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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멸(明滅)의 마녀 에르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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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 일천년의 세월을 살아온, 신화시대의 마녀에 대해 알려진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마왕군에 투신했다는 것. 인류를 불태우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았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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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7 서클의 마법사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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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적으로 7 서클의 마법사는 초월에 한없이 근접했으나, 초월에 이르지 못한 존재로 취급되곤 한다. 초월자와 그렇지 못한 이 사이에 놓인 간극은 결코 무시할 수 없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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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누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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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에 이른 초월자들조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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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멸의 마녀, 에르미나를 가리켜 초월에 이르지 못한 범인(凡人)이라 평가하지 않았다. 명멸의 마녀의 손에 떨어진 별자리들이 그녀의 강함을 증거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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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당초 이미 초월을 경험한 마법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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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클을 모조리 박살 내긴 했지만, 마법을 다루는 감각과 지식마저 잊어버리는 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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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서클을 복구했는지 모르겠지만, 하고 멀린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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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눈앞에 있는 건 초월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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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이 단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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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서클, 초월에 이른 마법을 다루지 못할 뿐 네 눈앞에 있는 것은 분명한 초월자라고. 소드 마스터와 다를 것 없는 초인(超人)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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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초월에 이른 마녀는 짜증 날 정도로 성가셔. 말했지? 마녀는 종족 단위로 사기를 치고 있는 또라이들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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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하늘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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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는 일곱 개의 원이 떠 있었고, 회전하는 일곱 개의 원이 만들어낸 화염은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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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경험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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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네가 서야 할 전장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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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가 손짓했다. 새하얀 손가락이 허공을 할퀴었다. 평범한 인간의 손짓은 눈앞의 공기를 가를 뿐이지만, 초월자의 손짓은 풍경을 가르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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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서클 주문, 화마(火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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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 웽웽대는 날벌레를 치우듯이 마녀는 가볍게 손짓했을 뿐이지만, 그녀의 손끝에서 물결치는 화염은 생각이 조금 달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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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염이 파도쳤다. 불길이 물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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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뻘건 불길이 전장을 휩쓸었다. 5 서클의 마법만 돼도 공성 마법이라 불린다던데, 그 위의 마법은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언젠가 품었던 궁금증을 나진은 지금 이 순간 해소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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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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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그마치 수십미터에 이르는 불의 파도가 밀려들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불길이 퇴각하는 병사들을 노리지 않는단 점이었고, 최악인 점은 그 불길이 정확하게 나진을 노린단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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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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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땅을 박차고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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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길의 파도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나진을 추격해 왔다. 땅이 타들어 간다. 바위가 녹아내린다. 불길이 지나간 곳에는 그을음조차 남지 않았다. 불타 재로 바스러지거나 흔적도 없이 녹아내릴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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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히는 순간 죽는다. 닿는 순간 육체 강화고 나발이고 녹아내린다. 나진은 그리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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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나진은 벽을 박차고 전력으로 질주했다. 화마(火魔)는 광범위한 영역을 쓸어버리기 위한 주문이었기에, 전력을 다해 질주한다면 그 영역에서 벗어날 수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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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건 ‘깔아두는’ 마법일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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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당연하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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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다. 준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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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실을 마녀가 모를 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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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을 박차고 달리던 나진이 검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시야는 앞에 고정돼 있지만 감각으로 느꼈으니까. 자신의 머리 위에서 소용돌이치는 마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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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서클 주문, 작열 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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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서클 주문, 화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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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마법이 아니다. 두 개의 마법이 중첩되어서 시전됐다. 일곱 갈래의 작열 광선이, 일곱 개의 화염구가 나진을 향해 쏘아졌다. 벽을 박차고 달리던 나진은 보지도 않은 채 검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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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드 시커의 경지에 오르면서 나진의 감각은 더욱 날카로워졌으며, 꼭 두 눈으로 보지 않더라도 소용돌이치는 마나가 ‘어느 곳’으로 향할지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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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이이이이이이이이이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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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의 두개골을 꿰뚫으려던 작열 광선이 나진의 검에 가로막혔다. 광선이 두 갈래로 쪼개지며 나진의 양옆을 긋고 지나갔다. 녹아내린 절벽을 보며 나진은 혀를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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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스치기만 해도 골로 가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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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작열 광선이 일곱 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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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겨우 한 발을 쳐냈을 뿐이다. 이리저리 휘며 달라붙는 작열 광선을 느끼며 나진은 혀를 찼다. 그러나, 막아야 할 것은 열선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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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아아아아아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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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땅을 박참과 동시에, 나진이 방금까지 서 있던 곳에 화염구가 착탄 했다. 지름 3m짜리의 화염구가 착탄 한 곳은 움푹 파였고, 폭발에 휩쓸린 돌조각들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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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화염구는 한 발로 그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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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염구가 나진이 서 있던 곳, 발을 디딜 곳, 도망칠 곳을 향해 동시에 날아들었다. 조금이라도 망설이거나 빈틈을 보이는 순간 추격해 온 작열 광선에 몸이 꿰뚫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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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아예 크게 도약해 도망친다면? 절벽을 박차고 땅에 발을 내디딘다면? 저 바닥에서 입을 벌리고, 자신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7 서클 주문 화마(火魔)에 집어삼켜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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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마법사들의 전투법인가. 사방에 그물을 펼쳐놓고 발을 디딜 곳을 줄여가며 궁지에 몰아넣는 것. 정말이지 까다롭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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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에 선택하란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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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이를 악물었다. 발을 디딜 틈이 없다? 도망칠 곳이 없다? 그럼, 만들면 그만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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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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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을 박차고 나진은 정면으로 돌진했다. 떨어지는 화염구를 회피할 생각을 하지 않은 채, 나진은 화염구의 궤적에 제 몸을 들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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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아아아아아아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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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음과 함께 화염구가 나진에게 착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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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길과 함께 흙먼지가 솟구쳤다. 그러나 이윽고 흙먼지를 가르며 나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착탄의 순간 검을 휘둘러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인 채 빠져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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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무사하진 못했다. 몸에는 그을음이 남았으며, 검을 쥔 손바닥이 녹아내려 칼자루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저 나진은 선택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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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를 최소화하고 살아남을 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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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염을 걷어내며 빠져나온 나진이 숨을 몰아쉬며 눈을 부릅떴다. 혈관을 타고 피가 빠르게 흘렀다. 육신이 한계를 넘어 가속했다. 절벽을 미끄러지듯 달리며 나진이 검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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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자리를 휘감은 검이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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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색의 궤적을 그리며 화염구를 가르고, 작열 광선을 쪼갠다. 벽을 박차고 내달리며 나진은 마녀의 주문을 하나하나 받아쳐 냈다. 얼핏 보면 마녀를 상대로 잘 버티고 있는 것 같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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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휘두르는 나진은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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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부턴가 마녀의 시선이 ‘자신’을 쫓아오고 있음을. 자신을 단지 성가신 날벌레가 아닌, 꿰뚫어 죽일 존재로 인식하고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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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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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손으로는 나진을, 왼손으로는 사슬 부대를 상대하던 마녀의 손끝이 정지했다. 한순간의 정적. 시간으로 따지자면 고작 1초의 시간. 멈춘 시간이 다시 움직인 것은 마녀의 두손이 교차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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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의 왼손과 오른손이 맞부딪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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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악, 하는 박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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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을 깨는 소리가 나진의 고막을 울린 순간이다. 들끓던 화마도, 나진을 추격하던 마법들도, 그 모든 게 한순간에 흩어졌다. 하지만 그것이 소멸을 의미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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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더 효율적으로 쓰이기 위함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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흩어졌던 화염들이 쪼개지고, 갈라지고, 분해되어 재조립됐다. 그 모든 과정은 1초도 되지 않는 시간 사이에 이루어졌다. 만일 이 자리에 마법사가 있었더라면, 그리하여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면 제 두 눈을 의심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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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완성되어 쏘아진 주문. 그런 주문을 지금 저 마녀는 분해하고, 재구성해 완전히 새로운 주문으로 변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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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적으로 불가능하며, 규칙에 어긋나고, 상식을 비웃는 행위다. 이는 제국의 대마법사인 영휘각 시프리아 가체프스카에게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일을 마녀란 존재는 너무나도 쉽게 벌이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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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에게 사랑받는 종족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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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칙을 어길 권리를 세계에게 부여받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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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초도 채 안 되는 시간에 재구성된 주문. 7 서클의 주문을 일곱 갈래로 쪼개고, 쪼개진 주문을 다시 일곱 갈래로, 일곱을 다시 일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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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수천에 이르는 화염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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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순간에 제 시야를 가득 메운 불로 빚어낸 화살을 마주한 순간 나진은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마녀의 주목을 받는다는 것. 마녀가 자신을 적으로 인식했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나진은 통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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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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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에 이르는 화살이 나진에게 쏘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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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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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피할 곳은 없다. 조금의 빈틈도 없이 사방에서 덮쳐드는 화살을 피할 수 있을 리가. 그렇다면 지금 나진에게 남은 선택지는 하나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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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눈을 부릅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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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동자에 핏발이 서고 시야가 넓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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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에서 밀려드는 불의 화살을 시야에 담은 채 나진이 검을 움켜쥐었다. 그리곤, 검을 휘둘렀다.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회피할 수도 막아낼 수단도 없다면 쳐낼 수 있는 데까지 쳐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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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나진이 선택한 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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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한번 휘두를 때마다 열댓 개의 화살이 갈라졌다. 주문을 쪼개고 쪼개 만들어낸 만큼 한 발 한 발의 위력은 보잘것없었다. 문제는 그 숫자다. 한 번의 휘두름으로 열 개의 화살을 베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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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바바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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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친 세발의 화살이 나진의 몸에 박혔다. 피부가 타들어 간다. 작열통이 뇌리를 뒤흔들었으나 나진은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둘렀다. 계속해서 화살을 쳐내지만 쳐내지 못한 것들이 나진의 몸을 꿰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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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그마치 천 발이 넘어가는 화살이다. 화살을 쳐내는 게 아니라, 거대한 파도 앞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다는 착각마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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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 앞에 한낱 인간은 무력하다. 무력하지만, 그렇다 하여 파도에 휩쓸릴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검을 휘두르며 나진은 끊임없이 생각했다. 검의 궤적을 수정했으며 조금 더 빠르고 간결한 움직임을 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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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걱, 그리고 투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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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화살이 잘려 나갔고, 수많은 화살이 나진의 몸에 틀어박혔다. 급소만을 보호한 채 나진은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기어코 파도를 베어버리겠다는 양 나진은 물러서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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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빠르게, 더 간결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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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의 시간이 흘렀지? 일초? 십초? 알 수 없었다. 단지 검을 휘두르는 데 나진은 몰입했다. 이미 한계까지 간소화했다고 생각했으나, 조금 더 줄일 수 있는 움직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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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어낼 수 있는 것은 모조리 덜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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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함으로 한 번 더 검을 휘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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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휘두를 때마다 흐드러지는 별자리가 잔상처럼 남아, 나진의 주위에는 마치 별이 가득한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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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서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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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크게 검을 휘둘렀다. 마지막 파도가 갈라지며 나진의 시야가 탁 트였다. 나진은 참고 있던 숨을 몰아쉬었다. 천 발에 이르는 화염살을 기어코 버텨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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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욱, 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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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멀쩡하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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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의 온몸에는 화살이 꽂혀있었다. 그 숫자만 해도 수십 발에 이른다. 팔과 다리는 물론이고, 어깨, 쇄골, 복부, 갈비뼈··· 급소만을 피했다 뿐이지 고슴도치나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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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아내린 피부. 그을음이 가득한 살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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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눈동자만큼은 뚜렷하다. 나진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전투가 시작된 아래 마녀의 표정에 처음으로 변화가 생겼다. 눈살을 찌푸린 채 그녀는 나진을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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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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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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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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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미나는 나진을 노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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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눈동자에는 불쾌함이, 경멸이, 짜증이 서려 있었다. 그녀의 시선을 받으며 나진은 히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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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좀 관심을 가져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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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워버려야 할 벌레. 고작 그 정도로 자신을 인식했을 마녀가, 이제는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걸고 있다. 그 사실에 나진은 웃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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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놈이구나. 미친놈이 한둘이 아닌 세상이긴 한데, 넌 독보적이네. 이상해. 분명 처음 보는 인간일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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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미나가 조금 더 눈살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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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해. 뭔가 익숙하단 말야. 너 뭐야? 날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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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지, 미친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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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답하지 않았지만 멀린은 답했다. 나진의 곁에 서 있는 멀린이 입가를 틀어 올린 채 히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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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서클을 잘게 밟아 다져버린 지가 엊그제 같은데, 어떻게 또 기어 올라왔네. 하여간, 재능빨로 먹고 사는 새끼들 같으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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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이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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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미나의 어깻죽지부터, 종아리까지 이어진 흉터를 가리키며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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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심장을 뚫어버려야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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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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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쿵, 땅을 강하게 짓밟으며 검을 휘둘렀다. 물론, 당연하게도 하늘에 떠 있는 마녀에게 칼끝이 닿을 리는 없다. 검기를 아무리 길게 늘어트려도 닿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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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진은 보았다. 검기 없이도 저 멀리 떨어진 대상을 베어 가르는 소드 마스터들의 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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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론의 검을 보았고, 유엘의 검을 보았으며, 게르드의 검을 보았다. 그 움직임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나진은 검을 휘둘렀다. 본래대로라면 흉내 내려 한다고 흉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결코 따라 하지 못할 움직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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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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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劍)에 몰입한 채,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둘러 한계까지 감각이 날카로워진 지금이기에, 나진은 아주 조금이지만 그 움직임을 흉내 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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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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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의 어깻죽지에서 종아리에 이르기까지, 일천년 전 멀린이 새겨넣었던 흉터를 따라 가느다란 실선이 그어졌다. 물론 그 위력은 보잘것없다. 칼끝으로 살짝 스친 듯한 위력에 불과했으며, 그마저도 마녀가 두른 화염에 가로막혀 불길이 일렁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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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드 마스터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일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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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분명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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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의 검은 마녀에게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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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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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미나가 제 어깻죽지를 매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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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천년 전 괴물과도 같은 마법사가 제 몸에 새겨넣었던 흉터. 그 흉터를 따라 검을 휘두른 검사를 바라보며, 에르미나가 입을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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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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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어진 입가에 맺힌 것은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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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광소였다. 에르미나는 제 얼굴을 쓸어내리며 미친 듯이 웃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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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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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곤, 뚜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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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데없이 웃음이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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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게는 못 죽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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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몸에 새겨진 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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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은 에르미나의 역린이었으며, 여태껏 그녀의 역린을 건드리고 살아남은 인간은 없었다. 에르미나가 따악, 하고 손가락을 튕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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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의 등 뒤로 여덟 번째 서클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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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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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번째 서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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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상징과도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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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미나의 등 뒤로 떠오른 여덟 번째 서클은 그을음이 남아있었으며, 금이 가 있었고, 어느 부분은 아예 쪼개져 있었다. 요컨대 서클로서 기능하지 못하는 불량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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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천년 전, 멀린에게 박살 난 서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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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그마치 천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에르미나는 여덟 번째 서클만큼은 복구하지 못했다. 멀린은 에르미나의 본질을 비틀었고, 그녀의 신비를 짓밟아 바스러트렸다. 그렇기에 에르미나는 결코 완벽해질 수 없었다. 불완전함을 간직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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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화(昇華)에 이르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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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초월에 닿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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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녀는 이미 초월을 경험한 대마법사였고, 모든 것을 잃고서도 다시 처음부터 쌓아 올려 초월에 한없이 근접했다. 그렇기에 그녀는 초월을 모방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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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별이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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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미나가 가진 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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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디 그녀가 가졌던 다섯개의 별 중, 네 개는 멀린에 의해 바스러졌다. 남은 것은 하나의 별. 그 하나의 별이 에르미나의 여덟 번째 서클을 비추었다. 이것이 에르미나가 찾아낸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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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살 난 부분을, 금이 간 부분을 별빛이 대체한다. 그렇게 그녀가 잃어버렸던 여덟 번째 서클은 일시적으로 기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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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누구인지, 뭐 하는 놈인진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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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미나의 붉은 눈동자가 소용돌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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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째로 태워줄게, 건방진 애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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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서클 주문, 명멸(明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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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요동쳤다. 거대한 마나의 격류가 그녀를 중심으로 휘몰아쳤다. 별빛마저 불사지르는 마녀의 불길이 나진을 겨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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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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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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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가를 틀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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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풍경을 반으로 쪼개며 누군가 전장에 개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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