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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노덴 에노시마 역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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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여기 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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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옆을 슬쩍 쳐다보았다. 그녀와 비슷하게, 붉은색 푸른색 노란색 가발을 쓴 채 애니메이션 코스프레 복장을 하고 있는 세 명의 일행이 그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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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진짜 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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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일단 제가 트위터랑 웹 서치 돌려봤는데 코스어 팀들 중에서는 오는 팀이 없더라고요. 진짜 무슨 이상한 사람들 오는 거 아니면 오늘은 사람 없을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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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서는 우려섞인 대화가 이루어진다. 그럴만 하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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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코스프레를 한 채 애니메이션 성지를 순례하기’는 코스플레이어들이 꿈꾸는 행위 중 하나다. 특히 22년의 패권작인 ‘봇치 더 락’은 인기도 많았고, 코스프레도 쉬웠고, 성지도 도쿄이거나 인근이거나 얼마 안 걸리는 곳이기까지 한 만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생길 확률이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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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껏 신경써서 코스프레까지 했는데, 똑같이 코스프레 한 사람들 만나면 좀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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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로만 따지면 거리낄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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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사람 심리라는게 이치로만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우리만의 특별함’을 찾아 왔는데 똑같은 생각 한 사람들 있어서 기분 잡치는 것도 있거니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또 어떻겠는가. 복장을 비교하거나 재현도를 비교하거나… 불보듯 뻔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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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각각 비교될 것이 분명하니, 차라리 마주치지 않는 것이 낫다는 생각으로 그들이 고른 날짜가 바로 오늘이었다. 아는 코스프레 팀의 일정을 전부 확인하고 맞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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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그런 그들의 기대는 시작부터 배반당했다. 에노시마 신사를 향해 걷기 시작한 그 시점에, 바로 옆에서 똑같은 ‘봇치 더 락’ 코스프레를 한 4인조가 나타난 것으로 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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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우르르 지나다니는 인도 위에서, 마치 도플갱어를 만나기라도 한 듯 얼어붙은 8명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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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어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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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 중 한명이 무심코 흘린 목소리에 그녀는 정신을 차렸다. 그렇게나 날을 고르고 골랐는데. 하필 오늘, 그것도 완전 똑같은 컨셉으로 나타난 코스플레이어 팀이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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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그냥 촬영 접고 집에 갈까? 아니면 살짝 늦출까? 강행하는 것 또한 방법이지만, 저쪽에서 접지 않으면 관광객들 앞에서 ‘줄 서서 성지 사진 촬영하기’ 같은 부끄러운 상황이 나올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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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 잠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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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까지 이어지던 생각을 끊은 후. 그녀는 빠르게 상대방 4인의 스캔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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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발은 일반모. 복장은 싸구려 원단으로 만든 대여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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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프레에는 우열이 없다. 중요한 것은 캐릭터를 재현하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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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코스프레를 통해 캐릭터를 ‘재현’하는 것에는 우열이 없다 한들… ‘코스프레 복장’에는 분명한 우열이 있는 법이다. 대충 인터넷 사이트에서 아무렇게나 구매한 2만원짜리 가발과 맞춤제작한 10만원짜리 가발. 그 중 어떤 것이 가치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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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생각하며 그녀는 일행들에게 은근슬쩍 눈빛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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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코스프레 대결’에서, 이길 수 있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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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그 시점에, 이서 또한 비슷한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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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쪽이 더 퀄리티가 높아보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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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와 일행들이 빌린 가발과 의상은, 관광지 근처 아무 가게에 들어가서 빌려온 것 답게… 퀄리티가 떨어지는 것이 확연히 보이는 것들이었다. 굳이 이서의 ‘과거 경험’을 빌려오지 않아도 이쪽이 딸린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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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이서는 웃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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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쪽이 외모가 더 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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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한 이야기기도 하고 부끄러운 이야기이기도 하다. 결국 외모라는 것은 타고나는 것이며 사람의 노력으로는 바꿀 수 없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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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렇기에, 이서와 아이들은 싸구려 의상을 입고 싸구려 가발을 쓴다 해도… 고급 의상에 고급 가발을 쓴 저쪽 사람들보다 ‘재현도’가 높을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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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사실에서 기반한 이서의 자신감은, 그녀로 하여금 상대와의 보이지 않는 승부에 나서게 만들었다. 서로를 노려보는 눈빛에 불꽃이 튀고, 뒤이어 고개가 살짝 끄덕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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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부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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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일행의 동의는 전혀 받지 않은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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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온갖 일을 다 겪어본 명전이다. 군대에 몇년을 처박혀도 봤고 감방에도 가 봤고 해외투어도 돌아봤고 마약도 해 봤다. 심지어 최근에는 죽기까지 해 봤고, 여자로 되살아나기까지 했다. 세상에 기인이사가 많다지만 아마 명전보다 많은 일을 겪은 사람은 몇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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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런 그조차도 생각조차 하지 못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바로 지금 여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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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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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죽기 전의 ‘서명전’에게 가서 “너는 내년에 일본에 여행가서 만화영화 등장인물을 따라하는 복장을 입고 너와 똑같은 만화영화 등장인물을 따라하는 복장을 한 사람을 마주친 다음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똑같은 목적지로 향할 것이다.” 라고 한다 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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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그는 믿을 수 있을까? 절대 믿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믿지 않아도 닥쳐오기 마련이다. 바로 지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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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일행을 쳐다보았다. 이게 무슨 일인지 잘 모르겠다는 표정이면서도 어찌되었든 움직이고는 있는 현아와, 무슨 일인지 알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실실거리고 있는 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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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앞에는 딱 봐도 기 싸움을 하는 중인 이서와 상대방 4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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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를 의식하지 않는 척 길을 걸어가면서도, 행인들을 지나칠 때마다 눈동자를 빠르게 움직이며 시선을 확인하는 다섯 명. 그 때마다 희비가 엇갈리는 것을 보면, 판정을 어떻게 내리는지는 몰라도… 대결이 벌어지고 있는 건 확실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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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분위기는 계속해서 이어진다. 다리를 걸으면서도, 상점가를 오르면서도. 끊임없이 서로를 확인하며 분하다는 표정이나, 신나하는 표정을 짓는 이서와 상대방 4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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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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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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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먹어봐야 한다는 ‘타코센베’… 이상하게 생긴 과자판떼기를 든 채로 야금야금 베어물던 명전에게 흘러든 나지막한 현아의 말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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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저 분들이랑, 우리랑 뭔가… 대결 같은 거 하고 있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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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잘 모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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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그냥 모르는 척 했다. 괜히 대답해줬다가 “왜 그러고 있는 거죠?” 같은 질문이 들어올까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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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을 서하가 해주고 있는 동안, 대결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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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트막한 상점가를 오르면 있는 신사 앞에서 각 네 명 끼리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찍으면서도(사진은 상대방이 찍어줬다). 계단 대신 요금을 내면 탈 수 있는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사진을 찍으면서도(마찬가지였다). 그 길 끝의 전망대에서 사진을 찍고(마찬가지), 전망대에 올라가서 사진을 찍으면서도(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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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계속해서 이어지던 이상한 대결은,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 이르러 최종장을 맞이했다. 바로 상대방의 분홍머리가… 등 뒤에 지고 있던 ‘기타 케이스’를 땅에 내림으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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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등비등하네요. 쉽게 이길 수 없는 상대인 걸 알겠어요. 이제 그만… 최종 승부를 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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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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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부… 승부? 승부를 보자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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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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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한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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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보고 한국인이라고 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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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때까지 한국인인 거 몰랐던 게 더 이상하지 않냐? 아까부터 계속 한국어 썼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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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를 꺼내든 여성의 중얼거림과, 그 말에 통역을 하는 현아. 잠시간의 소란이 이어지다 다시 분위기가 잠잠해진다. 왠지 모르게 비장해진 분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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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쪽은 기타를 칠 줄 알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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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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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를 칠 줄 안다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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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는 우리 쪽도 칠 줄 안다고 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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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쪽도 기타 칠 줄 알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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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는 기타를 잘 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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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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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들이 기타 잘 친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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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기타 히어로가 있다고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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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기타 히어로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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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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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통역사(아니다)를 끼고 주고받는 이서와 상대방의 문답. 초등학생마냥 서로가 잘났다고 우기고 있는 꼴이 무슨 ‘가족오락관’을 보는 듯 하다고 생각하며, 명전은 그냥 기타를 쳐보라는 시늉을 했다. 그 말에 분홍머리가 케이스에서 꺼내든 것은 마틴의 어쿠스틱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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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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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어진 연주는 의외로 들을 만 했다. ‘아마추어 수준에서’ 착실하게 기타를 연습하고 노력해왔다는 것이 느껴지는 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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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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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분간의 짧은 연주는, 안 그래도 코스프레로 인해 몰려있던 사람들의 이목을 확실하게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행인들 사이에서 들려오는 감탄사와 박수에 머쓱한 듯 고개를 꾸벅꾸벅 숙이다… 이 쪽을 보며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는 상대방 일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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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가요? 지금이라도 졌다고 하시는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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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대답 대신 터벅터벅 걸어가 손을 내밀었다. 살짝 놀랐다가, ‘할 수 있겠냐?’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기타를 내미는 상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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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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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Distortion? 맨 마지막 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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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의 말에 명전은 심드렁하게 마지막 파트를 쳐주었다. 그에겐 손 풀기 정도밖에 되지 않는 16분 음표의 연타. 그냥 끝내기는 심심하니 적당한 속주를 섞은 솔로까지 곁들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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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연주에, 상대방 일행은 눈을 번쩍 뜨고 명전을 바라보았다. 마치 트럭에 치인 듯한 표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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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사람들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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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만 재미있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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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의 이죽거림에 이서는 웃음으로 반응했다. 크흐흡거리는 웃음 소리가 왠지 얄미워, 그는 무릎 밑으로 흐르는 바닷물을 손으로 퍼 이서에게 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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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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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물이 차갑지. 따뜻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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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노시마 섬 코스프레 대결’(이서가 붙인 이름이었다)이 끝난 후. 땀에 푹 젖어버린 코스프레 의상을 반납한 후, 호텔에서 자고 있던 혜인을 깨워 도달한 곳은 에노시마의 해수욕장, 가타세 히가시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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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행 와서는… 진짜 생전 처음 겪은 일들만 잔뜩 생기는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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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이는 바다와 저 멀리 보이는 후지산. 명전은 그 풍경을 바라보다가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 한 두개 정도 있는 맑은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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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십년동안 바라봐왔던 풍경이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다. 그가 아무리 오래 살았다 할지라도, 그리고 그 상대로 몇십년을 더 살았다 할지라도. 지금의 이런 경험을 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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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불가능했을 것이다. ‘새로운 삶’이라는 것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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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그렇게 생각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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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던 생각은 퉁 하는 충격에 끊어진다. 이서가 던진 알록달록한 비치 볼. 명전은 그를 주운 후 이서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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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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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쟤는 뭐 저렇게 남사시러운 걸 골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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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밑까지 가리는 듯한 검은색 민소매 수영복이지만, 실은 시스루인 수영복 상의. 그리고 가랑이 끝까지 올라올락말락 하는 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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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의상은, 이서의 몸매와 맞물려 그야말로 파괴적인 퍼포먼스를 내고 있었다. 모델이라고 해도 믿을 법한 그런 외모에 불나방처럼 모여드는 남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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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너. 혹시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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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못해요~ 안 놀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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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가 계속 거절하는 것을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자기라면 다를 것으로 아는 건지 근거 없는 자신감인지… 비 내린 다음 날 잡초마냥 계속해서 생겨나는 '난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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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래서야 놀기는 글렀다고 생각하며, 명전은 비치볼을 손으로 통통 튕겼다. 혜인과 서하, 그리고 현아가 빨리 와야 그래도 인원이 돼서 저런 놈들 그만 올 텐데. 한명밖에 안 보이니까 자꾸 얕잡아보고 번호 따러 오는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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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그쪽의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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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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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생각하던 명전에게 들려온 것은, 얇상한 남자의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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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같이 놀지 않을래? 우리 지금 한명이 부족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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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이씨… 꺼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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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려온 것은 일본어. 하지만 명전은 굳이 해석을 하지 않아도 그 뜻을 알 수 있었다. 이제는 살다살다 이런 일도 다 겪어보는구나. 굳이 이런 일 까지 겪고 싶진 않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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