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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헤브츠 법안에 따라, 자진 신고한 소드 시커의 정보는 제국 전역에 공개된다. 이는 해당 인물에 대한 견제이자 광고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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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러이러한 무장을 다루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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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이러한 실력을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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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공표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광고다. 소드 시커쯤 되면 쓰이지 않는 곳이 없으며, 온갖 집단에서 눈에 불을 켜고 가져가려 하는 최고급 인력이다. 정보를 공개하는 것만으로 사방에서 서신이 날아온다는 뜻이다. 제발 좀 우리 집단에 들어와 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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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너무나 당연하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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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든 일이 갑작스레 이루어지는 법은 없다. 하루아침에 소드 시커급의 경지에 오르는 인물은 없으니까. 소드 시커의 경지에 근접한 인물은 당연하게도 사방에 소문이 퍼지고, 그 소문이 퍼지고서도 몇개월쯤은 지나야 소드 시커에 오르는 게 일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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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그 몇개월간 각 집단과, 귀족가, 기사단들은 해당 인물의 스카우트를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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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한 뒷조사를 거쳐 대상이 만족할 만한 제안을 건네기 위해서. 그렇기에 소드 시커급 강자의 명단이 갱신될 때 집단들은 ‘아, 드디어 그자가 올라갔나?’ 하고 준비된 제안을 건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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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번 경우는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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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데없이 갱신된 명단. 그리고 그 명단에 실려있는 인물은··· 소문으로는 한 번씩 들어봤지만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은 인물이다. 엑스퍼트 급으로 알려졌으며, 활동을 시작한 지 반년도 채 되지 않았으니 접촉하기엔 이르다고 판단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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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갑작스레 소드 시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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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력을 숨기고 있기라도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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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인물에 대한 정보가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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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제안해야할지 알 수 없다. 간혹가다 재야에 숨은 고수들이 이런 식으로 깜짝 등장하곤 했는데, 이 역시 흔한 경우는 아니었다. 각 집단은 얼떨떨한 심정으로 정보를 열람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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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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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前) 활동명 - 이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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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지역 - 캄브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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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지 - 소드 시커(Sword See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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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의 마지막에 쓰인 숫자를 읽은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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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령 - 1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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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전역이 발칵 뒤집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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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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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에 재능을 가졌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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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한 지원을 받은 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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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이들을 기준으로 평균을 냈을 때, 소드 엑스퍼트의 평균 연령대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소드 시커의 평균 연령대는 50대 후반으로 측정돼 있었다. 이는 제국이 건국된 이래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지켜져 온 상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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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간혹가다 기록을 갈아치우는 천재들이 나타나곤 하지만, 그리 큰 폭을 그리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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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당연한 일이다. 경지를 올리는 것은 곧 영혼의 격을 높이는 행위다. 오랜 시간 스스로를 갈고 닦아야 영혼에 묻은 때를 닦아내고, 승화(昇華)를 이룰 수 있으니··· 재능과는 별개로 경지를 올리는 데는 오랜 시간이 요구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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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검성 카론은 이질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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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너무나도 빠르게 경지에 올랐다. 막힘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역대 최연소 기록을 모조리 갈아치우며 질주했다. 처음에는 질투, 의심, 의문으로 가득했던 시선도 카론이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을 때쯤에는 동경과 선망으로 뒤바뀌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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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세출의 천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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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후 천년간 다시 없을 천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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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론에게 그런 찬사가 쏟아진 것이 십년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제국은 다시 한번 충격적인 사건을 맞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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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덟의 나이에 소드 시커에 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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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브리아의 모험가, 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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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열여덟의 나이에 소드 시커에 오른 소년이 나타났다. 불세출의 천재라 불리던 카론의 기록을 자그마치 12년이나 단축했으며, 평균에서 40년에 가까운 시간을 단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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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을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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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 잘못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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숱한 이들이 언성을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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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중 가장 큰 목소리를 낸 이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다름 아닌 제국의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史官)들이었다. 검성 때도 언성을 높였던 이들이었고, 자신들이 제국의 살아있는 역사라 믿는 이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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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서를 뜯어고쳐야 할 판국이다. 검성때도 숱한 역사서를 개찬해야 했던 그들로선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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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는 잘못됐다. 이치에 맞지 아니하니 이는 괴이(怪異)한 경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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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교도의 영향을 의심해 보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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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가 잘못된 것. 재검사를 필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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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표현이 다소 과격하긴 했으나, 그들의 의견은 세간의 공감을 샀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기록을 갱신해도 이런 식으로 갱신하는 게 어디 말이나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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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검성조차, 불세출의 천재라 불리던 검성조차 검의 교단의 지원을 받아 성장했다. 단단한 기반을 두고 성장했단 말이다. 그러나 저 소년은 어떠한가? 아무런 기반이 없다. 난데없이 나타났다. 심지어는 그 출신지조차 불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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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한 것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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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기간이 반년밖에 되지 않는다. 마탑이 만들어낸 호문클루스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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숱한 이들이 무언가 잘못된 거라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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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간이 시끄러워지자 제국은 심사의 내역과 심사를 담당했던 인물의 정보를 공개했다. 이에 언성을 높였던 이들은 옳다구나, 박수를 치며 감독관을 헐뜯기 위해 달려들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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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프리아 가체프스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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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관의 이름을 확인한 순간 모두 그 입을 닥쳐야만 했다. 여태껏 감독관의 기량을 의심하고, 의문을 제기했던 이들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린 건 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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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위대한 대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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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네 번째 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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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휘각(永輝角), 시프리아 가체프스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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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실력을 의심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이는 없었다. 그녀가 그 사실에 불쾌함을 표할 경우, 어지간한 집단은 공중분해 된다는 사실 또한. 결과적으로 제국은 침묵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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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거짓 한 점 없는 진짜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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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고작 열여덟에 소드 시커의 경지에 오른 인물이 나타났단 말인가? 이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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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간이 혼란에 빠진 가운데 결정타가 떨어졌다. 황제가 소드 마스터들을 소집한 것이다. 역사적인 순간을 기념하겠다는 명분이었다. 황제가 직접 개입한 순간부터 이 모든 것은 진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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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황실로 불려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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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에서 새로운 소식을 공개하기 전까진, 그 무엇도 알 수 없다. 숱한 이들이 숨을 참은 채 새로운 소식이 들려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도 소식은 빠르게 제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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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소 소드 시커의 등장을 알리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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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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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바체의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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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델마르 후작은 서신에 대문짝만하게 쓰인 ‘최연소 소드 시커, 나진’ 이란 문장을 확인하자마자 기립박수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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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보, 브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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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았는가. 내가 점찍어둔 청년이다. 내 두 눈이 정확하지 않았던가! 크게 사고를 칠 청년이라 하지 않았나! 그리 외친 후작은 아껴둔 포도주를 병째로 빨아 재끼며, 후원하던 극단들에게 명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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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이를 연극으로 만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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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과 디에타의 일화를 연극으로 제작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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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바체가 관광지로 발돋움 할 기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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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만큼은 휘하 기사들도 후작을 말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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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트레바체 후작가는 나진과 가장 먼저 접촉한 귀족가였고, 세간의 주목을 한 몸에 받고 있었으니까. 미래를 내다본 투자의 귀재, 라는 명성을 얻을 기회를 에델마르 후작은 놓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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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드 시커, 로젤린 아스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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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이미 나진이 소드 시커의 경지에 올랐단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모험가 도시가 시끄러운 가운데 다소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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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님, 그거 보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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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마, 다 알아. 이 누님은 어? 딱 보면 알아. 그놈 그거 내가 큰일 친다고 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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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때부터 여기까지 내다보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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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이지 인마. 단장 아무나 하는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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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반이란 녀석이··· 열여덟살이란 것까지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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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 뭐? 잠깐만,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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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젤린은 제 부하가 읽던 신문을 낚아챘다. 그리곤 그곳에 대문짝만하게 쓰인 ‘열여덟의 나이에 소드 시커에 오른······.’ 이란 문장을 확인한 순간 제 두 눈을 부릅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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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덟? 십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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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못해도 스물 중반은 될 줄 알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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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젤린이 얼빠진 표정을 지은 채 눈을 깜빡였다. 그녀마저 혼란에 빠진 가운데, 모험가 도시는 나진의 귀환을 기다리며 소란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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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화를 삼키는 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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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 상회의 회주, 디에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집회실로 들어왔다. 그야 즐거울 수밖에. 그녀의 상회는 실시간으로 주가가 폭등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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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과 디에타가 공적으로도, 사적으로도 매우 긴밀한 관계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 덕에 모험가 도시 안에서뿐만이 아닌, 바깥에서도 그녀에게 정보를 얻고자 찾아오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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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상인이었고 때로는 형태가 없는 정보 또한 어마어마한 가치를 가진단 사실을 잘 알았다. 금화를 두둑이 챙긴 덕에 그녀의 입가에는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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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건 그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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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점 찍어둔 남자가 잘나간단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다. 사방에서 관심이 쏟아지는 걸 보면 조금 속이 쓰리기도 하지만 뭐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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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자리는 내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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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투자자이자 첫 번째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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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딜 가던 첫 번째 자리가 가지는 가치는 굉장한 법이다. 그리고 다른 첫 번째 자리도 하나하나 가져갈 생각이었고. 그런 망상을 하며 디에타는 가지고 온 신문을 집무실 책상에 촥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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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나이, 끝까지 말 안 해줬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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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야말로 나이를 확인할 차례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디에타는 신문을 확인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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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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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을 헛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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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힌 숨에 켈록, 하고 그녀가 숨을 뱉어냈다. 몇번의 기침 후 그녀가 제 가슴팍을 두들기며 신문을 다시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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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덟. 변하지 않는 숫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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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의 나이는 스물이었다. 그러니까, 나진이 자신보다 두살 어리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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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하였어?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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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가 눈을 부릅떴는데, 그녀의 곁에 서 있던 호위 기사 파시온 역시 눈을 부릅떴다. 두 가지 이유에서. 하나는 나진의 나이에서였고, 둘은 제 주인의 눈동자가 저렇게 커질 수 있단 이유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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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동그랗게 뜬 채 두 사람은 신문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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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의 교단의 주인, 검성 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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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오랜만에 교단의 정복을 차려입은 채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평소에는 헐렁한 도포를 입고 훌쩍 떠나곤 하는 그지만, 이번에는 자리가 자리다 보니 그리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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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가 검주(劍主) 소집령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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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들의 전장이나 마경에 매몰된 소드 마스터들은 예외였으나, 카론과 같이 내륙에서도 활동하는 소드 마스터들은 소집령에 응해야 했다. 물론 의무가 없더라도 기쁜 마음으로 발걸음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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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놈 이름이 나진이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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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론이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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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덟의 나이에 소드 시커라, 젊다는 것은 예상했지만 이건 상상 이상이다. 자신이 세운 기록이 갈아치워졌단 사실에 카론은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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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은 비공식적으로 스승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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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의 데뷔를 축하해줘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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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손으로 가야 어디 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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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론이 손가락을 까딱이자, 대기하고 있던 대사제가 한 자루의 검을 가져왔다. 검의 교단에 속한 명장이 두들긴 올해의 야심작. 이 정도면 선물로 적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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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혈 교단의 처형인, 유엘 라지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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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경과 인접한 곳에 있는 악마 계약자들의 은신처에 단신으로 쳐들어갔던 그녀는, 급히 날아온 전보를 확인하고선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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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게 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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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의 나이와 경지를 이미 알고 있었던 유엘이다. 그때도 소드 시커에 근접해 있었는데 불과 한 달 만에 경지를 올린 겁니까. 대단하군요. 그리 중얼거리며 유엘은 검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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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핏물이 튀었다. 악마 계약자들이 공들인 마법이 종잇장처럼 찢겨나가고 그들의 육신이 잘게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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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소집령에 응하겠다’라는 답장을 매단 전서구를 날려 보내고선 술병을 입에 털어 넣었다. 알딸딸한 취기를 즐기며 그녀가 검을 고쳐잡았다. 이단들을 베어 넘기는 일도 즐거우나, 그 소년과의 만남이 더더욱 즐거울 것 같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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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 계약자들의 비명이 메아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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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치는 비명 사이로 유엘의 검이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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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제일각, 게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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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뜻을 받들어 소드 마스터들에게 서신을 날린 후, 그는 자신만을 위해 마련된 초원으로 돌아왔다. 그리곤 검을 휘둘렀다. 제국 전역이 발칵 뒤집힌 와중에도 노인의 일과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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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은 다만 검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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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그래왔듯이, 묵묵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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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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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안대를 쓴 채 어딘가로 안내받았다. 온갖 술식이 새겨진 안대였는데, 안대 속에서 눈을 깜빡여봐도 사방이 흐릿하게 보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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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일 것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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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힘을 주면 풍경이 선명해지긴 하나, 안대에 새겨진 술식들이 ‘치이이이익!’하는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기에 나진은 그냥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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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걸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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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장서 걷던 로얄 가드가 멈춰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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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곤 구웅, 하는 둔중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안으로 들어서자 로얄 가드가 나진의 안대를 풀어주었다. 나진은 눈을 몇번 깜빡였다. 휘황찬란한 불빛에 적응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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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눈을 뜨고 나진은 주변을 둘러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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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을 하는 법정 같기도, 결투를 하는 투기장 같기도 한 구조의 공간이었다. 원형의 공간 한가운데에 나진은 서 있었다. 고개를 들어보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이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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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성 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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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귀 유엘 라지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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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제일각 게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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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명의 소드 마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카론은 나진을 향해 어깨를 으쓱해 보였고, 유엘은 대놓고 나진을 향해 반갑다는 듯이 손을 흔들었다. 정작 얼굴은 무표정해서 다소 어색한 동작이 됐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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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게르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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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제일각의 노인은 눈을 가늘게 뜬 채 나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엘보다도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무색의 시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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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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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조금 더 고개를 들어 소드 마스터들보다 한층 위에 앉아있는 인물을 향했다. 별빛을 닮은 백금발을 늘어트린 사내. 그자가 누구인지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소드 마스터들의 위에 앉을 수 있는 이는 제국에 단 한명 뿐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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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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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아예 고개를 조아리려 하는 순간 그쯤 하면 됐다, 하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개를 들어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지고 나서야 나진은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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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부른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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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황제가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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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영혼의 격(格)으로 경지에 올랐음을 증명했다. 허나 그대는 검의 구도자, 즉 검사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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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팔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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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깃이 펄럭이며 빛무리가 흐드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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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란, 검을 한필의 붓으로 삼아 자신을 이야기하는 자. 칼끝으로 자기 자신을 증명하는 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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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드러진 빛무리가 나진을 비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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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제국의 자랑스러운 검주(劍主)들의 앞에서 증명해 보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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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소드 시커의 증거를 보이란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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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황제를 알현함에도 검을 압수하지 않은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는가. 나진은 꿇었던 무릎을 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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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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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발검(拔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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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드 마스터 셋이 지켜보는 가운데, 나진은 그 어느 때보다 동작 하나하나에 집중했다. 깔끔한 궤적을 그리며 들어 올린 칼끝은 천장을 향했다. 하늘과 일자 되게끔 놓인 한 자루의 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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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으로 나진은 제 얼굴의 반을 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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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에게 배운 검례(劍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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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눈을 감은 채 나진은 제 내면에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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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끝으로 그리는 것은 별. 별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꿈꾸었던 별이다. 나진이 감았던 두 눈을 뜨며 검을 가볍게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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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스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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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끝을 따라 금색과 백색의 빛무리가 흐드러졌다. 금색의 빛은 한데 뭉쳐져 작은 원을 이루고, 백색은 원과 원을 잇는 선이 됐다. 그리하여 만들어진 것은 백색과 금색으로 이루어진 별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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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을 비추던 빛무리들은, 나진이 만들어낸 빛에 가려져 더는 보이지 않게 됐다. 오직 나진의 검기가 만들어내는 빛만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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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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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광경을 지켜보던 세 소드 마스터와 황제는 눈을 부릅떴다. 그리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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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白)과 금(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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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이루는 두 가지 색이 공존하고 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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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자리의 형태를 닮은 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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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색이 뒤섞여 백금색을 이루지 않았을 뿐, 소년이 그려낸 것은 한없이 별빛에 가까운 검기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이는 이 자리에 없었다. 아마도, 제국 어느 곳을 뒤져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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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의 검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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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왕의 검기를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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