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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르칸은 까다로운 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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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볼품없고 우스꽝스럽기까지 했던 첫 등장과 달리 자르칸이 선보이는 무력은 무시할게 못 됐다. 소드 시커의 경지에 올랐으며 별 두 개를 손에 넣은 나진이 보기에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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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가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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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를 이어가며 나진은 눈살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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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르칸이 다루는 역장계열의 마법은 상대하기 까다로웠다. 단순히 마법을 사출해 적을 맞춰야만 피해를 입힐 수 있는 여타 주문들과 다른 까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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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 하나에 역장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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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손가락 열 개에, 악마의 손가락 21개를 더해 도합 31개의 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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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역장 하나하나가 크고 단단한 둔기다. 사람 몸통만 한 크기의 둔기가 쉴 새 없이 땅을 내려치고, 나진의 검을 가로막았다. 공격과 방어 두 용도로 모두 사용할 수 있을뿐더러, 원거리에서의 견제마저 가능한 역장. 그런 역장이 31개나 떠다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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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력도 무시할 게 못 된다. 맞부딪칠 때마다 검기가 뭉텅이로 깎여나가는 걸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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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물며 저 역장들은 맨눈으로 잘 보이지도 않으니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나진도 착실히 역장을 깎아내고 있긴 하지만, 저쪽의 소모 속도보다 이쪽의 소모 속도가 훨씬 빠르다. 이대로면 패배하는 건 나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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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위기감이 느껴지냐고 묻는다면··· 글쎄, 그건 또 아니었다. 나진의 눈동자는 여전히 차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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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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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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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개의 역장이 만들어내는 ‘쿵, 쿠웅!’ 따위의 둔중한 울림에 나진은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가 귀 기울이는 것은 자신의 심장이 내는 소리. 제 박동에 나진은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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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 쿵, 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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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 소리에 귀 기울여 보건대, 아직 여유가 있어 보였다. 옛날이었다면 이 정도가 나진의 한계였다. 이 이상으로 몸을 움직이려 하면 몸에 부하가 걸렸다. 지금도 걸릴 것 같긴 하지만, 왜일까? 더 과격하게 움직여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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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제 직감을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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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쿵쿵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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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혈액이 빠르게 몸을 순환했다. 근육이 당겨지고 신경이 가속했다. 온몸의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느낌. 당장에라도 끊어질 것 같은 근육을 마나가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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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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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그렇게 땅을 박차고 ‘평소처럼’ 움직이려던 나진의 눈동자가 커졌다. 나진 본인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빠른 움직임이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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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땅을 박찰 때 ‘탁’ 하고 소리가 났다면 지금 나는 소리는 ‘쾅’ 하는, 꼭 포탄이 쏘아지는 것 같은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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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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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장 하나를 베어 가르며 나진이 바닥에 쭉 미끄러졌다. 한순간의 가속. 그 가속에 놀란 것은 나진뿐만이 아니다. 자르칸의 눈동자에도 놀라움이 가득했다. 지금까지 힘을 숨겼던 건가? 그런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자르칸의 시선에··· 당황하던 나진은 이내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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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런 느낌이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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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제 몸의 속도에 적응하는 데는 불과 몇번의 공방이면 충분했다. 나진은 제 몸을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슬슬 가닥이 잡혔다. 또한, 별과 용혈이 제 몸을 어떤 식으로 변화시켰는지도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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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육체가 강화됐다기보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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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의 크기가 커진 거지. 효율이 올라간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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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의 말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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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나진이 알아차리지 못한 것도 당연했다. 제 몸에 일어난 변화는 육체가 강화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릇 자체의 크기가 커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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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얻으며 나진은 하늘에 도전할 자격을 얻었다. 그리고 그 자격이란 개념적이고 관념적인 것이 아니다. 그 사실을 나진은 이젠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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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어떻게 사용할지 감이 안 잡히는 별. 이 별의 힘을 다룰 수 있게끔 몸에는 변화가 일어났다. 그릇이 커지고 더 많은 힘을 한 번에 다룰 수 있게 됐다. 쉽게 말하면 한계치가 높아진 것이요, 한 번에 많은 힘을 휘둘러도 육체에 가해지는 부하가 줄어들었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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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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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제 몸을 감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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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나가 흐르는 통로. 그 통로의 크기는 큰 변화가 없다. 하지만 통로의 주위로 잔가지가 퍼져 있었다. 마치 나무가 뿌리를 내리듯이. 아직 그 크기는 작고 보잘것없지만··· 쓸모가 없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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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잔가지들이 마나를 더 정교하고,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게 만들어줬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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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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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땅을 박찼다. 전신에 골고루 퍼져있던 마나가 각력에 집중됐다. 다리와 발에 뻗어있는 잔가지에 마나가 한순간에 차올랐다. 자르칸의 역장은 나진의 앞이 아닌, 나진이 이미 지나친 자리를 두들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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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나의 순간 좁혀진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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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자르칸의 시야는 엄한 곳을 바라보고 있을 뿐, 제 코앞까지 나진이 파고들었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 대가를 그는 비싸게 치러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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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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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땅을 내려찍으며 마나를 움직였다. 각력에 집중됐던 마나가 다시 전신으로, 나아가서 팔과 어깨, 그리고 허릿심에 강하게 실렸다. 나진이 검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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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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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이 부드럽게 자르칸의 팔을 베어 갈랐다. 칼끝이 역장을 가르며 자르칸의 살에 닿았다. 살을 가르고 뼈를 끊으며 칼날은 반대 방향으로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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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어져 나가는 팔에서 늘어지는 구정물, 마기(魔氣)가 팔을 붙이려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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콱, 하고 나진의 손아귀가 떨어져 나간 자르칸의 팔을 움켜쥔 채 땅을 박찼다. 나진은 자르칸에게서 거리를 벌리며 팔의 절단면에서 쭉 늘어진 구정물을 검으로 내려쳐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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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일련된 동작은 너무나도 빠르게 이루어졌고, 자르칸의 입장에선 나진이 제 옆을 스쳐 지나간 순간 팔이 떨어져 나간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고통은 뒤늦게 엄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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촤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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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에 미끄러지듯 착지한 나진이 손에 들린 자르칸의 팔을 뒤로 휙, 던지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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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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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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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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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나를 한 점에 집중시켜 만들어내는 순간적인 가속. 육신의 한계를 넘어선 움직임이지만, 마나가 완충재로서 작용하기에 육체에 걸리는 부하는 크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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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실을 깨달은 나진은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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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까지 간신히 나진의 움직임을 쫓아가고 있던 자르칸의 입장에선 날벼락이 떨어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팔 하나를 잃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잃어버린 것은 악마의 팔이 아닌 인간의 팔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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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손해가 크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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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개의 역장이 사라졌으니까. 하지만 자르칸은 전투 경험이 풍부한 마법사다. 절단면에서 솟구치는 피에 당황하지 않고, 역장으로 절단면을 짓뭉개 지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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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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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증에 그의 표정이 구겨졌지만 딱 거기까지. 자르칸은 이내 나진을 노려보며 역장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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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가가가가가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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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장이 땅을 긁으며 나진에게 밀려들었다. 정육면체의 형태의 투명한 역장. 역장 주변으로 방출되는 힘은 역장에 닿는 것들을 박살 낸다. 닿기만 하면 저 팔이고 다리고 전부 뭉개버릴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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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닿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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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의 움직임이 빨라진 까닭에? 아니, 그뿐만은 아니었다. 나진이 계속해서 빠르게 움직이는 것은 아니었다. 전과 다를 것 없는 속도로 움직이다가 자르칸이 작은 틈이라도 보이는 순간에만 나진은 가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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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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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에서 솟구치는 피에 자르칸이 이를 악물었다. 꼭 상대가 자기를 가지고 노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으니까. 상대의 속도가 일정하지 않으니 상대하는 입장에선 미칠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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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방을 계속할수록 상처가 늘어간다. 피가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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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까진 소모전으로 끌고 가면 우세한 건 이쪽이었지만, 이젠 아니다. 상황이 역전됐다. 그 사실을 자르칸은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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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랄 같군. 정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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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르칸은 숨겨놨던 수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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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모량이 극심해, 결정적인 순간에만 사용하려 했던 수단. 악마의 권능이었다. 자르칸이 계약한 악마 마르포스(Marphos)는 ‘굴절’을 관장하는 악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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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절. 휘어서 꺾이는 것. 비뚤어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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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르칸의 등줄기에서 뻗어 나온 악마의 손아귀가 제멋대로 움직였다. 정육면체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역장이, 나진의 회피에 맞춰 굴절했다. 갑작스럽게 형태가 뒤바뀐 역장에 나진의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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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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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마저도 나진은 반응했지만, 완벽하게 반응해 내진 못했다. 나진의 어깨가 역장에 찍혔으니까. 살점이 뜯어져 나가 피가 철철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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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런 식의 공격은 한 번에서 그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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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개의 역장이 제멋대로 날뛰며, 시시각각 형태를 변화하며 나진을 덮쳤다. 휘고 꺾이며 시도 때도 없이 굴절하는 역장. 물론 그것을 다루는 건 자르칸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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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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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르칸의 코에서 피가 흘렀다. 그의 눈동자에 핏발이 섰다. 7서클의 연산 능력을 모조리 역장을 움직이는 데 사용하고 있었으며, 그걸로도 모자라 악마의 손에 연산을 맡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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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장의 크기를 바꿀 때마다 마나가 뭉텅이로 깎여나갔다. 마나가 바닥을 보이기 전에 결판을 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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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서클 마법, 파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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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서클 마법, 역장 폭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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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개의 역장이 쪼개졌다. 21개에서 42개로, 42개에서 다시 84개로 쪼개진 역장들이 불규칙한 궤도로 회전하며 일대를 휩쓸었다. 역장에 닿은 건물들이 ‘퍼석’ 소리를 내며 가루로 바스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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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서클 주문이 만들어내는 역장 폭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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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할 곳은 없었다. 나진은 길게 숨을 내뱉으며 폭풍을 향해 뛰어들었다. 몰아치는 폭풍 속에서 1초에도 몇번이고 백색의 섬광이 번뜩였다. 빛이 한번 번뜩일 때마다 폭풍의 크기는 줄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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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곤, 투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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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을 가르며 나진이 뛰쳐나왔다. 나진의 몸도 무사하진 못했다. 어깨며 다리며 살점이 뜯어져 나가 피가 흘렀으니. 하지만 어느 것 하나 치명적이진 않다. 폭풍을 뚫고 나온 나진이 자르칸에게 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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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나진은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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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르칸이 자신을 향해 쭉 뻗은 팔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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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르칸은 26개의 역장 중, 21개의 역장만을 활용해 역장 폭풍을 일으켰다. 그럼 남은 5개의 역장··· 자르칸의 인간의 팔에 들려있는 역장은? 그 답을 알려주겠다는 양 자르칸이 중지와 엄지를 마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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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하고 그가 손가락을 튕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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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서클 주문, 굴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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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개의 역장이 마찰했다. 한데 뭉쳐져 나진을 향해 밀려들었다. 닿는 것을 모조리 꺾고, 굴절시켜 버리는 주문. 굴절의 악마와 계약했기에 그 주문의 위력은 가히 7서클에 근접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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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한 가지 간과한 점이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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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屈)과 절(折)이란 글자가 나진과 상성이 좋지 않다는 점이었다. 단 한 번도 굴하지도, 꺾이지도 않았던 소년의 검기는 빛났다. 나진이 땅을 박차며 자세를 잡았다. 그건 굴절과는 반대되는 뜻을 가진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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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를 처단하기 위한 검(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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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탕가의 검이 역장을 정면에서 깨부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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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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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르칸. 과거 이름은 자르칸 블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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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한때 촉망받는 유망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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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이들이 사연 하나쯤은 품고 살아가듯, 자르칸에게도 사연은 있었다. 그 사연의 무겁고 가벼움을 떠나 그에게도 삶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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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장학파의 유망주 자르칸 블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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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겐 재능이 있었다. 재능이 있었기에 그는 67세의 나이에 6서클에 도달했다. 한평생을 바쳐도 5서클의 벽을 깨지 못하는 이들이 있는 것을 감안하면 자르칸에게는 재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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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이 있었다는 건 행운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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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가 명확했다는 것이 그에게 불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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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르칸은 97세의 나이까지 정도(正道)를 걸었다. 하지만 그는 6서클의 위로 나아가지 못했다. 30년을 바쳤음에도 성과는 전무했다. 그쯤 해서 자르칸은 깨달았다. 내 재능은 여기까지란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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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그 누구도 자르칸을 유망주라 부르지 않는다. 그는 늙어버린 노인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육체만큼은 자신이 가장 빛났던 시기에 고정된 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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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드 시커급의 강자는 노화에서 자유로워진다. 언제나 빛나던 시기의 육체로 평생을 살아간다. 그것은 얼핏 보면 영원을 허락받은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세상이 결코 허락하지 않는 것이 바로 영원(永遠)이란 단어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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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인간에게 120년의 세월을 허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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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년, 평범한 인간의 한계 수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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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넘어 살아있는 인간은 세상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오류에 해당한다. 이치에 걸맞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해야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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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밀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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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에서 저승으로. 차안에서 피안으로. 하지만 노화를 극복한 육체를 가진 이들은 밀려나지 않는다.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자연스러운 순환의 법칙을 거부한다. 그런 그들을 세상은 세상의 바깥으로 밀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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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륙(外陸), 세상의 바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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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으로 밀려나길 거부한 이들은 육체와 영혼이 바스러져 죽음을 맞이한다. 빠르고 느리고의 차이는 있지만 마모는 분명하게 찾아온다. 그것이 영원의 육체를 허락받은 이들에게 주어지는 죽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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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피하려면 외륙으로 떠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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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수많은 소드 시커급의 강자들은 제 발로 외륙으로 향한다. 세상을 구하느니, 영웅이 되겠다느니, 외륙을 정화하겠다느니 거창한 포부를 내세우지만 그건 자기 합리화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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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순리에 속하지 못하게 된 이들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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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에서 살아가지 못하게 된 이들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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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한 명의 늙은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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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르칸 블렌 역시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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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르칸은 97세의 나이부터 마모가 시작됐다. 바스러지는 제 육체를 본 순간 그는 절망했다. 죽음이 다가왔다. 마탑을 떠나 외륙으로 향해야 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 역시 죽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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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륙에는 괴물들이 득실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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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란의 저주받은 것들을 닮은 마수가, 저 밤하늘의 빛나는 초월자들이, 인간의 영혼을 탐하는 악마가, 성좌가 되길 바라는 탐욕스러운 사냥꾼들이 그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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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사이에서 살아남을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군인이 되어 그들과 싸우고 싶지도 않았다. 자르칸은 마법사였고 탐구자였다. 그는 단지 더 많은 지식과 연구를 원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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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진 시간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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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르칸은 선택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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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으로 남을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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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자르칸은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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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념을 버렸다. 양심을 버렸다. 먼 옛날 제 스승의 앞에서 했던 맹세를 저버렸다. 그 모든 것을 대가 삼아 그는 악마와 거래했다. 그토록 바라던 ‘다음 경지’에 발을 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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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서클. 악마의 손. 더 고차원의 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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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었다.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토록 바라던 초월의 경지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가 한평생에 거쳐 바라던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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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일견 위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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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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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초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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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르칸은 보았다. 눈앞에서 제 한평생을 바쳐 연구한 마법이 찢겨나가는 것을. 별자리를 닮은 검기, 결코 꺾이지도 끊어지지도 않는 검기가 역장을 깨부수며 다가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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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에서 밀려났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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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륙에서도 밀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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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선에 자리 잡을 수밖에 없었던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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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태되어 버린 어느 마법사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새하얀 빛이었다. 백색의 섬광이 자르칸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뒤이어 금색의 빛이 자르칸의 눈앞에서 폭죽처럼 튀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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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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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르칸의 목이 땅에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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