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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4 21:31:5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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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좋아해요. 나진.”

말했다. 말해버렸다. 그녀의 이성이 비명을 지르다못해 개거품을 무는 가운데, 디에타는 생각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좀 얄미웠다고.

사실이 그렇지 않나.

이쪽이 좋아하는 티를 팍팍 내는데 나진은 언제나 평온하기 짝이없다. 그 사실이 디에타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어디가서 꿀릴만한 사람은 아니지 않나? 솔직히 외모로만 따져도 제국에서 나보다 예쁜 여자가 얼마나 있다고?

최소한 좀 흔들리는 기색이라도, 거리를 좁혀오면 당황하는 기색이라도 보이면 좀 좋은가.

‘연애감정을 몰라서 통하지 않는 거라면.

이쪽이 좋아하고 있다는 걸 최소한 인지는 하게 만들어주겠다. 그 사실을 알고도 어디 평소처럼 대할 수 있을까. 이 관계에 최소한 변화는 생기겠지.

좋은 쪽으로든 안좋은 쪽으로든 말이다.

물론 안 좋은 쪽으로 흘러간다면 조금, 어쩌면 좀 많이 슬프겠지만 그건 그때가서 생각할 일이다. 미래의 자신이 어떻게든 방법을 떠올려주겠지. 걱정 반, 기대 반으로 디에타는 나진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나진이 반응했다.

우선 나진의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뒤이어, 나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눈을 크게 뜬 채 나진이 뒷걸음질을 치려했지만 울타리에 가로막혀 더 물러서지도 못했다.

턱, 하고 나진의 등이 울타리에 닿았다.

누가봐도 당황한게 분명한 모습이었다.

나진은 일반인을 아득히 뛰어넘는 수준의 반응속도를 가지고 있다. 소드 엑스퍼트가, 소드 시커가 되기 이전부터 그랬다. 타고난 동체시력과 반응 속도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으니.

그렇다보니 나진이 ‘불의의 일격’을 허용하는 상황은 그리 많지 않았다. 자신보다 강자에게 당한 적은 있어도, 약자나 동등한 수준의 적에게 치명타를 허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시피했단 뜻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나진은 불의의 일격을 허용했다. 그것도 그가 크게 동요할만큼. 도대체 누가 이 최연소 소드 시커에게 습격을 했는가? 피할 수 없을만큼 빨랐는가? 그게 아니면 숨어서 뒤를 노렸는가? 혹은 소드마스터라도 되나?

전부 아니었다.

상대는 정면에서 천천히 걸어왔으며 무(武)와는 담을 쌓고 살아가는 소녀였다. 그런 소녀에게 나진은 치명타를 허용했다. 나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내가 방금 뭘 들은거지?

잘못 들었다기엔 너무나도 선명한 목소리. 그 발음 역시 깔끔하다. 도망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완벽한 일격이었다.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서려던 나진의 등이 울타리에 닿아 ‘턱’ 소리를 냈다.

당신을 좋아해요, 나진.

디에타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제 아무리 연애와 담을 쌓고 살아가는 나진이라 한들 그 한줄의 문장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진 않는다. 직설적이면서도 담백한 고백. 동화나 영웅담의 클라이막스에나 등장할법한 대사였다.

나진은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언제나 몇 수 앞을 내다보고 상대의 공격에 반응하는 나진이었지만, 푹 찌르고 들어오는 디에타의 한마디에는 반응하지 못했다. 예상치도 못한 공격이었으니까.

어떻게 답해야할지.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알 수가 없는 나진의 시선은 자연스레 멀린을 향했다. 멀린은 나진의 길잡이다. 그녀라면 분명 이 상황에 적절한 답을 알려줄 터. 도움을 구하듯 나진은 멀린을 바라봤지만······.

-뭐, 뭐··· 뭐어?

멀린이라고 나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더하면 더 했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멀린은 천천히 제 고개를 기울였다. 그 고개가 기울어지다 못해 꺾일 무렵 그녀의 입술이 움직였다.

-내가 방금 잘못들은거니? 잘못들은거겠지. 아니, 잘못 들은거라고 해. 그래야만 할 테니까.

멀린이 어이없다는 듯 디에타를 바라봤다.

-고백에 가장 중요한 건 무드야. 분위기라고! 분위기도 안 잡고 냅다 이렇게 질러? 연애가 장난이야? 자고로 고백이란 달밤의 호수같이 분위기가 좋은 곳에서, 여정의 마지막을 장식하면서 하는 거야. 이런 어중간한 상황이 아니라!

그녀가 빼엑 소리를 질러댔다.

당연하게도 멀린은 고백을 한 적도, 받아 본 적도 없었다. 단지 자신이 고백을 받는다면 그런 장소가 좋을 것 같다고 언제나 망상했을 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제 취향을 털어놓은 멀린이 언성을 높였다.

-세상 어느 여자가! 어느 남자가! 이런 갑작스러운 고백을 좋아해!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이런 같잖은 수에 넘어갈 만큼 애가 만만해보여? 그렇게 봤다면 오산이야. 이 발랑까진 꼬맹아!

발을 동동 구르며 멀린이 휙, 나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렇지? 응? 너도 빨리 대답······?

멀린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그녀가 게슴츠레 뜬 눈동자로 나진을 흘겨봤다.

-뭐야. 넌 또 왜 그래.

‘제가 뭘요.

-눈. 눈동자! 왜 그렇게 흔들려? 뭐야, 너 설마?

‘아니, 당황할만 한 상황이잖아요.

-끄으으으으으윽!

당장에라도 거품을 물고 쓰러질 것처럼 멀린이 제 뒷목을 잡았다. 지금은 도움이 안되겠군. 나진은 멀린의 비명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눈앞의 디에타에게 집중했다.

“······.”

그녀는 말 없이 나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진이 대답을 들려주기 전 까진 비켜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진 역시 이 상황을 적당히 넘길 생각은 없었다. 정면에서 마음을 고백해 온 상대의 각오를 무시할만큼 나진은 무례하지 않았다.

침묵, 그리고 고민.

한시간 같은 1분이 흐른 뒤 나진이 입을 열었다.

“디에타.”

“네, 나진.”

“솔직히 말하자면, 전 디에타가 제게 무슨 감정을 느끼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좋아하냐 싫어하냐를 묻는다면 당연히 좋아하긴 합니다만.”

나진도 안다.

“디에타가 말하는 건 그런 단순한게 아닐거잖습니까?”

“툭 까놓고 말해, 연인 사이가 되고 싶다는 고백이긴 했어요. 이걸 제 입으로 말하는 것도 좀 부끄럽지만요.”

디에타가 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뒤늦게 부끄러움이 밀려오는 듯,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디에타가 중얼거리는 가운데 나진은 쓰게 웃었다.

“그래서 바로 대답하기가 어렵습니다.”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아직 모르겠거든요. 좋아한다는 게 뭔지, 디에타가 제게 느끼는 감정이 뭔지 말입니다. 그게 뭔지도 모른 채로 지금 디에타의 고백에 대답하는 건, 비겁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당신이 걸어온 승부에 신중하게 임하고 싶다. 적당한 대답, 적당한 말로 받아치는 건 당신에게 실례되는 일일테니. 나진은 그렇게 답했고.

“과연.”

디에타는 무심코 웃고 말았다.

비겁하다, 라. 참 눈앞의 남자가 할법한 대답이었으며, 디에타가 어느정도 예상한 대답이기도 했다.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어요.”

“미안합니다.”

“사과하지마요. 사과하면 꼭 차인 것 같잖아요? 대답을 아직 뒤로 미뤘을 뿐 거절한거 아니잖아요. 설마 저랑 평생 안볼거에요?”

“그건 아닙니다만······.”

“그럼 사과하지마요. 사과할 일이 아니니까.”

이렇게 될 줄 모르고 지른 고백은 아니었다.

아예 거절당하는 것까지 염두에 뒀거늘 이정도면 나쁘지 않았다.

“알고 있었어요. 당신이 아직 연애감정이 뭔지 모른다는 것도, 이런 반응이 나올거라는 것도.”

모르고 홧김에 저지른게 아니다.

알고도, 디에타는 나진에게 고백했다.

“원래는 천천히 단계를 밟아가려했죠. 당신의 ‘첫번째 자리’를 하나 하나 차지해가다가, 마지막으론 연인자리까지 차지할 계획이었는데 말이에요.”

디에타는 수줍게 미소지었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조금은 부끄럽다는 듯이.

“도저히 못참겠더라구요.”

웃으며 그녀는 말했다.

“당신, 멀리 떠나잖아요? 거리가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도 있고. 그래서 좀 초조해졌어요. 더 커다란 무대. 더 높은 곳. 더 대단한 자리. 당신은 분명 저 멀리까지 나아갈텐데······.”

최연소 소드시커. 최연소 쌍성.

지금도 말도 안되는 업적을 세운 나진이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할거라고 디에타는 확신했다. 확신했기에 불안했다. 더 거대한 존재가 될 나진에게 자신은 ‘한때의 인연’ 정도로 기억될까봐.

그러고 싶진 않았다. 정말로.

“그런 당신에게 잊지 못할 기억을 남기고 싶었어요. 당신이 말했죠? 뭐든 처음이 중요한 법이라고. 그럼 기억해요. 당신에게 처음으로 고백한 게 저란 사실을.”

그리 말하며 디에타가 입꼬리를 틀어 올렸다.

매력적인 미소였다. 나진도 숨을 삼킬 만큼.

“이런 여자인 걸 어떡해요. 실망했나요?”

“전혀.”

나진이 웃었다.

“오히려 좋은데요? 솔직함은 기사의 미덕이죠.”

“기사 시험이라도 치러볼까요? 지금이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도와드리죠. 검술은 가르쳐 드릴 수 있습니다.”

“그건 좀 솔깃하네요?”

농담을 던지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본 채 웃었다. 어이가 없어서, 그리고 즐거워서. 한참을 웃다가 디에타는 흐, 하고 길게 숨을 뱉어내곤 말했다.

“나진? 언제든 좋아요. 당신이 연애 감정이란 걸 느끼면 꼭 알려줘요. 그 상대가 저라면 좋겠지만, 제가 아니어도 좋아요.”

바람이 불어왔다.

디에타의 머리칼이 흔들렸다.

“저는 지금부터 당신이 내게 반하도록··· 설령 당신이 다른 누군가에게 반하더라도, 결국에 나를 선택하도록 만들 거예요.”

바람에 흔들리는 연갈색의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디에타는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샛노란 눈동자가 별처럼 빛났다.

“경매에요. 경쟁자가 나타난다면, 상대보다 더 좋은 조건, 더 많은 재화를 때려 박아서 빼앗아버리면 그만인 법.”

무얼, 하고 그녀는 말했다.

“저는 금화를 삼키는 뱀. 제국 제일의 거상이 될 상인이랍니다. 사람의 마음 하나 사들이지 못해서야 거상의 이름이 울지 않겠어요?”

반드시 당신을 가지겠다.

그렇게 포부를 밝힌 소녀의 기세에 나진은 자신이 밀렸음을 인정해야 했다. 단 한 번도 기세에서 밀려본 적이 없는 나진이, 상대가 소드마스터라도 고개를 빳빳이 세운 채 달려들던 나진이 처음으로 뒤로 물러섰다.

나진의 패배였다.

하지만 기분 나쁜 패배는 아니었다.

“인상적인 고백이네요.”

“그렇죠? 제가 생각해도 대사 참 잘 친 것 같은데. 어때요, 좀 두근거렸나요?”

“조금은.”

디에타가 피식 웃었다.

그녀가 손을 뻗어 나진의 가슴팍을 가볍게 밀쳤다. 나진에게 거리를 벌리며 자연스럽게 헤어질 작정이었지만, 디에타는 몇 걸음 가지 못해 멈춰 섰다.

원래 계획은 여기서 ‘그럼 다음에 봐요’ 하고 떠날 생각이었다. 더 얼굴을 보고 있으면 심장이 터질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참 애석하게도 여기서 캄브리아, 그것도 그녀의 집무실까지의 거리는 꽤 멀었다.

‘여기서 집무실까지 걸어가면······.

그때는 이미 해가 져 있을 것이다.

디에타는 살짝 고개를 돌려 나진을 바라봤다.

“······저기, 나진?”

“네. 디에타.”

“돌, 돌아갈까요? 우리?”

조금 전의 기세는 어디로 가고, 이리저리 시선을 피하며 말을 더듬는 디에타의 모습에 나진은 그만 웃고 말았다. 결국 디에타는 나진의 품에 안긴 채 집무실로 귀환했다.

이동하는 동안 제 얼굴을 손바닥으로 가린 채, 나진과 눈도 마주치지 못한 건 덤이었다.

-연애는 안 돼.

“예?”

-연애는 안 된다고!

디에타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온 나진이 처음으로 마주한 것은, 씩씩대는 멀린의 모습이었다. 멀린은 나진에게 손가락질하며 소리 질렀다.

-잘 들어. 아서는 여정의 끝까지 연애 한번 하지 않았어. 아서에게 고백하는 얼간이가 없던 건 아니야. 하지만 아서는 고고했지. 절대!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허락하지 않았어.

거기까지 말한 뒤 그녀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는데, 꼭 나진을 설득할 완벽한 논리를 발견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자, 아서왕을 동경해서 닮고 싶어 하는 네가 연애하지 않을 이유로는 충분하지?

그런 멀린을 빤히 바라보던 나진은, 멀린에게 들리지 않게끔 주의해서 독백했다.

이 사람 바보인가?

멀린이 들었다면 눈을 부릅뜨고 나진을 들들 볶아댈 만한 독백이었지만, 참 다행스럽게도 나진의 속내가 멀린의 귀에 들어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진은 오묘한 표정으로 멀린을 흘겨봤다.

-왜. 뭐. 왜.

“아뇨 그냥······.”

말끝을 흐리던 나진이 툭, 던지듯이 말했다.

“아서왕이 연애를 안 했다고 했죠?”

-물론이지. 아서의 길잡이였던 내가 보증해.

“그럼 제가 연애까지 해버리면, 아서왕보다 한 걸음 더 앞선 것 아닙니까? 아서왕이 하지 않았던 일을 해낸 거니까요.”

-······어?

“연애를 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군요.”

말문이 막힌 멀린의 동공이 흔들리는 가운데, 나진은 옷을 정리하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멀린에게서 등을 돌렸다.

-잠깐. 잠깐만.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야! 자는 척하지 말고 일어나. 일어나봐!

멀린이 소리를 질러댔지만 나진은 무시했다.

좀 시끄러울 뿐 멀린은 나진에게 물리력을 행사할 수 없었으며, 나진의 어깨를 잡아당겨 자기 쪽으로 돌리지도 못했다. 보통은 그리 소리 질러 대면 잠에 드는 것이라도 방해할 수 있었을 텐데, 지하도시의 골목길에서도 잘만 노숙했던 나진에겐 별 소용이 없었다.

-자? 진짜 자게? 야, 너 진짜 이럴 거야?

멀린의 칭얼거림을 자장가 삼아 나진은 잠에 들었다.

나진의 승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