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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으로 아름다운 결투는 미련을 남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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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수에 기대지 않고, 운에 의존하지 않으며, 그 어떠한 부차적인 요소의 개입 없이 이루어지는 결투. 실력과 기량만이 승패를 가르는 신성한 결투. 수많은 기사가 바라는 그런 결투는 그 끝마저 아름다운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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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자는 기꺼이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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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자는 마땅히 승리의 달콤함을 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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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투의 결과에는 여지가 없다. 변명이 끼어들 자리도 후회가 고개를 내밀 자리도 없는 것이다. 그 깔끔한 뒷맛에 투구기사는 기분 좋게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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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뭄으로 비쩍 마른 땅에 단비가 내리듯, 행군으로 지친 몸을 시원한 포도주로 달래듯, 투구기사는 오랜 갈증이 해소되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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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취하는군. 정말이지 좋은 싸움이었어. 젊은 놈답지 않게 제법 치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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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쪽이 할 말입니다. 그 기술, 대체 뭡니까? 받아낸 순간 몸이 공중에 떠버리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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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거? 금빛 뿔 기사단의 자랑인 기술이지. 가장 단순하고 가장 정직하며 가장 올곧은 것이 가장 강하다. 그런 묘리가 담긴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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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기본(基本)에 충실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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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좀 통하는구만. 바로 그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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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전 살벌한 분위기는 온데간데없다. 두 사람은 다시 모닥불 앞으로 기어가 떠들어댔다. 모닥불까지 걸어가는 동안 나진은 절뚝였고, 투구기사의 몸에선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지만 사소한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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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의 바위가 죄다 무너져 있었으며, 땅에는 파이고 긁힌 흔적이 가득했으며, 나진의 팔에는 부목이 덧대어져 있고 투구기사의 갑옷엔 흠집이 더 늘어났지만··· 이 또한 사소한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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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몇이지? 잘 쳐줘도 30은 넘지 않았을 것 같았는데··· 그 나이에 벌써 그만한 경지라니 놀랍군. 단순히 경지만 높은 게 아니야. 검을 수십 년은 휘둘러야 나올법한 기술의 완성도야. 이거, 내 안목이 틀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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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흐음, 하고 고개를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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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어떻게 되지? 아무리 봐도 50살은 훌쩍 넘긴 검사의 기량이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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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덟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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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군. 열여덟. 열··· 여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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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구기사의 고개가 조금 더 기울어졌다. 그의 투구가 ‘덜그럭’ 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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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이 지나치군. 거짓말은 좋아하지 않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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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제 품을 뒤적였다. 확장 마법이 걸린 주머니에 넣어놨던 물품 중에는 황제가 직접 나진에게 수여한 증서 역시 남아있었다. 나진의 신분을 증명하는 증서. 나진은 그것을 투구기사에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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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서를 받아 든 투구기사가 ‘허어’ 하고 탄식을 뱉었다. 투구에 가려졌지만 나진을 바라보는 투구기사의 시선에 ‘미친놈인가?’ 하는 의문이 느껴졌다. 나진이 가장 많이 받아본 시선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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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정신이 아니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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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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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나이에 그만한 경지에 올랐단 것도 놀라운데, 벌써 외륙에 발을 들였다는 게 더 놀랍군. 지나치게 이르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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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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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마모가 시작된 나머지, 더는 대륙에서 살 수 없게 된 이들이 밀려나는 곳이야. 못해도 100년 가까이는 산, 살 만큼 산 놈들이 오는 곳이지. 너 같은 어린놈이 올 만한 곳은 아닐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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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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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 네 실력이 뛰어난 건 맞지만, 아직 이르지 않나? 대륙에서 더 수련하고 와도 됐을 텐데. 당장 나만 해도 너보다 강하지 않나. 이 땅에는 너보다 강하고, 너를 노리는 이들이 수두룩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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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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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이 이야기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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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멀린도 비슷한 조언을 하긴 했었다. 조금 더 대륙에서 경험을 쌓고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멀린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이들이 나진에게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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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이르지 않냐. 너무 성급하지 않냐. 조금 더 경험을 쌓는 게 어떻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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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진은 제 고집을 꺾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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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놈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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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가장 빠른 방법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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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가장 빠른 길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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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정도(正道)였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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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왕이 걸었던 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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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금보다 더 강해져야 합니다. 더 빠르게 말입니다. 일정 수준에 오르기 전까진 부릴 여유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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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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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 소드마스터가 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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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초월의 경지가 우습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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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습게 보는 게 아닙니다. 어려운 걸 알기에, 높은 걸 알기에 이 땅에 온 것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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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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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는 반짝이는 별들이 있었다. 나진보다 훨씬 높은 곳에 떠 있으며, 나진이 엑스칼리버를 뽑는다면 곧바로 개입해 올 별들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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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라면 원탁의 별도 곧장 개입해 올 테지만 그래 봐야 변하는 건 없다. 별들이 개입하고, 격류가 몰아칠 것이며, 그 격류 앞에 나진은 휩쓸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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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원탁의 별이 개입하게 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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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은 말했다. 원탁의 개입만큼은 ‘마지막 한 수’로 남겨둬야 할 거라고. 나진은 저 멀리 외륙의 끄트머리에서 반짝이는 별들을 보았다. 멀린의 별이고, 원탁의 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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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별의 역할이 뭔지 나진은 안다. 멀린이 이야기해 줬으니까. 그 역할을 알게 된 이상, 원탁의 개입은 정말 마지막 한 수로 남겨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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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에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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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졌지만, 모두가 나진의 경지에 찬사를 보내지만, 나진은 여전히 독립(獨立)할 수 없었다. 그리고 독립해야만 이룰 수 있는 목표가 나진에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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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급할 이유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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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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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어봐도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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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자이시지 않습니까? 승자의 질문에 패자는 답할 의무가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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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닥, 타다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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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닥불에서 불씨가 튀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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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게는 스승이 두 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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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씨를 바라보며 나진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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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분은 제게 검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검을 휘두르는 기본을, 그리고 도망치는 방법을, 추격하는 방법을, 용병으로서의 기본 지식을 전수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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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도시의 용병, 오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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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른 한 분은 제게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단지 살아가는 방법뿐만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뭘 추구해야 할지에 대해서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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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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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와 긍지. 그리고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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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도시의 기사, 이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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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란 무엇인지. 긍지란 무엇인지. 때로는 삶보다 중요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그분께선 가르쳐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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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스승이었나 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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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훌륭한 스승이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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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의 눈동자가 낮게 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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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게 깔린 눈동자에는 불길이 일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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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 두 분의 복수를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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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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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을 그렇게 만든 이들에게, 그들을 짓밟은 이들에게, 저를 짓밟으려 한 이들에게 전 복수해야 합니다. 그 누구의 힘도 빌리지 않은 저 자신의 힘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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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야만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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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은 말했다. 너의 별에 내 삶을 걸어보겠노라고. 너의 삶에 내 명예를 걸어보겠노라고. 나진이 교단을 무너트리는 그 순간 비로소 이반이 옳았음이 증명될 것이다. 그건 다른 누군가 대신할 수 없었다. 오직 나진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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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언제나 마음 한편에 그만큼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었다. 복수를 하지 않으면 해방될 수 없다. 어떻게든 매듭을 지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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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가 강한 모양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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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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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드마스터에 올라야 상대할 수 있을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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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상대도 초월자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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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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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구기사가 길게 숨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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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저건 결코 침범해선 안 될 영역이라고. 저것이 소년의 역린이었고, 심장에 품은 불길이었다. 감히 다른 누군가 간섭해선 안 될 영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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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각자의 이유가 있는 법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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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에게도 그런 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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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구기사 역시, 이 땅에서 이루어야 할 목표가 있었으니까. 그는 길게 숨을 내뱉었다. 무언갈 결정했다는 듯 그는 나진을 똑바로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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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승자의 권리라는 말이 나와서 말인데, 결투의 규칙에 대해 알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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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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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자가 패자에게 세 가지를 요구할 수 있다는 규칙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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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로운 결투사, 바에르만이 선포한 규칙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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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잘 알고 있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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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구기사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이어서 나진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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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투의 승자는 나, 패자는 너다. 이 사실에 이견은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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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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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패배를 받아들이는 것도 기사의 덕목이지. 그렇다면, 나는 마땅히 승자의 권리를 누려야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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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의 뜸을 들인 후 그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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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게 세 가지 요구할 권리. 그중 하나를 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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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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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자는 패자에게 요구할 권리를 가진다. 패자는 승자의 요구에 승복할 의무가 있다. 권리와 의무. 결투가 명예로우면 명예로울수록 의무와 권리는 강해지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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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투구기사의 요구에 나진은 수긍했다. 게다가, 그리 무리한 요구도 아닌 까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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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구기사가의 요구는 단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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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과 한동안 동행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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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동행하는 동안은 네 목숨을 노리지 않겠노라고 투구기사는 나진에게 맹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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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와 긍지를 걸고 맹세하는 게 보통이겠지만, 나는 옛날만큼이나 그걸 무겁게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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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제 투구를 두들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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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투구에 걸고 맹세하지. 이 투구는 나 자신만의 명예가 아니라, 금빛 뿔 기사단 전체의 명예가 걸려있으니. 이 정도는 되어야 무거운 맹세가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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뿔 투구. 호른헬름(Horned He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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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투구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나진은 질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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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빛 뿔 기사단이라고 하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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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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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사단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들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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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금빛 뿔에 대해선 하루 종일도 떠들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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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술을 제공했으니 나도 좋은 이야기를 제공하도록 하지. 그리 중얼거리며 투구기사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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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빛 뿔 기사단. 열세 명으로 이루어진 소수 정예 기사단이었지. 모두가 뿔 투구를 썼다. 가장 명예로운 자가 가장 빛나는 뿔 투구를 썼지. 호른헬름. 바로 이 투구를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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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제 투구를 더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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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빛났다. 그 누구보다도 빛났다. 저 밤하늘의 별들이 부럽지 않았지. 십자별의 창을 짊어지고 우린 전장을 질주했어. 금빛 뿔 나팔을 불며 제국의 적을 짓밟았다. 우리는 언제나 명예로웠고, 긍지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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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눈을 감으면 그 소리가 들려오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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뿔 나팔의 울림과 대열을 맞춰 진군하는 우리의 발걸음 소리가, 말발굽 소리가, 갑옷이 절그럭대는 소리가 말야. 투구기사는 노래하듯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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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은 우리의 이름을 연호했다. 우리는 언제나 승리했고, 영광스럽게 승리했지. 우리가 내뻗은 창은 저 지평선의 너머까지 닿을 것 같았고, 외륙은 물론이고 캄란의 적들마저 꿰뚫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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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제 창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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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전 보였던 기술, 그 기술은 금빛 뿔의 기사단 모두가 쓸 수 있는 기술이었다. 가장 잘 쓰는 놈은 따로 있었지만 모두가 나만큼은 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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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해 봐라, 하고 그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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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명이 대열을 맞춘다. 절그럭! 갑옷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지. 그리곤 쿵, 땅을 강하게 내려찍으며 동시에 자세를 취하는 거야. 번쩍이는 13개의 창이 한 명의 적을 노리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뻗어나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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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경이었어. 그리운 풍경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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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하고 그가 길게 탄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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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뿔 나팔을 불어라. 제국의 적을 꿰뚫어라. 제국에게 영광스러운 승리를. 긍지 높은 금빛 뿔의 기사들이여! 우리는 영원토록 나아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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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노래했다. 이제는 꿀 수 없는 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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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에 젖은 그의 목소리에는 활기가 넘쳤다. 생기가 넘쳤다. 하지만, 그 모든 이야기를 마쳤을 때 그의 목소리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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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다 옛말이지만 말야. 그런 기사단이 있었다. 제국에서 가장 강력했던 기사단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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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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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고 싶은 게 많아 보이는 표정이군. 알만해. 그만한 기사단인데 왜 어디에도 적혀있지 않지? 그렇게 묻고 싶은 것 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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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예.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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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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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의 투구기사에겐 정말 미안한 이야기지만, 나진은 금빛 뿔 기사단을 오늘 처음 들었다. 나진이 기사단에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나진은 기사와 기사단에 관심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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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단에 대한 서적을 수도 없이 읽었으며, 역사서에 기록된 기사단과 그들의 격언을 외우다시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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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나진이지만 ‘금빛 뿔 기사단’ 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눈앞의 투구기사가 말한 대로라면, 그리고 저만한 실력자가 끼어있는 기사단이라면 나진이 모를 리가 없었는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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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忘國), 론디넬에 대해 알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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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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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외륙에서 만났던 소드마스터. 키르호프의 고국이 바로 론디넬이었으니까. 대략 300년쯤 전에 역사에서 소각되고 망각되어, 잊혀져버린 국가 론디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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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지랄 맞은 성좌의 개입으로 론디넬은 역사에서 지워졌다. 그저 몇 줄의 글귀만을 남길 수 있었지. 하지만, 그것도 당시 론디넬에 소속되어 있던 수많은 기사가 자신의 별을 바쳤기 때문에 ‘글귀’라도 남길 수 있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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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별을 바쳤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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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고국을 위해 기꺼이 제 목숨마저 내던졌기에. 수많은 목숨과 수많은 별의 희생이 있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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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히 론디넬은 그런 국가가 존재했다는 기록이라도 지킬 수 있었다. 하지만 말야, 론디넬은 정말 특별한 경우다. 키르호프라는 특별한 존재가 있었기에 가능했지. 대부분의 이들은 그러지 못했어. 금빛 뿔 기사단 역시 마찬가지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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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디넬과 같은 상황, 같은 성좌의 개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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덮쳐드는 망각과 소각의 권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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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을 떠올리는 듯 투구기사는 쓰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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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든 말든 네 자유다. 금빛 뿔 기사단은 분명히 실존했었다. 적어도 150년 전까지는 그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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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갑옷. 흠집투성이인 투구. 부러진 투구의 뿔을 매만지며 그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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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에게 잊혔더라도 나는 기억해. 나만은 기억하지. 승리의 함성. 뿔 나팔 소리. 동료들의 웃음 소리. 금빛 뿔의 격언. 나만은 그것들을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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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하고 투구기사가 손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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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륙 땅에는 그런 이들이 많을 거다. 잊혀진 옛 영웅. 역사에서 지워져 버린 이들. 그리고, 그 끝에 미쳐버린 이들이 넘칠 만큼 많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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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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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자(忘者)는 살아 움직이는 시체들만을 가리키는 게 아냐. 잊어버린 자. 잊혀진 자. 잃어버린 자. 외륙에선 수많은 이들을 뭉뚱그려 망자라 부르지. 그런 의미에선, 나도 망자나 다름없는 걸지도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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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닥, 타오르는 모닥불의 불길이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장작이 끝을 보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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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자. 잃어버린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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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져서, 소속을 잃어버린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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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난 궁금하다. 네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갈지. 나를 잠깐이나마 옛 영광에 취하게 해준 네가, 이 땅에서 숱한 망자들을 마주하고 어떤 결론을 내놓을지 흥미가 생기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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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타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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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네게 동행하자고 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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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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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불씨가 튀어 올랐다. 모닥불이 꺼졌다. 불길이 꺼지고 남은 것은 적막이다. 적막 속에서 나진과 투구기사는 서로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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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별과, 마모된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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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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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닥불은 꺼졌다. 적막을 깨고 투구기사는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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