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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나진의 팔을 잡아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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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바위와 바위의 틈새. 동굴 속으로 나진이 끌려들어 간 것과 거의 동시에, 쿠웅! 하는 소리와 함께 거인의 손아귀가 땅을 내려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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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흔들렸다. 거인은 연신 손바닥을 내려치고 그제야 만족했다는 양 자리를 떴다. 그렇게 흙먼지가 피어오르는 가운데 나진은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는 한 사내가 한쪽 무릎을 세운 채 바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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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은 굳이 상대할 필요가 없지. 신화시대의 표현으로야 거인(巨人)이지만, 저런 멍청한 놈들한테 인(人)이란 글자를 쓰는 게 맞나 싶기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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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아있음에도 서 있는 나진과 키 차이가 얼마 나지 않았다. 거구의 사내였다. 사내의 목소리는 동굴 안임을 감안해도 심하게 울렸는데, 그건 그가 투구를 눌러쓰고 있는 까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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굵직한 목소리가 투구에 부딪혀 한번, 동굴의 벽에 부딪혀 다시 한번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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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을 만난다면 적당히 숨어라. 저 덩치만 더럽게 큰 놈들하고 힘겨루기를 해봐야 체력 낭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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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진 갑옷에 넝마를 두르고 있는 사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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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구의 장식은 부러져 있었고 칼로 긁은 듯한 흔적이 투구에는 가득했다. 아니, 투구에만 가득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갑옷, 넝마, 깨진 갑옷 사이로 드러난 피부. 그 모든 곳에 흉터가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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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춤에는 쇠사슬에 감긴 검을 묶어놓았으며, 한 손에는 거대한 창을 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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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세월의 흐름에 마모된 석상을 보는 것 같았다. 영웅들을 기리기 위해 그들의 전당에 세워둔 석상. 그런 석상을 닮은 사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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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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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나진에게 손가락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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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손가락은 나진의 심장을 가리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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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그 별빛 좀 어떻게 해봐라. 눈이 부셔서 제대로 뜰 수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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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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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설마 별빛을 조절할 줄도 모르는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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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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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잡아주쇼, 내 별이 이렇게 빛나오, 하고 까마귀들에게 아주 소리를 치고 다니길래 정신 나간 놈인가 했더니 그건 또 아니었나 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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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멀린을 힐끗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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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은 ‘심호흡해. 네가 흥분하니까 별빛이 밝아지는 거야. 별빛을 꺼트려.’ 하고 빠르게 설명했다. 나진이 심호흡을 하자 그제야 그가 손가락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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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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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길게 말하지 않았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선 그가 동굴의 반대편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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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귀들에게 쫓기고 있지 않나? 따라와라. 몸을 숨길만한 장소는 좀 알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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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나진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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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에게서 등을 돌린 채 걸음을 옮겼다. 무방비해 보이는 모습. 나진은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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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남자를 믿을만한 요소는 없다. 도움을 받았다 한들 함정일 가능성도 있다. 외륙에 발을 들인 지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나진은 이곳이 ‘어떤 땅’인지 얼추 감을 잡은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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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을 수 있는 건 없다. 아무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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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저 남자의 제안을 무시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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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뒤를 돌아봤다. 동굴의 바깥은 소란스러웠다. 거인이 쿵쿵거리는 소리. 습격자들이 요란스레 숲을 뒤지고 다니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진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두 개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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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남자를 따라가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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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면 바깥에 나가 다시 쫓기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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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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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의 침묵. 고민은 짧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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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사내를 따라 걸었다. 사내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동굴의 깊은 곳으로 향했다. 동굴 안에서 절그럭, 하고 갑옷이 내는 소음만이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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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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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은 숲의 바깥까지 이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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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을 빠져나온 순간, 나진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광활한 외륙의 땅이었다. 광활하다. 그런 단어로밖에 표현하지 못할 세상이 그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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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야에 다 담기지 않을 정도로 넓은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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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땅은 메말랐고, 어느 땅은 풍요로웠다. 어느 땅에는 눈이 내렸고, 어느 땅에는 비가 내렸다. 온갖 기후와 환경이 물감처럼 뒤섞여 있었다. 저 끝까지 펼쳐진 밤하늘에선 별들이 형형색색으로 타올랐고, 땅에선 그들을 상징하는 구조물이 별빛을 받아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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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좌들의 영역임을 표시하는 거대한 구조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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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검, 창, 하늘에 닿을 것 같은 탑, 낡은 고성, 움직이는 성채,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십자가. 그것들은 저 멀리, 거리를 알 수 없을 만큼 먼 곳에 있었지만 원근감을 무시한 채 제 위용을 과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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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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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문득 고개를 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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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드높은 하늘에 알 수 없는 것들이 떠다니고 있었으니까. 항구에 정박해 있는 배를 닮은 생명체. 거대한 짐승이 하늘을 헤엄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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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고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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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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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말로는 별 포식자라고 부르기도 하고. 평소에는 별들이 흩뿌리는 별빛을 먹고 살아가지만, 별이 충분히 약해졌을 때는 별을 삼켜버리기도 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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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그딴 생명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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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들 아니. 이 땅이 좀 거지 같아야지. 외륙 깊은 곳으로 가면 저것보다 더한 것들도 득실거릴걸? 캄란에서 흘러나온 저주받은 것들도 가득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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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저건 또 뭡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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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하늘을 떠다니는 고래 중, 가장 거대한 고래를 바라봤다. 그 고래는 등에 성채를 짊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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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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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이 짧게 탄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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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건 오랫동안 보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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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쳐다보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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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과, 앞장서 걷던 남자의 목소리는 거의 동시에 울렸다. 그가 나진을 돌아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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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유성(天流星)의 성역이다. 성격이 더럽기로 유명한 별이지. 쳐다보지 마라. 엮이면 귀찮아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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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시선을 거뒀다. 쳐다보는 것만으로 발작하는 성좌도 있단 말인가. 그렇게 시선을 내리려던 찰나 나진은 문득 지평선의 끄트머리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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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득하게 먼 곳. 세상의 바깥인 외륙에서도 다시 바깥이라 부를만한 곳. 지평선의 끝에서 뭔가 반짝이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별이었다. 아주 작은 점처럼 보이지만 그곳에 별이 있었다. 그 별들이 흩뿌리는 별빛은, 수천수만 킬로미터의 거리를 무시해 나진의 눈동자를 비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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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별들은 뭔데 저렇게 빛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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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아, 저거? 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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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이 흐으, 하고 음습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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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기분 나쁜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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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에···? 네 앞에 있는 남자한테 물어보는 건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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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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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지평선 끝에서 빛나는 별은 뭡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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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긴. 가장 유명한 별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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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유명한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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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탁에 속한 별들이다. 대영웅 아서의 별, 대마법사 멀린의 별, 그들을 따랐던 기사들의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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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별들을 가리키며 남자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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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란의 저주받은 것들이 외륙으로 넘어오지 않도록 경계를 지키고 있는 위대한 별들이지. 수많은 가짜 중에 몇 안 되는 진짜 성좌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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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이 음습하게 웃었다. 그녀가 나진의 목에 팔을 두른 채 ‘봤지? 들었지?’ 하고 연신 나진의 볼을 손가락으로 쿡쿡 찔러댔다. 촉감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묘하게 아니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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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봐. 외륙에 온 지는 얼마나 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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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처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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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그럴 것 같더군.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놈이 오래 살아남았을 리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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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와 나진은 대화를 나누며 걸었다. 간단한 질문이 오갔다. 남자의 질문에 답하던 나진 역시 질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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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함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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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봐. 외륙에서 ‘이름’을 묻는 것만큼이나 실례되는 일은 없어. 이명이라면 또 몰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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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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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내겐 이명을 묻는 것도 실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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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어쩌라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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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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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이름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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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기억을 떠올리듯 중얼거린 남자는 ‘아, 그게 좋겠군.’ 하고 중얼거렸다. 그가 제 투구를 주먹으로 두들겼다. 투구와 건틀릿이 맞부딪쳐 ‘터엉’ 하는 묵직한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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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구기사. 그렇게 불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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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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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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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매한 대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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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이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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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아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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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들었으면 이쪽도 이름을 밝히는 게 예의잖아요. 그냥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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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내 진짜 이름을 밝히진 않았지. 그냥 소년이라 부르련다. 그쪽이 편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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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필 소년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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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새끼 같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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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구기사가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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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가 전성기로 젊어진 게 아니야. 딱 눈에 보이는 그 나이대의 애송이지. 내 말이 틀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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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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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은 긍정이다. 애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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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투구기사라 소개한 그와 동행하며 나진은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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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륙의 곳곳에는 뒤틀린 짐승이나 마수뿐만이 아닌, 정처 없이 배회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들의 눈동자에는 초점이 없었다. 팔을 축 늘어트린 채 그들은 목적 없이 걸었다. 그들을 볼 때 나진이 느낀 것은 이질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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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가죽을 쓰고 있지만, 인간이 아닌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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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널린 마수나 짐승이랑 크게 다를 것 없는 존재들. 나진에게는 저들이 살아 움직이는 시체처럼 느껴졌다. 조금의 지성도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그나마 시체와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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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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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움직임이 지나치리만치 정교하다는 것뿐이었다. 자신을 향해 마수가 달려들 적, 시체 같던 남자의 움직임이 급변했다. 완벽한 보법과 자세에서 나오는 완벽한 일격. 깔끔한 궤적을 그리는 사내의 검이 마수를 양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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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은 없지만 육체에 남은 경험은 건재하다. 그렇게 말하는 듯싶었다. 그 모습이 꼭, 조금 전에 보았던 그라프를 떠올리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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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뚫어버려도 그라프는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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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까뒤집고, 눈과 코, 귀에서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그는 움직였다. 의식이 없는 그의 몸을 움직였던 건 그라프의 육신에 새겨진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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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아무래도 까마귀들에게 단단히 찍힌 모양이군. 여기까지 기어코 쫓아오는 걸 보아하니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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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구기사가 나진의 뒤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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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는 일정 거리를 둔 채, 습격자들이 나진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나진을 공격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나진도 눈치챘지만 내버려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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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그런 별빛을 봤으면 놓칠 순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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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구기사가 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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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곤 습격자들을 바라봤다. 투구에 가려 그 눈동자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 시선에서 나진은 모종의 압력을 느낄 수 있었다. 강자들이 만들어내는 특유의 위압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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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구기사는 길게 말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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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그들을 향해 한마디를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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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거면 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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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격자들은 더는 다가오지 않았다. 그들은 걸음을 돌려 멀어졌다. 멀어지는 그들을 보며 투구기사는 비웃음을 흘렸다. 그리곤 나진을 내려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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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너를 도와줬다. 이건 인정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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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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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구기사의 도움을 받은 건 사실이었으니. 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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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 게 있으면 오는 것도 있어야 하지. 무상의 호의는 없다. 난 내 호의에 정당한 값을 받고 싶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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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하시는 게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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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가진 것들이 썩 가치 있어 보이진 않지만, 한 가지 정도는 가치가 있어 보이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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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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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 세상의 이야기를 들려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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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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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구기사는 자신이 알고 있는 장소가 있으니, 그곳에서 이야기를 나누자고 말했다. 그곳으로 향하는 동안 나진은 투구기사에게 질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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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프라는 자를 알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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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있지. 쿠르탄의 기사 그라프. 이 근방에선 제법 유명한 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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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자, 기사는 맞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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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질문에 투구기사는 나진을 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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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묻고 싶은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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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기사라고 말했지만, 어딜 봐도 기사 같지 않아서요. 제가 아는 기사와 그놈이 말하는 기사 사이에는 간극이 좀 큰 것 같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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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생각하는 기사는 뭐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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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상황에서도 명예와 긍지를 잃지 않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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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구기사가 걸음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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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듣는군. 혹시 아탕가의 기사들을 동경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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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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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뭐.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대부분은 기사라 불릴 자격이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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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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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은 명예와 긍지, 그리고 이상. 그것들의 가치가 한없이 희미해지는 곳이니까. 이 땅에서 그런 것들을 지키려면 강자여야만 한다. 강한 자만이 그것을 지킬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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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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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약자들도 명예와 긍지를 품을 수야 있지. 하지만, 그런 약자들이 어떻게 됐는지 벌써 봤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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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구기사가 피식, 웃으며 손가락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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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는 공허한 눈동자로 외륙을 배회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 망가져 버린 이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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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서 평범한 죽음은 허락되지 않는다. 이 땅에서의 죽음은, 제 모든 것을 잃고 잊어버린 망자(忘者)가 되는 것이지. 죽음보다도 더한 모욕이고, 치욕이야. 살아서 기사도를 외쳤다 한들 죽어서 저런 꼴이 되어버려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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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투구의 틈새를 손가락으로 거칠게 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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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의미가 없지. 안 그런가? 저런 짐승만도 못한 꼴로 전락한 순간 생전에 아무리 명예롭고 긍지 높았다 한들 가치가 없어. 추한 짐승이 되어버리니까. 이 땅에서 괜히 생존을 최우선 가치로 놓는 게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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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에는 명예로운 죽음이 있다. 긍지 높은 기사로서의 죽음이 허락됐다. 하지만, 외륙에선 아니다. 이 땅에서 기사로서의 최후란 허락될 수 없다. 투구기사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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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프라는 그 친구, 이 땅에 오기 전에는 긍지 높은 기사였다. 악마들을 베었다. 기사답지 않은 기사들을 죽였다. 흑마법사에게 납치된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단신으로 그들의 공방에 쳐들어가, 상처투성이가 되면서도 기어코 아이들을 모두 구해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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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남자였다, 하고 투구기사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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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는 외륙에서 170년을 살았다. 170년. 그 시간 동안 그가 뭘 봤을까? 결코 명예로울 수 없는, 긍지도 없는 죽음들을 봤겠지. 망자로 변해버리는 제 동료들을 목격했을 거다. 그 모든 걸 보고도 여전히 명예와 긍지를 외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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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구기사가 제 투구를 매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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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집이 가득한 투구의 장식은 부러져 있었다. 찌그러지고 구멍이 뚫린 투구는 투구로서의 가치를 절반쯤은 상실한 셈이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투구를 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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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서 명예와 긍지는 독한 술 같은 거다. 마시면 취하지만 깨면 괴로운 술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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