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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슬 말뚝을 잡아당기며 나진은 속으로 생각했다. 확실히 효과적인 전략이라고. 와이번 사냥을 업(業)으로 삼는 부대답게, 그들이 고안해 낸 전술은 와이번을 사냥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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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 피를 조금이나마 이어받은 마물답게, 와이번은 높은 저항력과 더불어 천부적인 감각을 지니고 있다. 마나의 흐름을 간파하고 공중에서 회피기동을 펼치는 와이번에게 마법을 명중시키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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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발리스타로 쏘아내는 화살 역시 마찬가지다. 명중하기가 더럽게 어려울뿐더러, 맞추더라도 큰 피해를 줄 수 없을 테니까. 소드 시커급의 경지에 오른 사수라면 또 몰라도 그런 사수들이 흔한 것은 아니었으니 일반적인 대응이 될 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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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선택한 전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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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슬 말뚝을 활용한 근접전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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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줄처럼 쳐둔 사슬을 밟고 접근하던, 달린 뒤 도약하여 말뚝을 투척하던, 최대한 와이번에게 가까운 거리까지 접근한 뒤 말뚝을 투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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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리는 곳은 비늘에 뒤덮이지 않은 와이번의 뱃가죽이나, 날개의 피막. 그렇게 한번 박아 넣는 데 성공하면 그다음은 사슬의 반동을 이용해 하늘로 솟구친다. 와이번의 등 위에 올라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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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천만하고 상당한 숙련도를 요구하는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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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한번 올라타는 데 성공한다면, 손에 든 날붙이의 사정거리에 와이번이 들어가게 된다면··· 거기서부턴 검사를 비롯한 전사들의 영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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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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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슬을 휘감아 올라간 나진이 와이번의 뱃가죽에 박힌 말뚝을 움켜쥐었다. 이다음 어떤 식으로 움직여야 할지는 굳이 와이번 사냥 부대의 움직임을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여태까지의 전투 경험이 나진에게 ‘어떤식’으로 움직여야 할지 알려주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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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반동을 이용해 나진이 자세를 바꿨다. 동굴의 천장에 매달린 박쥐처럼, 나진은 한손으로 말뚝을 붙잡은 채 두 발을 와이번의 뱃가죽에 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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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정한 자세였지만 상관없다. 이제부터 균형을 잡을 예정이었으니. 말뚝을 움켜쥔 것은 한손. 그렇다면 비어있는 다른 한손으론 무엇을 할 것인가. 나진은 검사다. 그리고, 검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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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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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역수로 쥔 검을 와이번의 뱃가죽에 찔러넣었다. 비늘에 뒤덮이지 않은 뱃가죽. 검기를 휘감은 검은 너무나도 쉽게 와이번의 배에 깊게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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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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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번의 비명 소리와 함께 핏물이 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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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얕다. 와이번의 뱃가죽은 두꺼웠으며 그 안의 내장을 휘젓기엔 검의 길이가 짧았다. 뱃가죽을 쑤셔 와이번을 죽이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고, 피를 흘리며 날뛰는 와이번에게 오랫동안 매달려 있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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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도 효율적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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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날아다니는 와이번만 해도 수십에 이르는데, 이렇게 해서야 끝이 없었다. 나진 역시 이런 소모전으로 이끌고 갈 생각은 전혀 없었다. 박아 넣은 검은 균형을 잡기 위한 것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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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어 오르는 피, 날뛰기 시작한 와이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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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나진은 와이번의 뱃가죽을 밟고 달렸다. 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건 도약의 연속이었다. 박아 넣은 검을 뽑아내고, 다시 박아 넣고, 같은 동작을 반복해 나진은 와이번을 등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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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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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뱃가죽을 넘어 와이번의 비늘에 발을 디딘 순간 그걸로 끝이었다. 울퉁불퉁한 비늘. 더는 검을 박아 넣을 필요도 없었다. 비늘의 틈을 밟고 나진은 순식간에 와이번의 등 위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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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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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번의 고삐를 잡은 오크 기수와 나진의 눈이 마주쳤다. 눈을 부릅뜬 오크가 한손으로 고삐를 움켜쥔 채, 등에서 도끼를 뽑아 들었으나 그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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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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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의 검이 번뜩였고 오크의 목이 떨어졌다. 오크의 시체를 발로 걷어차 땅으로 떨어트린 나진은 짧게 숨을 뱉었다. 기수를 떨어트렸으나 와이번은 미친 듯이 날뛰고 있다. 뱃가죽이 들쑤셔진 탓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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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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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와이번의 비늘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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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번지르르한 비늘에선 검기를 흐트러트리는 저항력이 느껴졌다. 마물의 가죽이 기본적으로 저항력을 가진다곤 하나, 와이번의 비늘이 가진 저항력은 나진의 상상 이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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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간한 검격으론 깊은 상처를 낼 수 없다. 여태껏 인간을 주로 상대해 온 나진으로선, 이런 거대한 덩치의 마물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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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리 오래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가까운 곳에 단서가 있었으니. 시선을 옮겨보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와이번에 올라타 날붙이를 휘두르고 있는 병사가 있다. 그 병사가 어떤 식으로 무기를 휘두르는지 나진은 흘겨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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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요하게 한 구석을 쑤시고, 비늘을 뜯어내고, 상처를 벌린 뒤 마지막 일격으로 뼈를 끊는다. 그 과정을 말없이 지켜본 나진은 검을 고쳐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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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 가가가가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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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자리를 휘감은 검기가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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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번의 등줄기에서 목덜미에 이르기까지 붉은 선이 그어지고, 핏물이 튀어 올랐다. 와이번의 움직임이 더욱 거세졌다. 어떻게든 나진을 떨어트리고자 와이번은 몸을 이리저리 비틀어댔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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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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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박아 넣은 채 나진은 와이번의 등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비늘이 벗겨지고 핏물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나진이 검을 비틀자 상처가 벌어지며 뼈가 드러났다. 아, 이런 식으로 하는 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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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번의 등줄기를 타고 목덜미로 이어지는 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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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라면 척추뼈에 해당할 뼈를 향해 나진이 검을 휘둘렀다. 스걱, 하는 소리와 함께 뼈가 끊어졌고 뼈와 함께 핏줄 같은 것들이 잘려 나갔다. 그 순간 와이번의 움직임이 뚝, 하고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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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임을 멈춘 와이번이 추락했다. 추락하는 와이번의 몸 위에서 뛰어내리며 나진이 사슬 말뚝을 빙글 돌렸다. 새로운 목표는 가까운 곳에 있었기에 말뚝을 멀리까지 던질 필요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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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을 잡은 나진이 날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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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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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번 사냥 부대의 지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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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레트 레긴퍼트는 얼빠진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곳에는 한 명의 검사가 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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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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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번의 비명이 전장에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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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스러운 비명. 비산하는 핏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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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명의 병사가 한 마리의 와이번만 떨어트려도 제 몫을 다했다고 칭찬받거늘, 저 검사는 벌써 세 마리째 와이번을 떨어트리고 있었다. 그리하고도 멈출 생각이 없는지 새로운 목표를 찾아 움직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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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뭐 하는 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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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소 소드 시커, 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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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불리는 소년은 와이번 세 마리를 떨어트리고도 지치긴커녕 오히려 더욱 빨라지고 있었다. 사슬 말뚝을 투척하고, 와이번의 몸 위에 올라타나 싶더니 순식간에 와이번을 도륙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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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감을 잡았다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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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휘둘러 한쪽 날개를 찢어버리고, 등줄기를 타고 내달려선 와이번의 목을 절단내버린다. 한 마리째에는 척추를 끊는가 싶더니, 세 마리째부터는 아예 목을 쳐서 일격에 죽여버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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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리 쉽게 끊을 수 있는 게 아닐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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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아무리 소드 시커라 한들, 와이번의 비늘을 뚫고 그 목을 일격에 절단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질레트 또한 소드 시커이지만, 아주 운이 좋은 게 아니라면 일격에 와이번의 목을 끊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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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비늘의 틈새에 검이 잘 꽂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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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기의 상태가 좋을 때나 가능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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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일을 대수롭지 않게 해내는 소년을 바라보며 질레트는 헛웃음을 흘렸다. 저 소년에게서 질레트는 무언갈 느꼈고, 그건 질레트가 전장에서 오랫동안 활동해 온 군인이기에 느낄 수 있는 무언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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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에서 살다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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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전장에서 머물다 보면 가끔, 아주 드물게도 저런 놈들이 나타나곤 한다. 재능이란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무언갈 가진 놈들. 싸움, 전투 그 자체에 천부적인 감각을 가진 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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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 상황에 최적의 수를 골라내는 놈들. 가르쳐준 적도 없는데 직감적으로 답을 고르는 놈들. 범인(凡人)이 수년에 걸쳐 갈고닦은 기술과 판단력을 한순간의 직감으로 뛰어넘는 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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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에서 오래 살아남는 놈들은 대개 그런 놈들이었고, 그런 놈들을 질레트는 몇 알고 있었다. 쓴웃음과 함께 질레트는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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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 사람 무안하게 만드는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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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기 어렵다. 방해되면 쫓아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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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껏 그리 말했건만 참으로 쓸데없는 충고였다. 하기야, 상대는 그 괴물 같은 검성의 기록마저 갈아치운 불세출의 천재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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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무니없는 놈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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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생각을 하며 질레트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어느덧, 와이번 부대가 퇴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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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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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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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이 일단락되고, 막사로 돌아온 나진은 자신을 찾아온 질레트를 바라봤다. 질레트는 머쓱하다는 듯 제 뒷목을 매만지더니 나진에게 손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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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아군의 피해도 줄었고, 와이번 부대가 평소보다 빨리 퇴각해 전선을 유지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됐다. 네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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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질레트가 내민 손을 맞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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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악수를 나눈 뒤, 질레트가 쓰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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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 가르쳐준 적도 없는데 아주 날아다니더군. 첫 전투에서 와이번 다섯 마리를 떨어트린 건 네가 유일할 거다. 병사들도 어이없어하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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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각하는 와이번 부대를 추격해 나진은 기어코 한 마리를 더 떨어트렸다. 꽁지 빠지게 도망치는 와이번 부대를 보며, 병사들이 웃음을 터트린 건 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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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머무른다고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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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흘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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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열흘. 솔직히 말하면 어떻게든 우리 군으로 낚아채 가고 싶은 심정이긴 한데······ 소드 마스터들께서도 가져가지 못한 인재를, 우리 군에서 가져갈 수 있을 것 같진 않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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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레트가 어깨를 으쓱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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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질레트 레긴퍼트다. 열흘간 잘 부탁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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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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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을 바라보는 질레트의 시선은 우호적으로 변해 있었다. 나진은 앞선 전투에서 제 쓸모를 증명했고, 유능한 병사란 지휘관의 입장에서 쌍수 들고 환영해 마땅할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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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령 잠시 전장에 머물다 가는 용병이라 한들 그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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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인이지만 나진은 열흘간은 와이번 사냥 부대의 일원으로 인정받았다. 병사들 역시 나진에게 우호적이었으며, 시간이 빌 때마다 나진에게 사슬 말뚝을 활용한 잡기술을 가르쳐주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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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슬의 중간을 잡고 이렇게. 굳이 말뚝을 안 박아도 됩니다. 이렇게 휘감는다는 느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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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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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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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두 번 보여주는 것만으로 곧장 기술을 익혀대는 나진의 모습에, 몇몇은 눈을 크게 떴고 또 몇몇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나진은 그들에게 배운 잡기술을 곧장 전장에서 활용함으로써 보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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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시간은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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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전장에 익숙해졌고, 이곳에서 며칠의 시간을 보낸 나진은 문득 멀린에게 말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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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여기도 그리 크게 다를 건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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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륙(外陸)에 처음 발을 디딜 때만 해도, 온갖 괴물들이 판을 치고 날뛰어대는 마경이란 느낌을 받았거늘······ 정작 며칠 머물러보니 바깥과 크게 다를 건 없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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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계속 별자리들의 시선이 느껴진다는 것, 그리고 하루가 멀다하고 싸움이 나는 전장이 사방에 깔려있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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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긴 외곽 쪽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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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나진의 중얼거림에 멀린이 짧게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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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만 더 안쪽으로 들어가도 느낌이 확 다를걸. 그래도, 거긴 지금은 안 들어가는 게 좋아. 아직 별을 가지지 못한 네가 감당할 만한 곳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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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여기서 감만 잡고 돌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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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중얼거리는 멀린의 말이, 나진에겐 딱히 확 와닿지는 않았다. 악명 높다던 와이번 부대를 사냥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았고, 외륙의 악명에 비해 대단한 강적을 만나지도 못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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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그건 그냥 네가 운이 좋은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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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의 독백에 멀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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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수란 언제나 뜬금없이 찾아오는 법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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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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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불길한 예언은 적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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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에 머무른 지 일주일째 되는 날, 언제나처럼 전장에 나선 나진은 평소와는 분위기가 다름을 직감했다. 상대의 병력도, 와이번 부대의 숫자도 무언가 달랐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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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보다 수가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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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의 인력만이 전장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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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유가 무엇인지 전장의 병사들이 깨닫게 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평소의 10분의 1도 채 되지 않는 병력을 끌고 온 적군. 그러나 그들은 겁에 떨기는커녕 자신에 가득 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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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유라 해봐야 별것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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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한 병력을 채우고도 남을 존재가, 단신으로 군대를 능가하는 존재가 그들 사이에 섞여 있는 까닭이다. 산개한 와이번 부대의 한가운데로 어느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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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게 늘어트린 붉은 머리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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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들어 가는듯한 붉은 눈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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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번이 아닌, 지팡이를 타고 공중을 부유하는 여인. 그녀의 등 뒤로 새빨간 원 일곱개가 떠올랐다. 그것이 마법사들이 환(環), 서클 따위로 부르는 개념이란 것을 병사들이 이해한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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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각, 퇴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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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러서! 마법 부대, 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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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 으아아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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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호프, 키르호프 경을 불러와라! 당장 그분께 신호를 보내라! 그분을 모셔 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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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 마녀다! 마녀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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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이 단숨에 혼란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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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들이 퇴각을 명령하고, 병사들과 기사들은 진열을 유지하는 것조차 잊은 채 퇴각하기 시작했다. 그리할 수밖에 없었다. 전장에 모습을 드러낸 저 여인은 병사들의 기억에 각인된 악몽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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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인간을 불태우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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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와 손을 잡고 마왕군에 투신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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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들이 이르기를, 명멸(明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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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이르기를, 마녀(魔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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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멸의 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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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의 목소리가 나진의 귀에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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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멸의 마녀, 에르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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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가 전장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 전장은 뒤집혔다. 일개 개인이 전장을 지배했으며, 흐름을 휘어잡았다. 아군이 퇴각하는 가운데 나진은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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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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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의 등 뒤로 떠오른 일곱개의 서클이 불에 타들어 가는 모습을. 화염을 머금은 채 회전하는 서클은 불의 고리를 연상케 했다. 화염에 휘감긴 고리가 하늘을 붉게 물들인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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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가 손짓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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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손끝에서 화염이 명멸(明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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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서클 주문, 화마(火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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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불길이 전장을 집어삼켰다. 불길은 적군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모조리 불태웠으며 불길이 지나간 곳에는 잿더미만이 남았다. 수십에 이르는 인간과 마물이 한순간에 잿더미로 사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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흩날리는 잿가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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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기에 일렁이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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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들 사이로 마녀와 나진은 시선을 마주했다. 붉게 소용돌이치는 마녀의 눈동자가 나진의 노을빛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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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씨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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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의 곁에 서 있던 질레트가 이를 악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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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간 미뤄둔 전역을 오늘 하게 생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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