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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4 21:31:57 +09:00

16 KiB
Raw Blame History

이서령과 설유월과의 면담이 끝나고.

나는 바로 협회에게 연락했다.

이제, 중단되었던 길드 왕진 일정을 다시 시작해도 될 것 같다고.

설유월의 건은 일단락되었으니까.

협회는 알겠다며 답했고. 바로 다음 길드 리스트를 보내주겠다고 했다.

오늘 오후 내 개인 상담소의 예약은, 비어 있었다.

딱 오후만 열어 놨었는데… 아무도 신청을 안 하더라.

그렇다고 오후에 문을 연다고 한들, 찾아올 내담자가 많을 것 같지도 않았다.

“…….”

그래, 오늘은 쉬자.

나는 그렇게 결정했다.

물론 쉰다고 해서 침대에 누워 뒹구는 그런 것은 아니다.

내일 상담에 대한 준비도 해야 하고, 리스트를 받아 선정도 해야 되니까.

물론 해태일 것 같긴 하지만….

나는 그대로, 집으로 향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휴식이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도시가 아직 푸른 새벽빛에 잠겨 있을 때, 내 상담실의 오븐은 벌써부터 따뜻한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 위이잉. 탁, 탁.

고소한 버터와 달콤한 설탕이 크림처럼 섞이고, 그 위로 신선한 계란이 들어간다.

오늘 내가 만들 것은, 스모어 쿠키.

진한 초코칩 반죽 속에, 마시멜로를 통째로 숨겨 구워내는 디저트다.

오븐에 들어간 쿠키 반죽들이,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서서히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상담실 안은, 온통 초콜릿 향으로 가득 찼다.

나는 쿠키를 꺼내 식힘망 위로 올린 후, 환기를 시켰다.

또 과한 냄새는 그다지 좋지는 않으니까.

여기가 빵집인 것도 아니고.

나는 환기가 되어감을 느끼며 커피 머신에서 커피를 내렸다.

부디 이 쿠키들이 오늘 찾아올 내담자들에게 작은 안식처가 되어주기를 바란다.

이제, 상담을 시작할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내 마지막 말이었다.

“다음 내담자분….”

나는 방금 나간 내담자의 진단서를 마무리하고, 기계적으로 인터폰을 눌렀다.

길드 이전 문제로 고민하는 C급 탱커 헌터.

이곳의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고향을 그리워하는 이방인 헌터.

그리고 길드 내 치정 관계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이방인 A급 헌터까지.

‘제가 넘어온 세계와 그녀가 넘어온 세계에서는…. 일부다처제가 기본이었습니다.

‘그렇군요.

‘그래서, 제게 아내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상관없다며, 정식으로 두 번째 부인이 되게 해달라고 요구합니다….

‘네…?

이 세계의 법은, 기본적으로 문화와 풍습의 차이가 있는 것을 인정했다.

따라서 국가에서는 원한다면, 해당 국가의 풍습을 법적으로도 인정해 주기로 결정했다.

형사취수제나… 동성 결혼이나… 일처다부, 일부다처제까지.

즉, 이방인이 원한다면 여럿과의 결혼도 가능하다는 소리다.

‘하지만 저는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비록 제 세계가 그랬다지만, 저는 지금의 아내와 너무나도 행복하고, 그녀와의 관계는 그저, 한순간의 열기일 뿐입니다….

마지막의 경우는 많이 당황스럽긴 했으나, 어쨌든 수많은 내담자가 상담실의 문을 열고 나갔다.

나는 차가운 커피를 들이부으며 그들의 마음속을 들여다보고, 분석하고 또 처방을 내렸다.

그리고 마침내 오전의 마지막 상담이 끝났다.

문제는… 이제야 막 점심시간이 되었다는 것.

‘밥 먹어야 되는데.

나는 뻐근한 허리를 두드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내 시선이 책상 한쪽에 쌓여있는 서류 더미에 닿았다.

오늘 오전에만 내가 상담한 내담자들의 기록이다.

기억이 더 흐릿해지기 전에 전부 정리해야만 했다.

“… 그래.”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방금 일어났던 의자에 다시 깊숙이 몸을 묻었다.

아무래도 오늘의 점심은 건너 뛰어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점심도 거른 채 산더미 같은 서류와 씨름하던 중이었다.

배고픔이 서서히 잊혀가는 그때.

  • 똑똑.

상담실의 문을 누군가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쪽을 바라봤다.

지금은 상담소의 점심시간이자 휴식시간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어떤 내담자분이든 정중하게 오후에 다시 와달라고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 끼익.

“죄송하지만 지금은 점심….”

문을 열자 그곳에는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물이 서 있었다.

그리고 내가 예상하지 못할 물건까지도.

“루나… 씨?”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자신의 신발 코를 내려보고 있었다.

그러다 내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슬쩍 고개를 들었다.

“아…! 선생님….”

“이 시간에 무슨 일이세요?”

나는 미소를 지으며 용무를 물었다.

하지만 바로 그때 그녀의 등 뒤에 어색하게 숨겨져 있던 하얀 의사 가운이 눈에 들어왔다.

‘… 응?

저거 혹시 내 거 아닌가?

뭔가 생긴 게 익숙한데.

“아… 그게… 다른 게 아니고….”

루나는 더 이상 숨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눈을 질끈 감고 가운을 내 앞으로 확, 내밀었다.

“죄송해욧!”

말하면서 혀를 살짝 깨물었는지 발음이 뭉개졌다.

나는 얼떨결에 아주 좋은 향기가 나는 내 가운을 받아 들었다.

그곳에는 유선우라는 이름이 제대로 박혀 있었다.

“어….”

이게 왜 루나에게….

내가 잃어버렸다 생각했던 가운은 그녀에게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일단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죠.”

나는 그녀를 상담실 안으로 들여보내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려던 바로 그 순간.

‘깜짝이야.

  • 팡!

맑고 경쾌한 소리와 함께, 그녀의 머리 위로 길고 새하얀 토끼 귀 한 쌍이 쫑긋하고 솟아났다.

문이 닫히고 둘밖에 없다고 느끼자마자 바로 변신 마법을 풀어버린 듯했다.

나는 전혀 놀란 티를 내지 않으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다행이네요.”

진짜 잃어버린 줄 알았다.

어디서 흘렸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지 않아서 그냥 포기하고 있었는데.

나는 컵에 차를 따르며 아무렇지 않은 척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루나는 자리에 앉은 채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그녀 앞에 물을 들이밀며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제가… 저번에 열쇠를 돌려 드리면서 화분도 갖다 드렸었는데요….”

“네, 그랬죠. 너무 좋더라고요 상담실 분위기가 아주 좋아졌어요.”

그녀가 가져다준 작은 라벤더 화분은, 지금도 창가에서 좋은 향을 내뿜고 있었다. 안 그래도 감사의 말을 전하려던 참이었다.

“그때… 화분에 물을 주려다가 실수로 선생님의 옷에 물을 쏟아버려서….”

아, 그랬구나.

나는 그제야 상황을 이해했다.

“죄송해서, 세탁하려고… 가져갔었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웃었다.

“그랬군요.”

루나가 돌려준 가운을 옷걸이에 걸었다.

“다른 가운이 한 벌 더 있어서 괜찮았습니다. 덕분에 깨끗하게 세탁이 됐네요.”

그리고 옷을 거는 그 순간, 내 코 끝에 아주 달콤한 향기가 스쳤다.

나는 가운에 코를 살짝 가져다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으아?!”

등 뒤에서 루나의 거의 비명에 가까운 새된 소리가 들려왔다.

‘딸기향?

나는 그녀를 돌아보며 순수한 감탄과 함께 물었다.

“… 향이 엄청 좋네요. 딸기 향 섬유 유연제인가요?”

솔직히 말해서 놀랐다.

나는 원래 딸기 향을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고, 유연제 특유의 인공적인 향은 오히려 싫어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옷에서는 아주 자연스럽고 싱그러운 진짜 딸기향이 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한입 베어 물고 싶어질 정도랄까?

구매처라도 물어볼까.

“딸… 딸기… 딸기 향… 이요?”

루나는 얼굴 전체가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 거의 울먹이며 내게 되물었다.

“그게 맡, 맡아 지시나요…?”

나는 그 격한 반응에 고개를 갸웃하며 답했다.

“네, 되게 진하네요. 그런데 또 자연스러워서 기분이 좋아지는 향입니다.”

나는 순수한 칭찬이었는데, 루나의 붉은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진, 진해요···? 어떡해….”

한 번 더 코를 대고 맡았다.

다시 맡아봐도 역시 좋다.

뭔가 묘하게 바닐라 향이 아주 은은하게 섞여 있기도 한데.

정확히는 잘 모르겠다.

“혹시 구매처를 여쭤봐도….”

“안… 안 팔아요! 아마… 팔지는 않을….”

“아 그런가요.”

아쉽게 됐다.

다른 향이 있었으면 한 번 사볼 생각이었는데.

그때, 루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네… 그, 근데… 가끔 제가 세탁… 해드릴 수도 있….”

“아닙니다. 괜찮아요.”

나는 그녀의 제안에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향이 좋긴 한데, 어떻게 내담자한테 빨래를 맡긴 단 말인가.

그건 루나에게도 민폐고, 내 윤리관에서는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내 거절에 상담실 안에는 다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녀가 가져다준 화분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너무 감사하다고.

마카롱에 대한 보상으로는 너무 과하다며.

루나는 손사래를 치면서 대답했다.

약간의 신변잡기 대화가 이어지던 중.

그녀가 무언가 결심한 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

“선생니임… 그래서 말인데… 혹시, 제가 오늘 점심 식사를 사드려도 괜찮을까요?”

“아… 점심이요….”

나는 약간 망설였다.

어려운 문제다.

일단 오늘 일정이 바쁜 것도 바쁜 것이지만….

기본적으로 내담자와 상담자와의 사적 만남은 자제해야 한다.

물론 순수한 치료를 목적으로 한 식사라면, 예외적으로 허용된다는 논문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 방식을 선호하지는 않는다.

루나가 완전히 마음의 짐을 떨쳐내고 내담자가 아닌 상태라면 이야기는 달랐겠지만….

그렇다면 루나는 그녀의 진짜 모습을 방 안에서만 아니라 밖에서도 드러낼 수 있어야 했을 것이다.

아직은 상처 입은 토끼다, 약간 치료가 됐을 뿐.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결정을 내렸다.

책상 위의 서류를 가리키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정말 죄송합니다만 내담자 분과 사적인 식사를 하는 것은 제 직업 윤리상, 조금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만약 루나 님께서 이제 더 이상 제 상담이 필요 없으시다면 이야기가 다르겠….”

“아, 아니에요! 절대!”

루나는 다급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내 거절을 단번에 받아들였다.

“죄송해서 어쩌죠…. 여기까지 찾아오셨는데.”

그러자 루나는 고개를 휙휙 저었다.

“아니에요 선생님. 제가 너무 경솔했어요.”

그 말과는 달리 루나의 쫑긋 서 있던 귀는 시무룩하게 아래로 축 처져있었다.

나는 그런 그녀의 실망한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봤다.

아.

나는 그녀에게 점심을 사줄 수는 없지만, 지금 해줄 수 있는 작은 위로를 건네기로 했다.

식힘망 위로 옮겨두었던 스모어 쿠키를 하나 집어 들었다.

그리고 재빠르게 예열해 둔 오븐에 가열했다.

살짝 데워진 쿠키를 작은 봉투에 담아 시무룩한 토끼의 손 위로 건네주었다.

“스모어 쿠키입니다.”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이걸로 용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루나의 눈동자가 쿠키를 보며 크게 뜨였다.


루나는 상담소에서 나와, 다시 유니온의 건물로 향했다.

아쉽게도 소기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다.

그러나, 너무 생각이 짧았다.

상담사라는 직업 상 내담자와 쉬이 식사 자리를 가질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 자체를 전혀 하지 못했으니까.

‘앗….

그때 상담실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나, 루나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상상도 못했다.

루나가 인터넷에서 찾아온 초강력 섬유 유연제라면 그의 옷에 남은 자신의 흔적을 지워줄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따라서 향이 사라졌을 거라 여겼는데….

선생님은 아까 가운의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먹음직스러운 딸기향이… 난다고 했다.

사용한 섬유 유연제의 향은 시트러스. 따라서 섬유 유연제의 향은 아니다.

“…….”

즉… 루나의 향이라는 것이다.

수인의 세계에서 여성 수인의 페로몬 향을 좋다고 느끼는 것은… 서로 간의 궁합이… 아주….

“…… 으아!”

루나는 거기까지 상상하다 길거리 한복판에서, 저도 모르게 펄쩍 뛰어올랐다.

토끼 점프.

그녀는 고개를 휙휙 내저으며 붉어진 뺨을 식히려 애썼다.

불경한 생각이다. 선생님은 그저 선생님일 뿐이다.

“후우….”

한결 차가우진 머리로 생각해 보니, 선생님의 책상 위에는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식사 자리는커녕, 점심조차 제대로 먹지 못할 것 같았다.

“음….”

루나는 고개를 돌리다 길 건너편 샌드위치 가게를 발견했다.

“갖다 드릴까…?”

그녀는 아주 잠시 망설였다.

‘그러자.

그리고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그곳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그녀는 아까 선생님이 주셨던 스모어 쿠키의 봉지를 뜯었다.

“앗뜨뜨….”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반으로 쪼갰다.

  • 주우우욱….

그때.

쿠키 안에 숨어 있던 하얀 마시멜로가, 뜨거운 열기에 녹아 끈적하고 투명한 실처럼 길게 늘어졌다.

“…….”

루나의 붉은 눈이, 멍해졌다.

하얀색으로… 길게 늘어진 액체에 가까운 마시멜로.

그녀는 홀린 듯 늘어진 마시멜로의 끝을, 자신의 혀끝으로 살짝, 가져다 대었다.

“… 달아.”

너무, 달았다.

루나는 그 아찔한 단맛에, 잠시 현기증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