까. 고성뿐만이 아니다. 도시, 탑, 유적 등등. 버려진 건축물들을 외륙 땅에선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었다.
멸망하거나 잊힌 국가가 남긴 건축물. 혹은, 외륙의 경계선이 확장되며 잡아먹혀 버린 도시들. 그 외에도 다양한 이유로 버려지거나, 성좌들에 의해 지어진 건축물들이 외륙에는 가득했다.
그리고, 그 건축물들의 양식은 일정하지 않았다.
1천 년 전, 고대 시대의 탑.
700년 전에 멸망한 옛 국가의 고성.
500년 전의 유적지.
300년 전에, 200년, 100년······.
1천 년 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대의 건축물이 외륙에는 공존했다. 초월자들이 거하고 규칙이 망가진 땅에도 인간이 쌓아 올린 건물들은 존재했다.
“성화 수호 기사단. 200년쯤 전에 활동했던 기사단이다. 알고 있나?”
“어느 정도는요.”
“그래. 저들은 기사단 전원이 함께 외륙에 투신했다. 200년쯤 전에 말야. 외륙에서 악마와 그릇된 초월자들과 싸우겠다는 숭고한 목적을 가지고서.”
외륙에서도 우리의 성화가 꺼지지 않음을, 거세게 타오름을 증명하겠노라. 그리 이야기하며 그들은 외륙에 투신했다. 투구기사는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모종의 사건을 겪은 뒤 성화 기사단은 망자들의 집단이 됐다.”
그 모종의 사건이 무엇인지 투구기사는 말하지 않았다. 단지, 하고 그는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지금의 저들은 인간을 사냥한다. 인간을 잡아먹고 자신들의 성화를 수호한다. 저 성채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보이나?”
보였다. 성벽에 가려 잘 보이진 않지만 요새의 위로 새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직도 성화가 타오르고 있다는 증거지. 저들은 계속해서 성화를 피우고 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성화를 지키려 하고 있지. 설령 인간을 사냥하는 일이 있더라도 말야. 네가 생각했을 때 저건 옳은 일인가?”
“기사답지는 않은 일 같네요.”
“그런가.”
투구기사는 나진의 말을 부정하지도, 긍정하지도 않았다. 그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요새를 향해 걸었다.
“외륙에서 답이란 없다. 네 스스로 생각하는 것만이 답이지. 그렇다면, 네 답을 전해봐라. 저 요새의 주인에게 말야.”
언덕을 내려가고, 우거진 숲을 지나 나진과 투구기사는 아툴라 요새의 근처까지 접근했다. 요새의 성벽과 망루에는 기사들이 배치 돼 있었고, 굳게 닫힌 철문을 지키는 기사들도 있었다.
얼핏 봐선 정상적인 요새로 보이지만··· 문제는 그 요새를 지키고 있는 이들이 정상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이었다. 기사들의 눈동자는 공허했으며 그들의 움직임에서 지성은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내 기억하기로 성화 기사단의 삼분의 일이 소드 시커급이었다. 대략 30인으로 구성된 기사단이었으니, 10명 정도가 소드 시커겠군.”
“쉬운 상대는 아니군요.”
“그렇지. 하지만, 말했다시피 저들은 200년 전부터 외륙에서 활동한 이들이야. 소드 시커가 열 명은 더 탄생하고도 남을 시간이지.”
최소가 10명, 더 늘어날 수도 있는 상황.
투구기사는 덩치에 어울리지도 않게 나무에 몸을 숨긴 채 나진에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저만한 덩치가 숨긴다고 숨겨질지는 의문이었지만, 요새를 지키는 기사들이 이쪽을 눈치채지 못한 걸 보면 효과는 있어 보였다.
‘그냥 저 망자들이 눈이 안 좋은 거 같기도 하고.’
아무래도 후자 쪽인 것 같긴 했다.
“어떻게 들어갈까요? 고성을 공략하기 쉽지 않아 보이는데.”
“어떻게 들어가냐니?”
“뭐. 성벽을 탄다거나 시야를 가리고 기습한다거나. 방법이야 많지 않습니까?”
“쓰읍.”
투구기사가 혀를 찼다.
“우리는 기사로서 성채를 방문하는 거다.”
“그렇죠?”
“기사는 정정당당하지. 하물며 이렇게 상대의 신념을 가리켜 ‘너희는 잘못됐다’라고 주장할 때는 더더욱 정당하고 올곧아야만 해. 그게 아탕가의 방식 아닌가?”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찌 기사가 성벽을 타겠나?”
“···예?”
“어찌 기사가 성벽을 타고 기습을 하겠어. 그건 안될 말이지.”
그리곤 쿠웅, 하고 그가 땅을 내려찍었다. 그가 발을 구르자 숲이 진동했다. 과연, 이마저 모른 척할 할 수는 없었는지 요새를 지키던 기사들의 시선이 나진과 투구기사가 숨어있는 숲속으로 향했다.
그런 시선들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마치 ‘날 봐라!’ 하고 외치듯 투구기사는 제 덩치를 부풀렸다. 그가 무릎을 굽히고 몸을 앞으로 숙이며 창을 옆구리에 끼웠다.
“정면 돌파. 그게 바로 낭만이지.”
창날을 세운 채 투구기사가 땅을 박찼다. 그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쾅!’ 하고 터지는 소리가 울렸다. 그가 걸음을 내디딘 곳마다 쩌억, 하고 땅이 갈라졌다.
충분한 힘이 실리자 투구기사는 거의 도약하다시피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성문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 역시 반응했지만, 그들이 눈치챘을 때 투구기사는 이미 성문의 코앞까지 도착해 있었다.
그리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굉음과 함께 성문이 박살 났다. 두꺼워 보이는 철문은 우그러지지 않고 산산이 조각났다. 덤으로 성벽도 흔들렸다. 좀 많이. 성벽에서 돌 부스러기가 우수수 떨어졌다.
“오우.”
투구기사를 따라 달리던 나진은 감탄했다.
정면에서 성문을 박살 내는 랜스차징. 그야말로 완벽한 랜스차징이었다.
그런가. 충분한 각력만 있다면 말이 없어도 사람은 랜스차징을 할 수 있는가. 랜스차징에 휘말린 기사들이 저 멀리 나가떨어지는 가운데, 나진은 박살 난 성문의 안쪽을 바라봤다.
요새의 안을 배회하던 망자들의 움직임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나진과 투구기사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자아를 잃어버린 망자들이라 한들 이 갑작스러운 습격에는 놀라움을 느낀 것일까?
잠깐의 정적.
직후.
카카카카캉!
그들이 검, 창, 할버드 따위를 뽑아 든 채 나진과 투구기사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그들의 무기 위로 심상이 담긴 오러가 피어오르고 있단 점에서 더더욱.
“이거 맞습니까?”
“글쎄, 정면 돌파가 낭만이래도.”
낭만은 얼어 죽을.
대뜸 랜스차징으로 성문을 박살 낸 습격자를 맞이하게 된 가운데, 요새에 주둔 중이던 기사들은 제법 그럴싸하게 대응했다. 곧장 대열을 갖춰 습격자를 에워싸기 시작했으니까.
자아를 잃어버렸음에도 그들의 동작은 절도 있고 정교했다. 혼자서 배회하는 망자들과 달리 그들은 하나의 집단으로서 움직였다.
촤아아아아아악!
대열을 갖춘 채 덮쳐드는 열댓 개의 냉병기. 확실히 위협적이었다. 나진이 검을 휘둘러 그것들을 받아내고, 물러서는 가운데 투구기사는 창을 크게 휘둘러 뻗어오는 무기들을 쳐냈다.
빙글.
그가 창대를 한 바퀴 돌려 역수로 움켜쥐었다. 그 길이가 족히 삼 미터는 돼 보이는 장창을 그는 단창(短槍)다루듯 다뤘다. 무게가 제법 나갈 텐데도 그는 한손으로 창을 움켜쥔 채 팔을 뒤로 젖혔다.
그리곤, 쐐엑.
그가 팔을 휘둘러 창을 투척했다. 쏘아진 창은 저 멀리 망루에서 이쪽을 저격하려던 기사의 몸을 꿰뚫었다. 아니, 꿰뚫었다기엔 다소 어폐가 있었다. 망루의 꼭대기를 아예 무너트려 버렸으니.
망루에서 활시위를 당기고 있던 기사째로 망루를 무너트린 창은 투구기사가 손짓하자 허공에서 꺾이며 다시 그의 손으로 돌아왔다. 콱, 돌아온 창을 낚아채며 그가 창대를 내려찍었다.
“그건 또 뭔 기술입니까?”
“외륙에서 창을 다루는 이라면 필수적으로 배우는 기술이지. 투창과 회수. 나중에 시간이 비면 알려주마.”
어깨를 으쓱이며 투구기사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몰려드는 망자들을 향해 함성을 내질렀다. 자신에게 주목하라는 듯이. 그건 인간의 목소리라기보단 차라리 짐승이 그르렁대는 소리에 가까웠다.
망자들의 시선을 제게 집중시킨 다음.
“저기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 보이지? 아마 거기에 있을 거다. 이 요새의 주인은.”
투구기사가 나진의 등을 팍, 후려쳤다.
“가봐라.”
그가 창대를 돌리며 웃었다.
“망자는 망자가 상대해야지. 네가 상대할 건 망자가 아니라 이 요새의 주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