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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서의 조항은 전체적으로 이안의 이득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마냥 모든 조항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최대한 편의를 봐준다고 했던 말은 사실인 모양이다.
“음.”
이안은 떠온 냉수를 한 모금 들이켜고 계약서를 한 장 사락 넘겼다.
이걸로 마지막 페이지. 적혀 있는 건 딱 2가지 조항이 전부였다.
[24. 갑은 을에게 자신의 개인적인 일을 도와달라고 할 수 없지만, 이는 을 또한 마찬가지다. 다만 을은 관리국에서 이루어지는 임무에 대해 갑에게 협력을 요청할 수 있다.]
[25. 갑은 을의 협력을 거부할 수 있지만, 만약 인류의 존속에 위험이 될 만한 일이 발생한다면, 을에게 협력해야만 한다.]
계약서는 25번째 조항으로 마무리되었다. 이안은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정중한 자세로 앉아 있는 두 사람을 보며 머리를 굴렸다.
전체적으로 나쁘지는 않은 조건들이었다. 자신에게 아무런 구속이나 속박도 가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협력할 때마다 돈을 챙겨준다는 것도 제법 마음에 들었다.
카르텔만큼이나 많은 보수를 주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한들 적은 액수는 아니었다. 최소 몇천 단위부터 시작하니, 적당히 협력하면서 살아도 부족함은 없을 것이다. 다른 마법사들에게도 이리 해주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굳이 그들과 비교할 필요는 없었다.
다만 일반적인 마법사들에겐 기본적으로 감시원을 배정하고 GPS까지 단다고 하니, 그들에 비해선 훨씬 자유로운 것도 사실이다.
‘왜 마법사들이 관리국과 엮이기 싫어하는지도 이해가 가는군. 저렇게 통제하려고 하니 싫어할 수밖에 없지.’
관리국의 입장도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다.
신비를 관리하고, 추적 및 처리하는 조직이니 그것을 직접 불러들이는 걸 넘어 다루는 것까지 가능한 마법사들을 감시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하지만 마법사들이 어디 자기랑 관련된 일을 객관적으로 보는 게 가능한 족속들이던가.
이안도 당장 자신에겐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라 이렇게 합리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거지, 만약 저 감시와 도청, GPS를 통한 추적이 자신에게 적용되었다면 협력이고 뭐고 다 때려치운 채 그들을 돌려보냈을 것이다.
“…….”
뭐, 의미 없는 가정이었다. 굳이 찾아오지 않을 미래를 걱정하며 불쾌해할 이유는 없었다.
이안은 남은 냉수를 쭉 들이켜고, 마도서로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조건이 생각보다 괜찮은데.”
“그렇게 느끼셨다면 다행입니다. 추가로 원하시는 게 있으시다면 마지막 페이지의 여백에 작성해 주십시오. 최대한 들어드리겠습니다.”
“여기서 더?”
“마법사님과 협력 관계를 체결하기 위해서 출혈도 감수한 상태입니다. 대단한 부탁은 힘들지 몰라도, 사소한 것쯤은 가능할 겁니다.”
김이서가 저자세를 유지하며 말했다. 이안은 대답하는 대신 마도서의 표지를 두드렸다.
과연 관리국은 어떤 생각이기에 저토록 을의 위치를 고수하는가. 하나의 단체가, 굳이 한 마법사에게 저리 굽신거릴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감시자.’
모든 답은 이안이 손에 쥔 마도서에 있었다. 그는 잠깐 자신의 새까만 마도서를 응시하며 픽 웃음을 터트렸다.
눈앞에서 대놓고 소환한 외해의 생물. 홀로 병원에 있던 의사와 간호사, 환자들을 쓸어버리는 것으로 모자라 공간의 주인인 병원장까지 막아 세운 거대한 괴물.
공간형 괴이이기에 소환해도 별다른 탈이 없었지만, 그게 현실에 모습을 드러낸다면 어떻게 될까.
굳이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문제였다. 절대 좋은 꼴은 보지 못할 것이다.
아마 관리국에선 그걸 경계하고 있는 것일 터. 그래서 이렇게 저자세로 나오며, 불필요한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또한 그의 칼끝이 관리국을 향하지 않도록 상황을 조율하는 거겠지.
‘내가 아무런 조건 없이 외해의 생물을 소환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소환 후에도 제물이 필요하다는 것까진 말해줄 필요 없어.’
정보의 우위는 언제나 중요했다. 상대는 모르는걸, 굳이 손해까지 감수하며 알려줄 이유는 없었다.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고, 테이블 위에서 펜 하나를 꺼내왔다. 그 모습을 본 김이서와 박민아의 얼굴이 살짝 밝아졌다.
사인은 할 생각이다. 매번 의뢰를 갈 때마다 관리국과 서로 견제하며 그들 앞에서 신분을 숨길바에야 차라리 협력 관계를 구축하고 편하게 움직이는 게 나았다.
행동에 제약을 부여하는 내용이 있었다면 고민 하나 없이 계약서를 찢어버렸겠지만, 그게 아니니까. 아무런 구속이나 속박 없이 그들과 좋은 관계를 이룰 수 있다면 굳이 거부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이안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곧바로 사인을 하지는 않았다. 계약서에 이름을 적는 순간 계약이 체결되니, 그 전에 뽑아먹을 수 있는 건 다 뽑아먹을 계획이다.
그가 손에 쥔 펜을 휘리릭 돌리면서 두 사람을 응시했다.
“만약 관리국과 협력한다면, 나는 어느 팀과 같이 움직이게 되는 거지?”
“종합부서의 지시를 따라 대응과 또는 격리팀과 협력하게 될 겁니다.”
“격리팀?”
“관리국 지하에는 신비를 감금해서 연구하는 시설이 있습니다. 마법사님의 도움이 있다면 연구에 진전이 있겠지요.”
김이서의 말에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응과와 격리팀. 대충 들어도 모두 무력이 필요한 부서인 것 같았다. 그들과 협력을 그리 자주 할 계획은 아니지만, 가는 일이 생긴다면 준비는 철저하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마법사에게 협력을 구해야 하는 일은 예시를 들어 대충 어떤 일이지?”
“정찰과 다수 사망, 대응과 인원 10인 이상이 사망하거나 실종하면 협력을 구합니다. 무조건 부르지는 않습니다.”
“현재 관리국과 협력하는 마법사의 수는?”
“셋입니다. 마법사님이 들어오신다면 넷이군요.”
“그들과의 계약은 평범하게 이루어졌나?”
“그런 분들도, 그렇지 않은 분들도 있습니다. 얌전히 감시를 받아들이신 분은 하나뿐입니다. 다른 두 사람은 한 번만 더 감시하면 관리국이고 뭐고 다 죽여버리겠다 엄포를 놓으신 터라, 계약 내용을 조금 손봤습니다.”
“마냥 다 감시하는 건 아니었군.”
“마법사라는 인재와 협력하는 거니까요.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관리국에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습니다.”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관리국이라.
아무래도 바티칸이나 시계탑, 카르텔과 달리 그들의 역사는 굉장히 짧은 모양이다.
하긴 고대나 중세부터 관리국이 있었다면 악마니 요괴니 하는 기록이 남아있을 리가 없었다. 지금이야 모조리 오컬트 취급이지만, 그때 당시에는 실제로 모두 있었던 일일 테니까. 정보 세탁을 잘해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이미 공공연하게 신비의 존재가 퍼져있었을 것이다.
다만 여기서 드는 의문은, 관리국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왜 아무도 정보 통제를 하지 않았는가였다.
다행히 물어보니 곧장 답변이 돌아왔다.
“그들도 예전부터 정보 통제는 열심히 해왔습니다. 다만 통제하는 속도보다 퍼지는 속도가 더욱 빠른 게 문제였죠.”
“아.”
“관리국의 등장과 함께 확실한 정보 통제가 이루어지고부터는 그들도 통제에 그리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는 않은 상태입니다. 딱 최소한으로만 하는 중이죠.”
“관리국에선 무슨 수단이 있길래 다른 조직도 제대로 하지 못한 정보의 은폐와 왜곡이 가능한 거지?”
“별거 아닙니다. 전 세계적으로 사람을 매수하여 정보를 훼손 및 삭제, 수정 작업을 거치고, 신비의 힘까지 동원하여 사람들의 인식을 변화시켰습니다. 다양한 기업과 정부의 협력도 도움이 되었죠.”
“…….”
“지금까지 다른 조직은 딱히 정부나 기업과 협력 관계를 구축하지 않았습니다. 시계탑이야 예전부터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곳이었고, 바티칸은 하느님의 뜻만 따르는 폐쇄적인 종교 집단에, 카르텔은 돈만 좇는 이윤 집단이었으니까요. 아마 세계 각지의 정부나 UN도 관리국의 등장을 반겼을 겁니다.”
김이서가 말을 잠깐 멈추고 물을 들이켜는 사이, 박민아가 입을 열었다.
“정보의 은폐를 통해 신비의 등장 빈도수도 굉장히 줄어들었어요. 이야기가 힘을 가지는 경우가 많았으니까요. 오컬트적인 이야기를 단순한 허상으로 느낄수록, 괴담의 힘도 약해지는 거죠.”
“괴담으로부터 파생하지 않은 괴이는 아니라는 뜻이군.”
“……아무런 기원도 없이, 그냥 모습을 드러낸 신비는 그렇죠. 그건 그냥 있는 거니까요.”
팔척귀신, 도플갱어, 원숭이꿈 등.
본래는 존재하지 않았다가 사람의 공포가 쌓임에 따라 나타난 괴이들이 있는 반면. 테마파크나 도서관, 병원처럼 아무런 기원 없이 탄생한 말 그대로 신비 그 자체인 괴이도 있었다.
전자는 원본에 적힌 파훼법을 이용하거나 머리를 조금 굴리면 도망치는 게 가능하지만, 후자는 아니다. 제대로 된 공략법이 없다면 무조건 죽는다. 괜히 관리국 요원들이 머리를 박아가며 공략법을 작성하는 게 아니었다.
이안은 침음성을 흘리며 마도서의 표지를 두드렸다.
“양쪽의 비율만 따지자면 어느 쪽이 더 높지?”
“비슷해요. 괴담으로부터 파생된 놈들은 계속 나타나는 특성이 있어서 개체수만 비교하자면 아마 괴담 쪽이 조금 더 높을 거예요.”
“그렇군…… 혹시 최근에 생긴 괴담도 힘을 가지고 신비가 될 수 있나?”
“많이 유명하면 가능해요. 하지만 나폴리탄 같은 규칙 괴담은 이미 신비가 개념을 먹어 치운 상태라 사람이 창작한 이야기는 힘을 가지지 못해요. 아, 근데 백룸은 또 만들어졌어요. 신기하죠?”
박민아가 그리 말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신비라는 게 참 특이해서요. 예외가 너무 많은 탓에 이렇다 규정하기가 힘들어요. 나름 메뉴얼을 만들기는 했지만, 이것도 매년 특이한 사례가 나올 때마다 수정되는 편이고요.”
“…….”
“신비가 얼마나 인류에게 악의적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죠.”
이안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말에 내심 동감했다.
그가 지금까지 마주친 신비는 모조리 인간에게 그리 친화적이지 않았다. 어쩌면 그런 놈들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 수가 절대적으로 많지는 않으리라.
이안은 그리 생각하며 마도서를 옆에 내려놓았다.
“좋아, 그럼 이제 마지막 질문.”
그가 들고 있던 펜으로 계약서의 마지막 조항을 탁 짚었다.
“여기 적힌 인류의 존속이 위험할 정도의 상황은 어떤 것들이 있지?”
“몇 개 없습니다. 지금까지 관측된 바로는 좀비 바이러스, 유령 핵폭탄, 나치 부대의 부활 등이 있었습니다. 이런 놈들 같은 경우, 바티칸과 관리국의 예언자들이 협력하여 미리 사전에 싹을 잘라두는 편입니다.”
다만, 하고 김이서가 말을 덧붙였다.
“외신 본체의 강림까지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신을 소환하고자 하는 이들은 전원 그 자리에서 사살하여 뇌를 박살 내는 편입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곤, 농담이라도 하려는 건지 미약한 웃음기를 머금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외신은 인간의 부름에 절대 응답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관심도 없습니다. 마도서를 가끔 내려주는 편이지만 그것도 개미에게 더러운 장난감을 던져주는 정도의 여흥일 뿐입니다. 진심으로 인간을 아끼거나 애정하는 외신은, 한 마리도 없을 겁니다.”
“…….”
이안은 대답하는 대신 눈동자를 슬쩍 굴려 심해견문록을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마도서의 페이지가 저절로 살짝 넘어가며, 문장 하나를 그에게만 슬쩍 보여주었다.
[외해의 주인은 심해견문록의 주인, 이하 ‘신이안’이라는 남자를 향해 무한한 신뢰와 애정을 보내줄 것을 맹세했다.]
김이서의 말을 대놓고 부정하다는 듯한 문장.
이안은 자신도 모르게 픽 웃음을 터트리며 마도서를 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