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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토벌이 아니라 경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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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리에 모인 백각 모험가 넷이 그리 판단한 데에는, 나름의 합당한 이유가 존재했다. 그들이 딱히 용의 두려움도 모르는 천치들이라 그런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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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천년 전 신화시대의 종막과 함께 용들의 태반이 종적을 감추었다 한들, 용들의 위용은 역사서에 고스란히 남아있었으니까. 개체마다 차이가 있긴 하나 통상적으로 소드 시커가 단독으로 용을 사냥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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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통상적으로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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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브리아 아래에 봉인된 적룡과 백룡은 통상적인 용들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본디 하나였으나 둘로 쪼개진 용이며 이미 아서에 의해 추락하고, 멀린에 의해 힘의 태반을 잃고 봉인된 용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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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위대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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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아래로 떨어지며 위대함을 잊은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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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룡과 백룡은 그 특성도, 공략법도, 심지어는 약점까지도 모조리 까발려진 용이다. 하물며 오랜 세월 봉인된 영향으로 약화까지 돼 있으니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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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드 시커 다섯이면 능히 사냥하고도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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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건 누가 ‘마지막 일격’을 꽂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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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모인 모험가들은 그리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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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의 위험은 있겠지만 그 위험을 감수하고 얻을 수 있는 보상은? 용의 가죽과 뼈, 피, 심장과 같은 부르는 게 값인 최고급 소재들이다. 그리고 용의 소재로 만들어진 아티팩트가 하나 같이 입이 떡 벌어지는 성능을 가졌음을 모르는 모험가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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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가란 금화와 위험을 저울질 하는 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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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게 있어 이번 용 토벌전은 입맛을 다시게 만드는 기회였다. 중앙길드의 길드장도 그 사실을 알기에 토벌권을 우선해서 가져온 것이겠지. 위험보다 이득이 더 크다고 여겼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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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의 기사단은 어디까지나 보험일 뿐, 이 도시에 모인 모험가들로 충분히 토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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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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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이 어깨를 으쓱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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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평범하게’ 흘러갔다면 이건 틀린 판단은 아니야. 대략 이백년쯤 전에도 백룡과 적룡이 부활했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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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이 처음이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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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몇백년마다 한두 번씩 봉인의 틈새로 튀어나오곤 해. 완벽한 봉인이란 세상에 존재할 수 없거든. 아무튼, 그때마다 소드 시커 몇 명이서 쉽게 사냥했으니 이번에도 그렇다고 생각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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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회의실의 테이블에 걸터앉아 다리를 꼬았다. 당연하게도 멀린은 나진의 눈에만 보였기에 다른 백각 모험가들이 보기에 나진은 허공을 올려다보는 것으로밖에 안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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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번 경우는 다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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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이 고개를 숙여 나진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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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들이 착각하는 건 두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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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두 손가락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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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는 이번에도 약화된 용이 나올거라 생각하는 거. 이번엔 달라. 봉인식이 ‘완전히’ 깨질 거거든. 저들이 상대해야 하는 건 약화된 용이 아닌 나와 아서가 상대했던 신화시대의 용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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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 하나를 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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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손가락 하나를 까딱이며 멀린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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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둘은, 만일 완벽한 용이 부활한다 한들 자신들이 용을 사냥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부분이지. 이 착각은 어째 일천년간 변함이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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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이 우습다는 듯 히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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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천년 전, 용을 떨어트릴 당시 멀린은 육환(六環)의 마법사였으며 아서는 소드 시커의 경지에 오른 무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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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둘이서 용 두 마리를 떨어트렸으니, 소드 시커 여럿이 모이면 충분히 할만한 게 아닌가? 그런 이야기가 돌았었지. 그때마다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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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인해 버려서 보여줄 수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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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이 한숨을 내쉬며 턱을 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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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그리 쉬우면 별을 얻을 수 있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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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업을 이루어야 하늘에 걸 수 있는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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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첫 번째 별을 손바닥 위에서 굴리며 멀린은 나진을 바라봤다. 그것은 자신이 이끌어야 할 왕을 바라보는 눈동자는 아니었지만,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후배를 바라보는 눈동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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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네 차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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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의 푸른 눈동자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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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의 노을빛 눈동자가 서로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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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너만의 방식으로 증명 할 차례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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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천년 전 아서는 용의 날개를 베어 땅 아래로 떨어트렸다. 그렇다면 너는 어떠한 방식으로 용을 떨어트릴 것인가? 어떻게 그들을 땅 아래에 가두어 둘 것인가? 멀린의 눈동자는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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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와 닮았지만 닮지 않은 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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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토벌전에서 소년이 어떠한 대답을 들려줄지, 어떠한 방식으로 별을 손에 넣을지, 멀린은 너무나도 궁금했다. 하지만 그 대답을 듣는 것은 한 달 뒤로 미뤄두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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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의 독백이 멀린에게 들리듯, 멀린의 독백과 감정 역시 나진에게 일정 부분 흘러들어왔다. 소드 시커의 경지에 오르며 많은 것이 바뀌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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옅게나마 흘러들어오는 멀린의 감정을 느끼며 나진은 입가를 틀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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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해도 좋을 겁니다, 멀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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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의 조언을 들으며 떠올렸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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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곱씹으며 나진은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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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도 자신 나름의 방법을 생각 중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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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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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길드로부터 토벌과 관련된 정보와 서류를 받은 뒤 나진은 길드를 빠져나왔다. 그 과정에서 마주치는 직원마다 나진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는데 이 또한 백각 등급의 특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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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의 도시 캄브리아에서 높고 낮음을 가리는 것은 오로지 실적이다. 그리고, 백각 등급의 모험가는 가장 높은 실적을 가진 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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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브리아의 귀족이라고 불리는 게 이런 뜻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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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그런 생각을 하며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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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황실에서 계산한 봉인식의 틈이 벌어지는 날은 한 달 뒤였고, 멀린도 비슷한 대답을 내놓았다. 즉, 한 달 정도 여유가 있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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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동안 무엇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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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고 작은 의뢰들을 수행해도 좋겠지만, 나진은 지금의 자신에게 과할 정도로 세간의 시선이 쏠려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무엇을 하던 시선이 따라붙을 것이며 그 의도를 의심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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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앞으로 도착한 지명의뢰만 해도 수십 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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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한 이야기지만, 그런 속내가 훤히 보이는 의뢰는 받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애초에 한 달간 뭘할지에 대해선 이미 생각해둔 참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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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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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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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을 잡고 나면 분명 대륙의 바깥으로 나간다 했죠? 별들의 전장과 악마들의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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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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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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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을 쌓고, 위업을 이루고, 별을 새기는데 그만한 장소는 없으니까. 그리고 숱한 영웅들이 걸음 하는 장소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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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들의 전장과 악마들의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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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멀린이 보여주었던 환상을 나진은 기억하고 있었다. 제 영혼을 뒤흔들고 한번은 무릎 꿇렸던 풍경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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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으거언··· 시험하려 했던 거야. 알지? 막 너 겁주려는 의도가 없···지는 않았지만, 꼭 필요한 과정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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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있어요. 왜 그래요? 갑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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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저번에 말했잖아? 멀린도 나한테 대뜸 지랄하지 않았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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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하게 시무룩한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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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드와 조우했을 당시 농담삼아 던졌던 ‘멀린 당신도 그랬잖아요’ 라는 말에 아직도 신경을 쓰고 있는 듯싶었다. 나진이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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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알죠. 시험이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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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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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아지는 멀린의 목소리를 보니, 뭔가 조금 더 놀리고 싶었지만 나진은 꾹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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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늦어도 두 달쯤 뒤면 그쪽으로 가게 될 것 같은데··· 이번에 한번 미리 보고 올까 생각 중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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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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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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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을 잡으려면, 용 비슷한 거랑 상대라도 해봐야 할 것 같은데 내륙에는 마땅찮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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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과 비슷한 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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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 피가 옅게나마 섞여 들어간, 그러나 그 신비는 공유받지 못한 존재. 와이번. 그것이 나진이 점찍어둔 연습 상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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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번은 나름 상위 마물이니까 마경 쪽에 있긴 하겠지. 그래서 그걸 잡으러 가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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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 잡아야 하니까요. 날아다니는 놈들이랑 싸워본 적이 딱히 없는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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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고민해 보던 멀린도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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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쁘지 않은 생각이긴 하네. 네 행보를 궁금해하는 이들에게 보여주기도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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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부분 또한 나진이 노리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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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자신에게 쏠려있는 시선들에게 보여줄 생각이었으니까. 자신은 마경으로의 진출을 시험 중이며, 차후 그곳에서 활동할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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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쁘지 않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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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멀린은 무언가 걸린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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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보면 그··· 좀 충격적일 거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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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번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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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세상의 바깥. 외륙(外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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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갈 설명해 보려다가 멀린이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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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 설명하는 것보단 한번 보는 게 빠르겠지. 그래서, 지금 당장 갈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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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라서 나쁠 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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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복에 걸리는 시간을 생각하면, 한 달도 나름 빠듯한 일정이 될 수도 있었으니까. 고개를 끄덕인 나진은 곧장 마차 하나를 매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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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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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선, 그렇게 불리는 곳까지 멈추지 않고 직행으로 달리는 마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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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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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의 바깥쪽, 외륙(外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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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는 그곳을 가리켜 세상의 바깥, 세외(世外)라고 칭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는 틀린 표현이 아니었다. 세상에 통용되는 규칙의 태반이 그곳에선 일그러지거나, 망가진 채로 적용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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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자와 죽은 이가 명확히 나뉘지 않는다. 염하지 않은 시체는 하룻밤이 지나면 저절로 살아 움직이며, 망자가 되어 세상을 떠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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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흐름이 일정하지 않다. 어느 곳은 빠르며 어느 곳은 느리고, 또 어느 곳은 아예 멈춘 채 박제되어 있다. 그렇기에 모든 계절이 공존하기도, 하나의 계절만이 영원히 반복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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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칙과 섭리가 엉망인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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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경과 황무지가 마구잡이로 뒤섞인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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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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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이 세상을 떠난 성좌들이 개입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세상의 바깥, 외륙이다. 지금 나진이 향하는 곳인 악마들의 서식지인 마경(魔境) 역시 그곳에 존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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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악마들은 성좌와 비견되기도 해. 애초에 성좌인 놈들도 있고. 악마라고 성좌가 못 되는 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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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도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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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경의 지배자, 마왕이라 불리는 놈들은 그 정도는 될걸? 내가 태워죽였던 바알이란 놈도 별 아홉개는 가지고 있었던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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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의 설명을 들으며 이동하기를 며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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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날 며칠을 달리던 마차는 돌연 멈춰 섰다. 마부는 여기서부턴 더 이상 못 나아간다며, 나진을 내려두고선 마차를 돌려 내륙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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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야에 덩그러니 놓아진 나진은 눈을 깜빡였다. 주변을 둘러보면 ‘마지막 한잔’이란 간판이 걸려있는 마구간 겸 주점이 하나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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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긴 처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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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점의 바깥에서 술을 홀짝이던 사내 하나가 나진에게 말을 걸어왔다. 나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사내는 팔을 쭉 뻗어 한쪽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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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쯤 걸으면 도착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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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을 마지막으로 사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술을 홀짝일 뿐이었다. 나진은 고개를 돌려 사내가 가리킨 방향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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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틀린 지형과 황폐해진 토지가 끝없이 이어진 곳. 일단 나진은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본 나진이 제자리에 멈춰 섰다. 멈추어 설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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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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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른 하늘에 금이 가 있었으며, 균열은 저 멀리까지 이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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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다 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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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이 그렇게 말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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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걸음을 다시 옮겼다. 그러나 얼마 안 가 다시 걸음을 멈추어 서야만 했다. 땅에 하나의 경계선이 그어져 있었으므로. 누가 그었는지는 모르나 경계선은 세상을 양분한 것처럼 저 멀리까지 이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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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최초의 검성이 그은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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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이 히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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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가 캄란의 경계선을 긋는 걸 보고, 자기도 하나는 그어야겠다고 대뜸 그은 게 이거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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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이 지나도록 흔적이 남은 검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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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어떻게, 어떤 식으로 검을 휘둘러야 이런 식의 흔적을 남길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잠시 경계선을 바라보던 나진이 길게 숨을 가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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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곤 경계선 바깥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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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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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발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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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세상의 바깥에 걸음을 내디딘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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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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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의 눈이 크게 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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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 쿵, 쿵 심장이 거세게 뛰었으며 체내의 마나가 미친 듯이 요동쳤다. 나진의 동공에 핏발이 바짝 섰고 온몸의 감각이 한계까지 곤두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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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가 역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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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나의 흐름이 뒤집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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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감각이 비명을 질러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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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곤 파삭, 하고 무언가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나진은 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봤다. 피부가 갈라지고 있었다. 아니, 피부가 아니었다. 육신이 아주 천천히 바스러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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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나를 전신에 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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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빠르게 마나를 둘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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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야 갈라짐이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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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선 항상 마나를 두르고 있어야 해. 아니면 아예 여기에 몸을 적응시키던가. 뭐··· 넌 엑스칼리버 덕분에 마나를 안 두르고도 몇 달은 버틸 텐데, 해볼 거면 해봐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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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로 추천은 안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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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이 중얼거리는 가운데, 나진은 천천히 숨을 가다듬었다. 당황스러웠다. 고작 한 걸음 내디뎠을 뿐인데 자신이 알고있던 상식이 망가진 느낌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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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여기가 그래. 그런 곳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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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게 웃은 멀린이 나진의 옆에 바로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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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직 놀라기는 이를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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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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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한순간에 뒤바뀐 것은 일대의 흐름만이 아니었다. 경계선 너머에서 보았던 풍경과 경계선 안으로 들어와서 본 풍경은 전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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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과 초목이 공존했으며, 눈보라가 몰아치는 곳과 바짝 마른 황무지가 공존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것은··· 원근감을 무시하고 시야에 들어오는 구조물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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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 박힌 거대한 검, 부러진 창, 화살, 사슬, 낫··· 온갖 종류의 무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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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좌들의 상징이지. 저긴 자기네 영역이니 들어오면 재미없을 줄 알라는 경고 같은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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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은 그리 설명하면서, 다시 한번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저 풍경은 나중에 보고 하늘이나 먼저 봐보라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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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렇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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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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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왜 멀린이 하늘을 보라 한 지 나진은 깨달을 수 있었다. 제멋대로 쪼개진 하늘. 마치 깨진 유리창처럼 하늘은 깨져있었으며, 깨진 곳마다 검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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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하늘 사이사이에 검은 밤하늘이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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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밤하늘에는 빛나는 별이 박혀 있었다. 저마다의 색으로 빛나는 별들. 그 별들이 마치 눈동자 같다고 나진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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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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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뭐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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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하다고. 눈동자 맞아 저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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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이 어깨를 으쓱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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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곤, 그녀가 ‘딱’ 하고 손가락을 튕겼다. 멀린이 나진의 영혼을 감싸놓았던 장막이 걷혔다. 그 순간, 나진은 동시다발적으로 밀려드는 감각에 숨을 헛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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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시선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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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가 아니었다. 수십, 수백, 수천 개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 시선은 하늘에서부터 시작됐다. 저 빛나는 별 하나하나가 모두 시선이었다. 수백 개에 이르는 별이 나진을 주목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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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바깥, 외륙(外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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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이 양팔을 쫙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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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어먹을 별자리들의 땅에 온 걸 환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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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왕 다음으로 가장 많은 별을 가진, 어느 오래된 성좌는 쓰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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