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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실 땐 취하지만 깨면 괴로운 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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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구기사는 명예와 긍지를 그렇게 표현했다. 그 말을 들은 나진은 침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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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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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을 다문 채 나진은 투구기사를 바라봤다. 투구에 가려진 눈동자는 보이지 않는다. 언제나 시선으로 타인의 생각과 분위기를 읽어왔던 나진이지만, 투구기사에겐 나진의 눈썰미는 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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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다른 방법으로 알아보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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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와 긍지가 쓸모없는 것이란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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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런 적은 없다만. 말했잖아? 독한 술이라고. 술은 삶에 있어 필수적인 요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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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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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없이 사람이 어떻게 살겠나. 술 없는 삶만큼 퍽퍽한 게 또 없지. 가끔 술 좀 마셔주고, 좀 취해줘야 그럭저럭 살만한 게 삶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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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구기사가 능청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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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언제까지고 취해 있을 수만은 없지. 언젠가는 술에서 깨야 하고, 그땐 취한 만큼의 대가를 지불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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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가를 무엇으로 지불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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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말한다. 나의 목숨으로 갚겠노라고. 하지만 외륙은 그들에게 다시 질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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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그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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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게 취할수록 숙취는 괴로워지는 법이다. 대륙에서 네가 어떻게 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술기운을 좀 빼란 소리다. 안 그러면 삶이 고달플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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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터가 가득한 손길로 그는 외륙에 돌아다니는 망자들을 가리켰다. 죽어서도 무기를 놓지 못한 채 영원토록 투쟁하는 시체들이 그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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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들도 한때는 기사였다. 단지, 영원히 기사일 수 없었을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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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도 긍지도 없는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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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명예와 긍지에 취해 살아갔던 이들이 맞은 최후였노라고 투구기사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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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자(忘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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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어버린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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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망자들을 바라봤다. 그들 중에는 제 몸에 창대를 꽂아놓은 망자들도 있었는데, 그 창대에 걸린 깃발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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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단의 문양. 제국의 문양. 혹은 가문의 문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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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양각색의 깃발을 짊어진 채 망자들은 외륙을 배회했다. 오직 그것만이 자신들에게 허락된 명예라는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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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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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구기사의 뒤를 따라 한참을 걸은 나진은 어느 장소에 도착했다. 큼지막한 바위들이 가득한 장소였는데, 바위의 형태들이 자연스럽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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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럽게 땅에서 솟아오르거나, 깎여나간 바위가 아닌 어디선가 날아와 꽂힌 듯한 형태. 그런 큼지막한 바위들 사이에 투구기사는 멈춰 섰다. 그리곤 바닥에 굴러다니는 적당한 돌을 들고 와 깔고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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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앉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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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구기사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장작 비슷한 것들을 들고 와 바닥에 놓고 불을 피웠다. 그 장작이란 게 잘린 사람의 팔이란 게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불은 잘만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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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닥, 타다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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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르는 불을 바라보며 투구기사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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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에서 왔다 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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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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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얼마나 알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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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만큼은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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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다행이군. 그럼 새벽 전쟁에 대해 알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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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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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있었다. 유엘 라지안의 정보를 조사하며 알게 된 전쟁이었다. 그녀가 처음으로 목격된 장소가 다름 아닌 새벽 전쟁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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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기둥이 반란을 일으키며 벌어진 전쟁 아닙니까.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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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쟁으로부터 얼마나 시간이 흘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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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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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년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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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구기사가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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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래됐군. 그다음에 제국은 어떻게 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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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제국이 승리했습니다. 당시 로열 가드를 이끌던 게르드 경께서 반란의 주동자들을 처단함으로써, 승리를 이끄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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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드? 그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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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구기사가 놀란 듯이 되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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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놀랍군. 그놈이 그렇게 잘 싸우는 놈이 아닐 텐데. 그다음엔 게르드 그놈은 어떻게 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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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공로를 인정받아 게르드 경께서는 제국의 기둥이 되셨습니다. 처음에는 말석이었지만, 지금은 제국제일각이라 불리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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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의 말을 들은 투구기사가 잠시 침묵했다. 침묵은 길지 않았다. 이윽고 그가 투구를 덜그럭, 대며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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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잘못 들은 건 아니겠지? 게르드 그놈이 제국제일각이 됐다고? 제국의 첫 번째 기둥이? 그럼 분명 소드마스터가 됐겠군. 별도 달았을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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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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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놈, 별 몇 개나 가지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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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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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일곱 개씩이나? 이거 놀랍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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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드 경과 아는 사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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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지. 그놈은 날 기억 못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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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구기사가 큭큭대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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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도 그는 나진에게 바깥세상의 이야기를 질문했다. 주로 ‘제국은 평화롭나? 지금의 황제는 누구지?’ 같은 제국의 정세를 묻는 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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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바깥 이야기를 들으니 즐겁군. 질문을 너무 많이 했어. 나도 질문을 받도록 하지. 내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나? 나에 대한 질문을 빼면 답해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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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귀들이 뭡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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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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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프도, 눈앞의 투구기사도 나진의 습격자들을 가리켜 ‘까마귀’라고 표현했다. 그게 무엇인지 나진은 궁금했다. 멀린은 ‘뭔지는 알 것 같은데, 나 때랑은 용어가 좀 다르네······.’ 하고 난색을 보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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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꾼이지. 이 땅에 막 발을 들인 신입들을 사냥하는 놈들. 남이 사냥하고 남은 찌꺼기들을 파먹는 놈들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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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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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사냥만큼 쉬운 방법이 없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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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구기사가 모닥불을 바라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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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륙이란 빌어먹을 땅은 인간을 끊임없이 마모시킨다. 마모가 어느 정도 진행되는 순간 망자가 되어버리지. 그 끔찍한 최후가 싫거든 저항해야 하는데, 그 방법이 그리 많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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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손가락 두 개를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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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업을 쌓고 별을 얻어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증명하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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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손가락 하나를 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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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아니라면, 하고 비웃음과 함께 그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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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별을 사냥하는 거지. 물론 저 밤하늘의 성좌들을 사냥하면 위업도 얻고, 별도 얻으니 일석이조겠지만 그게 어디 쉬워야지? 초월자를 상대하는 건 몹시 피곤한 일이야. 어려운 일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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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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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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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구기사가 손을 뻗어 나진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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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같은 신입들을 사냥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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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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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에 깃든 별빛을 파먹으면 조금이나마 마모를 늦출 수 있지. 망자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있어. 그렇게 신입이나, 약한 놈들을 사냥해 별을 취하는 놈들을 가리켜 이 땅에선 ‘까마귀’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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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까마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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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를 파먹고 살아가는 추잡한 짐승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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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청한 놈들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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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구기사가 나지막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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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하니까 몰려다닌다. 집단행동을 한다. 하지만 그거야말로 멍청한 짓거리지. 신입이 가진 별 하나를 통째로 삼켜도 모자랄 판에 나눠 가지게 되거든. 실제로 까마귀들은 사냥하기 전에 공헌도에 따른 별빛의 분배니 뭐니 열심히도 떠들어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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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비웃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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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누가 지키겠나? 애초에 긍지도 명예도 잃은 놈들이다. 당장 오늘 살아남기 위해서 제 모든 걸 팔아치운 놈들이 약속을 지킬 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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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이 끝나면 까마귀들은 분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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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그래도 주는 별빛이 가뜩이나 적은데, 그걸 나누고 나누면 간에 기별도 안 가겠지. 그렇게 중얼거리며 투구기사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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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을 놈 하나 없어. 언제든 뒤통수를 후려 까고 도망칠 놈들만 한가득하지. 그렇게 무리 지어 다니는 놈들은 가짜야. 사냥꾼이라 불릴 자격이 없으니 ‘까마귀’라는 멸칭으로 불리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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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진짜는 뭡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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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진짜 사냥꾼들이 뭐 별거겠나. 혼자서 사냥하는 이들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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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구기사가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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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감을 까마귀들에게서 도와주는 척 꾀어낸다. 갖가지 핑계를 대면서 호의인 척, 선의인 척 사냥감을 방심하게 만들지. 그렇게 거추장스러운 까마귀들을 따돌리고 사냥감과 단둘이 남는 순간을 기다리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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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구에 한 번 부딪힌 웃음소리는 묵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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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음에야 뭐, 말 안 해도 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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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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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빛이 일렁이는 투구가 나진을 가만히 응시했다. 투구에 가려진 눈동자는 읽을 수 없었다. 그 안에서 그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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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목소리. 그 목소리의 온도는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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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늘한 목소리였다. 보이지 않아 알 수 없지만 그 눈동자도 목소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온도를 가지고 있을 거라고 나진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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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의든, 선의든, 쓸 수 있는 모든 걸 써서 사냥감을 꾀어내곤 사냥감이 방심한 순간 물어뜯는다. 혼자서 사냥감을 독식한다. 그게 진짜 사냥꾼들의 방식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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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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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지금 고민 중이거든. 네 심장을 빼앗을까, 아니면 한 번 더 호의를 베풀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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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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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구기사는 무덤덤하게 말했고, 나진 역시 무덤덤하게 답했다. 자신과 똑같은 태도로 대응하는 나진의 모습에 투구기사의 시선은 조금 더 낮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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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귀를 못 알아들었나? 너를 죽일지 말지 고민하고 있다는 뜻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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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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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것치곤 평온해 보이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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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참 친절한 선전포고다 싶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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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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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어깨를 으쓱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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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서 ‘지금부터 너를 죽일 생각인데, 어떻게 생각하냐?’ 하고 말하고 있잖습니까. 세상 어떤 사냥꾼이 그렇게 허술하게 사냥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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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를 부려도 널 죽일 수 있다는 자신감의 방증일지도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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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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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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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표현이 더 있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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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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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에게 너를 공격할 거라 알린다. 그리 말하면서도 기습하지 않고 시간을 준다. 도망치든, 싸울 준비를 하든 상대가 어떤 행동을 취할 때까지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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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익숙한 절차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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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말하며 나진은 제 손목과 장갑 사이의 틈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그리곤 쭈욱, 장갑을 벗어 손에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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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건 장갑을 던지고 서로의 이름을 밝히는 것 정도가 되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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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바닥에 장갑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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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무두질 된 가죽 장갑. 아탕가의 기사, 아르고에게서 선물로 받은 장갑이었다. 그가 자랑했던 대로 장갑이 바닥에 맞닿을 적 ‘짜악!’ 하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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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탕가의 기사, 이반의 종자. 나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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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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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투 신청을 받아들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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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곤 투구기사를 향해 씨익, 입가를 틀어 올려 보였다. 웃음은 전염됐다. 나진이 보인 행동이 뭘 의미하는지 깨달은 투구기사가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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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이걸 사냥이라고 말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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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걸 결투라고 표현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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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아들일지 말지는 당신의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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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꾼과 사냥감. 습격자와 피습자. 그 구도를 나진은 장갑을 집어 던지고 자신의 이름을 밝힘으로써 망가트렸다. 상하관계가 아닌 동등한 관계. 그 행위에 투구기사는 투구를 덜그럭거리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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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정신 나간 놈이로군. 이걸 결투로 받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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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구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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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말했다. 투구기사가 아닌, 투구 ‘기사’라고 나진은 눈앞의 남자를 호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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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와 긍지는 술이라고 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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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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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잔하시죠. 술친구 정도는 되어드릴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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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의 침묵. 그리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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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내 크게 웃은 투구기사가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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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쁘지 않은 제안이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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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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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지만 내게 밝힐 이름은 없다. 잃어버렸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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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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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결투에 앞서 자신을 소개하지 않는 것도 실례인 법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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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창을 들어 올렸다. 이름을 잃어버렸다 한들, 자신을 소개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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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빛 뿔 기사단을 아나? 호른헬름(Horned Helm)이라고 부르기도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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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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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기억해라. 금빛 뿔 기사단의 이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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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끝으로 나진을 겨눈 채 그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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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금빛 뿔 기사단의 첫 번째 단장, 호른헬름의 주인이다. 이 투구가 곧 나의 존재를 증명한다. 이 투구와, 투구에 담긴 이야기가 나의 이름을 대신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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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창대로 제 투구를 두들겼다. 카앙, 하는 울림과 함께 그의 웃음소리도 메아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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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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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나진의 이름을 불렀다. 소년이나 애송이, 이봐 같은 지칭이 아닌 오직 나진만을 가리키는 이름을. 그것이 결투의 상대에 대한 예의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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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수는 양보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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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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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눈앞의 투구기사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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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말했다. 나진에게 첫수를 양보하겠노라고. 그러나 나진은 쉽사리 달려들지 못했다. 모닥불이 타들어 가는 소리가 탁, 타닥··· 길게 늘어졌다. 나진이 느끼는 체감 시간이 그만큼 느려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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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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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닥불의 불씨가 한번 튀어 올라 사그라드는 짧은 순간이 나진에겐 수십 초, 혹은 그 이상처럼 길게 늘어졌다. 길게 늘어진 체감 시간 속에서 나진은 상대를 관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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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자다. 이견이 없는 강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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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륙에 들어온 뒤 나진을 추격하던 이들 중 그 누구를 데려다 놔도 눈앞의 기사와는 비교가 되질 않았다. 비단 외륙뿐만이 아니었다. 대륙에서 나진이 만났던 이들 중에서도 이 남자와 견줄만한 이는 손에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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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드마스터. 그에 준하는 초월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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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도 되는 이들만이 이 남자와 비교했을 때 빛이 바래지 않았다. 투구 기사가 퍼뜨리는 위압감은 가히 소드마스터들의 그것과 견줄만했다. 그렇다면, 눈앞의 이 남자는 초월에 이른 강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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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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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었다. 나진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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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의 남자에게선 묘한 기운이 느껴졌다. 이런 기운을 어디서 느껴봤던가. 기억을 더듬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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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멸의 마녀, 에르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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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히 외륙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 만났던 상대. 가진 별을 모두 잃고, 서클이 박살 나 더는 초월자가 아니게 됐던 마녀. 그녀에게서 느껴졌던 기세와 비슷한 것이 눈앞의 기사에게서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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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자라기엔 부족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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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자가 아니라 하긴 지나치리 강렬한 기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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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초월자였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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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아니게 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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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숨을 가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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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의 이성은 외친다. 이건 승산이 없는 싸움이며 지금 당장 도주하는 것이 옳다고. 저 남자는 너를 사냥하겠다고 말했으며, 너의 목숨을 빼앗겠다고 선언하지 않았냐고 나진의 이성은 비명을 질러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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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도망쳐라. 눈앞의 남자는 위험하다. 승산은 한없이 희박하다. 저자는 무언갈 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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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철저한 근거에 입각한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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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진의 직감은 다른 결론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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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로운 결투를. 최선을 보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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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그것을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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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의 직감은 그렇게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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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근거는 없다. 이성적이지 않다. 즉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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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진은 언제나 이성보다는 직감을 신뢰했다. 애초에 이성만을 따랐더라면 나진의 여정은 시작되지도 않았다. 엑스칼리버를 뽑으라는 직감으로부터 시작된 여정이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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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그래왔듯 나진은 자신의 직감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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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무책임한 신뢰가 아니다. 신뢰의 대가는 지불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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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으로, 하고 묻는 멀린의 물음에 나진은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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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쥔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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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의 검 위로 검기가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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