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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魔女), 신비로부터 태어난 종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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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보기엔 평범한 인간과 다를 바 없으나 그들이 마녀라는 특수한 종(種)으로 분류된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인간을 닮았지만 마녀들은 본질적으로 인간과는 달랐으니까. 다만, 그들이 처음부터 마녀라 불리던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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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에게 사랑받는 종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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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로부터 태어난, 신비 그 자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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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을 부릴 권리를 세계에게 인정받은 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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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의 신비를 가진 마녀가 나타나기 전까지 그들을 가리키던 문장들. 언젠가 멀린이 중얼거렸던 말들을 곱씹으며 나진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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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마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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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길을 연상케 하는 붉은 머리칼. 붉은 눈동자. 그을음이 남은 새하얀 피부. 불길을 떠올리게 하는 여인은 지팡이에 걸터앉은 채 하늘을 부유하고 있었다. 그녀는 다만 무표정했고, 무표정하게 사람을 불태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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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길이 만들어낸 열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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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기에 일렁이는 아지랑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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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로 사위어 흩날리는 인간이었던 것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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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든 게 마치 마녀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불길이 인간의 형태를 얻으면 저런 느낌일까? 나진의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갈 무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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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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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늘한 목소리. 나진의 귓가에 멀린의 서늘한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옆을 돌아보면 멀린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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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건 네가 상대할 만한 수준의 적이 아니야. 도망쳐. 뒤도 돌아보지 말고 뛰어. 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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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급할수록 목소리가 차가워지고 차분해지는 이들이 있다. 멀린 역시 그런 부류였고, 지금 멀린의 목소리는 여태껏 나진이 들었던 멀린의 목소리 중 가장 낮은 온도를 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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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멸의 마녀, 에르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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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년 전에 이미 8서클, 대마법사의 경지에 올랐던 마녀야. 분명 내가 서클과 별을 죄다 박살 내놨던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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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이 혀를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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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에게 사랑 받는 또라이들답게 방법을 찾아낸 모양이지. 최악이야. 도망쳐 빨리. 다음 마법이 오기까진 시간이 남아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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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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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이 이유 없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인물이 아니라는 걸 나진은 잘 알고 있었다. 나진은 멀린을 신뢰했고, 신뢰한 만큼 빠르게 결단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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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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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곧장 고개를 돌렸고 걸음을 돌렸다. 퇴각하는 병사들을 따라 도주할 준비를 마쳤다. 그렇게 걸음을 내딛으려다 문득 나진은 제 옆을 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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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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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엔 침묵하고 있는 질레트가 있었다. 질레트는 제자리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은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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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레트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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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신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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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가십니까? 퇴각하라고 명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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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 싶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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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레트가 쓰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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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남아서 시간을 벌어야지 않겠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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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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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면 전멸이거든. 저 잘나신 마녀님이 손가락 한번 까딱할 때마다 분대 단위로 쓸려나갈 텐데, 꽁무니 빠지게 도망쳐봐야 별 의미가 없지. 잘 알아. 몇 번 당해봤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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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레트 레긴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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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세월 전장에서 살아온 군인답게 그는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종종 경험했고, 그때마다 제 상관이나 선배들이 어떤 식으로 행동하는지 봐 왔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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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내 차례가 왔다, 이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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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들이, 상관들이 그러했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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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자신의 차례가 왔다. 그저 그뿐인 이야기였다. 빌어먹을. 전역을 지금 하게 생겼군. 질레트가 한숨을 내쉬며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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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들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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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레트가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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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에게 들으라고 외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지시를 따르는 와이번 사냥 부대에게 전하는 외침이었다. 그가 챠르륵, 소리를 내며 사슬을 늘어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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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우리 부대는 영멸의 마녀, 에르미나의 시선을 끈다. 접근하지 마라. 요격할 생각은 버려라. 철저하게 시선을, 그리고 시간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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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당초 이길 수 없는 상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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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하다못해 시간을 끌어라. 아군이 퇴각하고 지원군을 불러올 때까지 저 마녀의 옷깃을 붙잡고 늘어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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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호프 경께서 전장에 걸음 하기까지 우리 부대는 저 마녀를 붙들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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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가 비대칭전력을 꺼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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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아군의 비대칭전력이 전장에 도착할 때까지 누군가는 시간을 끌어야 했다. 그 역할을 우리 부대가 맡게 됐노라고 질레트는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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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지시를 따르는 병사들. 와이번 사냥 부대의 병사들은 결연한 표정으로 질레트의 곁에 바로 섰다. 챠르륵, 소리를 내며 병사들은 자신들이 자랑하는 사슬 말뚝을 늘어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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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신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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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레트가 연초를 꼬나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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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을 붙일 필요는 없었다. 사방에 흩날리는 잿가루에 연초 끝을 가져다 대는 것만으로 연초에 불이 붙었으니까. 그가 연초를 태우며 나진을 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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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봐라. 지난 일주일간 수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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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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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지원을 온 용병일 뿐, 이 전장에 목숨을 걸 의무도 책임도 없었다. 그렇기에 질레트는 나진에게 어서 도망치라고 손을 휘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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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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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침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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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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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의 재촉. 타오르는 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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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질레트를 필두로 한 죽음을 각오한 병사들. 그와 반대로 도망치는 병사들. 메아리치는 비명소리와 연신 퇴각을 외쳐대는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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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각, 퇴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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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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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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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흐름에 나진은 떠밀렸다. 아직 나진은 초월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고, 전장에서 나진이란 단지 거대한 흐름에 휩쓸리는 일개 개인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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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하늘에 떠 있는 마녀와는 다르다. 지금의 나진은 저 마녀처럼 전장을 지배하지도, 흐름을 휘어잡는 거대한 존재감을 지니지도 못했다. 최연소 소드 시커. 위대한 업적이지만 전장에서의 나진이란 인간은 뛰어난 병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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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소드 시커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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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에 오른 마스터들의 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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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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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웅, 하고 나진이 걸음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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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각을 외치며 후퇴하는 병사들 사이에서 나진은 균형을 잡았다.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땅에 발을 디딘 채 자리를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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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는 게 옳다는 것도, 상대가 안 된다는 것도, 승산이 없는 싸움이란 것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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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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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도망칠 거냐고 묻는다면,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나진은 쉽게 입에 담을 수 없었다. 강적을 만나면 무조건 도망칠 것인가? 승산이 없다고 도주하고, 도망쳐 물러설 것인가?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를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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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건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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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야 의미가 없다. 그런 이를 세상의 그 누가 영웅이라 부르겠는가. 대영웅 아서는 어느 전장에서도 도망친 적이 없다. 아서는 언제나 최선을 다해 발버둥 쳤고, 저항했으며, 처절할 정도로 망가지고서도 기어코 승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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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아서는 대영웅이라 불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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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되고 싶은 건 그런 대영웅이었지, 제 살길 찾아 도망가며 끈질기게 살아남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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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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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은 더는 나진에게 도망치라고 외치지 않았다. 나진의 독백이, 감정이 흘러들어왔으니까. 그녀가 침묵한 가운데 나진이 속으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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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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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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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끈다는 걸 전제로 덤빈다면, 어떻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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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마녀를 이기지 못한다는 건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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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건 결투가 아닌 전쟁이었다. 상대를 쓰러트리는 것만이 승리하는 방법이 아니란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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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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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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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추천하지 않아. 너무 위험해. 죽을 가능성이 높아. 알고 있어? 상대는 마녀야. 내가 활동했던 시대부터 살아온 마녀(魔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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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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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있는데도 굳이 싸우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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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침묵함으로써 긍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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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은 환장하겠다는 듯 제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왜 인지, 이런 상황이 익숙하다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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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나 너나,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건 똑같네. 하긴 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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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말을 그녀는 내뱉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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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탄은 그쯤 하면 충분하다는 듯 그녀가 숨을 고르고 나진을 바라봤다. 차분히 가라앉은 눈동자로 나진을 바라보며 그녀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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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은 네 몫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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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무엇을 선택하던, 그 선택에 따른 최선의 길을 찾아내는 게 내 몫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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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하고 싶은 대로 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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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이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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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지는 않게 도와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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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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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운 줄 알면 잘해,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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툴툴거리면서도 멀린은 마녀를 상대하는 법을 입에 담기 시작했다. 숱한 마녀들의 서클을 박살 내고, 그들의 신비를 바스러트린 대마법사의 조언. 그녀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나진은 내디뎠던 발을 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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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각하는 병사들이 만들어내는 흐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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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흐름을 거슬러 나진은 마녀가 있는 쪽을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 아직은 흐름을 뒤바꿀 만큼의 강자가 되진 못했지만, 흐름을 거스를 정도는 된다고 이야기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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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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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레트 레긴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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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에서 수십 년을 살아남은 군인이자, 소드 시커급의 경지에 오른 강자. 그는 자신이 속한 ‘와이번 사냥 부대’라 불리는 사슬부대의 지휘관들이 썩 좋지 못한 최후를 맞이했음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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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그럴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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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슬부대는 뛰어난 병사들이 모이는 곳이었고 유격대로써 활용되는 부대였다. 그리고 유격대가 으레 그렇듯, 사슬부대는 와이번 사냥뿐만이 아니라 변수가 발생했을 때 즉각 대응하는 역할을 맡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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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바로 지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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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레트는 연초를 태우며 표정을 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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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리지도 않는군, 정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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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드 시커는 분명한 강자다. 하지만 이 빌어먹을 외륙(外陸)에 머물다 보면, 소드 시커란 생각보다 별 대단한 존재가 아니란 사실을 싫어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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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세대의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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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년을 살아온 괴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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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을 치는 별자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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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신화시대에나 나올법한 강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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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것들이 득실대며 심심찮게 모습을 드러내는 게 이 외륙이란 곳이었다. 당장 저 하늘에 떠 있는 마녀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저런 거대한 존재들 앞에서 소드 시커란 한없이 작은 존재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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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작은 존재라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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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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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잘나신 괴물들의 시선을 끄는 것 정도는 가능하다. 질레트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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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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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멸의 마녀, 에르미나가 새로운 주문을 터뜨리려는 순간이다. 질레트를 필두로 한 사슬부대가 허공을 향해 사슬을 투척했다. 전장의 벽에 사슬을 박아 넣고 공중으로 도약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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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는 눈살을 찌푸리곤 손을 가벼이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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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손끝을 따라 불길이 너울 친다. 거대한 화염이 사슬을 녹여버리고, 공중으로 도약한 병사들을 집어삼켰다. 몇몇은 새까만 잿더미가 되어 떨어지지만 끝내 몇몇은 허공으로 뛰어오르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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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의 손짓을 허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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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가 한번 손짓할 때마다 적게는 수십, 많게는 수백의 병사가 쓸려나감을 감안했을 때 이는 나쁘지 않은 교환비다. 그렇게, 질레트는 생각해야만 했다. 전장에서 견디려면 이런 식의 사고가 필요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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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글, 하고 질레트도 사슬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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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하들에게만 희생을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그 역시 이미 죽음을 각오했으니. 절벽에 사슬을 걸고 고속으로 이동하며 마녀의 시선을 끌고, 그녀의 손짓을 유도하는 병사들. 그들의 사이에 질레트는 끼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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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의 실수가 곧 죽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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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실수하지 않더라도, 죽음은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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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하다못해 발버둥 쳐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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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불길이 절벽을 휩쓸었다. 벽이 녹아내리고 뜨겁게 달궈진 진흙처럼 물렁해졌다. 아슬아슬하게 불길을 피해낸 질레트는 헛웃음을 흘렸다. 하여간 괴물 같은 마법사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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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을 상대하는 건 같은 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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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호프 경께서 오신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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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괴물 같은 사내가 전장에 도착한다면, 흐름은 다시 뒤바뀔 것이다. 그때까지 발버둥을 쳐주마. 그리 생각하며 질레트는 절벽을 박차고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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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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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끈한 열기가 일대를 휩쓸 때마다, 함께 전장을 질주했던 병사들이 한둘씩 잿더미가 되어 바스러진다. 마녀에게서 몇 초의 시간을 붙들기 위해선, 한명의 목숨이 바스러져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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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레트는 벽을 박찼다. 박차고 또 박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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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에게도 끝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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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슬을 걸고 달리던 질레트는 문득 마녀와 시선을 마주했다. 마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흉흉한 붉은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질레트는 죽음을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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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서클 주문, 작열 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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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의 주변에 떠오른 붉은 화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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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축된 화염에서 압축된 열선이 쏘아졌다. 열선은 하나가 아니었다. 마녀에게 있어 서클의 수는 곧 동시에 영창 할 수 있는 주문의 수를 의미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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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이이이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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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개의 열선이 질레트에게 쏘아졌다. 피할 수 없다. 회피가 불가능하다. 찰나를 쪼개며 접근하는 열선의 앞에 그가 죽음을 직감한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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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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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레트는 등 뒤에서 무언가 터지는 소리를 들었다. 아니, 터지는 소리가 아니었다. 누군가 벽을 박차고 접근하는 소리였다. 등 뒤에서 무언가 접근했다. 짓쳐 드는 작열 광선보다 조금 더 빠른 속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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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곤 번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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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레트는 제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빛을 보았다. 그것은 백색과 금색으로 이루어진 별자리다. 하늘에 떠 있어야 할 별자리가 왜 눈앞에 있는가? 뒤늦게 질레트는 그것이 누군가의 검기임을, 누군가 제 목덜미를 잡아당기며 검을 휘둘렀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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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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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기와 열선이 맞부딪쳤다. 불똥이 튀어 오르고 검기의 편린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목덜미를 붙잡혀 뒤로 던져진 질레트는, 그제야 검기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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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소 소드 시커, 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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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각하던 군대 사이에 섞여 도망쳤을 소년이 다시금 전장에 발을 디딘 것이다. 나진이 이를 악물고 검을 크게 휘둘렀다. 일곱갈래의 열선 중 기어코 세갈래를 쳐내고, 나진은 자리를 이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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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이이이이이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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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나진이 서 있던 자리를 남은 네 개의 열선이 꿰뚫었다. 벽이 녹아내리고 거대한 구멍이 뚫린 가운데, 나진은 미끄러지듯 땅에 착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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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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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에게 내던져졌던 질레트 역시, 땅에 착지하며 나진을 바라봤다. 왜 다시 왔나. 그런 질문을 반사적으로 입에 담으려는 그보다 먼저 나진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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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키르호프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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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전 스쳐 지나가듯 들었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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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황을 뒤엎을 수 있는 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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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락상 아군의 지원군일 ‘키르호프’란 이름을 입에 담으며 나진은 질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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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옵니까? 얼마나 시간을 끌어야 하는지는 알아야 할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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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 십오분 정도 되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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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오분이라.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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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길게 숨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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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고개를 들어 마녀를 바라봤다. 마녀와 시선을 마주한 채, 나진은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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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짓거 한번 해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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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그리 외친 순간 마녀의 손끝이 나진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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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개의 서클이 동시에 빛나며 하늘을 붉게 물들였다. 이러나저러나 이야기를 길게 나눌 시간은 없었다. 질레트와 나진이 산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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