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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화를 삼키는 뱀, 디에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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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위 기사 한 명만을 대동한 채 공작가를 뛰쳐나와 불과 5년 만에 캄브리아 제일의 거상이 된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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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업적은 놀랍긴 하나, 캄브리아 바깥에선 그녀와 그녀의 상회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캄브리아 내에서야 큰 영향력을 가지는 것은 맞나, 그 영향력이 캄브리아 바깥까지 미치는 것은 아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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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1년 전까지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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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1년이 지난 지금은 이야기가 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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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1년간 디에타 상회는 폭발적인 성장을 이뤄냈다. 캄브리아 바깥까지 유통망을 만들었으며, 제국의 중심에 거점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거기에 더해 나진이라는 유명 인물과의 연관성을 과시하며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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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된 이목. 수많은 시선과 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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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황에 조금이라도 실수한다면 쌓아 올린 것들이 전부 허사로 돌아간다. 그러니 몸을 사릴 법도 하지만, 금화를 삼키는 뱀은 뼛속까지 상인이다. 높은 위험에는 높은 이득이 따른다. 상인으로서의 상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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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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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세상이 그녀의 상회를 주목하는 가운데, 디에타는 당당히 무대 위에 올라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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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 사들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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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벌된 백룡과 적룡의 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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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소재의 최우선 낙찰권을 미리 손에 넣었던 디에타다. 이 순간을 위해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묶어뒀던 금화들. 그 전부를 디에타는 한방에 풀었다. 금화로 이루어진 파도가 경매장을 휩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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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중앙길드에 달아둔 빚, 숱한 상단들에게 잡아뒀던 약점과 빚들을 그녀는 소재를 입찰하는데 모조리 쏟아부었다. 디에타는 적룡과 백룡의 소재 9할 가까이를 손에 넣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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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점이라 부르기에 충분한 매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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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는 용의 소재를 독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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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큼 출혈이 컸지만, 그녀가 생각하기에 용의 소재는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매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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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의 소재가 뭔가? 연금술, 마공학, 방어구와 무기를 비롯한 장비 제련을 비롯해 연구 목적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온갖 곳에 쓰이는 상품이다. 그 상품성은 일찍이 증명됐으나 매물이 없어 팔지를 못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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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매물이 수십 년 만에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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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아서왕의 전설과 연관된 적룡과 백룡의 소재가 말이다. 상품성뿐만이 아니라 사치품으로서의 가치 역시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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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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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는 백금화를 손바닥 위에서 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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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용의 소재는 특별했다. 나진이 토벌한 적룡은 캄란의 마녀의 영향을 받은 특수 개체였고, 소드 시커의 검기조차 견디는 비늘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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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그래도 가뜩이나 비싼 용의 소재에 그런 특별함까지 붙으니, 이쯤 되면 디에타가 부르는 게 곧 값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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숱한 상단, 공방, 마탑에서······ 그야말로 온갖 곳에서 거래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디에타는 응하지 않았다. 상인은 현물만을 거래하지 않는다. 때로는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더한 가치를 지님을 그녀는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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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을 가장 비싼 값에 팔아 치우는 게 상인의 덕목이라면, 디에타는 훌륭한 상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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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색 탑에선 저희에게 마탑의 상품들을 싼값에 제공하기로 약속했습니다. 또한 저희에게 가장 우선해서 마탑의 상품을 제공할 것을 조건으로 걸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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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자신을 찾아온 상인들에게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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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프커 대장간에선 소재로 가공한 상품들을 저희 상회에 제공할 것을, 더 나아가 저희 상회와 제휴를 맺을 것을 약속했어요. 도프커 대장간만이 아니랍니다? 로엔스 공방, 벤델린 연금탑, 월하이트 대장간에서도 비슷한 제안을 보내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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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쪽에선 무슨 조건을 가져오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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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건을 가져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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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않으면 거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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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수십 년 만에 풀린 용의 소재를 향해 달려드는 이들끼리 경쟁을 붙였다. 그들이 더 좋은 조건을 부르도록 유도했다. 상인들 사이의 경쟁이 과열되는 가운데 디에타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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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어디에도 상품을 팔아치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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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원하는 손님은 아직 등장하지 않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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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미끼일 뿐이다. 더 큰 물고기를 이 판에 끌어들이기 위한 미끼. 디에타는 수면 아래를 유유히 헤엄치는 대어를 노려봤다. 당신 역시 이 물건이 탐날 것이다. 하지만 직접 이 판에 뛰어들긴 싫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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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이 떨어진다고 느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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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거래하는 상회. 당신과 연이 닿은 상인들. 그들을 통해 물건을 제공받는 게 당신이 그리는 그림일 것이다. 하지만 이걸 어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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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팔 생각이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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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고 싶다면 당신이 직접 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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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그래야만 거래에 응할 테니. 무얼, 체통을 신경 쓰느라 이 무대에 뛰어들길 꺼리는 당신을 위해 판을 이렇게까지 키웠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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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찰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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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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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수면위로 대어가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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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금탑에서 손님이 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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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끼를 물었다. 디에타가 손안에서 굴리던 백금화를 튕겼다. 공중에서 회전하는 백금화를 바라보며 그녀가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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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금탑(白金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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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에서 가장 거대한 마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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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마탑의 꼭대기에 디에타가 노리는 먹잇감이 있었다. 백금탑의 탑주, 시프리아 가체프스카. 제국에 유통되는 아티팩트의 4할 가까이를 만들어내는 대마법이자 제국의 다섯 기둥 중 일각을 차지하는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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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휘각(永輝角) 시프리아 가체프스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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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바로 디에타가 노리는 먹잇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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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화를 삼키는 뱀은 백금탑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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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금탑과의 연결점을 만들어둔다. 그들과 거래할 창구를 만든다. 그것이 이 모든 계획의 목적이었다. 제국의 수도에 성공적으로 자리 잡기 위해선, 든든한 거래처가 필요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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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는 미끼를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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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낚인 물고기를 구워삶는 일만 남았다. 그리고, 그건 디에타의 전문 분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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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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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가 튕긴 백금화를 낚아챘다. 한번 손에 쥔 백금화를 그녀는 놓치는 법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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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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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뻐근한 몸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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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움직일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게, 오랫동안 누워있던 탓에 몸이 굳은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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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누워있긴 했네요. 얼마나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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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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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밖에 안 있었나? 체감상으로는 8개월은 더 누워있던 것 같은데. 나진이 삐걱거리는 제 어깨를 두들기며 지난 한 달을 떠올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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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룡 토벌로부터 꼬박 한 달 동안 나진은 침대 신세를 져야 했다. 엑스칼리버의 회복력이 있다 한들, 워낙에 심각한 부상이었으니까.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죽어도 열 번은 더 죽었을 만한 부상이라며 치료사들은 혀를 내둘렀지만, 애석하게도 나진은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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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드 시커, 두 개의 별, 그리고 엑스칼리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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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인간을 벗어난 회복력을 지닌 나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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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사들은 못 해도 반년은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나진은 불과 한 달 만에 침대에서 일어났다. 치료사들이 보면 뒷목 잡을만한 일이었지만··· 정작 나진 본인은 그 한 달조차 한없이 길게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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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네가 일주일 이상 쉰 적이 없으니까 그렇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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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이 한숨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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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도시를 나온 이후로 네가 뭐 휴식이란 걸 해봤어야지? 무슨 하루라도 수련을 거르면 죽는 사람처럼 틈만 나면 검을 휘둘러댔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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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덕분에 1년도 채 안 돼서 별도 달고, 소드 시커도 됐잖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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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련하시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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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못 말리겠다는 양 고개를 가로젓는 가운데, 나진은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벽에 걸린 검을 허리춤에 채우는 나진을 보며 멀린이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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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수련하게? 좀 쉬지 그래? 상처가 다 아물지도 않았는데 뭐가 그리 급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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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하러 가는 거 아닌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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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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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선반을 가리켰다. 그곳엔 과일 바구니를 비롯한 온갖 요깃거리가 놓여있었는데, 모두 디에타가 놓고 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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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말이에요? 제국에서 이런저런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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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 이것 좀 먹어볼래요? 별건 아니고, 오는 길에 보여서 사 왔어요. 가끔은 이런 것도 괜찮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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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할까 봐 책도 좀 가져와 봤어요. 이런 거 좋아하죠? 제국을 빛낸 100인의 영웅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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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침대 신세를 진 한 달 동안 디에타는 거의 매일 병문안을 와줬는데, 그 사실에 나진은 감사함을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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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매일 병문안을 와줬잖아요? 한 번쯤은 제가 찾아가는 것도 괜찮을 듯싶어서. 안 그래도 바쁜 사람인데 찾아오는 것도 수고로울 것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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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응······ 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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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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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애는 그렇게 생각 안 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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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무슨 뜻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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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은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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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리만치 ‘이런 쪽’으론 가히 파멸적인 눈치를 가진 나진과 달리, 멀린은 소녀의 연심을 몰라볼 정도로 눈치가 없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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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몰라보는 게 이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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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애, 널 보는 눈에서 아주 꿀이 뚝뚝 떨어지던데? 손이라도 닿는 날엔 화들짝 놀라 어깨를 떨지 않나, 뭐만 하면 귀까지 새빨갛게 물들이질 않나. 그걸 몰라볼 수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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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멀린은 삼켰다. 왠지 말해주기 싫었으니까. 아끼는 물건을 다른 사람이 멋대로 만지고 있는 것 같은 묘한 불쾌감. 멀린이 뚱한 표정으로 나진을 흘겨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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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그렇게 째려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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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나진은 멀뚱멀뚱 눈만 깜빡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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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때만 보면 영락없는 애송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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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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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뭐 하는 짓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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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도 성장이 빨라 종종 까먹는 사실이지만 눈앞의 소년은 고작 열여덟살이었다. 그것도 지하도시를 벗어나 세상에 나온 지 1년도 채 안 된 애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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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적인 인간관계를 맺어본 적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으니, 나진이 연애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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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냐, 네가 찾아가면 좋아하긴 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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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은 어깨를 으쓱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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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녀는 연인이니 연애니 하는 하잘데 없는 것들에 시간을 쓰는 게 아깝다고 생각하는 쪽이었지만, 굳이 훼방을 놓을 생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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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이 녀석이 어디 백날 찍어봐야 넘어갈 나무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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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에는 검, 기사, 별밖에 없는 게 바로 나진이다. 자신이 인도하고 있는 소년이 연애를 하는 모습이 도저히 멀린의 머릿속엔 그려지지 않았다. 그 갈색 머리 소녀에겐 안된 이야기지만, 나진이 그 소녀에게 넘어갈 것 같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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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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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진 멀린이 미소를 지었다. 자기 혼자 뚱해졌다가, 이젠 실실 웃고 있는 멀린을 바라보며 나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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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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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 상회 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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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상인과 손님들이 줄지어 순서를 기다리는 가운데, 나진은 그들의 옆을 지나쳐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경비병은 나진을 제지하기는커녕 나진을 알아보고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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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안으로 들어서 상회의 최상층으로 올라갈 때까지 그 누구도 나진을 막아서지 않았다. 본래 디에타를 만나려면 다소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했지만, 나진에게는 필요하지 않은 절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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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든 찾아와도 좋다. 여기서 말하는 언제란, 형식이나 예의상의 언제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의 ‘언제나’를 의미하니 부디 부담 없이, 그리고 되도록 많이 찾아와 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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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는 나진에게 그렇게 말했고, 상회의 직원들에게도 나진이 오거든 그냥 자신한테 보내라고 명령을 내려놓은 마당이었다. 그 덕에 나진은 별 어려움 없이 최상층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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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무실의 문은 닫혀 있었고, 문 바깥에는 기사 둘이 지키고 서 있었다. 한 명은 늘 보던 디에타의 호위 기사 파시온이었지만, 남은 한 명은 로브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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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위 기사를 새로 하나 들인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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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묘하게 익숙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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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자 그 시선을 알아차린 기사가 약간의 웃음과 함께, 로브를 걷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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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보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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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스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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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날개 기병, 클라우스 아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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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에게 약점이 잡혀 나진을 습격했으나, 지금은 나진의 우군이 되어준 사내였다. 반가운 얼굴이긴 했지만 이 사람이 왜 여기에? 나진의 의문 어린 시선에 클라우스는 닫힌 집무실의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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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아가씨께서 날 고용해 주셨지. 감사하게도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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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가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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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공식적으로 우린 죽은 사람들이라 신분도 마땅찮고, 머물 곳도 마땅찮았는데······ 저 아가씨가 다 준비해 주지 뭔가? 덕분에 편안한 날을 보내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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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의 우군이 되어주기를 약속한 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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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처우는 자신에게 맡겨두고, 당신은 당신이 해야 할 일을 하라고 디에타는 말했더랬다. 과연 그 말대로였다. 나진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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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한 인원의 신분과 숙소를, 그것도 비밀리에 마련해주는 게 쉽지만은 않았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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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화를 튕기며 ‘돈만 있으면 다 된답니다.’ 하고 중얼거리는 디에타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진은 피식 웃곤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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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잘됐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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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네 덕분이지. 아, 그리고 지금 내 이름은 ‘로마노프’ 다. 디에타 상회에 소속된 용병이지. 네가 교단에 검을 겨누기 전까진 로마노프라는 이름으로 살아갈 생각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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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노프 경이라고 불러드리면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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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이란 칭호는 과분하군. 편하게 로마노프라고 불러주면 좋겠어. 경이란 칭호는 내가 푸른 날개 기병의 깃발을 다시 걸 수 있게 됐을 때 붙여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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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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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과 클라우스가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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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웃다가 나진은 문득 떠오른 질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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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로마노프 씨뿐만이 아니라 그때 그분들이 전부 디에타 상회에 소속된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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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셈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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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잠시 속으로 계산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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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날개 기병, 클라우스 아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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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 사냥꾼, 제롤드 오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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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전선에서 군인으로 활동하던 바사우스 말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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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소드 시커급의 강자 셋에 더해, 다수의 소드 엑스퍼트들이 그날 나진의 협력자가 될 것을 약속했다. 그들 전부가 디에타 상회 소속의 용병이 됐다고 가정한다면? 나진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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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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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식적이라곤 하나, 소드 시커급 강자 셋을 용병으로 둔 상회라니. 심지어 상회의 후원을 받는 소드시커가 하나 더 있음을 생각하면··· 이건 일개 상회가 가져도 될만한 수준의 병력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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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파시온을 슬쩍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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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표정 역시 나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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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지에 소드 시커급의 강자 세 분을 부하로 두게 된 내 심정이 어떨 것 같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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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온의 농담 아닌 농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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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무슨 용건이지? 아가씨를 보러 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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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한 번쯤은 제가 찾아가 볼까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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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께서 좋아하시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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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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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아가씨께서 낮잠을 즐기실 시간이라 본래대로라면 손님을 들여선 안 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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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문을 열어주며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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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 너는 예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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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다시 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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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소리를? 네가 왔다가 그냥 떠났다고 아가씨께 말씀드렸다간, 아가씨께 무슨 소리를 들을지 감도 안 잡히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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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어서 들어가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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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말하는 파시온을 지나쳐 나진은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나진이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문은 소리 없이 닫혔다. 파시온의 배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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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시선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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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가, 햇볕이 잘 들어오는 자리. 그곳에 놓인 소파에 디에타가 몸을 기댄 채 잠을 자고 있었다. 햇살에 반짝이는 갈색 머리칼. 어지간히도 피곤했는지 나진이 가까이 다가가도 디에타는 깰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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쌕쌕, 하는 작은 숨소리만 들려올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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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잠시 디에타를 바라보다가 맞은 편에 놓인 의자에 걸터앉았다. 깨울까 했지만, 저리 잘 자고 있는 사람을 깨우기도 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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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의자에 앉아 기다리기를 십오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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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파 옆에 놓인 자명종이 시끄럽게 울어댔다. 그 소리가 들리자마자 디에타는 거의 후려치다시피 자명종을 내리쳤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자명종이 침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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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으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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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기 싫다는 듯, 소파에 얼굴을 파묻은 채 신음하던 디에타는 이내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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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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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이 덜 깼는지 늘어지게 하품하던 디에타와,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나진이 눈을 마주쳤다. 하품하던 자세 그대로 굳은 디에타가 눈을 깜빡였다. 기다란 속눈썹이 커튼처럼 눈동자를 가렸다, 걷히기를 몇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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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억,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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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을 이해한 디에타가 숨을 헛삼킴과 동시에 고개를 휙 돌렸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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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저기 나진? 잠시 벽 좀 보고 있어 줄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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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시선을 벽으로 돌리자, 디에타는 집무실 한구석에 놓인 전신거울 앞으로 달려갔다. 재빨리 옷매무새를 고치고, 부스스한 머리칼을 정돈하고, 가볍게 화장을 고친 디에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다시 소파로 돌아가 다소곳이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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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고개 돌려도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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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깨우지 않은 파시온을 속으로 욕하며, 디에타는 여유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상인이란 어떠한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는 법. 현재 온 대륙에 주목하는 거상답게 디에타의 표정 연기는 완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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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정, 연기는 완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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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완벽한 연기를 새빨갛게 물든 귀와, 꼼지락거리는 손가락이 다 망쳐놓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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