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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하늘에 별이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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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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솟구치는 용의 피도, 마지막으로 용이 내뱉는 비명도, 그제야 환호성을 내뱉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한없이 멀게만 느껴졌다. 온몸을 쑤시던 고통도 서서히 옅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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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시간이 느리게 흐르다 못해 멈춘 것만 같은 고요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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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별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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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하늘을 장식한 수많고 수많은 별 사이에서 은은한 빛을 흘리고 있는 별. 다른 누구의 것이 아닌 오직 자신만의 별. 엑스칼리버는 진작에 수납했지만 나진의 눈동자는 백금색으로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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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할게요, 이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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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밤하늘의 가장 높은 곳에 제 별을 걸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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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여정의 시작점에 당신이 있었음을, 당신이 날 바깥으로 내보낸 건 옳은 선택이었음을, 추락했을지언정 당신은 빛을 잃지 않은 기사였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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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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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증명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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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번이고 속으로 떠올렸던 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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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번이고, 몇번이고 속으로 다짐했던 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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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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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들을 떠올리며 나진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하늘을 향해 들어 올린 손을 나진은 쫙 펼쳤다. 나진의 버릇과도 같은 것이었다. 지하도시에서도 천장을 향해 습관처럼 손을 뻗곤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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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때의 손짓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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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손짓은 정반대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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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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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독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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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잣말이었으나, 듣는 사람이 있었기에 그것은 혼잣말이 아니었다. 나진의 곁에 서 있는 멀린은 침묵한 채 나진의 말에 귀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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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나는, 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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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도시. 바깥에선 매립지라 불리는 곳에 파묻힌 쓰레기였다. 별이 보이지 않는 어두컴컴한 곳에서, 천장에 박힌 발광석을 바라보며 별의 빛이 어떤 것일지 상상해 볼 뿐인··· 별과 가장 먼 거리에 있는 인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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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보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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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향해 손을 뻗어도 별은 닿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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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금 이 순간은 다르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드넓게 펼쳐진 밤하늘과 별이 보였다. 하늘을 향해 손을 뻗으면, 그곳에서 빛나고 있는 자신의 별이 잡힐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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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토록 바랐던 자신만의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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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하늘의 중심도, 높은 곳에도 걸려있진 않지만 분명히 저곳에 존재하는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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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바라보며 나진은 웃었다. 수많은 감정이 교차하는 웃음이었다. 하나의 단어로 정리되지 못한 웃음을 머금은 나진에게, 침묵하던 멀린이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더 부드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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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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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나진의 어깨를 손으로 건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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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은 나진보다 키가 살짝 작았기에 팔을 위로 올려야 했고, 그럼에도 실체가 없는 허상이었기에 그 손길은 나진의 어깨에 닿지 않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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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의 감정만큼은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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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한개의 별을 지닌 성좌는, 새로이 별을 얻은 신성(新星)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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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에 두 개의 별이라니, 또 말도 안 되는 일을 저질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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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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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야, 용의 입 안으로 뛰어드는 미친 짓까지 저질렀는데 그럴만하지. 보는 내가 심장이 다 떨어지는 것 같더라. 너처럼 미친놈은 내 시대 때도 보기 드물었는데, 정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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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끝을 흐리던 멀린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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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멋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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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쉬어. 피곤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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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느리게 흐르던 시간은 본래의 속도를 찾았고, 주변을 맴돌던 소음이 사람의 목소리로 뒤바뀌기 시작했다. 나진이 하늘을 향해 뻗었던 팔을 내리며 주변을 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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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호성을 내지르는 기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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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을 떡 벌린 채 경악하는 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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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흘리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로젤린. 그리고, 신성의 탄생을 축복한다는 듯이 박수를 치고 있는 리하르트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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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나 할 것 없이 그들 모두가 나진이 이루어낸 위업에 찬사를 보내고 있었다. 그리해야 마땅한 위업이었으니. 소년은 목숨을 걸고 용에게 도전한 끝내 용살(龍殺)의 위업을 이루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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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달릴 길을 뚫어낸 이들도, 용의 공격을 막아낸 이들 역시 별의 편린을 손에 넣었다. 새로운 별의 탄생과 앞으로 떠오를 별의 편린을 남긴 전장이었다. 환호성 속에서 나진은 엷은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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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리는 손으로 나진은 용의 피가 묻은 검을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마치 아서가 그랬던 것처럼, 나진은 토벌의 종료를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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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아아아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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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층 커진 환호성이 스톤헨지에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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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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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 토벌이 끝난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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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게도 나진은 침대 신세를 져야만 했다. 어째 한번 전투를 할 때마다 이렇게 되는 것 같긴 한데, 이번 싸움에서 입은 부상은 쉽게 치료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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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출(放出), 엑스칼리버의 첫 번째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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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쓰고 나면 원래 그래. 모아놓은 걸 한 번에 다 쏟아붓는 거라, 한번 쏜 다음에는 한동안 출력이 확 떨어지고 축복도 옅어지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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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칼리버의 회복력이 옅어진 것도 한몫하겠지만 평소보다 부상이 심한 까닭이었다. 복합골절에 기괴하게 꺾인 손가락, 그리고 전신화상까지. 사제들이 혀를 내두르며 ‘살아있기는 한 겁니까?’ 하고 물어볼 정도였으니 더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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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죽을 뻔하긴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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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대를 칭칭 감은 채 나진은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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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력이 높음을 감안해도 몇주는 침대에서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들었다. 별을 손에 넣었으니 뭔가 변화가 생길 텐데, 그 변화를 당장 체험해 보지 못해 나진은 내심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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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되는 건 알겠는데, 좀 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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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병상에 드러누워 시간을 보내고 있자니 몇몇 인물들이 병문안을 찾아왔다. 가장 먼저 찾아온 것은 로젤린과 리하르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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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룡 토벌전의 영웅님이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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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하르트는 유쾌한 웃음과 함께, 병문안 선물로 사 들고 온 과일 바구니를 내려뒀다. 로젤린은 침대 한구석에 걸터앉아 나진을 바라보며 큭큭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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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붕대를 감아두니 언데드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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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보면서 비슷한 생각 하긴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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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는데 안 녹아내린 게 더 신기하긴 하지. 용 입속은 어떻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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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주게 뜨겁던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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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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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밖에 없더라고요. 브레스가 어디서 튀어나오나 했더니, 거기서 한 줌 꺼내서 뱉으면 그게 브레스겠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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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캬, 그럼 브레스 속에서 검을 휘둘러 용의 심장을 쪼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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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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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진짜 미친 새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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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젤린이 제 무릎을 탁 치며 과장되게 웃었다. 나진의 말이 과장인지 진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됐든 나진이 용의 아가리 속으로 뛰어들어 심장을 쪼갰단 사실 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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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오직 단 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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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살자(龍殺者), 지크프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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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웅이라 불린 최초의 검성만이 이루어낸 위업을 나진은 재현해 냈다. 머잖아 또 시끄러워지겠군. 그런 생각을 하며 로젤린은 입꼬리를 틀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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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다, 애송··· 아니, 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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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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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덕분에 얻은 게 어디 한둘이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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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젤린이 나진의 앞에 제 손바닥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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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피식 웃으며 리하르트를 힐끗 바라봤다. 고개를 끄덕인 리하르트가 제 손을 쫙 펼쳤다. 마치 무언갈 보여주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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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곤, 반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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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손아귀에서 작은 별이 빛났다. 나진이 눈을 크게 떴다. 리하르트 폴셴은 하나, 로젤린 아스칼로의 손에서는 두 개의 별이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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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나, 리하르트 아저씨나 위업을 좀 쌓아두긴 했는데 이번 싸움이 결정적이었던 모양이야. 새로운 별을 얻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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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첫 번째 별이지. 위험한 전장에 발들이기 싫어서 기사를 때려치웠는데, 이 나이에 별을 얻을 수 있게 될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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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하르트가 어깨를 으쓱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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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덕분이군.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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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할 말입니다. 덕분에 사지 멀쩡한 채로 적룡 앞에 도달 할 수 있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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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지가 멀쩡하진 않았던 것 같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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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고 검 휘두를 수 있음 그게 멀쩡한 것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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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의 대답에 리하르트도, 로젤린도 웃음을 터뜨렸다. 두 사람은 잠시 대화를 나누다가 병실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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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몸 성한 날이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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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음으로 병실을 찾아온 것은 디에타였다. 붕대를 칭칭 감은 나진을 바라보며 디에타가 한숨을 내쉬었다. 왜인지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눈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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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들었어요. 적룡의 입안으로 뛰어들었다면서요? 여기저기서 난리도 아니던데. 스톤헨지의 깨어진 봉인식, 완전히 부활한 두 마리의 용, 마녀의 개입, 용을 삼키고 완전해진 적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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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가져온 신문을 읽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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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용을 죽인 용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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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소 용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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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을 죽이고 한 번에 두 개의 별을 단 모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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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소 이성(二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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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최연소가 붙은 칭호란 칭호는 다 채가고 있는 것 같던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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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별을 얻었다는 게 벌써 알려졌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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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난리도 아니었으니까요. 마녀의 별자리가 나타난 게 천년 만이라던데, 그런 와중에 새로운 별이 떠올랐으니 관측소가 주목할 만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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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측소, 회색탑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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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탑주, 나유타 님이 얼마나 시끄럽게 소리쳐댔는데요? 제국의 관리들이 보고를 올리라는 것도 다 씹고, 당신 별에 이름을 붙여야 한다면서 회색탑의 문을 걸어 잠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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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별에 이름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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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각사각. 과일 바구니에서 사과 하나를 꺼내 깎으며 디에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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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별에 이름을 붙이는 건 회색탑주의 역할이니까요. 자, 여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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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질이 서투른지 울퉁불퉁하게 깎인 사과 조각을 디에타가 나진에게 내밀었다. 나진이 붕대에 감긴 손을 들어 올려 보이자, 디에타는 살짝 머뭇거리더니 나진의 입에 사과 조각을 가져다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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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를 받아먹으며 나진이 질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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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에 이름을 붙인다면··· 이명을 말하는 겁니까? 선별의 검, 아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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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느낌이에요. 몇 개의 후보를 가져오고 그중에서 당신이 마음에 드는 걸 하나 고르는 거죠. 나중에 별을 쌓을수록 이명이 바뀌는 경우도 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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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머릿속으로 성좌들의 이명을 떠올려봤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당연하게도 ‘선별의 검’이라 불리는 아서였고 그다음은 ‘호수의 마법사’ 멀린이었다. 다만 두 사람의 이명은 다소 심심한 느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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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백한 거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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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이 투덜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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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나도 아서도 엄청 화려한 이명 얻을 수 있었어. 진리를 꿰뚫는 마법사니, 하늘을 가르는 검, 별을 떨어트린 지팡이, 종언을 침묵케 한 자, 같은 이명이 후보에 올랐었는데 다 거절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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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성좌명은 담백해야 맛이 살아. 절제미가 있는 거라고. 그리 중얼거리는 멀린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나진이 흐음, 하고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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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기대되긴 하네요. 무슨 이명이 붙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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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붙이는 이명을 끝까지 가져가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까, 그냥 예명 정도로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요? 마음에 안들어도 나중에 바꾸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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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처음이 중요한 거잖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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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사과를 깎으며 디에타가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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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럼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면 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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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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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찾아오신대요. 회색탑주 나유타 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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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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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못 움직이잖아요. 그리고 당신을 회색탑으로 호출하자니, 주변 시선이 신경 쓰인다나? 중간에 잡것들한테 낚아챌 것 같다나 뭐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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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하고 디에타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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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로 오신다던데요? 직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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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에 늘어선 마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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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 하나를 책임지고 있는 책임자가 그렇게 쉽게 움직여도 되는 건가? 뭔가 그럼 안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나진은 질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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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쯤 오신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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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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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할 말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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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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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뒤, 회색탑주 나유타가 나진의 병실에 찾아왔다. 나진은 호위 인력 하나 없이 대뜸 자신을 찾아온 회색탑의 마탑주를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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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호위가 필요 없긴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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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탑주쯤 되면 초월자에 견줄만한 강자가 아니던가. 전투가 아닌 별을 헤아리는 쪽으로 경지에 오른 인물이라곤 하나, 일정 경지에 오르면 수준 차이라는 게 생기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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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벌컥 열고 찾아온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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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탑주 나유타의 첫인상은 다소 음침해 보였다. 정돈하는 것조차 귀찮은지, 한갈래로 대충 묶어 내린 새까만 머리칼. 어딘가 음습해 보이는 눈동자. 그리고 오랫동안 골방 생활을 한 지 피부는 새하얀 걸 넘어서 창백하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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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구나? 네가 나진이구나? 소문은 들었어. 열여덟의 나이에 소드 시커에 오른, 최연소 소드 시커. 네 별을 관측하다 보니 알게 된 건데, 너 명멸의 마녀 에르미나와도 맞부딪쳤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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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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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과 관련한 위업이 많아. 아주 많아. 하나둘이 아니던데? 매번 강자랑 맞부딪쳤더라. 하나하나 살펴보는데 붙은 단어들이 장난 아니야. 위기, 죽음, 부상, 극복, 각성, 발버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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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말을 쏟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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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성명을 채 하기도 전에. 그렇게 한참을 떠들어대던 나유타가 아, 하고 박수를 치며 쓰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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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정신 좀 봐라,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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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나진의 바로 앞에 놓인 의자에 걸터앉았다. 다소 털털해 보이는 움직임이었다. 나진이 예의를 차리려 하니 그녀가 손짓했다. 괜찮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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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회색탑주 나유타야. 별을 관측하고 이름을 붙이는 일을 맡고 있지. 오늘 내가 널 찾아온 건 다름 아니라··· 네 별에 이름을 붙이기 위해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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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품에서 종이를 꺼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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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급스럽기 짝이 없는 종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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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후보를 몇 개 뽑아왔는데, 괜찮은 거 있으면 골라볼래? 무례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이건 좀 구린데?’ 싶으면 바로 말해줘도 돼. 정말로 괜찮아! 설마 내가 ‘당신 작명 센스 좀 구린데요?’ 하는 말 좀 들었다고 내가 네 목을 쳐버리겠니? 그리 쪼잔한 사람이 아니니 걱정하지 말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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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따라가기 힘든 분위기를 가진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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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됐고, 어디 한번 봐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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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과 함께 나진은 종이를 펼쳐봤다. 그곳엔 나유타가 적어 온 이명들이 쓰여 있었다. 후보군만 열 개가 넘어갔는데, 천천히 읽어 내려가던 나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멀린의 표정 또한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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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길을 가르고 용의 심장을 꿰뚫어 죽인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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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이 오거든 뛰어드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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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드래곤 슬레이어(The Dragon Sla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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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좀, 그, 뭐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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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공포를 잊은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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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가르는 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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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데스 슬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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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중간에 눈을 감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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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인지 모르게 몸이 고통스럽고, 손가락이 오그라드는 감각이 느껴졌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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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거창하고 화려하고 구리지 않아? 아니, 뭐 별 다섯개를 넘긴 애들한테 지어줘도 ‘이건 좀.’ 할 것 같은 이명들만 가득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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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 역시 마찬가지인 듯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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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진지하게 회색탑주의 자질을 의심했다. 그래도 초롱초롱 눈을 빛내는 나유타에게 ‘당신 작명 센스가 왜 그 모양이냐?’ 하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나진은 감았던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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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다 읽어보기나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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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시선을 쭉 내리자니, 마지막에 두 줄로 그어진 이명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건 너무 담백하니 별로라는 주석이 달린 이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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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괜찮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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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손가락으로 그 이명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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