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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스러운 것은 의심스러운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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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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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리는 갈빗대를 하나 집어들고서 물어뜯었다. 주변 생도들이 숫제 짐승을 보는 듯한 시선을 보냈으나 개의치 않았다. 달짝찌근한 양념이 입 안 가득 터져나오는 이 순간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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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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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여년 만에 다시금 접하는 한식은 엔리의 기억 속에 묻혀 있던 추억을 향수와 함께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다. 그동안 공작 가문의 기사로서 부족함 없이 먹고 자랐음에도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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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야 판타지 세계 음식이 얼마나 대단하건 치킨에 콜라 한 잔이 땡기는 걸 막을 수는 없었지. 이건 그 욕구를 얼마간 채워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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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도시락을 텅텅 비운 엔리는 아쉽다는 듯 손가락에 묻은 양념을 쪽쪽 빨면서 요기를 마무리했다. 그 모습을 본 코델리아가 감탄사를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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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방법을 아시네요!? 다른 사람들은 포크로 깨작깨작…… 아니, 조신스럽게 드시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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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바닥 스트릿 출신이라 뭐든 잘 주워먹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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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바닥…? 아, 혹시 평민 출신이시라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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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천민 출신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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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델리아는 그리 물으며 손수건을 건넸다. 엔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수건을 건네받아 손가락에 남은 타액과 양념을 닦아냈다. 이런 고급스러운 손수건을 휴지 대용으로 쓰는 게 마음에 퍽 걸리긴 했지만 뭐. 본인이 주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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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주변에 선 남자 생도들은 그 귀한 손수건으로 양념이나 닦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지, 매서운 눈빛을 쏘아붙이며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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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제가 아무런 힘 없는 평민이거나 빽 없는 기사였더라면 겁 먹고 벌벌 떨 정도로 매서운 시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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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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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엔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 시선을 마주보았다. 개중에는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 섞여 있었는데, 엔리는 이 녀석들을 대체 어디서 본 건지 떠올리려 애써 머리를 굴렸다. 한참동안 머리를 굴려도 마땅히 떠오르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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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먹었습니다. 답례라도 드리고 싶은데 제가 마땅히 드릴 게 없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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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뇨! 괜찮아요! 보답을 바라고 한 일은 아니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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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입니까? 그렇군요. 그럼 평소 동경하던 기사를 향한 선물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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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중얼거리던 엔리는 뒤늦게 저 징그러운 남자 생도들의 얼굴을 어디에서 보았는지를 떠올렸다. 한 놈은 자신에게 끈질기게 집착하던 테오도르 기사단장을, 또 한 명은 왕좌 위에서 뒤룩뒤룩 녹아내린 국왕을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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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한 명이 누구인지는 모르겠다만…… 저 둘 사이에 끼어 있다는 건 그 또한 보통 귀족은 아니란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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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제야 우리 아가씨께서 이 여자를 창녀니 뭐니 불러댔던 이유에 대해 알 수 있었다. 기사단장의 아들이나 왕자를 꼬신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닐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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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야, 저 가슴은 못 이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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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팔한 십대 청춘의 육신으로 저 유혹을 이겨낼 수 있을 거 같지는 않다. 아무리 귀족이라고 할 지라도 그렇다. 하물며 그녀는 십대의 본능을 자극하는 몸매에 더해 이 세상에선 본 적도 없는 문물로 상대를 매혹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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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이건 왕족이건 함락당하는 건 당연한 일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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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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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리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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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마침 잘 됐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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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꺄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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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으로 벤치 이용권을 드리겠습니다. 제가 돌아올 때까지 따뜻하게 뎁혀 놓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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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네에? 그게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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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여자에게 손을 대자 날카로운 살기가 마구 날아든다. 엔리는 그들이 보내는 시선을 가볍게 무시한 뒤 비명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한 걸음 내딛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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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로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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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해 있던 몸이 순식간에 최고 속도로 내달린다. 기사의 육신이 뿜어내는 각력은 말에 뒤쳐지지 않을 정도라서, 엔리의 몸은 앗- 하는 순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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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리가 사라지자, 뒤늦게 분을 싹히고 있던 이들이 코델리아를 향해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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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델리아 양! 괜찮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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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의 몸을 함부로 만지다니…… 저 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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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간 칼잡이란 것들은. 죄다 매너가 없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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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대로 기사단장의 아들, 3왕자, 마탑주의 제자가 내뱉은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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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치에 앉아 그들을 올려다보게 된 코델리아는 하하- 어색한 웃음을 내뱉으며 괜찮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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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놈, 돌아가면 바로 작위를 박탈하도록 아버님께 알려야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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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왕자가 말했다. 코델리아는 그 말에 화들짝 놀라며 그러지 말라고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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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뇨! 고작 이런 일로 박탈이라뇨…… 저는 정말 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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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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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이래도요! 만일 그런 짓을 하신다면 저는 앞으로 전하를 싫어하게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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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를 싫어하겠다. 순수하다면 순수하고 오만방자하다면 오만방자한 그 말이 3왕자의 마음을 꿰뚫었다. 사실, 이미 어장에 붙잡힌 물고기는 먹이를 주지 않겠다는 말에 껌뻑 죽을 수밖에 없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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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 차례 흥분을 가라앉힌 코델리아는 방금 전 모습을 감추었던 엔리를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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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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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델리아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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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는, 전부 방금 전처럼 달릴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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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순수한 질문이었다. 코델리아는 마법학부의 학생이었으므로 기사들의 움직임에 대해선 잘 몰랐다. 마찬가지로 정확하게는 모르는 3왕자와 마탑주 제자의 시선이 유일한 기사학부인 크리스토퍼를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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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게 몰려드는 시선에 잠시 침음성을 흘리던 크리스토퍼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저었다. 방금 전 움직임. 고작 한 번의 도움닫기로 전속력을 낼 수 있는 건 제아무리 기사라 할 지라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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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령 제 아버지라 할 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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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실을 깨달은 크리스토퍼는 이 자리에 있던 기사의 실력이 심상치 않음에 놀랐다. 과연 공작의 대리로 모습을 드러낼 정도는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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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적어도…… 기사단장급은 되어야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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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그럼 대단하신 기사님이 맞았네요! 나중에 가르침이라도 받는 게 어떠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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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가르침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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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제일검인 아버지를 두고서 다른 영지의 기사에게 검을 배우라는 터무니 없는 말에 당황한 크리스토퍼였지만, 그는 순진무구한 소녀의 얼굴을 앞에 두고서 거부할 정도로 담력이 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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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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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말로 그에게 가르침을 받으려는 시도 따위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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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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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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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오지 마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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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마법학부 생도 리엘은 지팡이를 마구 휘두르며 제게 다가오는 고블린들을 밀어냈다. 그러나 평소 이렇게 무거운 걸 제대로 드는 일도, 쥐고 휘두르는 일도 없던 그녀의 휘두름은 엉망진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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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는 체력도 점점 빠져나가고 있어서, 그 속도마저 조금씩 느려지고 있는 마당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지팡이 들 힘도 없어질 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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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이렇게 된 건 전부 다 저기 저 망할 남자친구 때문이었다. 바깥에서 한 번 해보고 싶다고 그렇게 징징거리기에 어쩔 수 없이 받아주었더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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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아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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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덩이에 화살 한 대를 맞고, 아까 전부터 비명 지르며 굴러다니고 있었으니까. 정말이지 아무런 도움도 안 되는 녀석이었다. 정이 뚝 떨어질 만치 한심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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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 말래도오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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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제게 다가오는 고블린들을 향해 계속해서 소리만 버럭버럭 내질렀다. 고블린들은 그런 그녀와 남자를 보며 킬킬거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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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그녀가 조금만 더 침착했더라면, 남자친구가 엉덩이에 화살을 맞건 말건 신경 쓰지 않고 주문 영창에 집중했더라면, 하다 못해 마법학부가 아닌 기사학부 애인을 가졌더라면 일이 이렇게 되지는 않았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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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마법 영창은 상당한 집중력을 요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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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황, 불안, 고통, 두려움을 느끼며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만만한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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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마법학부 필수 교양에 명상 수업이 있는 게 아니었다. 침착과 진정은 마법사의 덕목이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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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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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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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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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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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동안 지팡이 휘두르며 물러서던 그녀는 기어이 그 지팡이마저 빼앗기고 말았고, 전장의 신이라 불리던 마법사는 일개 연약한 소녀로 전락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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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엘은 눈을 질끈 감고 몸을 덜덜 떨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 지는 그녀도 알지 못 했다. 저 녹슨 쇠꼬챙이에 찔려 살해당하려나? 아니면 아예 납치당해 평생 고블린의 애를 낳는 모판으로 전락할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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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에 눈물콧물 질질 짜내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녀가 깔고 앉았던 치맛자락에서 축축함마저 느껴질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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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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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카로운 파열음이 그녀의 귓가에 울려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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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자신을 내몰았던 징그러운 소귀小鬼들의 비명소리가 뒤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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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에에에에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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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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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약! 끼야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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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차례 비명이 터져 나온 이례, 적막이 그곳을 집어 삼켰다. 리엘은 아주 천천히, 겁에 질린 어린아이가 공포의 대상이 물러갔을 때를 확인할 때처럼 천천히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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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엔 기사가 서 있었다. 녹색 머리의 기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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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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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어어- 괘, 괜찮. 괜찮…… 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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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덜덜 떨면서 몸을 일으키려다말고 제 다리가 삐엇음을 확인했다. 그 모습을 본 엔리는 일어나려던 그녀를 멈춰세우고 품 속에서 예비용 포션을 꺼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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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십시오. 저쪽을 처리하고 올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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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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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리의 턱짓에 따라 고개 돌린 리엘은 엉덩이를 훤히 드러낸 채로 기절한 제 애인을 발견했다. 더러운 엉덩이가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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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 머리의 기사는 엉덩이에 화살 박힌 벨에게 다가간 뒤, 숨도 쉬지 않고 화살을 뽑아내곤 그 자리에 포션을 들이부었다. 그 고통에 기절해있던 벨이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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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으으으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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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일어나셨네. 조금만 참으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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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아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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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길래 밖에서 엄한 짓은 왜 해서…… 안 그래도 고블린 놈들은 후각에 민감해서 살냄새도 잘 맡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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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부턴 조심하라느니 어쩌느니 하는 말들은 그녀의 귓가에 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귓가에는 오직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의 하모니만이 울려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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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자주 봐온 동화 속 한 장면. 백마 탄 기사가 공주를 구하러 오는 소설 속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잠시 옷매무새를 정리한 리엘은 비틀거리는 다리를 애써 부여잡고 일어나 엔리의 곁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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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기, 기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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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제 괜찮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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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괘, 괜찮아요! 그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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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엘은 여지껏 없던 두근거림을 느끼며 엔리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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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인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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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물음에, 엔리는 표정을 살짝 굳히며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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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답을 들은 리엘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냅다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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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있는 방향이었기에, 엔리는 애써 붙잡지 않고 내버려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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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도 귀엽고 몸매도 나쁘지 않았지만, 엔리는 그녀의 고백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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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처녀가 무슨, 내가 만만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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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전까지 이 자리에서 떡치던 연놈의 고백을 받을 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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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교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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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지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엔리는 이브에게서 들은 한 마디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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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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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갑자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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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맘때쯤 열리잖아. 뭐가 갑자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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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평화롭게 농땡이나 치려고 했던 엔리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 그도 그럴 것이, 아가씨가 굳이 자신을 불러 이런 얘기를 꺼내는 건 한 가지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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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해. 너랑 루카, 둘 데려갈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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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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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만 있어? 목소리가 왜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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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아무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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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만 있으면 말해. 사교회를 안 가도 되는 방법을 알려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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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엔리는 귀를 쫑긋 세웠다. 귀찮은 사교회에 안 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니? 그게 뭔지 들어나 볼 법 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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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왕실에 쳐들어가 선전포고해. 그리고 다 때려부수렴. 그럼 사교회고 뭐고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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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 그런 짓 했다간 전쟁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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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사교회가 가기 싫으면 전쟁이라도 일으키렴. 그런 말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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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말이지만, 사교회가 귀찮다고 전쟁을 일으킬 미치광이는 없었다. 사교회가 귀찮은 일이라면 전쟁은 끔찍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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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도 제대로 못 하고, 목욕이나 휴식은 사치였으며, 제아무리 엔리라고 할 지라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 대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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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령이라면 모를까 귀찮다는 이유로 선택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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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보다 아가씨. 언제는 인맥 같은 건 쓰잘데기 없다고 안 만든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아카데미도 인맥 필요 없다고 안 가시는 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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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친목질 하지 않는 거랑 아예 칩거하는 거랑 같니? 전자는 고고한 늑대지만 후자는 왕따야. 집단에게 따돌림 당하면 공작이고 뭐고 골로 가는 거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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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아가씨. 고고한 늑대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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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질래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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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브가 악역영애다운 폭력성을 드러내고 나서야 집무실을 나선 엔리는 사교회 파티에 입을 옷가지들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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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단장과 부단장이 동시에 영지를 비워도 좋은 건가 싶었지만, 그건 엔리가 판단할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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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가 말하기를 사교회는 전쟁터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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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터에 빈손으로 나가는 멍청이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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될 수 있는 한 최대한 많은 무장을 들고 나가는 것이 전쟁의 드레스 코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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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보다 이 놈의 나라는 뭐만 했다 하면 파티를 여네…… 이러다 망하는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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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리는 전생의 역사에서 보았던 여러 불안한 요소들을 떠올리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설마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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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기나 마력 열차 따위를 보고 있으면 산업 혁명과 더불어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혁명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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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디 이 세상에 붉은 낫과 망치가 대두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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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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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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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 그대로 있는 놈들이 모여서 웃고 떠드는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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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하기 짝이 없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자리지만. 단순한 것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 사람인지라. 사교회는 겉으로는 귀족들의 친목회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말 없는 전쟁터로 변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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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를 염탐하고, 누가 누구와 사이가 좋은 지 파악하고, 영지의 핵심정보를 빼내고, 자식을 이용해 서로 동맹을 맺고…… 문자 그대로 창칼만 오가지 않는 냉전 그 자체의 장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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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만 들으면 누가 좋아서 이 전쟁터에 끼겠느냐 싶겠지만, 오히려 그 반대였다. 칼날이 무섭다고 칼을 갈지 않으면 전쟁에 대비할 수 없듯이. 사교회라는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 곧 실제 전쟁으로 이어지지 않는 지름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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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의 다섯 기둥 중 하나! 클라우디아 공작과 그 영애께서 입장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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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는 공작과 함께 사교회장에 발을 디뎠다. 그 곁에는 호위기사인 루카와 엔리가 함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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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외부 활동을 전혀 하지 않는 이브를 보게 된 이들은 아주 잘 되었다는 듯 매섭게 눈동자를 굴렸다. 그녀가 단순히 하급 귀족 나부랭이였더라면 그만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겠지만, 그녀는 공작 영애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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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를 떠받치는 다섯 개의 기둥 중 하나. 심지어 어린 나이에 사실상 공작을 실각시키고 그 권력을 차지했다는 소문이 도는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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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해져서 나쁠 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친해지지 않으면 치명적이게 될 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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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누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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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일행이 안으로 드나들기가 무섭게, 금발을 찰랑거리는 장발의 남성이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공작을 상대로도 아무 거리낌 없이 다가올 수 있는 건 이 나라에서 오직 한 부류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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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뵙습니다. 아우렐리아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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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자 얼굴 보기가 이토록 힘들어서야 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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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정이 여의치 못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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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 영애는 그리 말하며 얼굴에 웃음으로 만들어진 가면을 장착했다. 그 아름다운 미소에 속아 넘어간 귀족이 대체 얼마나 될까. 아우렐리아는 쓴웃음을 내지으며 콧바람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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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각하도 오랜만입니다. 사위로서 자주 찾아뵀어야 하는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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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닙니다. 전하. 저희야말로 먼저 인사드리지 못 해 죄송할 따름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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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아뇨, 저야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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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찮기 그지 없는 귀족들의 허례허식이 시작되었음을 본 엔리는 표정을 살짝 굳히며 루카의 옆구리를 살짝 찔렀다. 곧장 반응한 루카가 눈동자만 슬쩍 굴려 그를 바라보는 가운데, 엔리는 남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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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먹고 올 테니까 여기 잘 지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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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아니, 단장. 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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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있다가 교대해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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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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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나누는 이들에게 들키지 않게 몸을 움직인 엔리는 자연스럽게 파티 음식이 놓인 장소로 향했다. 그릇과 집게를 들고 음식을 담은 뒤, 그걸 먹을 포크 한 자루를 챙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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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크 같은 위험한 물건이 여기 있는 걸 보면 이 사교회의 보안 의식도 바닥을 긴다는 걸 알 수 있다. 이걸로도 충분히 사람을 죽일 수 있는데…… 사교회 벽면에 붙여놓은 기사들로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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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쓰잘데기 없는 생각을 하며 음식을 음미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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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는 입에 맞으시나요? 기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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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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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리는 자신의 은폐가 뚫렸음에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실 뚫리는 일 자체가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의 은폐가 뭐 마법이나 초능력 같은 건 아니니까. 기척을 죽이고 시야의 사각으로 빠져나가는 기술일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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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처음부터 자신을 집요하게 노리는 이가 있다면 저를 찾아내는 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란 뜻이다. 다만 그 상대가 자신을 그렇게 지켜볼 필요가 없는 이라서 문제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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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의 샛별을 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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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예의차리지 않으셔도 괜찮답니다? 저희 사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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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그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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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아 그라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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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시아 왕국의 2왕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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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의 하나뿐인 공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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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제게 말을 걺으로서 그녀를 주시하던 시선이 제게로까지 옮겨 붙는다. 맘 편하게 식사는 못 하겠군. 그리 생각한 엔리는 접시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입가를 닦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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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은 들었답니다. 이번에도 엔리 경께서 대단한 공을 세우셨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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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아닌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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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었나요? 로엔그람 경으로부터 그렇게 들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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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히 잘못된 정보입니다. 그 아저씨. 공주님께 헛바람을 넣는 걸 보니 위험한 사람이군요. 징계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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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하-! 로엔그람 경을 그렇게 얘기하는 건 아마 엔리 경밖에 없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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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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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리는 속으로 로엔그람에 대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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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작전에서 손에 넣을 건 죄다 넣었기에 공을 양보했건만. 그걸 굳이 다 갖다 일러바쳤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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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다음 번에 또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기대하고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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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뭐. 기회가 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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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 실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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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그로란 어그로는 죄다 이쪽으로 옮겨놓고 스리슬쩍 빠져나가는 엘레노아를 지켜보던 엔리는 조심스레 다시 접시를 들어올렸다. 그러나 왕족과 친분이 있어 보이는 존재를 귀족들이 가만히 내버려둘 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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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서 달려든 귀족들이 인사 한 번 나눠보고자 말을 걸어대는 가운데, 그들을 일일이 상대하다간 끝이 없으리라 생각한 엔리는 적당히 말을 끊고서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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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 인기쟁이시네요? 엔리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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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누구……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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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또 다시 붙잡힌 엔리는 욕지거리 나오려던 입을 틀어막고 상대를 바라보았다. 이 세상이 정말로 로맨스판타지 소설 속이라면 그곳의 주인공일 것임이 확실시되는 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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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델리아 피에시타와 3왕자 카시우스가 그곳에 있었다. 엔리는 아까 전 엘레노아에게 그랬던 것처럼 예법을 갖춰 인사를 올린 뒤 두 사람을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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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입니다. 코델리아 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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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오랜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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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델리아는 반갑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예전과 달리 카시우스는 그 웃음을 보고 질투를 보내지 않았다. 코델리아라는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 익숙해졌을 뿐더러, 눈앞에 있는 엔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어렴풋이 깨달은 것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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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겉으로 보기에 엔리가 코델리아에게 별 흥미가 없어 보인단 점도 한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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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분은 이제 아예 달라붙어 다니시는 군요. 이제 공주님이라고 불러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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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아, 아니예요! 저랑 전하는 그런 관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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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관계를 보고 짓굿게 농담을 던지던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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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야아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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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물의 울음소리와 함께 유리창이 깨져나가는 소리가 가득 울려퍼졌다. 파티를 즐기던 귀족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이리저리 도망치는 가운데, 창가와 가까이 있던 그들에게도 마물이 덮쳐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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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임. 사람의 몸을 녹여버리고 그 어떤 타격과 참격도 통하지 않는 강력한 몬스터. 오직 몸뚱아리의 중심에 숨겨진 코어를 베어야만 목숨을 잃는 강력한 몬스터가 코델리아를 향해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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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꺄아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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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델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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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터에게 습격당하는 코델리아의 몸 위를 카시우스가 덮치듯 감싸안는 가운데, 두 사람은 아무리 기다려도 느껴지지 않는 고통에 의아하다는 듯 조심스레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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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뜬 그곳엔 포크 한 자루로 핵을 정확하게 찔러 슬라임을 무력화시키고 있는 엔리의 모습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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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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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네. 네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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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뭔 일인지…… 잠깐 보고 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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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와 포크를 두 사람에게 넘겨준 엔리는 곧장 무기를 찾아 떠났다. 그 뒷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던 코델리아는 화들짝 놀라며 눈을 껌뻑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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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델리아? 무슨 일 있나? 어디 다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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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뇨. 전하. 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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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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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델리아는 이것이 이벤트였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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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런 몬스터의 습격, 이를 구해주는 왕자님의 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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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런 부상을 치료할 수 있는 빛 마법의 각성 이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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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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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어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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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양손을 내려다보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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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손에서는 빛 한 줄기 터져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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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실습은 아무런 사고 없이 잘 진행되었다. 중간에 생도 하나가 화살을 맞는 사소한 찐빠가 생기긴 했지만, 숲 속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숨기길 원했던 피해자의 의견과 현장 담당관의 절묘한 합의로 인해 없던 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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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무사고 1일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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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동안 진행되는 현장 체험 실습. 당연한 말이지만 그 모든 이들을 공작저에서 맞이할 수는 없었다. 아카데미 생도들은 공작령에 있는 숙박업소로 여기저기 퍼져나갔다. 아카데미 생도이기 전에 귀족이니만큼 어느 정도 낙수 효과를 기대해볼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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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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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이들을 맞이할 수 없단 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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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손님은 받아들일 수 있단 뜻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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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입니다. 카시우스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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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오랜만이야. 클라우디아 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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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마로 드러눕는 바람에 먼저 찾아뵙지 못 한 점, 송구하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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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네. 꾀병에 걸렸다면서? 자네 기사에게 들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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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 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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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는 방긋 웃는 동시에 이를 박박 가는 소리를 애써 숨기며 눈동자를 굴렸다. 3왕자인 카시우스가 이 자리에 있는 건 그러려니 할 수 있었다. 그에게 안 좋은 감정이라고 해봐야 정치적인 이유로 자신을 사형시킨 것밖에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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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니 짜증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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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뭐, 왕세자를 죽이고 왕권을 손에 넣은 3왕자가 정통성과 정치적 영향력을 위해 자신을 죽인 건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에 비해 결코 이해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는 존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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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과 약혼까지 한 주제에 딴 여자에게 눈독 들이고, 그 여자를 차지하겠다고 형제끼리 싸움을 벌이다 패배해 폐위당하는 걸 넘어 아예 목숨까지 잃어버리곤 제 약혼자까지 죽게 만든 쓰레기는 결코 용서하지 못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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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쓰레기를 꼬신 탕녀가 제 눈앞에 앉아 있는 꼴은, 더더욱 못 보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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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브 공녀님! 저는 아카데미 마법학부 1학년, 피에시타 남작령의 코델리아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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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 클라우디아라고 합니다. 코델리아 영애. 만나서 반가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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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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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는 왕족 앞에서 약점을 내보일 정도로 어리숙한 귀족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 전회차와 이번 회차를 포함하면 공작과 비슷한 나잇대가 아니던가? 속에 능구렁이 수백 마리는 기르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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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님을 만나고 싶어서 밤잠도 설치고 오늘만을 기다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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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밤잠을 줄이면 피부가 상한답니다?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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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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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긋 미소 짓던 이브 클라우디아는 부채를 펼쳐 입가를 가렸다. 그러지 않고서는 표정 변화를 도무지 숨길 수 없을 것만 같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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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꼬리만을 유지한 채 입꼬리를 끌어내린 이브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마구 내뱉으며 3왕자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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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전하. 오늘은 무슨 일로 방문해주셨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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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별 거 아닐세. 우리 코델리아 양이 자네와 꼭 만나고 싶다고 해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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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군요. 코델리아 영애? 영애는 무슨 일로 저와 만나고 싶으셨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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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님과 친해지고 싶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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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델리아가 테이블을 탁-! 내리치며 몸을 일으켰다. 옆에 앉아 있던 3왕자는 그리 일어나면서 생긴 가슴의 출렁거림에만 시선을 모두 빼앗긴 모양이었지만…… 그녀의 정면에 있던 이브는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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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는 그녀의 얼굴에서 순수함을 엿보았다. 다른 그 어떤 흑심도 섞이지 않은, 그저 순수한 호의와 선의. 친구가 되고 싶다는, 세살배기 코흘리개 꼬맹이나 떠올릴 법한 그런 순수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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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넌 그때도 그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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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는 처형당하기 직전 만났던 코델리아를 떠올렸다. 그녀가 3왕자에 의해 구금되었을 당시, 남 몰래 그녀를 찾아와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며 서글피 울던 그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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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상황이 그렇게 되었을 당시에도 순수함을 잊지 않았다. 모두가 마녀라고 부르며 돌 던지던 당시에도 너는 나와 친구가 되고 싶다고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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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서야 이브는 코델리아라는 존재가 어떻게 왕국을 표백시켰는지 알 수 있었다. 그 어떤 얼룩도 지워버릴 새하양은 시커멓게 물든 왕국에게 있어선 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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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무슨 소리인가요, 코델리아 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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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여, 역시 안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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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테이블에 앉아 차를 나눴으니. 저흰 이미 친구가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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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망감으로 물들어가던 코델리아의 얼굴에 희열이 가득 차오른다. 그 가증스러운 얼굴을 보면서 이브는 마주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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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이 여자는 이번 생에도 왕국을 새하얗게 물들일 것이다. 그 순수함에 빠져버린 얼룩들은 제 자신을 조금이라도 깨끗하게 만들기 위해 그 새하양에 손을 담글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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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마찬가지로, 지난 번과 같은 혼란이 일어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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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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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생에는 지난 번처럼 그저 휩쓸리기만 하지는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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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코델리아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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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위해서 준비해온 10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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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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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례 없던 현장 체험 학습을 경험한 생도들은 각자 나름의 감상평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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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딴 짓거리는 대체 왜 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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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시간이 남아도는 줄 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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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끔찍한데. 이딴 곳에서 먹고 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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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당연한 감상이었다. 공작령이 아무리 좋다고는 해도 왕국의 수도, 그라시아 령보다 좋을 수는 없는 바. 마찬가지로 그라시아 령에 지어진 아카데미보다 훌륭한 시설을 자랑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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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몇몇 이들은 수도에 버금가는 시설을 즐길 수 있었겠지. 하지만 모두가 그러지는 못 했다. 사람은 가진 것보다 가지지 못 한 것에 열을 내는 생물인 지라, 생도들은 자신이 최고급 시설을 누리지 못 했음에 분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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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리지 못 한 대다수의 생도가 불만을, 누릴 수 있던 극소수의 생도들도 별 만족스럽지 못 한 경험에 불평을 쏟아내는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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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리는 아카데미 생도들을 이곳으로 데려온 원흉과 대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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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만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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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제일기사단의 단장 테오도르 발헤임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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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발헤임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검자루를 지팡이 쥐듯 부여잡고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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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만 더,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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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갈면서 눈앞에 있는 상대에게 고개를 숙인다. 엔리는 슬슬 지루하다는 듯 기지개를 켜며 귀찮다는 감정을 노골적으로 표현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의 부탁을 아예 거부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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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한 놈을 상대하는 게 지루한 일인 건 맞아도 재미 없는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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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리는 어서 덤비라는 듯 가볍게 손을 까딱였다. 그 신호에 명백히 하수인 크리스토퍼가 달려나갔다. 나름 기사학부 수석이라는 자존심이 있긴 했지만, 현직 기사 앞에서 으스댈 정도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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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물며 상대는 이미 자신을 몇 번이고 고꾸라뜨렸던 강자. 아무런 망설임 없이 달려나간 크리스토퍼는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배운 왕국검술. 숱한 기사들에게 칭찬 받았던 그 기술이지만 엔리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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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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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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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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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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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는 정신을 차려보니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무엇에 당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기술의 격차. 마치 이쪽이 무얼 할 지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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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련의 가장 큰 문제점은 상대방이 제게 무언가 가르쳐 줄 마음이 없다는 점이었다. 엔리는 그저 가장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그를 쓰러트렸을 뿐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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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이것이 아무런 재능 없는 생도나 어린아이에게 행해지는 일이었더라면, 그건 충분히 학대라고 부를 법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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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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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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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는 왕실기사단장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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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이라는 단어로 똘똘 뭉친 천재였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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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굴하지 않는 정신력까지 겸비한 사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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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침,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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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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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끝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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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상대하고 있는 것이 상식의 틀에서 벗어난 존재였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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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겠다는 일방적인 선언 이후, 크리스토퍼는 엔리가 처음으로 먼저 움직이는 것을 목도했다. 제자리에서 가만히 기다릴 때에도 자신을 압도하던 상대가 움직이니, 그 결과는 놀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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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는 일격에 기절했다. 그는 엔리가 접근하는 것도, 검을 휘두르는 것도 보지 못 했다. 다만 그가 무언가를 하리란 확신은 있었기에, 애써 버텨낼 수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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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성은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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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리는 기절했음에도 두 발로 꼿꼿이 서서 버텨내는 크리스토퍼를 보며 살짝 감탄사를 터트렸다. 근성 있는 후배를 보는 건 그닥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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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그 모습을 보고자 귀찮음을 감수할 정도는 아니었을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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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절한 크리스토퍼가 깨어난 이후, 아카데미로 돌아가는 행렬에 합류하는 걸 확인한 엔리는 달력을 확인했다. 어느덧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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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는 아무것도 얻지 못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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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친구를 얻었고, 또 누군가는 깨달음을 얻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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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걸 마무리할 헤어짐의 때가 도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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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한동안은, 어쩌면 평생 동안은 그들을 다시 마주할 일이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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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생각하며 막사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려던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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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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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리는 이브의 갑작스런 호출을 받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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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가 피습당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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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서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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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생도들을 태운 열차가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나포 당했다는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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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같았더라면 납치된 귀족의 가문에서 알아서 몸값을 내고 구해오겠으나,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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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그 열차에는 귀족뿐만 아니라 3왕자까지 탑승해 있는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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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가까운 영지는 우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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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롭게 몸값을 준비하고 협상 따위를 기다릴 여유가 없단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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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가라. 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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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서 너의 무력을 보여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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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령을 받은 기사는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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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스 마이 레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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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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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명의 기사가 공작령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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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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밧줄에 묶인 아카데미 생도들은 불안에 덜덜 떨고 있었다. 그들을 책임져야 할 교수와 호위들은 진즉에 머리통에 구멍 하나가 생긴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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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왕자 카시우스는 이 상황에 침음성 흘리면서 납치범들을 노려보았다. 그들이 노리는 게 누구인지는 명확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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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질은 나 하나로 충분하지 않나. 다른 이들은 놓아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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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는 거야, 이 샌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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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시우스의 말을 들은 납치범이 어처구니 없다는 듯 다가와 그의 볼따구에 총구를 강하게 들이밀었다. 차가운 쇳덩이가 볼살과 이빨을 비비며 찢어놓는 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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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철분향이 입안 가득 느껴지는 가운데, 다른 납치범이 왕자의 볼을 찌르는 납치범을 향해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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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 중요한 인질이다. 위험한 짓은 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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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앙? 안 쏜다고. 누굴 등신으로 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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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화를 엿들은 카시우스는 이들이 하나로 뭉친 조직이 아님을 깨달았다. 동시에 머릿 속에선 감히 왕족을 노리고 이런 짓을 저지를 조직들의 목록이 스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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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데모니엄, 칸의 전사들, 칠왕국의 잔당, 이국의 무리, 단순한 도적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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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순간, 카시우스는 강렬한 풀내음을 느끼고 멈칫했다. 그가 아는 한 이런 풀냄새를 풍기는 종족이란 단 하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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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왕국연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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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프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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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이 대륙에서 가장 많은 영토를 가지고 있던, 지금은 왕국에 의해 그 대부분을 빼앗기고 아주 좁은 수림 하나에 갇혀 사는, 그리하여 왕국을 질시하는 종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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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왕국연맹이란 단어를 들은 납치범들은 순간 입을 꾹 다물더니,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3왕자를 노려보았다. 대충 정답은 맞는 것 같지만 알게 된다고 한들 크게 바뀌는 건 없으니 내버려 두겠다는 듯한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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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전 그들이 말했던 대로, 카시우스의 가치는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의 값어치보다 비쌌기에. 고작 정체를 알아내었단 이유만으로 손을 대지는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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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속 요정들의 격도 바닥으로 떨어졌군. 이런 무자비한 습격이라니?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인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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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시우스는 자신들이 습격 당했던 상황을 떠올렸다. 어느 순간 나타난 마차가 열차와 나란히 달리기 시작했고, 늘 그러했듯 도적떼를 무시하고 나아가려던 열차는 마차에서 발사한 대포에 의해 반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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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 옆구리에 생겨난 구멍으로 도적떼들이 우르르 침투하는 가운데, 마차 안에 몰래 침투해 있던 녀석들도 동시에 움직여 순식간에 경비와 호위를 죽이고 그들이 있는 곳까지 점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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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날 며칠을 계획했는지 모를 이 습격에 아카데미 생도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들은 모두 마법사고 기사였지만, 실전 경험이 풍부한 백전노장은 아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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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까지나 배움을 받는 수습생. 자신들을 가르치던 교수의 머리통에 구멍이 뚫리고 몸에 납으로 된 쇠구슬이 박히는 데 침착할 수 있는 이들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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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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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이 사건은 국제적으로 지탄받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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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는 너희는, 얼마나 많은 이들을 죽이고 왕국을 세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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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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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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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뜸 납치범의 입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들이 터져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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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 아루, 기미, 하유, 피르…… 그 외에도 셀 수 없이 많지. 어때? 너는 너를 위해 죽은 이들의 이름을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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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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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잊지 않아! 너희 인간들이 수 년전 은원도 잊어버리는 데 반해, 우리는 수백 년 묵은 은혜도 잊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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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분이 터져나온다. 인간의 한평생보다 기나긴 세월 쌓아온 원한이, 이제 막 십여년 살아온 카시우스는 이해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깊이 묵은 관계가 그를 쥐어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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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져나오는 감정에 압도당한 카시우스는 할 말을 잃고 입을 꾹 다물면서도, 그저 반박하기 위한 말을 입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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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는 목적지가 정해져 있지. 너희들이 아무리 용을 써도 목적지를 바꾸는 짓 따위는 하지 못 할 거다. 그리고 열차가 다음 정착지에 도착하면 그걸로 끝. 너희는 모두 체포당할 것이고, 사형 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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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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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가 여전히 이토록 태연할 수 있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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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쯤이면 열차가 나포되었음이 통신석을 통해 공유되었을 것이고, 왕자가 납치되었음에 경악한 왕국에선 비상사태를 선포해 기사와 마법사들을, 군대를 소집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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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아무리 잘나더라도 왕국군과 정면에서 맞붙어 승리를 차지할 수는 없다. 그런 일이 가능했더라면 애진즉에 왕국을 상대로 승리를 차지하고 그 땅을 차지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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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말을 들은 반왕국연맹의 엘프는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비웃음의 의미가 가득 담긴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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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너희 인간의 상상력이 대단하긴 하더군. 엘프들은 평생 듣도보도 못 한 물건들을 만들어내. 당장 이것만 하더라도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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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프는 그리 말하며 제 손에 든 총을 들어올렸다. 천둥을 내는 도구. 엘프들을 더더욱 좁은 구역으로 내몬 물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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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동시에 백발백중의 사수인 엘프들에게 있어 더더욱 찰떡궁합인 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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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년 살아온 엘프도 이런 물건을 만드는 방법 따윈 몰랐다. 그러나, 만들 줄 모른다고 하여서 사용할 줄 모르는 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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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문명의 이기가 언제까지고 너희들에게만 웃음 지을 거라고 생각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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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이이이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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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열차가 흔들리고 잠시 굉음이 울려퍼진다. 기우뚱거리던 열차가 균형을 되찾은 순간, 카시우스는 무언가 바뀌었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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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 보이는 풍경이 바뀌었다. 정확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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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가 향하는 방향이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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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이 누구인지 잊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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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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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자연의 사랑을 받는 종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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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사이며 드루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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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게 있어 실시간으로 궤도를 만드는 것쯤은 무척이나 간단한 일이었다. 이를 이용해 열차를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끄는 것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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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오로지 엘프에게만 허락된 기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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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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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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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의 꼬리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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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을 바라보며 주변을 경계하던 호크는 저 멀리, 먼지구름을 피워내며 달려드는 말 한 필을 보면서 총을 들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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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지만 여긴 이미 우리가 선점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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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아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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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을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강력한 천둥이 친다. 눈앞은 순식간에 탄연으로 가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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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캐한 연기에 콜록거리며 손을 내저은 호크는 이쪽을 향해 달려들던 기수가 총에 맞고 떨어졌음을 확신했다. 연기 때문에 보진 못 했지만 이쪽을 향해 달려오던 말 위에 아무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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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실을 깨닫고 여유롭게 총알을 재장전하던 그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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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하나 물어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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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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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크는 제 앞에 나타난 녹색 머리 사내를 보면서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쳤다. 곧바로 총구를 들이밀며 매섭게 노려보았으나, 사내는 아랑곳 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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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아카데미 생도들이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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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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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크는 답하지 않고 그저 사내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사내는 묵묵히 호크를 바라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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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방금 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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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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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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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소리를 들은 제 동료들이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싶어 꼬리칸으로 들어온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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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는 문 너머 포박당한 시민들을 보고서 검을 뽑아들었다. 이곳이 자신이 목적지로 삼은 그곳임을 확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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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방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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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크는 감히 검자루를 잡는 시대착오적 기사님을 향해 총알을 발사했다. 기사가 아무리 재빨라도 총알보다 빠를 순 없음을 가르쳐주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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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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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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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다 더 가벼울 순 없는 소리가 한 번 가볍게 울려퍼지고 난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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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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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크를 포함한 일행들은 그대로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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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치범들을 쓰러트린 엔리는 걷는 속도를 높이며 앞칸으로 나아갔다. 총 소리가 연달아 두 번이나 울렸다. 앞에서도 무슨 일이 생겼음을 인지하고 있을 타이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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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리는 조심스레 눈을 감고 소리에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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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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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 한 번 가봐. 혹, 기사들이 벌써 뒤쫓아 왔을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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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엄마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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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리의 귀에는 앞칸과 그 너머, 열차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이 내뱉는 다양한 소음들이 들려왔다.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발걸음, 서 있는 누군가들을 향해 명령을 내리는 이의 목소리, 겁에 질린 어린아이의 울음소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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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든 소리를 기반으로 그의 머릿속에는 하나의 지도가 그려지고 있었다. 이 열차의 길이, 열차 안에 존재하는 모든 납치범들의 수, 그들이 지닌 무기의 종류.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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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대가 온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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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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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윽, 인질만 아니었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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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와 귀족들로 보이는 이들의 소리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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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뜬 엔리는 곧바로 검을 앞으로 내질렀다. 검을 내지르기가 무섭게 열린 문틈 너머로 칼에 찔린 납치범이 윽- 하고 멈춰서는 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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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자루를 밀며 문 너머로 향한 엔리는 놀란 듯 자신을 바라보는 납치범들을 보며 가볍게 검을 뽑아냈다. 피가 칼날을 타고 뚝뚝 흐르며 바닥을 적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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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발, 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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촤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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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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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독무대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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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Kn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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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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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증스러운 이름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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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아무것도 모르는 농부가 1미터 거리에서 기사와 만난다면 그는 칼을 휘두르는 것조차 보지 못할 것이며, 3미터 거리에서 만난다면 칼자루 잡는 것만 얼핏 볼 수 있을 것이고, 10미터 거리에서 만난다면 그제야 기사가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기사란 존재는…………(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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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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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칼 보후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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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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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의 복도는 무척이나 좁다. 사람 하나가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으며, 좌석과 사람, 온갖 짐들이 통행에 방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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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납치범들이 열차를 목표물로 삼은 게 아니다. 이 안에서라면 기사들의 초인적인 움직임이나 마법사들의 마법 사용을 막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에. 배우지 못 한 무지렁이들도 총이라는 문명의 이기를 통해 초인을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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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론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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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 으아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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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구를 마구 돌리며 상대를 겨낭한다. 그러나 상대를 조준하는 그 순간, 이미 상대는 그 자리에서 벗어난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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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는 복도뿐만 아니라 좌석 의자, 벽, 천장. 밟을 수 있는 틈이 미세하게 존재하는 틈들에 거미처럼 달라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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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움직임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기괴한 움직임. 그 움직임 앞에선 정말로 거미줄에 붙잡힌 벌레마냥 마땅한 저항도 하지 못 했다. 먹잇감을 노리는 노련한 사냥꾼에게 사냥당하듯, 어느 순간 날카로운 검끝이 딱 한 치 급소를 찌르고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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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 으으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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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 구멍이 뚫린 납치범들은 생명을 담은 둑에 구멍이 난 것마냥 다급히 손으로 그 구멍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밑 빠진 둑에 물이 차오를 수 없듯이, 구멍난 신체를 그깟 응급조치로 되돌릴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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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썩- 많은 피를 잃어버린 납치범이 쓰러지자, 엔리는 가볍게 검을 털어내며 앞칸으로 향했다. 그렇게 문을 연 순간, 그가 들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납치범들이 곧장 총구를 들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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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토록 소리내지 않으려 애썼음에도 결국 침입을 들키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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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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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치범이 소리치는 것과 동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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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리의 시계(視界)가 멈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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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세상이 한 폭의 그림에 담긴 듯 했다. 멈춰버린 세상 속, 엔리는 조용히 눈동자를 굴리며 납치범들을 바라보았다. 그 중에 한 명, 얼굴에 뒤집어 쓴 복면으로도 가리지 못 한 특징적인 귀가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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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살처럼 뾰족하게 튀어나온 귀. 엘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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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쟁이가 있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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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알았나 했더니만, 청력이 엔리 못지 않게 좋은 엘프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엔리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제게 겨눠진 총구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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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리가 아무리 빠르게 움직여도 총알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건 불가능했다. 마찬가지로 검을 대여섯 번 휘둘러 총알 대여섯 개를 베어내는 일또한 불가능했다. 그런 일이 가능했더라면 세상은 진즉에 엔리 왕국과 그곳에서 살아가는 노예들로 정리됐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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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총알보다 빠르게 움직이지 못 한다고 하여서 총알을 피할 수 없는 건 아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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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가지로 총알보다 느리다고해서 총알을 벨 수 없는 것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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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리의 시선이 총구가 향하는 그 끝을 향한다. 그의 머릿속에는 저 총구가 향하는 방향이 마치 레이저처럼 선명하게 엿보였다. 그리하여 다섯 개의 총알이 겹치는 한 지점을 찾아낼 수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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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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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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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의 휘두름으로 제 몸을 향해 날아드는 총알을 모조리 베어낼 수 있었다. 사수가 한 번 기회를 놓치면 그 다음은 온전히 기사의 차례였다. 엔리는 잽싸게 달려가 당황하는 납치범들의 목을 베어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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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뭇거릴 틈도 없이 곧장 앞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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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음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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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겁하다고 하진 않겠지, 기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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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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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그러들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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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리는 마법에 의해 우그러지는 열차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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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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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생도들의 납치를 주도한 건 반왕국연맹이지만, 납치범들 모두가 반왕국연맹의 일원인 건 아니었다. 납치범들 중에는 그냥 인생이 망해버린 범죄자나 귀족에게 엿을 먹이고자 하는 복수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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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두 명이면 모를까, 수십 명을 모조리 연맹원만으로 모집할 수는 없었다. 그만한 수를 몰래 모으는 것도 문제였지만 만에 하나 작전이 실패했을 경우 연맹에 크나큰 타격으로 이어질 수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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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모은 납치범들은 당연히 문제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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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씨이버어얼… 뭘 먹으면 젖탱이가 이렇게 커지십니까? 귀족 나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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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프 나린은 인상을 찌푸리며 범죄자 녀석이 총구로 아카데미 생도 중 한 명의 가슴을 쿡쿡 찌르는 것을 지켜보았다. 왕자에게 그런 짓을 했다면 곧장 말렸겠지만, 귀족 한 명쯤 건드리는 건 그리 큰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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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 이건 뭐, 내가 봤던 어떤 창녀보다도 크네. 나으리. 아예 그쪽으로 전향하시는 건 어떠십니까? 제가 단골이 되어드리겠습니다. 어떠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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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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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쿠, 무서워라. ─이 씨발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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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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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곳에서 들릴 거라 생각한 적 없는, 날 것의 폭력으로부터 발현된 소리가 울려퍼진다. 화들짝 놀란 귀족들이 소리가 들린 방향을 바라보는 가운데, 뺨을 얻어맞은 코델리아 영애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납치범을 올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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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의 뺨을 후려친 납치범은 평민이 귀족의 몸에 손을 댔다는 배덕감에 흥분한 듯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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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응? 아직도 너희 저택인 줄 알아? 여기가 안방 같아? 편안해? 불편하게 해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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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꺄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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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채를 휘어잡고 몸을 강제로 일으킨다. 고통과 공포에 젖은 코델리아는 그저 눈을 질끈 감고 덜덜 떨어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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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습을 본 납치범이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가학심을 끌어올리는 가운데, 열차 안 온도를 일순간 낮춰버릴 정도로 차갑고 매서운 목소리가 낮게 울려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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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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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민이라면 자연스럽게 몸이 굳을 수밖에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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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천적인 푸른 피로 자아낸 카리스마가 강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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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게 손끝 하나라도 대면, 죽는 것보다 더 끔찍한 꼴을 보게 해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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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하하-! 어이쿠, 무서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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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치범은 분명 그 목소리에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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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동시에 이 상황에선 아무도 자신을 해칠 수 없으리란 이성이 본능을 이겨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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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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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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꽈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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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치범의 손이 코델리아의 가슴을 거칠게 쥐어짠다. 창녀에게도 이렇게는 안 하겠다 싶을 정도로 강하게. 그저 고통을 주는 게 목적이라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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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댔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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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익-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말하자, 분개한 3왕자가 마구 몸을 흔들며 몸을 일으키려했다. 그러나 팔다리가 묶인 상황에서 제대로 움직일 수 있을 리가 만무. 납치범은 그런 3왕자를 비웃듯 내려다보며 나린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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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만 없으면 되는 거지? 이 년, 좀 써도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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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칸으론 가지 마라. 여차할 때를 대비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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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앞에서 하는 취미는 없는데…… 귀족 아가씨랑 한다니까 이상하게 흥분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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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흐. 음흉한 웃음을 흘리며 좌석 안쪽으로 코델리아를 집어던진 납치범이 천천히 바지춤을 풀기 시작하는 가운데, 나린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인간의 지저분한 성욕 배출 따위는 보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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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금방 끝나겠지. 인간의 성교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고 들었으니까. 기껏해야 3분에서 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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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도는 얼마든지 참아줄 수 있었다. 나린이 그리 생각하며 발광하는 아카데미 생도들을 경계하는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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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아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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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미세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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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프의 청력으로나 겨우 들을 정도로 작달막한 소음이 나린의 귓가에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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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그래도 열차는 시끄러운 물건이다. 마석을 태우며 내는 증기 소리, 굴러가는 바퀴 소리, 중간에 뻥 뚫린 객실에서 나는 바람 소리와 수많은 승객들이 내는 소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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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방금 들려온 총성은 그런 소음들 사이에서도 결코 좌시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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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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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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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입자다. 벌써 누군가 왔나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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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린의 말에 납치범은 화들짝 놀라며 옷매무새를 추슬렀다. 기껏 재미 좀 보나 했더니만…… 그는 기다란 총기를 들어올리며 열차의 문쪽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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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버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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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인간인 납치범의 귀에도 들릴 정도로 총성이 커지기 시작했다. 침입자가 정말로 가까이 다가왔음을 깨달은 납치범이 꿀꺽 침을 삼키는 가운데, 나린은 정령들을 불러모으며 앞으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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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리하고 오지. 여기서 기다리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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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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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린이 범죄자에게 아카데미 생도들을 맡기고 빠져나간 그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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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만을 기다리고 있던 크리스토퍼가 밧줄을 풀어헤치고 범죄자를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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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허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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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런 기습에 반응하지 못 한 범죄자는 총을 빼앗기고 마구 얻어맞았다. 얼굴이 피떡이 되어 원래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 할 정도가 되고 나서야, 크리스토퍼는 묶여있던 아카데미 생도들의 포박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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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전하. 조금 더 빨리 움직였어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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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괜찮다. 그보다, 코델리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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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도. 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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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석 안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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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훔치며 몸을 일으킨 코델리아는 애써 웃음을 되찾으려고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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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하하- 이거 어쩌죠…… 더럽혀져, 버렸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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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델리아. 그런 말 하지 마라. 너는 아무런 잘못도 없어. 끝까지 당한 것도 아니지 않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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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범죄자에게 몸 이곳저곳을 만져지기는 했지만 순결을 잃은 건 아니었다. 그리고 카시우스는 고작 그 정도로 더럽다며 사랑하는 여자를 쳐낼 정도로 순결에 집착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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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피 우는 코델리아를 끌어안아 달래준 뒤, 압수당한 지팡이를 회수한 3왕자는 아카데미 생도들을 이끌고 나린이 향했던 방향으로 전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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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군이 우리를 구하러 왔다고는 하지만, 귀족된 몸으로서 가만히 앉아만 있을 수는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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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로는 그런 명분이었지만, 실속도 있었다. 어쨌거나 이 열차에서 탈출하기 위해선 원군과 합류하는 쪽이 더 수월하리란 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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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열차의 뒷칸으로 향한 아카데미 생도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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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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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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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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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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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드드드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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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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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가 우그러드는 순간, 마법임을 깨달은 엔리는 곧장 몸을 날려 창문으로 빠져나갔다. 창틀을 붙잡고 열차 위로 올라탄 순간, 그가 발 딛고 있던 열차가 마치 큐브처럼 쪼그라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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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량 안에 있던 좌석이요 쇳덩어리 차체까지 모조리 박살난 그 모습을 본 엔리는 옅게 신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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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에 있었으면 죽었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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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의 무서움이란 이런 것이었다. 강력한 초인 기사조차 죽여버리는 위험성. 이 마법이 전장에서 펼쳐졌더라면 수십에서 수백에 달하는 병사가 아무렇지 않게 죽어버렸으리란 걸 쉬이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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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동시에─ 이런 마법사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세상을 지배하지 못 한 이유가 앞 차량에 뻥 뚫린 구멍을 통해 열차 안으로 진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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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왕국연맹이 열차를 나포할 때 만든 구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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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 한 량을 아무렇지 않게 박살낸 엘프 마법사는 구멍을 통해 들어선 엔리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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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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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순순히 맞아주겠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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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리는 굳이 적과 대화하지 않고서 검을 들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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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대보다 강력한 마법사들이 세상을 지배하지 못 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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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마법을 사용하는 데에는 시간과 준비가 필요하며, 기사는 그런 빈틈을 찌르는데 특화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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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엔리가 공작저에서 일하며 베고 찌르며 죽인 마법사의 수가 두 자릿수를 가볍게 넘어가니- 이 거리에선 마법사가 무슨 수를 강구하던 기사를 이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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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드리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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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프가 영창을 외우자 나무로 만들어진 차량이 꿈틀거리며 엔리의 몸을 노려온다. 그러나 그를 읽고 먼저 움직인 엔리는 그 공격들을 모조리 회피해내며 엘프의 앞까지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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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와 코가 맞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 엔리의 눈동자를 본 엘프는 화들짝 놀라며 뒷걸음질 쳤지만, 그보다 먼저 그의 검이 엘프의 목을 베어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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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컥, 커어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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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치범은 주동자로서 생포할 필요가 있었지만, 문제는 그가 강력한 마법사라는 점이었다. 그것도 차량 하나를 순식간에 우그러뜨릴 수 있는 강력한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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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아카데미 생도들에게 무슨 해를 끼칠 지 모르는 이상, 살려두는 건 악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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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욱- 검을 꽂아넣어 확인사살까지 마친 엔리는 제 뒷편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아무런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하게 서 있는 3왕자와 귀족들의 모습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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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검을 털어내며 납검한 엔리는 왕자 앞에 예를 갖추며 인사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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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하러 왔습니다.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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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어어- 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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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리. 클라우디아 령의 기사, 엔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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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칭찬할 수는 없는 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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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카데미 생도들은 꿀꺽 침만 삼킬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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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모두를 포함해 교수와 호위까지 혼자서 제압한 엘프 마법사를 단칼에 죽여버린 기사 앞에서 그깟 예법을 지적하는 귀족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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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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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 실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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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오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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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가를 받고서야 문을 연 기사는 조심스럽게 묵례를 올린 뒤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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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동자들의 확보가 모두 끝났습니다. 과연 전하의 말처럼 시민들 사이에 숨어 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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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한 병력이 움직이는데 도움이 없었을 리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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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시우스는 그리 읊조리다 뒤늦게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곤 기사에게 전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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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참, 범인 중에 얼굴이 뭉개진 녀석이 있을 텐데. 그 자식은 죽이지 말고 고문해. 누군지는 크리스토퍼에게 물어보면 알려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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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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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가 직접 죽이지 말고 고통을 주라고 명령한 만큼, 기사는 그 대상이 될 범죄자 녀석에게 동정을 보냈다. 무슨 짓을 저질렀기에 원한을 샀는지는 몰라도─ 녀석은 차라리 죽여달라고 빌만큼 끔찍한 나날들을 보내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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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를 모두 마친 기사가 방 안에서 빠져나가는 가운데, 카시우스는 오늘 날 있었던 일에 대해 떠올렸다. 반왕국연맹에 의해 아카데미 생도들이 탄 열차가 나포되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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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을 계기로 앞으로 열차의 탑승과 보안이 조금 더 철저해지리라. 어쩌면 열차에 탈 때마다 마법으로 검사를 받게될 수도 있었고. 마차에 대포가 달려서 다가오는 적들을 요격하게 될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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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수칙은 피로 쓰이는 법. 카시우스는 그 말뜻을 진정 이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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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하나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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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공작이 그런 전력을 숨기고 있었을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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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시우스는 공작령의 기사에 대해서 떠올렸다. 녹색 머리의 기사. 공작령에서 처음 보았을 땐 껄렁껄렁하고 일하기 싫어하는 모습이 한량, 파락호를 떠올리게 했지만…… 그의 실력을 본 뒤에는 그 모든 생각이 180도 뒤바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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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날 열차를 피습했던 반인류연맹과 그 주동자인 엘프는 결코 약하지 않았다. 아카데미 생도들을 보호하는 마법학과 교수와 왕족, 귀족들을 지키기 위해 파견된 호위기사들. 심지어 열차 안에서 난동을 막기 위해 모집된 경비들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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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이름을 한 끗 날리는 정예 엘리트들이었다. 농담이 아니라 어지간한 영지 하나쯤은 그들만으로도 점령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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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반인류연맹은 그런 호위들을 모조리 박살내버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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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리는 홀로 반인류연맹을 쓰러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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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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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영지를 무너뜨릴 수 있는 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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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영지에 쳐들어가 영주를 죽이고 도망칠 수 있는 강자가 공작령에 있다는 뜻이다. 그동안 이를 꽁꽁 감추다가 이제서야 그 존재를 드러낸 이유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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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시우스는 클라우디아 공작의 의도를 읽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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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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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왜 혼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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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기 귀찮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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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렇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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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석은 가져왔나? 다른 이들에게 연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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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깜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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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괘, 괜찮네. 열차 안에는 통신석이 마련되어 있으니까, 그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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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리와의 대화를 떠올린 카시우스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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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왜 아무 생각도 없는 것 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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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것이 정답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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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시우스를 포함한 아카데미 생도들중 그 누구도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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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로 권위 있는 자의 행동은 과대평가받기 마련이다. 초인적인 업적을 눈앞에서 펼친 엔리를 의심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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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의도가 무엇이냐. 클라우디아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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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시우스는 그리 고민을 쌓아올리며 하루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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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머리를 굴려본들 진실에 닿는 일은 없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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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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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빈에게나 주어지는 호화로운 방 안에서, 엔리는 통신석을 향해 보고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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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되어서. 오늘 안으로 돌아가는 건 어려울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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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알았어. 천천히 복귀해도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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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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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소. 못 해도 사흘 안으로 복귀하도록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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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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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말 실수를 깨달은 이브 공녀가 사흘 내로 복귀하란 명령을 내리는 가운데, 엔리는 조심스럽게 만약의 경우를 질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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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런데. 만일 스카웃 당하면 어떻게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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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이미 내 기사야. 다른 귀족과 봉신 계약을 맺은 기사에게 영입 제안 같은 멋 없는 짓은 하지 않을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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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좀 잘났잖아요. 그런 거 안 따지고 제안할 수도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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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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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돌하기 그지 없는 엔리의 발언에 할 말을 잃은 이브 공녀가 침묵을 유지하는 가운데, 그가 원하는 바를 뒤늦게 깨달은 이브는 한숨을 살짝 내쉬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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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멍아. 넌 내 꺼야. 주인 몰라보는 멍멍이는 거세해버릴 테니, 그렇게 알아. 알았니? 알았으면 짖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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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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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잘 했어. 잘 다녀와. ……내 나이가 몇인데, 이런 짓거리는 시키지 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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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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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다는 듯 얼굴 붉히며 통신을 끊는 이브 공녀를 보며 실실거리던 엔리는 통신석을 가방 안에 집어넣고 적당히 침대에 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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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그렇게 몸을 던지기가 무섭게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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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리 경. 깨어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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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에- 들어오십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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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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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통신을 끊기가 무섭게 방 안으로 들어선 메이드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테이블을 설치하고 간식거리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는 곧 그의 통신을 엿듣고 있었다는 증거였지만, 엔리는 별 개의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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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껏해봐야 왕실 안에서 ‘클라우디아 공작 영애는 자기 기사를 개라고 부른다.’ 라는 날조 0 사실 100에 입각한 소문이 나돌아다닐 뿐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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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메이드가 간식거리를 세팅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엔리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멈칫했다. 아무리 보아도 세팅되는 간식의 양이 지나치게 많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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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이 조금 많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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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기다려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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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팅을 끝마친 메이드는 그리 말한 뒤 곧장 바깥으로 나가 누군가를 데려왔다. 메이드가 데려온 상대를 본 엔리는 침대에서 일어나 조심스레 예법을 갖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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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님을 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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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괜찮답니다. 편히 있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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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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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발에 푸른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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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깔만 보자면 코델리아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온몸에서 기품을 뿜뿜 뿜어내는 존재. 그라시아 왕국의 2왕녀, 엘레노아 그라시아가 그곳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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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리는 긴장을 늦추지 못 한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곳은 여자들이 어플로 원나잇 상대를 찾고 친구들과 몇 명의 남자를 만났는지 자랑스럽게 떠들어대는 현대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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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정조가 상품으로 팔리는 시대. 왕족과 추문이라도 돌았다간 불경하다며 사형을 때리는 중세 왕정 시대였다. 그녀가 제 방에 드나들었단 소문이 퍼지기라도 했다간 큰일이었다. 아무리 엔리라고 해도 나라와 척을 지는 건 곤란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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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님께서 제 방에는 무슨 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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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안 되나요? 제가 어딜 갈 때마다 누군가의 허락을 받아야 할 줄은 몰랐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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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게는 몰라도 국왕 폐하께는 말씀드리시겠죠. 하물며 외간남자의 방에 들어간다고 한다면야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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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디도 지지 않으려는 엔리를 보며 뾰루퉁하게 볼을 부풀린 엘레노아는 대답 없이 지그시 엔리를 노려보다가, 자신이 졌다는 듯 가볍게 표정을 풀고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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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을 구해준 생명의 은인이자 영웅을 보러왔답니다. 이걸로도 부족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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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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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리는 그리 말하며 엘레노아의 맞은 편에 마주 앉았다. 허락도 없이 왕녀와 동석하는 모습에 둘을 시중들던 시녀가 화들짝 두 눈을 뜨기는 했지만, 굳이 앞에서 그 사실을 지적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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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아 본인도 동생을 구해준 영웅에게 그깟 예법을 지키지 않았노라 꾸짖을 정도로 막돼먹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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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저는 기사님들을 동경했답니다. 마왕에게 납치당한 공주를 구하러 떠나는 것도, 저주에 걸려 잠든 숲 속의 공주를 구하는 것도, 못된 왕비에 의해 탑에 유폐된 공주를 구한 것도 모두 기사님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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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렇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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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필 그 예시가 전부 다 동화 속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엘레노아가 기사에게 그닥 나쁘지 않은 이미지를 갖고 있는 건 확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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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야 그렇지 않고서야 기사 하나를 만나겠다고 남자 혼자 있는 방에 불쑥 찾아오지는 않았겠지. 그녀의 머릿속에선 만에 하나 일어날 참사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왜? 자신이 바로 기사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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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에 대한 환상이 강한 공주님이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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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제게 호의를 가진 사람을, 그것도 얼굴 예쁜 미녀를 매몰차게 내쫓을 수도 없는 노릇. 엔리는 결국 엘레노아의 이야기 상대가 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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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도 그닥 힘든 일은 아니었다. 엔리에게 있어선 그저 있었던 일들을 덤덤하게 이야기하면 될 뿐이었으니까. 듣는 사람을 위해 이야기를 멋들어지게 꾸며낼 필요또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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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쳐들어갔더니, 안에는 함정을 판 도적떼들이 기다리고 있더군요. 대략 80명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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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십 명이요!?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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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하던 대로 쓰러트렸습니다. 다수랑 싸울 때 중요한 건 둘러싸이지 않는 건데 다행히 입구가 좁아서 여럿이 저를 상대할 각이 나오지 않았거든요. 정면에서 셋 정도만 상대하면 되었는데, 도적 셋을 상대하는 건 기사라면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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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엔리가 겪은 일들 자체가 일반 사람들에게 있어선 허풍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허황된 이야기들이었으니까. 굳이 부풀려서 기대감을 높일 필요도 없었다. 반대로 성과를 줄이면 줄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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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참동안 이야기꽃을 피우며 눈동자를 반짝거리던 엘레노아는 이제 슬슬 시간이 되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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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같아서는 더 듣고 싶지만, 슬슬 시간이 다 됐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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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게 됐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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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이지, 이럴 때는 언니나 여동생이 없다는 게 아쉬울 정도예요. 만일 자매가 있었더라면 저 대신 분장시켜서 수업에 보낼 텐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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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그게 무슨…… 왕녀님은 2왕녀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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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런데요? 2왕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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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리가 대체 무슨 소리냐는 듯 엘레노아를 바라보자, 엘레노아는 그게 무슨 문제라도 되느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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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1왕녀 전하가 있으니까 2왕녀……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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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아. 엔리 경은 아직 궁중 예법에 익숙하지 않으신 모양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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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아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이며 제가 2왕녀인 이유에 대해 설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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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오라버니, 아우렐리아 왕자가 1왕자. 그 다음 제가 둘째니까 2왕녀, 마지막으로 카시우스가 막내 3왕자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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낳은 순서대로 번호가 붙여진다고 생각하면 외우기 쉽다고 이야기하는 엘레노아를 보며, 엔리는 자신의 생각이 옳았음을 다시금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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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이 로판이 아니고서야 이딴 빡대가리 같은 명칭은 붙이지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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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알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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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만에 다시 보는 국왕 앞에 무릎 꿇은 엔리는 왕에게서 치하를 받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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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하다. 엔리 경. 필마단기로 왕자와 생도들의 목숨을 구한 것. 더할나위 없는 용맹의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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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납치된 열차 안으로 쳐들어가 도적떼들을 베어내고 왕족과 귀족, 그리고 시민들의 목숨을 구한 것. 국왕은 이 사실을 대대적으로 발표하여 왕국의 명예와 위세를 지키려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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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왕국에는 이 정도의 저력이 있다! 상대가 누구든 전혀 두렵지 않으니 얼마든지 덤벼 보라는 기세등등한 모습을 내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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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용맹한 기사에게는 그만한 포상이 주어지는 법. 기사Knight 엔리 경. 자네에게 아카데미 교수직을 부여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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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은 싱긋 웃으며 그리 이야기했다. 엔리의 나이 열여덟. 다른 이들은 아카데미에 다니거나 다른 기사의 밑에서 종자 생활이나 하고 있을 나이에 교수직이라는 파격적인 제안을 건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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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엔리는 그 제안을 그닥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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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 싫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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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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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절의 의사를 입에 담은 그 순간, 알현실 안에 적막이 가득 내려앉는다. 왕의 제안을 거부하는 것은 불경스러운 행위. 곧장 불경죄로 감옥에 가두어도 할 말이 없는 일이었지만, 국왕은 침착을 유지하며 침음성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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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렇군. 엔리 경. 그렇다면 원하는 포상이 따로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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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껏 그를 영웅으로 만들어놓았거늘, 그를 체포해서 이 분위기를 깨뜨리고 싶지는 않았다. 나중에 따로 트집을 잡을 지언정, 지금 당장 그를 처벌하는 것은 악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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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폐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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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보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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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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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리는 기억을 더듬으며 국왕에게 제 의사를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왕실의 보물로 널리 알려진 그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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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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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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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디아 령으로 복귀한 엔리는 이브 공녀에게 멱살을 붙잡힌 채 탈탈 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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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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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 공녀는 눈빛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몸소 알려주겠다는 양, 무척이나 날카로운 눈빛으로 엔리를 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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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앞에서 그딴 망발을 저지르고, 저딴 거나 받아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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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켁, 아가씨. 슬슬 숨이 안 쉬어지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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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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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예. 그런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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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멍청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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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우우우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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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는 주먹을 쥐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마음 같아선 이 멍청이를 한 대 후려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제 주먹만 아플 거라는 사실을 알기에 가까스로 참아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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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화를 참아낸 이브는 씩씩 숨을 몰아쉬며 이를 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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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저건 왜 받아온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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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의 손가락이 창 밖, 공작저의 마당에서 뛰놀고 있는 한 마리 말을 가리켰다. 오자마자 공작령의 마구간을 정복하고, 마당을 제 집 안방마냥 뛰어다니는 왕실의 말. 명마 호르스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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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아가씨께서 예전에 갖고 싶다고 말씀하셨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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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십년도 더 된 이야기잖아! 이 멍청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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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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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어이 분을 참지 못 하고 주먹을 내지른 이브는 무슨 강철이라도 넣어놨나 싶을 정도로 단단한 엔리의 가슴팍에 까진 손등을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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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멍청이가 악질적인 것은 평소 중요한 것들은 죄다 기억하지 못 하는 주제에 흘러가듯 내뱉은 말 한 마디는 쓸데없이 잘 기억한다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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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여덟 살 때 갖고 놀던 장난감을 아직도 좋아하는 줄 알고 열여덟의 딸에게 선물한 아빠와도 같다. 이브는 자신이 이런 경험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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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을 게 있으면 먼저 나한테 물어를 보던가! 아니면 당장 쓸만한 마도구나 왕실 비전 마법 같은 걸 받아오든가! 호르스가 뭐야 호르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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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호르스가 나쁜 건 아니다. 실제로 십년 전. 왕국에서 가장 유명한 말을 고르자면 누구나 호르스를 꼽던 시기가 있다. 이브가 당시 호르스를 원했던 것도 왕국 최고의 말을 갖고 있으면 영입할 수 있는 기사의 수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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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로부터 십여년의 시간이 흘렀다. 왕국은 그동안 다양한 말들을 육성했고, 호르스는 최고의 위치에서 내려오게 되었다. 공작쯤되면 호르스 정도의 말은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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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꿔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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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 바꿔? 너 무슨 저잣거리 시장에서 물건 산 줄 아니? 그딴 소리나 하고 앉아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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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지적할 힘도 잃어버린 이브가 의자에 털썩 주저 앉는 가운데, 엔리는 뭐 어쩌겠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호르스. 최고는 아니지만 최상급은 되는 말이었다. 당장 공작저의 마구간에도 그와 비슷한 급이 몇 없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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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최고라는 영광을 지녔던 말. 시간이 흘러 그 영광에 녹이 슬기는 했지만…… 엔리는 그닥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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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많으면 좋은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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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간 이제 막 지쳐 쓰러진 이브 공녀가 1코인을 획득한 마리오마냥 펄떡 뛸 거라는 사실을 알기에 입을 꾹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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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히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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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스의 울음소리가 정원으로부터 울려퍼졌다. 여전히 자신이 최고인 줄 아는 과거의 영광이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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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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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의 좌하변. 남서부에 위치한 클라우디아 령은 왕국 전체의 식량을 담당하는 초거대 곡창지대였다. 당연히 이를 노리는 무뢰배들이 셀 수 없이 많았으며, 왕국 외부 야만족들이나 몬스터들이 가장 많이 노리는 목표물도 바로 이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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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막기 위해 클라우디아 공작령에선 기사 영입에 상당한 공을 들였는데, 이브 클라우디아가 실권을 잡으며 기존의 기사단을 모조리 갈아버리고 만든 것이 바로 흑장미 기사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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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머리에 장미와도 같은 미모, 그러면서도 가시 돋은 성격의 아가씨를 상징하는 흑장미를 심볼로 삼은 기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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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이 흑장미 기사단은 왕국 제일의 기사단과 자웅을 겨룰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기사단이었다. 엔리를 제외해놓고 보더라도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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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리는 아무리 공작령이라지만 왕실에 뒤처지지 않는 이유에 대해 궁금해한 적이 있었다. 이브는 그저 웃음지으며 선구안이 좋다고 말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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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을 말하자면 그녀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선구안이 좋다. 그럴 수밖에. 그야 그녀는 회귀자요, 회귀자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한다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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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장미 기사단. 영지 순찰을 마치고 복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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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정보. 그를 통한 시장 독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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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는 지금으로부터 십여년 뒤, 어떤 기사가 이름을 날리고 또 어떤 기사가 뛰어난 실력을 갖추었는지를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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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사가 아직 이름을 널리 떨치지 못 했을 때. 그때 신입 기사에게는 과분할 정도로 많은 돈과 이권을 제시하며 영입한다면- 당연하게도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기사란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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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장미 기사단은 그렇게 왕국 제일의 기사단 자리를 넘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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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지 순찰 중 마주친 몬스터 무리의 위치와 도적떼의 위치를 기록한 지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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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그래, 수고했어. 다른 특이사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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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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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는 루카의 보고를 들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난 회차에서 그녀를 따르며 끝까지 충절을 지키던 흑장미의 기사. 지난 번에는 기사단장이었지만 이번 생에는 엔리라는 돌연변이를 만난 덕택에 부단장으로 영입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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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녀 본인은 부단장이라는 위치에 만족하고 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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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만족을 넘어서 뭐랄까…… 사람 자체가 바뀐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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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는 그녀를 볼 때마다 시간이 되돌아갔음을 새삼스럽게 느낀다. 그도 그럴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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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 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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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망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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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를 마친 루카가 때마침 방으로 들어서던 엔리를 발견하고 잽싸게 달라붙는다. 그 모습을 본 엔리는 징글거린다는 듯 질색하며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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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헤, 단장. 보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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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그래. 떨어져 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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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은데요? 오랜만에 만난 부단장한테 너무 섭섭하신 거 아니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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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 부단장은 그리 말하며 볼을 부풀렸다. 숱한 기사들이 그녀의 웃는 얼굴 한 번 보고자 목숨을 내던지는 걸 생각해본다면 그 모습에는 금화 이상의 가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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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그녀를 매달고 있는 엔리는 관심 없다는 듯 마구 밀어내고 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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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는 그 모습을 보며 저 루카가 자신이 알던 루카가 맞는지 의심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지난 회차 때의 그녀는 어땠는가? 평생 웃음기 한 번 없는 얼굴로 사람을 죽이던 철혈의 기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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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저 푼수 같은 모습에서 기사단장으로서의 품위나 체면 따위는 일절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저게 그녀의 본 모습일 수도 있겠지. 기사단장이라는 자리에 짓눌려 개화하지 못 한 소녀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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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다. 노닥거리는 건 거기까지 하도록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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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의 말에 두 사람은 표정을 굳히고 그녀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한량 같은 모습이나 푼수 같은 모습을 연출하기는 했지만 두 사람의 정체성은 기사. 군주의 말을 따르며 적을 베어내는 칼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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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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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뭡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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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긴 뭐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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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그리 말하며 왕실로부터 내려온 공문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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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엔 소집령이라는 글자가 끄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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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징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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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인류연맹 토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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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왕족을 건드린 일에 대한 철저한 복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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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 가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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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싶겠지만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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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나름 세계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던 조선의 왕조차 21세기 현대의 직장인만 못 한 삶의 질을 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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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집권체제가 강력하게 자리잡아 왕의 권력과 나라의 재산이 왕실의 곳간으로 모이는 조선에서도 이렇거늘, 그보다 못 했던 유럽의 수많은 왕국들은 어떠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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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물며 그 중세 유럽의 왕국들을 배경으로 삼은 로판 속 세상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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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가난해야 정상…… 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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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리는 주변에 모여든 기사들을 보며 속으로 헛웃음을 터트렸다. 수백이 넘는 기사가 모여 있거늘 이 중 절반이 왕실에 소속되어 월급 받고 일하는 궁정기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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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각지에서 소집령을 내려 불러모은 병력의 절반 이상이 왕의 군대라는 게 무슨 의미인가. 왕의 군사력이 자신을 제외한 모든 귀족을 합친 것 이상이요, 왕이 굳이 귀족이나 기사에게 땅을 내주고 신하로 삼는 봉건제도를 유지할 필요가 없단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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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모인 듯 하니, 슬슬 회의를 시작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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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 제 2기사단의 기사단장. 로엔그람이 서두를 열자 서로를 관찰하며 기 싸움을 벌이던 기사들이 잠시 눈에 힘을 풀고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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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엔그람은 국왕에게서 내려받은 칙서를 펼치며 그 안에 적힌 내용을 읊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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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하신 국왕 폐하, 파라가일 그라시아 폐하께서 말씀하시길. ‘왕국 내에 불온한 종자들이 숨 쉬고 있도다. 나의 기사들은 내 신하가 보낸 기사들과 함께 녀석들을 뿌리 뽑고 잔당을 모두 없애도록 하라’ 라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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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말하는 잔당이 반왕국연맹이라는 사실을, 그들이 왕자의 납치를 시도했다가 실패하여 국왕이 무척이나 진노했다는 사실을, 그리하여 기어이 손해뿐인 토벌을 개최했단 사실을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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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여기저기서 한숨이 터져나온다. 반왕국연맹. 이미 수백년 전 초대 그라시아 국왕에 의해 쫓겨난 놈들이거늘, 바퀴벌레처럼 여기저기 숨어서 살아남은 놈들이다. 그것들을 모조리 쫓아내라는 건 하루이틀 일로 끝나지 않을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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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엔그람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걱정하지 말라는 듯 말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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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폐하께서 이리 말씀하시긴 했지만, 정말로 녀석들을 뿌리 뽑을 때까지 작전을 이어나갈 생각은 없다.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지. 잔당을 하나하나 뒤쫓는 건 기사가 아니라 병사가, 군대가 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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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우리를 부른 이유가 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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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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칙서에는 한 장의 지도가 겸해져 있었다. 열차 납치에 실패하고 체포당한 반왕국연맹의 일원들을 심문해 얻어낸 그들의 본거지가 적힌 지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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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이 소집령을 내려 기사들을 불러모은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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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거지를 쑥대밭으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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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봐도 함정임이 분명한 마법사들의 본거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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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뛰어들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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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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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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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사람 수십 명을 베어내는 기사나 도시 하나를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는 마법사가 있거늘 병사가 도대체 왜 필요하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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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핵폭탄으로 도시를 날려버리고, 전략폭격으로 나라 하나를 초토화시킬 수 있는 현대에 보병이 왜 필요하냐는 질문과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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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는 초인이지만, 그렇다고해서 결코 상대할 수 없는 무적의 존재는 아니다. 군대가 진을 짜고 쉴 틈 없이 압박한다면 병사만으로도 충분히 기사를 죽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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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는 손짓 한 방에 수백 명을 죽여버리는 강력한 포대였지만, 그 무지막지한 화력을 아무런 대가 없이 쏟아낼 수 있는 건 아니다. 준비와 시간이 필요했다. 평소에 훈련으로 쌓아올린 노력을 휘두르는 기사들에겐 군침흐르는 먹잇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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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식으로 먹고 먹히는 관계가 완성되었기 때문에 비로소 군대가 유지될 수 있고, 동시에 귀족정이 유지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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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토벌 원정에서 병사가 하나도 없는 이유또한 그것이었다. 병사는 마법사의 먹잇감일 뿐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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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 호르스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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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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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지군. 호르스의 주인이 나타났다곤 들었는데…… 그렇다면 자네가 엔리 경인가? 왕자님을 구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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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하니 말을 타고 나아가던 그때, 선두에서 전열을 이끌던 로엔그람이 뒤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그 물음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엔리는 로엔그람의 눈동자가 옅게 빛나는 것을 보고 멈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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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 있는 이 기사가 왕국의 근위대장인 테오도르와 같은 족속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눈치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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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하군.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자네가 테오도르 경과도 좋은 승부를 보였다는데 언제 한 번 나랑도 승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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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엔 이런 사람밖에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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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린다는 듯 표정을 굳히면서도 승낙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자, 로엔그람은 멈추지 않고 쉴 새 없이 말문을 열어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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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먹은 아저씨들의 특징일까, 그게 아니라면 원래 그런 사람인 걸까. 로엔그람은 전생에 다니던 회사의 부장님을 떠오르게 만들 정도로 집요하게 잡담을 쏟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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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땐 정말로 죽는 줄 알았지. 허나 당시엔 사랑스럽던 내 아내가 준 부적이 운 좋게 단검을 막아준 덕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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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엔그람 대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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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런. 가봐야겠군. 이야기는 나중에 이어서 하도록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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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마구 쏟아내던 와중, 앞에서 선두를 이끌던 기수가 목청 높이 소리쳤다. 부름을 들은 로엔그람이 앞으로 나아가자, 저 멀리 숲이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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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왕국연맹의 일원을 심문해 얻어낸 그들의 본거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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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의 입구에 도착한 로엔그람은 배낭 속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약물을 꺼내들더니, 조심스럽게 바닥에 흩뿌렸다. 수풀을 타고 줄줄 흘러내리던 액체가 땅 속 깊숙이 파고든 그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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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정보는 사실이었나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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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전체가 크게 빛나며 가득 깔린 마법진을 내보였다. 시약 반응이 나타나는 것을 확인한 로엔그람은 쓴웃음을 지으며 뒤로 슬쩍 물러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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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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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일날 뻔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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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는 마법사의 천적이었지만, 그렇다고 마법사가 마냥 무력하게 당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준비를 마친 마법사는 충분히 기사를 잡아 죽일 수 있는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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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곳은 반왕국연맹의 본거지. 엘프 마법사들이 아주 오랜 세월 보강했을 마법의 숲. 이 숲 자체가 마법사의 공방이나 다름 없는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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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아무리 강대한 기사라 할 지라도 여기에 들어서는 건 자살행위였다. 전국에서 수백 명의 기사를 모았다 하더라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로엔그람도 그 사실을 무척이나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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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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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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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의 공방이 괜히 숨겨져 있는 게 아니다. 이런 곳에 있다간 폐병 걸릴 거 같다는 생각이 드는 곳에 있는 이유가 별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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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로 드러난 성은 튼튼하지만, 반드시 무너지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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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들이 각자 행낭에 달고 온 부품들을 내려놓고 차례차례 조합하기 시작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순식간에 대포 수십 정이 완성된다. 그 안에 들어가는 것은 화염 마법이 각인된 대포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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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번의 포성과 함께 백린탄을 연상케하는 화염이 숲 전체에 마구 흩뿌려진다. 숲이 활활 불타오르기 시작한 모습을 바라보며, 로엔그람이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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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숲 주변을 포위하라! 기어나오는 쥐새끼들을 박멸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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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도라곤 일절 보이지 않는 철저한 실용 앞에서, 기사들은 각자 말을 박차고 튀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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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의 전력으로 5000의 병력도 토벌할 수 있는 포위섬멸진의 완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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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전공이라도 더 올리기 위하여 기사들이 엉덩이에 땀띠나도록 고삐를 후려치는 가운데, 엔리는 흑장미 기사단을 이끌고 천천히 이동했다. 작전 구역과는 상당히 떨어진, 동시에 사람들의 눈이 닿지 않는 장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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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도착한 엔리는 지루하다는 듯 말 위에서 하품을 쩍쩍 내뱉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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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맞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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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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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가씨도 대단하다니까. 이런 건 대체 어떻게 아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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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리가 기사단을 이끌고 도착한 이곳은 이브가 미리 전달해준 반왕국연맹의 도주로였다. 정확히는 그들이 파놓은 땅굴이 최종적으로 이어지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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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엘프가 드워프마냥 땅굴을 팔 거라곤 생각하지 못 한 다른 이들은 꿈에도 모르는 장소였다. 엘프란 숲의 요정. 숲 속에서 항전을 했으면 했지, 설마 땅굴을 파고 추하게 도망치리라 생각하리란 그리 쉽지 않은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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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땅바닥이 요상하게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땅이 푸욱 꺼지기 시작했다. 그 안에서 전신에 흙을 덕지덕지 묻힌 엘프들이 하나 둘 기어나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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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됐어, 이제 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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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도 걸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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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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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어나오려던 엘프들이 땅굴 출구에서 태연하게 기다리는 엔리 일행을 보며 멈칫하는 가운데, 엔리는 귀찮게 설명할 필요 없다는 듯 엘프의 멱살을 잡고 키조개 뽑듯 쭈우욱 뽑아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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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들어올린 엘프를 휙- 내던지자, 기다리고 있던 흑장미 기사단의 기사들이 그들을 포박하고 머리에 두건을 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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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리가 이 귀찮기 짝이 없는 작전에 참가한 이유는 반드시 참가하라는 이브 아가씨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요, 이브가 제 기사를 지원하면서까지 이곳으로 보낸 이유는 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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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 얌전히 투항하면 목숨만은 살려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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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곳 없는 엘프를, 그것도 숙련된 마법사를 아무렇지 않게 구할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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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에 떨던 엘프들은 도망치는 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인지, 하나둘 땅굴에서 빠져나와 순순히 투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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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프들을 사로잡은 흑장미 기사단은 그리 생포한 엘프들을 말 등에 짐 싣듯이 실어놓고서 천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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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리는 기사단을 이끄는 루카를 향해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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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해서 전달해라. 중간에 딴 길로 새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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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넵! 누구 명령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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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만약 들키면─ 베어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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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멸구. 목격자가 있다면 죽여서라도 그 입을 틀어막으라는 엔리의 말에 루카는 익숙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확답했다. 이 일은 결코 들켜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무고한 평민이 목격한다면 죽여서라도 그 입을 틀어막아야 할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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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번 작전에 참여한 기사들 중에서도 자신들처럼 엘프를 뒤로 빼돌리려는 이들이 있으리라. 엘프 아닌가. 숲의 요정. 미의 종족. 아름다우며 마법적인 적성마저 뛰어난 생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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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숫자만 많았더라도 인간을 넘어 이 세상을 지배했을 상위 종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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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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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하세요. 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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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 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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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의 걱정에 엔리는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제야 루카는 누가 누굴 걱정하냐는 듯 헛웃음을 털털 내뱉으며 고삐를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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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프들을 데리고 작전 구역을 빠져나가는 부하들을 바라보던 엔리는 저 멀리, 숲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멈춰선 걸 확인했다. 화포로 인해 발생한 화재가 꺼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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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습을 확인한 엔리는 엘프들이 빠져나왔던 땅굴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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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러 가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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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엔리는 땅굴 속으로 휙- 몸을 내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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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활 타오른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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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카만 잿더미들이 이곳에 숲이 있었다는 걸 증명하듯 우뚝 솟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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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으로 화재를 진압한 엘프들은 그 광경을 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이 평생 살아온, 또 지켜온 숲이 하루 아침에 초토화가 되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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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실 님. 도망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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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 먼저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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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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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누군가는 뒤를 지켜야하지 않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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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왕국연맹의 간부인 마르실은 그리 말하며 씁쓸한 미소를 피어냈다. 그 표정을 본 엘프들은 더 지체할 수 없다는 듯 하나 둘 땅굴 속으로 몸을 내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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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프들이 땅 속으로 숨어드는 모습을 지켜보던 마르실은 대체 언제부터 엘프의 위상이 땅바닥으로 떨어졌는지 모르겠단 생각에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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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라는 게, 참으로 야속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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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프의 위상은 이렇지 않았다. 과거엔 이러지 않았다. 엘프들은 모든 종족보다 훨씬 많은 땅을 제것마냥 활보했으며, 그 발걸음은 누구에게도 붙잡히지 않았고, 찬란한 태양은 늘 엘프들을 축복하듯 내리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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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어떠한가? 엘프들은 이제 햇볕 한 점 들지 않는 어두컴컴한 숲 속에서 숨어산다. 숲 바깥으로 나돌아다니다가 인간에게 붙잡혀 노예가 된 엘프가 수두룩하며, 그 영역은 전성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치 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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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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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프들을 이런 상태로 내몬 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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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이이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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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 날아드는 익숙한 화살 소리에 마르실은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휘적거렸다. 그녀 몸 위로 피어오른 배리어가 날아드는 화살을 튕겨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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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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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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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해, 화살을 튕겨낸 걸 보니 마법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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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을 불태운 인간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낸다. 전원이 마법으로 강화된 갑옷과 칼을 찬 기사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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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들은 마르실 한 사람을 보고도 결코 방심하거나 달려들지 않았다. 오히려 소리를 내질러 다른 동료들이 모일 때까지를 기다렸다. 마르실 또한 그런 기사들을 보며 굳이 마법을 영창해 자극하거나 하지 않고 얌전히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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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있었구나. 추악한 엘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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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도착한 로엔그람이 선두에 서서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 기수를 쥐었다. 그의 뒤로 대열한 기사들을 보고 있으면 마치 거대한 창 한 자루가 자신을 향해 겨눠지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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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두에 선 로엔그람이 이들의 대장이라는 걸 직감한 마르실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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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악? 인간에게 들으니 웃음이 절로 나오는 군. 인간들에겐 거울도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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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끄럽다. 더러운 반역자여! 위대한 그라시아 왕국의 혈족을 건드린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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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묻고 싶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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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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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만만하게 창을 겨누는 인간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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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너희는 우리가 뭘 잘못했기에 이렇게까지 핍박하는 거지? 이 땅은 원래 우리 엘프들의 땅이었고. 우리들의 고향이었다. 우리가 우리 고향에 사는 것이 그토록 불만이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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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소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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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그 물음에 로엔그람은 일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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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은 위대하신 초대 그라시아 국왕 폐하께서 정복한 영토요, 패배한 너희들은 초대 국왕 폐하께서 허락하신 땅에서만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주제 넘게 자신들에게 허락된 것 이상을 넘본 죄! 패배한 주제에 더 한 것을 넘보는 오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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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프들의 잘못이란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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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한 주제에 강자의 것을 넘본 것이 잘못이로다! 기사단, 거창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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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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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을 겨드랑이에 꽂아넣은 기사들이 박차를 가했다. 신호를 받은 말들이 매섭게 달려드는 가운데, 그 앞에 선 마르실은 열차가 제게 달려드는 듯한 압박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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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하나가 초인인 기사들의 결집은 마치 마법과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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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습을 지켜보던 마르실은 쓴웃음을 내지으며 손을 들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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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한 게 죄라 이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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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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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이야말로 죄인이 아니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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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아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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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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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下馬! 하마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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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왕국연맹의 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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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프 대마법사 마르실의 마법이 기사들의 결집을 와해시키며 솟구쳐 올랐다. 대마법사의 마법 앞에 와해된 기사들이 마구 낙마하는 가운데, 마르실은 그리 바닥을 구르는 기사들을 보며 다시 한 번 마법을 주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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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이 어디라고 생각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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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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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는 기사를 이기지 못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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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준비를 마친 마법사는 기사를 상대할 수 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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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을 제 공방처럼 사용하는 대마법사는 능히 정면에서 기사단을 깨부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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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라, 쓰레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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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마법이 기사단을 향해 내리꽂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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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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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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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실은 숨을 헐떡이며 몸 안에서 요동치는 마력을 가라앉혔다. 짧은 사이에 상당한 량의 마력을 소모해서인지, 머리가 핑 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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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다행인 점은 더 이상 그녀에게 해를 끼칠 기사가 남아있지 않다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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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들은 모조리 바닥에 쓰러져 기절해 있었다. 갑옷에 걸린 마법이 생명을 보호한 모양이지. 그러나 기절한 이상 그것도 의미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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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들을 마무리하기 위해 마법을 영창하려던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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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을 죽이는 건 조금 곤란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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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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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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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 했던 마르실이 다급히 뒤를 돌아보았을 무렵, 그녀는 제 팔이 하늘 높이 수놓는 모습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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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언제 꺼내서 휘두른 건지도 모를 검이 녹색 머리 기사의 손에 들려 있었다. 마르실은 잘려나간 팔뚝을 부여잡고서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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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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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리. 클라우디아 령의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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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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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마르실. 부탁이 하나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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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리는 자신이 빠져나왔던 땅굴을 가리키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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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막아주지 않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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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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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들이 못 찾게. 무너뜨려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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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물론 그가 그런 부탁을 하지 않았더라도 마르실은 땅굴을 무너뜨려 그 흔적을 찾을 수 없게 할 예정이었지만…… 자신을 공격한 인간이 그런 부탁을 해오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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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을 알 수 없어 그를 매섭게 노려보는 가운데, 엔리는 뭐 어쩔 거냐는 듯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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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굴이 다른 기사들한테 발견되면 조금 곤란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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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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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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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의도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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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실은 마법을 영창해 땅굴을 무너뜨렸다. 이것으로 인간들은 이곳에 땅굴이 있었단 사실도, 이 땅굴이 어디로 연결되어 있는 지도 알아내지 못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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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친 엘프들은 이것으로 살아남을 수 있겠지. 마르실은 그리 생각하며 녹색 머리의 기사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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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일 건가,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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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아무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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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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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리는 미안하다는 듯 쓴웃음을 지으며 검을 들어올렸다. 그녀를 살려주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뛰어난 실력을 가진 대마법사인 건 틀림 없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빼돌릴 만큼의 가치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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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아무리 엔리라고 할 지라도 이 장소에서 들키지 않고 그녀를 빼돌리는 건 무리였다. 적어도 이 장소에 있는 모든 기사를 죽이든가 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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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무리 엘프 대마법사라 할 지라도 이 자리에 있는 모든 기사를 죽이고 그들이 모시는 귀족 군주들과 척을 질 정도로 가치 있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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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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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실을 깨달은 마르실은 최후의 저항을 시작했다. 자신의 모든 마력을 끌어올려 조금이라도 더 많은 피해를 입히고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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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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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버둥친다고 벗어날 수 있을 정도로 엔리가 만만하지는 않았다. 그녀가 마력을 끌어올리기가 무섭게 복부에 칼이 박혔고, 그녀는 내장을 쏟아내며 바닥을 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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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언을 남길 시간도 없었다. 엔리는 고통이라도 덜어주고자 빼낸 칼날을 다시 한 번 휘둘렀다. 피가 낭자하고 머리가 바닥을 구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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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엘프 대마법사라 할 지라도 내장을 뽑아내고 머리를 잘랐는데 살아나진 않겠지. 그리 생각한 엔리는 시체를 뒤로 하고 바닥을 구르는 기사들을 향해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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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 속에서 포션을 꺼내 그들의 입 안에 흘러넣자, 하나둘 정신을 차린 기사들이 눈을 뜨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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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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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깼으면 어서 일어나시죠. 로엔그람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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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리 경…? 자네가 여긴 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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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리는 아무 말 없이 그저 몸을 돌려 바닥을 구르는 마르실의 시체를 가리켰다. 그 시체를 본 로엔그람은 뒤늦게 현 상황을 파악하고 기절 하기 전 기억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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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프 대마법사의 마법에 휩쓸려 차례차례 쓸려나가던 그 기억. 왕실 제2 기사단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당하던 그 장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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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가, 쓰러트린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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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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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말이라도 고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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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리의 갑옷에 생채기는커녕 흙먼지 하나 묻어있지 않음을 확인한 로엔그람은 엔리가 자신들을 띄워주기 위해 입 바른 말이나 하는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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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굳이 그 사실을 지적하진 않았다. 자신들보다 실력이 뛰어난 기사가 자신들을 띄워주는데 그걸 굳이 반박할 정도로 아둔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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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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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로 들었던 것보다 엘프들의 수가 적더군. 분명 어딘가 숨겨져 있는 게 분명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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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렇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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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찾아보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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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엔그람은 공을 나누겠다고 제안했다. 마르실만한 대마법사가 둘이나 있을 거라곤 생각되지 않으니, 이제부터 만나는 것들은 아무런 힘 없는 엘프일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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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타고 움직이는 기사들의 사냥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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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엔리는 잠시 고민하는 척 침음성을 흘리더니, 웃으며 거절의 멘트를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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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사양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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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괜찮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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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뭐.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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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리는 바닥을 바라보았다. 로엔그람이 따라 시선을 돌리자, 그곳엔 굴러다니는 엘프 대마법사의 머리가 있었다. 어째선지 홀로 주변과 색이 다른 땅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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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이미 충분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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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로엔그람은 기사의 귀감을 만났다는 듯 감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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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더미가 된 숲을 기사들이 내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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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햣하-! 잡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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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는 건 그냥 엘프, 도망치지 않는 건 훈련받은 엘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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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포해, 생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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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서 승리를 차지한 이들이 전리품을 약탈하는 시간. 만일 이게 왕국 영지와 영지의 싸움이었더라면 서로의 감정을 더럽히는 약탈은 금지되었겠지만, 이번 싸움은 영지와 영지의 싸움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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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와 범죄자들의 싸움. 정의와 악당의 싸움. 죄인을 처벌하는 심판봉이다. 덕택에 기사들도, 그들을 통제해야 할 로엔그람도 엘프들을 약탈하는 데 있어 일말의 망설임도 갖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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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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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으음…… 이상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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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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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프들의 수가 너무 적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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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을 일주한 로엔그람은 제 부하 기사에게 그리 읊조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 넓은 숲을 살아가는 엘프의 수가 지나치게 적다. 들었던 정보의 십분지 일도 안 될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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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우 가능성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심문받은 엘프가 끝까지 의리를 지켜내고 입을 닫았다는 것. 나머지 하나는 엘프들이 진즉에 배신을 알아차리고 미리 도망쳤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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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왕국의 고문기술자들은 아무리 고결한 기사라고 할 지라도 그 입을 열게 만들 수 있는 전문가들이었다. 숲 속에서 자기들끼리 어화둥둥하며 살아왔을 엘프가 버틸 수 있을 자극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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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쳤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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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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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엔그람의 눈이 숲을 포위하고 있던 기사들을 향해 돌아간다. 그러고보니 기사의 수가 처음보다 무척 줄었다. 다가가 물어보니 작전 중 생긴 부상으로 먼저 퇴각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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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리 있나. 로엔그람은 그들이 엘프들을 따로 빼돌렸음을 깨달았다. 하기야 그럴 이유는 충분했다. 이번 소집령은 왕의 권한을 이용한 것이라 소집된 기사와 그들의 군주에게 그 어떤 대가도 주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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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귀족으로 임명 받았을 때, 기사로 서임 받을 때 계약했던 약속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아무런 대가 없이 일하는 게 반가울 리 없다. 때문에 알아서 대가를 챙기는 행위는 당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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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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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엔그람은 뒤늦게 엔리가 이끌던 기사단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엔리 본인이 숲 속까지 들어와 그들을 구해주었던 지라 깜빡 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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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상황에 보여야 할 부하 기사단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그 또한 엘프를 몰래 빼돌렸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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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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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그가 그럴 리는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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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엔그람은 그리 생각하면서도 가볍게 넘어가지 못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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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 한 켠에는 계속해서 의구심이 남아 그를 괴롭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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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기사의 직감이란 보통 잘 들어맞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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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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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디아 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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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들에게 들키지 않고 무사히 영지에 도착한 흑장미 기사단은 사전에 교육받은 대로 별관에 차례차례 엘프들을 집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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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택 안에 도착한 엘프들은 공포에 덜덜 떨면서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인간에게 붙잡힌 엘프들이 어떻게 되는 지, 그들의 선조에게. 또 그들의 동족에게 수도 없이 경고 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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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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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더러운 인간의 엉덩이를 빨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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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다리가 다 잘리고, 눈알을 파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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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의 경우에는 변태 귀족에게 끌려가 장난감처럼 다뤄지다가 죽음만 면한 채로 목숨만 부지하든가, 그나마 나은 경우에도 성노예로 끌려가 수많은 남성들에게 희롱당하는 최후를 맞이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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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이 자리에서 혀를 깨물고 죽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될 상황에- 별관의 문이 열리고 새하얀 빛과 함께 새카만 머리의 영애가 그들 앞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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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프들은 두려움에 떨면서 별관 안으로 들어선 여성을 바라보았다. 귀족이라는 개념을 인간으로 빚으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품격 넘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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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 클라우디아는 엘프들을 내려다보면서 가볍게 쯧- 혀를 내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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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럽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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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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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프들이 몸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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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조심스레 운반했다고는 하지만, 땅굴을 헤쳐나온 엘프들의 몸상태가 깨끗할 리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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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씻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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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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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의 한 마디에 그녀 뒤에 기다리고 있던 하녀들이 잽싸게 달려가 엘프들을 하나씩 들어올렸다. 공작가의 메이드답게 뛰어난 실력을 지닌 그들은 손목 발목이 묶인 엘프 수십을 고작 수십 분이 되기 전에 말끔하게 만들어놓는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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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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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깨끗하게 씻겨진 엘프들은 다시 한 번 이브 앞에 진열되었고, 깨끗해진 엘프들을 본 이브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불만을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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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쯧. 삐쩍 곯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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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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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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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의 한 마디에 메이드들은 곧장 수십 인분의 식사를 준비했고. 과연 밥까지 먹여줄 수는 없었는지 일시적으로 손목을 풀어놓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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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손목을 풀고 식사하는데 그 어떤 감시도, 경비도 없었다. 식당 안은 음식과 식기로 가득했고. 엘프들은 아무렇지 않게 날카로운 식기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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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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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던 엘프들이었지만, 밥을 거절하진 않았다. 그들도 아주 오랜만에 보는 진수성찬에 눈이 돌아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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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에서 엘프는 기본적으로 죄인이거나 노예다. 숲 바깥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건 상상도 못 하며, 당연히 식사 또한 숲에서 나는 도토리나 열매를 주워다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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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는 정말 아주 가끔밖에 먹을 수 없는 수렵민족. 그런 이들에게 아주 오랜만에 값비싼 고기와 과일, 생선 따위를 들이미니 눈이 돌아가지 않을 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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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가……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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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독이 들은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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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이거 먹어봐요! 맛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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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어린 엘프들은 이 상황에 마냥 웃음보를 터트릴 뿐이었지만. 인간불신이 기본적으로 깔린 어른 엘프들은 이 상황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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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그렇게 의심했기에, 발목에 묶인 밧줄을 풀거나 탈출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들에게 있어 최고의 행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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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출 시도는? 아무도 없다고? 그래? 그럼 본보기는 필요 없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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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가 끝난 이후 뒤늦게 돌아온 이브는 그리 말하며 엘프들을 돌아보았다. 그 눈빛은 자신과 똑같은 지성체를 보는 것이 아닌, 말 잘 듣는 가축을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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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인간은 자신에게 충실한 가축에게 보상을 내리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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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프들은 기사들의 손에 이끌려 별관을 빠져나와 그 옆에 있는 숲으로 향했다. 클라우디아 공작이 특별히 관리하는 숲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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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이 숲이 너희들의 영지야. 너희들끼리 알아서 촌장을 정하고,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러 와. 별관까지 자유롭게 이용해도 좋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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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나먼 옛날. 엘프들이 이 땅의 지배자였을 무렵. 그럴 때에나 볼 수 있었던 양지 바른 숲. 햇볕이 중간중간 잘 스며들고 싱그러운 향기가 가득한 숲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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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을 배정받은 엘프들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믿을 수 없다는 듯 서로를 바라보았다. 도무지 이 인간들이 자신들에게 이토록 잘해주는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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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인간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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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 님이라고 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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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브 님. 궁금한 게 있습니다. 저희는 대체 여기서 뭘 하면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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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 한 엘프들 중 한 명이 총대를 매고서 이브에게 물었다. 그 질문을 들은 이브는 이런 것도 모르냐는 듯 인상을 살짝 찌푸리면서 그 엘프를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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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빛만으로도 사람 여럿은 죽여봤을 그 시선을 정면에서 받아내고 있으니, 엘프는 절로 침을 꿀꺽 삼킬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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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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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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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그러했던 것처럼. 활을 쏘고, 정령을 다루고, 마법을 배우면서 스스로를 단련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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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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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그러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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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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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까지 귀한 대우를 해주면서 내뱉을 말이 아니었다. 엘프들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가운데, 이브는 한 마디를 남긴 뒤 모습을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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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임이 있을 때 알아서 부를 테니, 그때까지 준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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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가 정말로 기사들을 대동하고 떠나간 직후. 엘프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주억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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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믿을 수 없다. 인간은 모두 그들을 하나의 소장품쯤으로 여기며, 노예로 붙잡아 거래하고, 희롱하고 괴롭히며 망가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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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인간은 믿을 수 없어도 행동은 믿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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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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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도망치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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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돼.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는 데다가…… 아이들까지 있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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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속박도 감시도 없는 이상 이곳을 탈출하는 건 무척이나 간단한 일이었다. 다만, 그 어떤 엘프도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하지 못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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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지 모르는 숲 바깥을 선택하는 것보다야, 배부른 가축이 되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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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리 나쁜 것 같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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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 님은, 사실. 좋은 사람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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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해도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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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마음씨 착하신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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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의 행적만 보았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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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가 보여준 행적은 악역영애라기보다 엘프를 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악당의 탈을 쓴 위인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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