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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을 비롯한 각국에선 소드 시커급의 경지에 오른 무인들의 권위를 존중했다. 본래 신분이 미천하든, 출신이 비루하든, 소드 시커급의 경지에 올랐다면 최소 기사와 동등한 권위를 부여받는다.
요컨대 귀족에게 무릎을 꿇지 않아도 되고,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지 않아도 된단 뜻이었다.
‘그러니까.’
나진이 앞을 바라봤다.
각 집단을 대표하는 제복을 입은 사람들. 본래라면 나진은 저들의 앞에서 고개를 숙여야 했을 테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었다. 나진은 고개를 들고 그들을 마주했다.
그들 또한 나진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표하며 나진에게 말을 걸어왔다. 전투의 흔적이 남아 접견실의 풍경이 개판이긴 하지만, 대화를 나눔에 있어선 부족함이 없었다.
“슐레트 용병단에선 나진 경께 부단장 자리를 약속하오. 1년 계약 시 백금화 삼백닢, 품위유지비로 백금화 삼십닢을 추가로 약속드리지. 이에 더해 의뢰보수비는 별도로 계산되오.”
가장 먼저 나진에게 명함을 내민 것은 슐레트 용병단이었다. 슐레트, 제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용병단이었으며 ‘반드시’ 의뢰를 성공 시키기로 유명한 용병단이었다.
그만한 용병단에서 부단장 자리를 약속했다는 것은, 다른 이들이 보기에도 놀라운 일이었다. 거기에 백금화 삼백닢이라니? 그야말로 파격적인 조건이다.
조금 전, 게르드와 전투 중에 접견실의 문이 박살 났기에 안에서 나누는 대화는 바깥에도 고스란히 들렸다.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들이 슐레트 용병단이 부른 계약 조건을 듣고 마른침을 삼키는 가운데, 나진이 입을 열었다.
“거절합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거절.
저런 조건으로도 부족하단 말인가? 도대체 무슨 제의를 받았기에? 슐레트 용병단의 단원이 명함만을 남긴 채 쓸쓸히 접견실에서 퇴장했다.
그 뒤를 이어 명함을 내민 것은 블랑시아 공작가의 기사. 블랑시아는 무가(武家)로 이름난 가문이었으며, 숱한 기사들을 배출해 낸 명문가였다. 가문에 속한 소드 시커만해도 여섯이다.
“블랑시아 공작께선······.”
기사는 공작의 친서를 읊었고, 이어서 계약 조건을 입에 담았다. 기사는 공작에게 ‘조건을 재량껏 바꿔도 좋으니 어떻게든 끌어들여라’ 라는 전언을 받은 참이었기에 슐레트 용병단보다 높은 조건을 불렀다.
백금화 400닢. 거기에 더해 작위까지.
그러나 이번에도 나진의 입에서 돌아오는 대답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말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나진은 ‘거절합니다’라는 단답을 내뱉었다.
“거절합니다.”
뒤이어 들어온 렘폰 기사단에게도.
“거절합니다.”
제국에서 가장 이름 높은 상회, 록티드 상회의 전속 모험가 제안에도.
“거절합니다.”
마탑, 모험단, 명문가 휘하의 기사단, 제국에서 내로라하는 무력 세력들, 연합도시의 길드, 성체 교단······.
“거절합니다.”
그들이 건네는 모든 제안을 나진은 거절했다. 얼마나 파격적인 조건을 부르던 돌아오는 대답은 변함이 없었다. 애당초 그런 것들에 관심이 없다는 듯 나진은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그렇게 나진은 접견실을 떠났다.
그 누구도 나진을 막아서지 못했다.
접견실 앞에 모였던 집단의 스카우터들이 복귀해 이 소식을 전하자, 각 집단의 수장들은 한 가지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어떠한 제안도 받아들이지 않았다니?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인가?
누가, 저 매물을 낚아챘단 말인가.
가장 먼저 선상에 오른 것은 황실 휘하의 기사단이었다. 그러나 나진은 캄브리아로 돌아갔고, 황실에서도 별다른 움직임은 없었다. 로얄 가드가 추가됐다는 이야기도, 황실 기사단에 나진이 걸음 했다는 목격담도 전혀 없었다.
다음으로 선상에 오른 것은 검의 교단과 성혈 교단, 그리고 게르드 휘하의 기사단.
접견실에 도착했을 때 나진은 이미 소드 마스터 둘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으며, 그 뒤에 게르드 역시 그 자리에 함께했다. 그렇다면 세 소드 마스터 중 하나가 낚아챈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 또한 아니었다.
성혈 교단에도, 제일각의 탑에도, 검의 교단에도 나진은 걸음하지 않았다. 어떠한 교류도 없었다. 그저 캄브리아로 돌아갔다는 소식만이 들려올 뿐.
『그럼 도대체 누구인가?』
18세에 소드 시커의 경지에 오른 소년.
지금 소년이 가진 가치도 충분히 높지만, 몇 년의 시간이 더 지난다면 그 몸값은 더 오를 것이다. 만일 소드 마스터의 경지까지 오르게 된다면? 그 몸값은 측정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러니 지금 선점해야만 하는데.
도대체 어떤 놈이 채갔단 말인가.
그렇게 며칠의 시간이 흐른 뒤, 그들은 몇 가지 정보를 입수했다. 나진은 여전히 무소속이나 그런 나진을 후원하는 곳이 두 군데 존재했다. 소년이 소드 시커의 경지에 오르기 전부터 소년과 교류했으며 소년을 꾸준히 후원해 왔던 집단의 수장.
디에타 상회의 회주, 디에타.
캄브리아 재단의 주인, 에델마르 후작.
그중에서도 이목이 쏠린 것은 디에타 상회의 주인이다. 그녀의 이름이 낯이 익었기에. 몇개월쯤 전 아르베니아 공작가와 그녀가 엮인 사건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았다. 이 시대에 보기 드문 낭만적으로 마무리된 사건이었으니.
가문에서 버려진 소녀와, 그런 소녀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걸고 공작가의 기사단장과 맞부딪친 용병에 대한 이야기. 그 이야기를 곱씹던 몇몇은 눈을 부릅떴다. 당시에는 그 용병에 대해 그리 주목하진 않았지만······ 지금은 이야기가 달라졌다.
『캄브리아에 사람을 보내 조사해라.』
『당시 활동명은 이반.』
『디에타 회주와 해당 인물의 관계를 위주로.』
캄브리아에 사람을 보내보니 ‘이반’이라 불리던 청년이 해당 사건의 ‘용병’이었단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고 디에타 회주와 사적으로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 또한.
그 사실을 집단의 수장들이 알아차렸을 때.
그때만을 기다렸다는 듯, 에델마르 후작이 다스리는 트레바체 영지에서 연극이 개막했다. 최연소 소드 시커 나진을 중심으로 한 연극. 제국 전역에서 관객을 끌어모으기 시작하는 후작의 모습을 보며 각 집단의 수장들은 헛웃음을 흘렸다.
아직 별이 빛나지 않을 때, 그 빛을 알아보곤 미리 줄을 선 이들이 있었단 사실을 깨달았으므로.
『쟁탈전의 승자는 디에타 상단의 회주다.』
『최연소 소드 시커를 낚아챈 것은 캄브리아의 거상이다. 그녀를 주의해라.』
나진의 이름과 함께 디에타의 이름 또한, 제국의 권력가들 사이에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밥 한 끼에 최연소 소드 시커의 호감을 산 투자의 귀재, 디에타라고 불러주세요.”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립니까?”
제 앞에서 환히 미소 짓고 있는 디에타를 보며 나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요즘 들어 디에타의 입가에선 웃음이 떠나질 않았는데, 세상만사가 즐거워서 견딜 수가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바닥에서 동전 하나를 주웠는데, 알고 보니 그게 백금화······ 아니 다이아몬드, 아니 다이아몬드도 아닌가? 이걸 뭐라 말해야 할까요. 별?”
해맑게 웃고 있는 디에타를 흘겨보며 나진은 피식 웃었다. 그녀가 요즘 들어 왜 그렇게 행복한지 이유를 대충 알 것 같았으니까. 듣기로는 상회의 주가가 나날이 고점을 갱신하고 있던가?
‘캄브리아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상단’ 이란 칭호는, 이미 캄브리아에서 제일가는 상단으로 갈아치워진 지 오래였으며······ 제국의 수도에 세워둔 거점으로의 진출도 착착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앞으로 한두 달이라던가.’
수도로 옮겨가 본격적으로 규모를 키울 거라 들었는데, 그 준비로 디에타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정을 소화하면서도 웃고 있었다. 일 하는게 즐겁다는 듯이.
“뭐, 그건 그렇고 말이에요.”
디에타가 웃음을 거두었다.
길게 숨을 내뱉은 그녀가 눈을 게슴츠레 떴다.
“나진 당신.”
“예?”
“스물여덟도, 이십 대 초반도 아니었잖아요. 이거 뭐예요?”
그녀가 제 집무실 걸린 액자를 가리켰다.
신문지를 오려 전시해 둔 액자였는데, 거기에는 나진의 사진과 함께 대문짝만하게 ‘18세에 소드 시커의 경지에 오른, 최연소 소드 시커 나진’이란 글자가 적혀 있었다.
“제 눈이 잘못된 게 아니면, 여기에 열여덟살이라고 적혀있는 것 같은데요?”
“······.”
“또, 또 시선 피한다···!”
나진이 슥, 시선을 피하자 디에타가 테이블을 찹 하고 때리며 나진을 손가락질했다.
“저하고 동갑이라면서요!”
“그런 적 없습니다.”
“나이 차이 얼마 안 난다면서요···!”
“두 살이면 얼마 안 나는 거 맞잖습니까.”
“아니, 그게, 허, 참······.”
디에타가 제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저보다 두살 연하잖아요······.”
“그렇게 됐네요.”
“난 당연히 당신이 연상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아주 나중에.
연인관계로 발전하면 ‘오빠’라고 불러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망상을 하며 잠자리에 들기 전 이불 속에서 음습한 미소를 짓던 디에타다.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디에타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오빠가 아니라, 저 사람이 날 누나라고 불러야 할 판국······ 어?’
그것도 나쁘지 않은데?
디에타가 제 입가를 손으로 가렸다. 잠깐 상상해 봤는데 썩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디에타?”
“네, 네에?”
나진의 부름에 디에타가 어깨를 살짝 떨었다.
“나이를 속인 건 미안하게 됐습니다. 저도 밝힐 순간을 좀 놓친 느낌이라······.”
“뭐 미안할 것까지야 있나요. 그냥 놀랐다는 거지.”
디에타가 엷게 웃었다.
“어쨌든, 축하해요. 나진.”
그녀가 나진에게 편지를 건넸다.
나진이 제국의 수도에 다녀오는 동안, 나진의 앞으로 도착한 서신들이었다. 두툼한 편지뭉치에서 가장 위에 올라가 있는 서신 두 개를 그녀가 가리켰다.
“하나는 제국의 황제께서 보낸 축하 서신이고.”
황실의 문양이 새겨진 서신.
“다른 하나는, 아탕가의 기사단에서 보냈네요.”
그리고, 아탕가의 문양이 새겨진 서신.
둘 다 나진이 소드 시커의 경지에 올랐음을 축하하는 서신이었다. 편지를 받아들며 나진은 잠시 침묵했다. 새삼 자신이 소드 시커의 경지에 올랐다는 사실이 체감됐으니까.
별이 보이지 않는 지하도시에서 태어났다.
그 어디에도 이름을 알리지 못했으며.
자신이란 인간이 존재했다는 사실마저 그 어디에도 기록되지 못했다. 그렇기에 나진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인간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이젠 아니다.
이제는 아니었다.
제국 전역에 자신의 이름이 퍼졌다. 최연소 소드 시커라는 칭호와 함께 나진이라는 이름은 제국의 역사서에 기록될 것이다. 자신이 존재했단 증거를 제국의 역사에 새겨넣었다.
‘하지만, 이제 시작일 뿐이지.’
이제부터 더 많은 기록을 남길 것이다.
제국의 역사서에 한두줄을 추가하는데 만족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역사서를 통째로 고쳐 쓰게 만들어주마. 어디 역사서뿐일까. 아서왕으로부터 시작된 신화 역시 다시 쓰여야 하리라.
그렇게 만들 것이다.
다름 아닌, 자신의 검으로.
편지를 바라보며 나진은 미소 지었다.
드넓은 지하도시의 풍경.
훨씬 넓어진 제 내면에서 나진은 담장에 걸터앉아있었다. 시선을 조금 내려 아래를 내려다보면, 그곳엔 어울리지도 않는 호수가 하나 놓여있었다.
멀린이 그토록 애원하던 호수.
소드 시커의 경지에 올라 간신히 재현해 낸 호수에서 멀린은 발을 담근 채 참방거리고 있었다. 물장구를 치는 그녀를 흘겨보며 나진이 입을 열었다.
“멀린.”
“응? 왜?”
“아서랑 당신이 잡았다는 용 말인데요.”
스톤 헨지의 아래 봉인된 두 마리의 용.
“그 용에 대한 이야기, 자세히 들려줄 수 있어요?”
“말 안 해도 그럴 참이었어.”
멀린이 입꼬리를 틀어 올렸다.
“소드 시커의 경지에 올랐고, 기반도 충분히 마련됐지. 이제 제대로 시작점에 서야겠지?”
“아직 시작점이 아니에요?”
“아니지. 별 하나쯤은 가져야 그때부터 시작 아니겠어?”
그녀가 손가락을 휙, 휘둘렀다. 손끝에서 물결치는 물방울이 허공에 흐드러졌다. 흐드러지는 물방울은 공중에 멈춘 채 반짝였다.
“하나는 백룡, 다른 하나는 적룡.”
붉은색과 백색으로 물든 물방울.
“과거 나와 아서가 떨어트렸던 용이고.”
당시 캄브리아를 공포에 떨게 했던 두 마리의 용. 그 용에 대한 설명을 시작하며 멀린이 손을 뻗었다. 새하얀 손가락의 끝이 나진을 가리켰다.
“네가 다시 한번 떨어트려야 할 용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