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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4 21:31:5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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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화를 삼키는 뱀, 디에타.

호위 기사 한 명만을 대동한 채 공작가를 뛰쳐나와 불과 5년 만에 캄브리아 제일의 거상이 된 인물.

그녀의 업적은 놀랍긴 하나, 캄브리아 바깥에선 그녀와 그녀의 상회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캄브리아 내에서야 큰 영향력을 가지는 것은 맞나, 그 영향력이 캄브리아 바깥까지 미치는 것은 아니었으니.

불과 1년 전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1년이 지난 지금은 이야기가 좀 다르다.

근 1년간 디에타 상회는 폭발적인 성장을 이뤄냈다. 캄브리아 바깥까지 유통망을 만들었으며, 제국의 중심에 거점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거기에 더해 나진이라는 유명 인물과의 연관성을 과시하며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집중된 이목. 수많은 시선과 관심.

이 상황에 조금이라도 실수한다면 쌓아 올린 것들이 전부 허사로 돌아간다. 그러니 몸을 사릴 법도 하지만, 금화를 삼키는 뱀은 뼛속까지 상인이다. 높은 위험에는 높은 이득이 따른다. 상인으로서의 상식이었다.

그녀는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온 세상이 그녀의 상회를 주목하는 가운데, 디에타는 당당히 무대 위에 올라섰다.

“전부 사들여.”

토벌된 백룡과 적룡의 소재.

그 소재의 최우선 낙찰권을 미리 손에 넣었던 디에타다. 이 순간을 위해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묶어뒀던 금화들. 그 전부를 디에타는 한방에 풀었다. 금화로 이루어진 파도가 경매장을 휩쓸었다.

그간 중앙길드에 달아둔 빚, 숱한 상단들에게 잡아뒀던 약점과 빚들을 그녀는 소재를 입찰하는데 모조리 쏟아부었다. 디에타는 적룡과 백룡의 소재 9할 가까이를 손에 넣는 데 성공했다.

독점이라 부르기에 충분한 매물.

디에타는 용의 소재를 독점했다.

그만큼 출혈이 컸지만, 그녀가 생각하기에 용의 소재는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매물이었다.

드래곤의 소재가 뭔가? 연금술, 마공학, 방어구와 무기를 비롯한 장비 제련을 비롯해 연구 목적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온갖 곳에 쓰이는 상품이다. 그 상품성은 일찍이 증명됐으나 매물이 없어 팔지를 못했을 뿐이다.

그런 매물이 수십 년 만에 풀렸다.

그것도 아서왕의 전설과 연관된 적룡과 백룡의 소재가 말이다. 상품성뿐만이 아니라 사치품으로서의 가치 역시 높았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야.

디에타는 백금화를 손바닥 위에서 굴렸다.

이번 용의 소재는 특별했다. 나진이 토벌한 적룡은 캄란의 마녀의 영향을 받은 특수 개체였고, 소드 시커의 검기조차 견디는 비늘을 가지고 있었다.

안 그래도 가뜩이나 비싼 용의 소재에 그런 특별함까지 붙으니, 이쯤 되면 디에타가 부르는 게 곧 값이었다.

숱한 상단, 공방, 마탑에서······ 그야말로 온갖 곳에서 거래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디에타는 응하지 않았다. 상인은 현물만을 거래하지 않는다. 때로는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더한 가치를 지님을 그녀는 알았다.

상품을 가장 비싼 값에 팔아 치우는 게 상인의 덕목이라면, 디에타는 훌륭한 상인이었다.

“적색 탑에선 저희에게 마탑의 상품들을 싼값에 제공하기로 약속했습니다. 또한 저희에게 가장 우선해서 마탑의 상품을 제공할 것을 조건으로 걸었죠.”

그녀는 자신을 찾아온 상인들에게 미소 지었다.

“도프커 대장간에선 소재로 가공한 상품들을 저희 상회에 제공할 것을, 더 나아가 저희 상회와 제휴를 맺을 것을 약속했어요. 도프커 대장간만이 아니랍니다? 로엔스 공방, 벤델린 연금탑, 월하이트 대장간에서도 비슷한 제안을 보내왔죠.”

“그쪽에선 무슨 조건을 가져오셨나요?”

조건을 가져와라.

그렇지 않으면 거래는 없다.

그녀는 수십 년 만에 풀린 용의 소재를 향해 달려드는 이들끼리 경쟁을 붙였다. 그들이 더 좋은 조건을 부르도록 유도했다. 상인들 사이의 경쟁이 과열되는 가운데 디에타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녀는 어디에도 상품을 팔아치우지 않았다.

그녀가 원하는 손님은 아직 등장하지 않았으니.

이건 미끼일 뿐이다. 더 큰 물고기를 이 판에 끌어들이기 위한 미끼. 디에타는 수면 아래를 유유히 헤엄치는 대어를 노려봤다. 당신 역시 이 물건이 탐날 것이다. 하지만 직접 이 판에 뛰어들긴 싫겠지.

‘격이 떨어진다고 느낄 테니까.

당신과 거래하는 상회. 당신과 연이 닿은 상인들. 그들을 통해 물건을 제공받는 게 당신이 그리는 그림일 것이다. 하지만 이걸 어쩌나?

‘난 팔 생각이 없는데.

가지고 싶다면 당신이 직접 와라.

난 그래야만 거래에 응할 테니. 무얼, 체통을 신경 쓰느라 이 무대에 뛰어들길 꺼리는 당신을 위해 판을 이렇게까지 키웠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

그리고, 찰랑.

“회주님.”

드디어 수면위로 대어가 모습을 드러냈다.

“백금탑에서 손님이 오셨습니다.”

미끼를 물었다. 디에타가 손안에서 굴리던 백금화를 튕겼다. 공중에서 회전하는 백금화를 바라보며 그녀가 미소 지었다.

백금탑(白金塔).

제국에서 가장 거대한 마탑.

그 마탑의 꼭대기에 디에타가 노리는 먹잇감이 있었다. 백금탑의 탑주, 시프리아 가체프스카. 제국에 유통되는 아티팩트의 4할 가까이를 만들어내는 대마법이자 제국의 다섯 기둥 중 일각을 차지하는 인물.

영휘각(永輝角) 시프리아 가체프스카.

그녀가 바로 디에타가 노리는 먹잇감이었다.

금화를 삼키는 뱀은 백금탑을 바라본다.

백금탑과의 연결점을 만들어둔다. 그들과 거래할 창구를 만든다. 그것이 이 모든 계획의 목적이었다. 제국의 수도에 성공적으로 자리 잡기 위해선, 든든한 거래처가 필요했으니.

물고기는 미끼를 물었다.

이젠 낚인 물고기를 구워삶는 일만 남았다. 그리고, 그건 디에타의 전문 분야였다.

콱.

디에타가 튕긴 백금화를 낚아챘다. 한번 손에 쥔 백금화를 그녀는 놓치는 법이 없었다.

나진은 뻐근한 몸을 풀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게, 오랫동안 누워있던 탓에 몸이 굳은 게 분명했다.

‘오래 누워있긴 했네요. 얼마나 있었죠?

-한 달 정도?

그것밖에 안 있었나? 체감상으로는 8개월은 더 누워있던 것 같은데. 나진이 삐걱거리는 제 어깨를 두들기며 지난 한 달을 떠올려봤다.

적룡 토벌로부터 꼬박 한 달 동안 나진은 침대 신세를 져야 했다. 엑스칼리버의 회복력이 있다 한들, 워낙에 심각한 부상이었으니까.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죽어도 열 번은 더 죽었을 만한 부상이라며 치료사들은 혀를 내둘렀지만, 애석하게도 나진은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소드 시커, 두 개의 별, 그리고 엑스칼리버.

이미 인간을 벗어난 회복력을 지닌 나진이다.

치료사들은 못 해도 반년은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나진은 불과 한 달 만에 침대에서 일어났다. 치료사들이 보면 뒷목 잡을만한 일이었지만··· 정작 나진 본인은 그 한 달조차 한없이 길게만 느껴졌다.

-그야 네가 일주일 이상 쉰 적이 없으니까 그렇겠지.

멀린이 한숨을 내뱉었다.

-지하도시를 나온 이후로 네가 뭐 휴식이란 걸 해봤어야지? 무슨 하루라도 수련을 거르면 죽는 사람처럼 틈만 나면 검을 휘둘러댔잖아.

‘그 덕분에 1년도 채 안 돼서 별도 달고, 소드 시커도 됐잖습니까?

-어련하시겠어.

그녀가 못 말리겠다는 양 고개를 가로젓는 가운데, 나진은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벽에 걸린 검을 허리춤에 채우는 나진을 보며 멀린이 한숨을 내쉬었다.

-또 수련하게? 좀 쉬지 그래? 상처가 다 아물지도 않았는데 뭐가 그리 급해?

‘수련하러 가는 거 아닌데요?

-뭐?

나진이 선반을 가리켰다. 그곳엔 과일 바구니를 비롯한 온갖 요깃거리가 놓여있었는데, 모두 디에타가 놓고 간 것이었다.

「오늘은 말이에요? 제국에서 이런저런 일이.」

「나진, 이것 좀 먹어볼래요? 별건 아니고, 오는 길에 보여서 사 왔어요. 가끔은 이런 것도 괜찮죠?」

「심심할까 봐 책도 좀 가져와 봤어요. 이런 거 좋아하죠? 제국을 빛낸 100인의 영웅에 대한······.」

나진이 침대 신세를 진 한 달 동안 디에타는 거의 매일 병문안을 와줬는데, 그 사실에 나진은 감사함을 느끼고 있었다.

“거의 매일 병문안을 와줬잖아요? 한 번쯤은 제가 찾아가는 것도 괜찮을 듯싶어서. 안 그래도 바쁜 사람인데 찾아오는 것도 수고로울 것 아니에요.”

-으응······ 글쎄?

“예?”

-그 애는 그렇게 생각 안 할 것 같은데?

“그게 무슨 뜻입니까?”

멀린은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상하리만치 ‘이런 쪽’으론 가히 파멸적인 눈치를 가진 나진과 달리, 멀린은 소녀의 연심을 몰라볼 정도로 눈치가 없진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몰라보는 게 이상했다.

그 여자애, 널 보는 눈에서 아주 꿀이 뚝뚝 떨어지던데? 손이라도 닿는 날엔 화들짝 놀라 어깨를 떨지 않나, 뭐만 하면 귀까지 새빨갛게 물들이질 않나. 그걸 몰라볼 수가 있나?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멀린은 삼켰다. 왠지 말해주기 싫었으니까. 아끼는 물건을 다른 사람이 멋대로 만지고 있는 것 같은 묘한 불쾌감. 멀린이 뚱한 표정으로 나진을 흘겨봤다.

“뭘 그렇게 째려봐요?”

물론 나진은 멀뚱멀뚱 눈만 깜빡일 뿐이었다.

-이럴 때만 보면 영락없는 애송인데.

“예?”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멀린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도 성장이 빨라 종종 까먹는 사실이지만 눈앞의 소년은 고작 열여덟살이었다. 그것도 지하도시를 벗어나 세상에 나온 지 1년도 채 안 된 애송이.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맺어본 적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으니, 나진이 연애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냐, 네가 찾아가면 좋아하긴 하겠네.

멀린은 어깨를 으쓱였다.

물론 그녀는 연인이니 연애니 하는 하잘데 없는 것들에 시간을 쓰는 게 아깝다고 생각하는 쪽이었지만, 굳이 훼방을 놓을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이 녀석이 어디 백날 찍어봐야 넘어갈 나무던가?

머릿속에는 검, 기사, 별밖에 없는 게 바로 나진이다. 자신이 인도하고 있는 소년이 연애를 하는 모습이 도저히 멀린의 머릿속엔 그려지지 않았다. 그 갈색 머리 소녀에겐 안된 이야기지만, 나진이 그 소녀에게 넘어갈 것 같진 않았다.

방긋.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진 멀린이 미소를 지었다. 자기 혼자 뚱해졌다가, 이젠 실실 웃고 있는 멀린을 바라보며 나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디에타 상회 본부.

수많은 상인과 손님들이 줄지어 순서를 기다리는 가운데, 나진은 그들의 옆을 지나쳐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경비병은 나진을 제지하기는커녕 나진을 알아보고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할 뿐이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 상회의 최상층으로 올라갈 때까지 그 누구도 나진을 막아서지 않았다. 본래 디에타를 만나려면 다소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했지만, 나진에게는 필요하지 않은 절차였다.

언제든 찾아와도 좋다. 여기서 말하는 언제란, 형식이나 예의상의 언제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의 ‘언제나’를 의미하니 부디 부담 없이, 그리고 되도록 많이 찾아와 주길 바란다.

디에타는 나진에게 그렇게 말했고, 상회의 직원들에게도 나진이 오거든 그냥 자신한테 보내라고 명령을 내려놓은 마당이었다. 그 덕에 나진은 별 어려움 없이 최상층에 도착했다.

집무실의 문은 닫혀 있었고, 문 바깥에는 기사 둘이 지키고 서 있었다. 한 명은 늘 보던 디에타의 호위 기사 파시온이었지만, 남은 한 명은 로브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호위 기사를 새로 하나 들인 건가?

그런데, 묘하게 익숙한데.

나진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자 그 시선을 알아차린 기사가 약간의 웃음과 함께, 로브를 걷었다.

“또 보는군?”

“······클라우스 경?”

푸른 날개 기병, 클라우스 아텐.

교단에게 약점이 잡혀 나진을 습격했으나, 지금은 나진의 우군이 되어준 사내였다. 반가운 얼굴이긴 했지만 이 사람이 왜 여기에? 나진의 의문 어린 시선에 클라우스는 닫힌 집무실의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아가씨께서 날 고용해 주셨지. 감사하게도 말야.”

“디에타가 말입니까?”

“그래. 공식적으로 우린 죽은 사람들이라 신분도 마땅찮고, 머물 곳도 마땅찮았는데······ 저 아가씨가 다 준비해 주지 뭔가? 덕분에 편안한 날을 보내고 있지.”

나진의 우군이 되어주기를 약속한 이들.

그들의 처우는 자신에게 맡겨두고, 당신은 당신이 해야 할 일을 하라고 디에타는 말했더랬다. 과연 그 말대로였다. 나진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이만한 인원의 신분과 숙소를, 그것도 비밀리에 마련해주는 게 쉽지만은 않았을텐데?

금화를 튕기며 ‘돈만 있으면 다 된답니다. 하고 중얼거리는 디에타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진은 피식 웃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잘됐군요.”

“다 네 덕분이지. 아, 그리고 지금 내 이름은 ‘로마노프’ 다. 디에타 상회에 소속된 용병이지. 네가 교단에 검을 겨누기 전까진 로마노프라는 이름으로 살아갈 생각이고.”

“로마노프 경이라고 불러드리면 되겠습니까?”

“경이란 칭호는 과분하군. 편하게 로마노프라고 불러주면 좋겠어. 경이란 칭호는 내가 푸른 날개 기병의 깃발을 다시 걸 수 있게 됐을 때 붙여주게.”

“그리하죠.”

나진과 클라우스가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리 웃다가 나진은 문득 떠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럼 로마노프 씨뿐만이 아니라 그때 그분들이 전부 디에타 상회에 소속된 겁니까?”

“그런 셈이지?”

나진이 잠시 속으로 계산해 봤다.

푸른 날개 기병, 클라우스 아텐.

악마 사냥꾼, 제롤드 오톤.

최전선에서 군인으로 활동하던 바사우스 말렉.

위의 소드 시커급의 강자 셋에 더해, 다수의 소드 엑스퍼트들이 그날 나진의 협력자가 될 것을 약속했다. 그들 전부가 디에타 상회 소속의 용병이 됐다고 가정한다면? 나진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허어.”

비공식적이라곤 하나, 소드 시커급 강자 셋을 용병으로 둔 상회라니. 심지어 상회의 후원을 받는 소드시커가 하나 더 있음을 생각하면··· 이건 일개 상회가 가져도 될만한 수준의 병력이 아니었다.

나진이 파시온을 슬쩍 바라봤다.

그의 표정 역시 나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졸지에 소드 시커급의 강자 세 분을 부하로 두게 된 내 심정이 어떨 것 같나?”

파시온의 농담 아닌 농담이었다.

“그래서 무슨 용건이지? 아가씨를 보러 왔나?”

“예. 한 번쯤은 제가 찾아가 볼까 싶어서.”

“아가씨께서 좋아하시겠군.”

그가 미소 지었다.

“지금은 아가씨께서 낮잠을 즐기실 시간이라 본래대로라면 손님을 들여선 안 되지만······.”

그가 문을 열어주며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나진, 너는 예외지.”

“다음에 다시 올까요?”

“무슨 소리를? 네가 왔다가 그냥 떠났다고 아가씨께 말씀드렸다간, 아가씨께 무슨 소리를 들을지 감도 안 잡히는군.”

그러니 어서 들어가 봐라.

그리 말하는 파시온을 지나쳐 나진은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나진이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문은 소리 없이 닫혔다. 파시온의 배려였다.

나진은 시선을 옮겼다.

창가, 햇볕이 잘 들어오는 자리. 그곳에 놓인 소파에 디에타가 몸을 기댄 채 잠을 자고 있었다. 햇살에 반짝이는 갈색 머리칼. 어지간히도 피곤했는지 나진이 가까이 다가가도 디에타는 깰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쌕쌕, 하는 작은 숨소리만 들려올 뿐.

나진은 잠시 디에타를 바라보다가 맞은 편에 놓인 의자에 걸터앉았다. 깨울까 했지만, 저리 잘 자고 있는 사람을 깨우기도 좀 그랬다.

그렇게 의자에 앉아 기다리기를 십오분.

소파 옆에 놓인 자명종이 시끄럽게 울어댔다. 그 소리가 들리자마자 디에타는 거의 후려치다시피 자명종을 내리쳤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자명종이 침묵했다.

“으으응.”

일어나기 싫다는 듯, 소파에 얼굴을 파묻은 채 신음하던 디에타는 이내 몸을 일으켰다.

“하아암······?”

잠이 덜 깼는지 늘어지게 하품하던 디에타와,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나진이 눈을 마주쳤다. 하품하던 자세 그대로 굳은 디에타가 눈을 깜빡였다. 기다란 속눈썹이 커튼처럼 눈동자를 가렸다, 걷히기를 몇차례.

허억, 하고.

상황을 이해한 디에타가 숨을 헛삼킴과 동시에 고개를 휙 돌렸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저, 저기 나진? 잠시 벽 좀 보고 있어 줄래요?”

나진이 시선을 벽으로 돌리자, 디에타는 집무실 한구석에 놓인 전신거울 앞으로 달려갔다. 재빨리 옷매무새를 고치고, 부스스한 머리칼을 정돈하고, 가볍게 화장을 고친 디에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다시 소파로 돌아가 다소곳이 앉았다.

“이제 고개 돌려도 돼요.”

자신을 깨우지 않은 파시온을 속으로 욕하며, 디에타는 여유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상인이란 어떠한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는 법. 현재 온 대륙에 주목하는 거상답게 디에타의 표정 연기는 완벽했다.

······표정, 연기는 완벽했다.

그 완벽한 연기를 새빨갛게 물든 귀와, 꼼지락거리는 손가락이 다 망쳐놓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