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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바깥, 불규칙이 곧 규칙인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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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외륙(外陸)에도 밤은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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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밤, 막사의 바깥에 걸터앉은 나진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낮에는 푸른색과 검은색이 뒤섞여 기괴한 하늘이었지만, 밤이 찾아오자 흑색으로 통일된 하늘은 그럭저럭 평범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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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수백 개나 박혀 있는 것만 빼면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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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륙에선 별이 아주 잘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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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륙에서 하늘을 올려다봤을 때 보이는 것은 큼지막한 별자리들뿐이었다. 유명한 영웅의 별자리 같은 것들. 날씨가 아주 좋고 하늘이 맑아야 작은 별자리를 겨우 관측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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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곳에선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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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륙에서는 아무 때나 하늘을 올려다보아도 수많고 수많은 별자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이름을 날린 영웅들의 별자리는 물론이고, 누구의 것인지 모를 작은 별자리들까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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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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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수 놓인 하늘을 바라보며 나진은 길게 숨을 내뱉었다. 다른 이가 보기엔 나진 혼자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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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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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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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혼자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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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나진의 눈에만 보이는 성좌가 나진의 바로 곁에 앉아있었으므로. 멀린은 푸른 머리칼을 쓸어내리며 다리를 까딱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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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멸의 마녀 에르미나, 강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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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그렇겠지. 그년, 한때는 8서클에 별 다섯개를 가진 초월자였어. 추락했다곤 하지만 그 경험과 지식이 어디로 가는 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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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이 쓰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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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미나가 처음부터 너를 적으로 인식했더라면, 처음부터 너를 죽일 작정으로 상대했다면··· 살아남기 힘들었겠지. 그건 알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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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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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에 에르미나가 펼쳤던 마법, 명멸(明滅)을 마주한 순간 느꼈으니까. 격이 다르다는 것을.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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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잘 싸웠어. 생각한 것 이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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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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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로 만족스러운 표정이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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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후우, 하고 길게 숨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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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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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해서 자만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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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최연소 소드 시커. 제국 전역을 발칵 뒤집은 불세출의 천재. 그 모든 것이 자신을 수식하는 말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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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하고는 있지만··· 그래도, 분명한 강자의 축에 올랐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객관적인 기준에서 봐도 소드 시커쯤되면 강자가 맞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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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외륙은 통상적인 기준에 얽매이지 않는 곳이다. 소드 시커쯤은 ‘따위’로 만들어버릴 강자들이 득실거리는 곳이 외륙이다. 그 사실을 나진은 마녀를 마주한 순간 통감해야만 했다. 멀린에게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경험한 건 다른 문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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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미나 만큼의 강적, 많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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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이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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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에 걸터앉은 멀린이 다리를 까딱이며 하늘을 가리켰다. 그곳엔 수많은 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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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세대의 영웅. 신화시대의 영웅. 그리고, 그들 중 타락해 버린 이들이 많지. 타락뿐일까? 영원을 견딜 육체를 손에 넣었지만 정신이 영원을 견디지 못해 망자(亡者)가 되어버린 이들도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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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년 전에는 영웅이라 불렸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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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가진 채로 외륙을 떠도는 망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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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을 가진 최고위 악마들, 그런 악마들을 부리는 마경의 지배자들, 그 지배자들의 꼭대기에 앉아있는 마왕, 마녀,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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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경에 머무르는 특별한 강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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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한 별. 망가진 별. 캄란과 내통하는 인류의 배반자······ 끝도 없이 많지. 세상에는 영웅들만큼이나 씹새끼들도 많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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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탁에도 있었고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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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중얼거리며 멀린이 나진을 바라봤다. 조금 힘이 없어 보이는 나진의 얼굴에, 멀린은 쿡쿡 웃음을 흘려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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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왜 웃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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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 죽은 모습이 재밌어서. 마녀 앞에서 ‘당신의 천년을 15분간 붙들어두는 데에는 고작 18년의 세월이 필요했을 뿐이다.’ 하고 외쳐대던 놈은 어디로 가고 이런 쭈글이만 남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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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땐 열이 올라서 그런 겁니다. 흥분하면 원래 이런 말 저런 말 다 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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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중얼거리는 나진의 말에, 멀린은 엷은 웃음을 머금은 채 고개를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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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난 딱히 틀린 말이라 생각 안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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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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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것들이야 외륙에 널리고 깔렸지. 초월자이니 마왕이니 악마니··· 어딜 둘러봐도 강한 놈들뿐일 거야. 하지만, 어디 그놈들이 특별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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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이 히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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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륙에 널린 강자들을 ‘따위’로 취급할 수 있는 대마법사의 웃음은 가벼웠다. 가볍게 웃으며 그녀가 나진에게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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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년을, 천년에 가까운 세월을 살고도 ‘고작’ 그 정도인 놈들이야. 정체되고 멈춰버린 놈들이지. 조금도 특별하지 않아. 조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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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나진에게 하는 말인 동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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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 자기 자신에게 하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녀의 시간은 천 년 전에 멈춘 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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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워하지도, 막막하다고 생각하지도 마. 너는 충분히 잘하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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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 위로는 고마운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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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의 말에 귀 기울이던 나진이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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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막막하다고, 두렵다고 생각하진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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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그런 표정이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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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세상엔 괴물 같은 놈들이 참 많구나, 하는 정도지 왜 두려워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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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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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 밟고 올라갈 발판들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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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애 말하는 것 좀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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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겁하는 것처럼 몸을 뒤로 빼면서도 멀린은 웃고 있었다. 나진의 그런 사고방식이 마음에 든다는 것처럼. 그렇게 나진이 막사로 돌아가려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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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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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나진의 막사에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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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음걸이는 가벼웠으나 그 존재마저 가볍지는 않았다. 그 독특한 걸음 소리에 이끌리듯 나진은 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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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깨워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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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忘國)의 소드 마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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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잠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군. 잠깐 시간 괜찮나? 안 괜찮더라도 내어주면 좋겠군. 이래 봬도 내가 조금 바쁜 몸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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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디넬의 마지막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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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호프가 그곳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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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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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의 소드 마스터, 키르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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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디넬이 멸망할 무렵 이미 초월의 경지에 올라가 있었기에, 최소 400년 이상을 살아온 무인. 그리고 그 세월의 태반을 외륙의 전장에서 보내고 있는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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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군이나 왕국군, 연합군에 속한 것은 아니지만 그분께선 언제나 전장에 머무르시지. 그리곤 변수가 발생할 때마다 한걸음에 달려오셔. 그분이 살린 목숨만 해도 뭐··· 세는 게 무의미할 정도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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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대해 질문하자 질레트는 이렇게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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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이라 불릴만한 분이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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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에 머무르는 그 이유조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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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유가 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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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그건 본인에게 듣는 게 좋을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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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이라 불릴만한 분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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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대뜸 제 막사를 찾아온 키르호프를 바라봤다. 그 옷에는 그을음이 가득했으며, 조금 전까지 전장을 떠돌다 온 듯 흙먼지투성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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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미나, 몇 번을 만나도 화끈한 여자더군. 뜨거워 죽는 줄 알았지 뭔가? 이것 보게. 피부가 다 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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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가볍게 웃으며 나진에게 제 팔을 가리켰다. 팔에는 그을음과 화상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얕은 화상의 흔적뿐, 그 이상의 부상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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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일 각오로 덤비는 마녀를 상대로 고작 그 정도의 부상만 입고 돌아왔단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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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는 어떻게 됐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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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처럼 도망치더군. 추격해도 끝이 없어서 그냥 놓아주었지. 난 결착을 보고 싶은데, 언제나 그쪽에서 빼더군. 별을 걸고 싸우긴 싫은 모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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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호프가 어깨를 으쓱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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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걸고 싸우는 게 뭐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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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게 있어. 나중에 설명해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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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과 대화를 나누며 나진은 키르호프를 힐끗 바라봤다. 나이에 영향을 받지 않는 초월자답게, 키르호프는 젊은 청년의 모습이었다. 400년의 무게감이 느껴지진 않는 가벼운 인상의 사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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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시간을 끌어주었다지? 내가 도착할 때까지 말야. 질레트에게 이야기는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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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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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라. 목숨을 걸고 세운 공훈을 너무 가볍게 말하는군. 조금 더 자랑스러워해도 좋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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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호프가 쓰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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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많은 병사들이 살았다. 내가 올 때까지 시간을 끌어준 것에 감사를 표하지. 덕분에 참으로 극적인 상황에 도착할 수 있었고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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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적인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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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키르호프가 어깨를 으쓱이며 나진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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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검, 어땠나? 추락하는 붉은 하늘 아래서 홀로 검을 휘두르는 검사. 얼마나 멋있는 풍경이야? 젠장, 내 주군께서 이 모습을 보셨어야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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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다는 듯 주먹을 불끈 쥐는 키르호프의 모습에 나진은 눈을 깜빡였다. 뭔가, 생각했던 것보다 가벼운 사람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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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하늘을 찢어발기는 일격! 일격 일격이 마녀의 불길을 가르고 열기를 밀어냈다! 음유시인들이 환장할 내용이지. 거기에 내가 좀 잘생겼어야지? 무릇 여인들의 마음을 낚아챌 절호의 기회였는데, 안타깝게도 내 활약을 지켜본 건 너와 몇몇 병사뿐이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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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일장 연설을 늘어놓던 키르호프가 피식 웃었다. 당황스러워하는 나진의 시선을 확인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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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런걸세. 감사 인사 겸 눈도장이나 찍어두러 왔지. 소문이 자자한 최연소 소드 시커께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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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를 알고 계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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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가지고 있다면 모를 수가 없지. 네가 외륙에 발을 디디는 순간, 온갖 별들이 다 네 쪽을 바라보면서 수군댔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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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호프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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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떠오를 신성(新星)에 주목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지. 이미 저 밤하늘에 네 자리가 마련되고 있는 것 같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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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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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모르고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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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눈을 깜빡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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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하늘에 제 자리가 마련된다니? 나진이 눈동자를 미끄러트려 제 옆을 바라봤다. 멀린은 모른 척 나진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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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깜짝 놀라게 해 주려 했지, 하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멀린을 뒤로하고 나진은 키르호프를 바라봤다. 그가 아직 말하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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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위업으로서 칭송받을 업적을 쌓아왔고, 그것들이 결실을 볼 일만 남은 거겠지. 마녀를 상대로 시간을 끈 것도 그 일부일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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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것도 위업이··· 되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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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소리를? 초월자를 상대로, 초월에 이르지 못한 인간이 15분의 시간을 버텼어. 단독으로 별이 되기엔 부족하나 별의 일부가 되기엔 충분한 위업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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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것들이 쌓고 쌓이면 별이 되는 법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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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거대한 하나의 업적만이 별이 되는 건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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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말하며 키르호프가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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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별을 손에 넣길 바라마, 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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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호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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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식을 방해해서 미안하군. 쉬게. 용건은 다 전했고, 오늘은 나도 가봐야 할 곳이 있으니 이 정도에서 파하면 적당하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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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찾아와, 할 말만을 하고 떠나려는 키르호프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나진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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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례가 안 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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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한 게 하나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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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하나를 드려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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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이지. 하나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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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께서 전장에 머무르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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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레트가 ‘본인에게 직접 들어라’ 라고 말했던 것. 그 질문을 던지자 키르호프는 잠시 침묵했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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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걸음을 돌려 나진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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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곤, 허리춤에 채워둔 칼자루를 손등으로 툭툭 두들겼다. 그곳에는 지금은 멸망해 잊혀진 론디넬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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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디넬이란 국가를 알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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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는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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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난 론디넬의 마지막 생존자인 동시에, 론디넬의 마지막 기사이기도 하지. 어쩌면 론디넬의 마지막 검(劍)이기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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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국가, 망국(忘國) 론디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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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디넬의 마지막 기사는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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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나의 고국이 멸망했을지언정, 나의 칼끝에서 론디넬은 살아 숨 쉰다. 그리고 나의 주군, 론디넬의 마지막 국왕께선 론디넬의 검이 인류를 위한 전장에서 빛나기를 소망하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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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한 멋있고, 화려하고, 아름답게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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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말하며 키르호프가 제 망토를 펄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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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전장에 머무르며 검을 휘두르는 것은 주군의 마지막 소원을 이루어드리기 위함이야. 다른 이유도 있긴 하지만, 일단은 그게 첫 번째 이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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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이 됐나? 그렇게 묻는 키르호프의 질문에 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벼운 말투. 가벼운 인상. 그러나 그 검에 담긴 무게는 전혀 가볍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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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다운 이유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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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기사다운 이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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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과 키르호프는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한쪽은 완성된 기사였고, 한쪽은 기사를 꿈꾸는 소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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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또 보도록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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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을 남긴 채 키르호프는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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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사를 떠나며 키르호프는, 그리고 막사의 안에서 나진은 직감했다. 두 사람의 머리에는 동시에 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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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자주 보게 될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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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여러 방향으로 엮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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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직감이었고 어쩌면 확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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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인지 모르게 두 사람은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론디넬’이란 이름을 곱씹던 멀린의 표정이 구겨졌다. 떨어진 별에 의해 멸망한 국가. 그 국가의 멸망에 개입됐던 별자리가 떠올랐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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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론디넬의 멸망에 개입한 별은 총 3개. 그중 하나는 멀린이 아주 잘 알고 있는, 그리고 결코 잊어버릴 수 없는 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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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탁의 배신자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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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이름을 더럽힌, 그리하여 영원히 스스로를 기사라 칭할 수 없게 된 더러운 배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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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슬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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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前) 원탁 최강의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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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탁의 한구석을 차지했던, 한때의 동료를 떠올린 멀린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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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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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륙에서의 일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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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젠, 슬슬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그렇게 내륙으로 돌아가려 하는 나진을 배웅 나온 것은 질레트였다. 본래대로라면 지휘관이 자리를 비우는 것은 안 될 일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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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 한쪽도 날아갔고, 지휘관 자리도 후배에게 물려줬어. 조금 쉬다가 전장에 복귀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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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레트는 그리 말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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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질레트의 안내를 받아 나진은 외륙의 경계선에 가장 가까운 마구간, 최후의 한잔에 도착했다. 마차를 불러놓고 기다리는 동안 나진과 질레트는 가볍게 식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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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 여기 주인이 음식을 잘한다니까. 일단 내륙이라 그런가? 공기부터가 달라. 맛이 좋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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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 말하며 질레트가 술을 홀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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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건 그렇고, 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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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녀의 사건 뒤로 질레트는 나진을 애송이가 아닌 이름으로 불렀다. 나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질레트는 술잔을 내려두며 손가락으로 나진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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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 와이번 잡겠다고 왔었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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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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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다니는 놈을 상대할 연습을 한다고 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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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랬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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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잡으려는 게 뭔데 와이번이나 되는 놈들을 상대로 연습하던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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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질문에 나진은 피식 웃으며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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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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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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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 드래곤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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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답에 잠시 벙쪄있던 질레트는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용, 용이라. 만약 다른 사람이 용을 잡겠다고 말했다면 코웃음 치며 넘어갔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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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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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거로 거짓말을 왜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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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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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의 소년이라면 웃음으로 넘기질 못할 이야기였다. 확실히, 용을 사냥할 거라면 와이번은 연습을 하기에 최적의 사냥감이었을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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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연습은 좀 된 것 같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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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 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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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이 됐다니 다행이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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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마차가 도착했다. 내륙으로 향하는 마차. 자리에서 일어서 마차로 향하는 나진을 바라보다가, 질레트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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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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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뒤를 돌아본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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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레트가 휙, 하고 나진에게 무언갈 던졌다. 반사적으로 낚아챈 나진이 제 손에 들린 것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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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이다. 가져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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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슬부대의 상징, 사슬 말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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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을 떨어트리거든, 우리 사슬부대의 사슬이 참 쓸만했다고 소문 좀 내주면 좋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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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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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피식 웃으며 마차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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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용을 떨어트리러 갈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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