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py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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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면 안 돼요!!”
루나의 입에서 절규에 가까운 비명이 튀어나왔다.
“네네. 알겠습니다. 일단 진정을….”
나는 반사적으로 즉시 눈을 감았다.
목소리 톤을 최대한 낮추고, 부드럽게 그녀를 진정시키려 애썼다.
눈을 감아도 하얀 토끼 귀가 아른거리긴 한다.
복실복실한게….
일단, 그 모든 것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실눈 뜬 거 아니죠?! 보고 있는 거 아니죠?!”
“아닙니다.”
나는 등을 살짝 돌려, 내가 그녀에게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증명해 보였다.
내 행동에 그녀의 거친 숨소리가 아주 조금, 아주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긴장의 끈이 끊어진 것일까.
“흐윽….”
아주 작은 흐느낌이 들려왔다.
“또 해제당했어… 흑.”
점점 목소리가 서러워진다.
그러더니 눈을 감고 있는 내 앞, 그러니까 어둠 속에서 익숙한 메세지가 떠올랐다.
[경고: 복합 마법(B급)이 당신에게서 벗어나려 합니다.]
루나가 도주 마법을 사용하려 한다는 알림이었다.
그녀의 발밑에서, 마력이 급격하게 소용돌이치는 기운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어진 메시지는, 이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복합 마법 (토끼굴)을 해제하시겠습니까? (Y/N)]
이번에 시스템은 내게 의사를 물어왔다.
아까도 좀 물어보지 그랬어.
그런데 토끼굴?
아무래도 루나의 이동 기술인듯했다.
외형과 잘 어울리는 기술이긴 한데… 인식 저하 마법도 아니고, 내가 이것마저 해제할 수 있다고?
‘…….’
루나 씨는 아무래도 마법적으로 다소 허술한 것 같다.
내가 알기로는 제국 출신의 이방인들은 전부 마법을 극도로 잘 다룬다.
이 세계의 각성자들도 마법은 다루지만, 그 발전 정도나 수준이 제국에 한참 미치지 못해 이방인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들었다.
그런데 제국 출신의 S급 헌터가 나한테 해제를 당한다는 것은….
결국 나는 이번에는 해제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 억지로 붙잡아두는 것은 최악이다.
공포의 질린 토끼를 구석으로 모는 것보다는 스스로 굴을 파고 도망치게 기다리는 것이 나았으니까.
나는 머릿속으로 N을 선택했다.
[토끼굴(B) 해제 거부, 사용자가 당신에게서 벗어납니다.]
- 퐁!
나는 그 소리와 함께 천천히 눈을 떴다.
눈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희미한 딸기 향만이 남아있을 뿐.
나는 텅 빈 의자를 잠시 응시하다 상담실에 비치된 인터폰의 버튼을 조용히 눌렀다.
“팀장님, 다시 와주시겠습니까?”
채 1분도 지나지 않아, 문이 거의 부서질 듯 열리며 인사팀장이 달려왔다.
그의 얼굴에는 ‘혹시 루나님이 사고라도 쳤나?’ 하는 걱정과, ‘벌써 상담이 끝났나’ 하는 기대감이 뒤섞여 있었다.
“상담사님! 무슨 일이라도… 어? 루나님은 어디에…?”
그는 텅 빈 방을 둘러보며 당황했다.
나는 그에게 손짓으로 여기에 앉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방금 막 따라둔 따듯한 차를 그의 앞으로 밀어주었다.
“우선 한잔하시죠.”
내 침착한 태도에, 오히려 팀장이 더 안절부절못했다.
나는 찻잔을 들어 향을 한번 음미한 뒤, 본론을 꺼냈다.
시선은 그의 눈에 고정한 채로.
“팀장님. 루나 씨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계십니까?”
내 질문은 진짜 궁금하다기보다는, 시험에 가까웠다.
그녀가 필사적으로 숨기려는 수인이라는 정보.
만약 유니온 길드조차 이 사실을 모른다면 비밀을 지켜주는 방향으로 가야 했으니까.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네?… 그게 무슨….”
팀장의 눈이, 예상대로 당황으로 흔들렸다.
[국해원]
[메인 스탠스]
[혹시 벌써 루나 헌터가 수인인 것을 알아냈는지 의문입니다.]
됐다. 알고 있구나.
나는 그와 눈을 마주치며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제가 여쭤보는 것은 루나 씨의 출신과 관련된 것입니다.”
그러자 팀장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벌써 알아내셨군요.”
그는 피로감이 어린 얼굴로, 마침내 모든 것을 인정했다.
“저희도 알아내는데만 1년이 걸렸는데….”
나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상담사님?”
그의 목소리에는 간절한 도움의 요청이 담겨 있었다.
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건 제가 앞으로, 잘 해보겠습니다.”
나는 잠시 말을 고른 뒤, 앞으로의 계획을 밝혔다.
“우선 오늘 루나 씨는 가장 마지막에 뵙겠습니다. 마지막에도 안 오신다면… 나중에라도요.”
“네? 하지만 가장 시급한 건….”
팀장은 당황하며 말을 덧붙이려 했다.
“지금 그녀는 극도로 예민한 상태일 겁니다. 저와의 만남이 그렇게 유쾌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오늘 아침뿐만 아니라, 저번 주까지 포함해도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속으로 덧붙이며 말을 이었다.
“억지로 몰아붙이기보다는 시간을 좀 드리겠습니다.”
내 설명에, 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한 가지 요청드릴 것이 있습니다.”
나는 그를 보며 말했다.
“길드 내의 조직도 자료를 준비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출신이나, 이런 것들도요.”
“조직도요…? 네 일단,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팀장은 황급히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나는 텅 빈 맞은편 의자를 바라봤다.
아직 바쁜 것은 마찬가지다.
루나를 제외해도 내담자는 많았으니까.
몇 차례의 상담이 더 이어졌다.
대부분은 이방인으로서 겪는 가벼운 정체성 혼란이나, 전투 후의 가벼운 스트레스에 대한 것이었다.
적절히 넘길 수 있는 정도.
“감사하오 의원. 그대의 말에, 나아갈 길이 보다 선명해진 기분이오.”
“아닙니다. 언제든 찾아와주세요.”
방금 막 상담을 마친 이는, 중원 출신의 낭인이었다.
정파에도, 마교에도 속하지 못한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다.
그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그였고.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낭인이라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 주었다.
그는 후련한 얼굴로 상담실을 나섰다.
나는 다음 순서를 확인하기 위해 태블릿 PC를 켰다.
제국 출신의 드워프. 대장장이로, 최근 창작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고 했다.
부디 루나에 대한 정보도 겸사겸사 얻을 수 있기를 바라며, 나는 방문을 향해 입을 열었다.
“다음 분, 들어오세요.”
- 끼익.
문이 열리고, 다음 내담자가 들어왔다.
그러나 그곳에는 한 마리의 잿빛 토끼가 서 있었다.
길고 풍성한 머리카락 사이로, 끝이 검게 물든 길고 쫑긋한 귀가 솟아있다.
복장이 굉장히 과감하다. 몸의 모든 곡선이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전신 레깅스형 전투복 차림이었다.
그녀는 가벼운 걸음걸이로 내게 다가와 책상 한쪽에 엉덩이를 걸치며 깊이 숙였다.
“우와아~ 선생님, 엄청 잘생겼네여?”
그녀는 붉은 눈동자로 나를 훑어보며, 혀로 자신의 입술을 살짝 핥았다.
‘누구지? 순서가 바뀌었나?’
나는 당황스러움을 감추고, 재빨리 태블릿 PC의 길드원 명단으로 눈을 돌렸다.
안에는 조직도가 담겨 있었다.
눈앞의 여성의 프로필이 화면에 떠올랐다.
내담자의 이름은 엘리스.
루나와 같은 제국의 출신이자… 수인.
명확히 수인이라 쓰여 있기도 하고. 프로필 사진 속에서 그녀는 자신의 귀를 자랑스럽게 드러내고 있었다.
자신의 정체성을 겉으로 드러내는 스타일인 듯했다.
내 능력은 그녀의 이름을 인지하는 순간 이미 분석을 끝마친 상태였다.
[엘리스]
[메인 스탠스]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타입의 수컷을 발견했습니다. 이 상담실에서 그와 교미하고 싶다고 강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적합 답변] [만족 적합률 100%]
[원하는 바를 이루게 하십시오.]
‘…?’
누구 맘대로.
이뤄줄 생각은 없었다.
근데… 뭐지?
아무리 봐도 정신적으로 문제는 없어 보였다.
메인 스탠스 어디에도 고민이나 트라우마의 흔적은 없고, 오직 원초적인 욕망만이 가득하다.
내담자라고 보기에는 어렵다.
그렇다면, 이 사람. 엘리스는 아무래도….
나는 한 가지 가설을 세우고 그녀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선생니임~”
그녀는 몸을 내 쪽으로 더 기울였다. 잿빛 머리카락이 그녀의 얼굴을 따라 찰랑거린다.
“오늘 끝나고 뭐 해요?”
“아마… 별일 없으면 바로 집으로 갈 것 같네요.”
나는 담담히 대답했다.
“으응. 그래요? 그럼 나랑 밥 한 끼 어때요?”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다음 제안을 던졌다.
그리고는, 노골적인 시선으로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기 시작했다.
눈과 코, 입술을 차례로 훑어내리더니.
그녀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음… 아니다. 보면 볼수록 내 스타일이네. 그냥 나랑 잘래요?”
엘리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폭탄 같은 말을 던졌다.
대답할 틈도 주지 않으며, 쐐기를 박듯 덧붙였다.
“내가 토끼 수인이긴 해도, 원래 아무한테나 이러지는 않거든요? 진짜. 지이인짜.”
딱히 놀라지는 않았다.
이게, 내가 알고 있던 또 매체에서 떠들던 수인의 모습이긴 했다.
단지 루나가 특이한 케이스일 뿐.
나는 정석적으로 답변했다.
“죄송하지만, 엘리스님. 저는 직업 윤리상 내담자와는 사적인 관계를 맺지 않습니다.”
내 대답에 엘리스의 미소가 한 층 더 깊어졌다.
“으응… 그랬구나?”
그녀는 내게 한 뼘 더 가까이 다가오며,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근데, 저 내담자 아닌데요?”
그럴 것 같았다.
어딜 봐도 건강해 보였으니까.
나는 태연하게 답했다.
“네 그럴 것 같았습니다.”
“오~ 그럼?”
엘리스의 눈이 장난스럽게 빛났다.
“거절하겠습니다.”
그 말에, 처음으로 엘리스의 미소가 멎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