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py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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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유월은 푹신한 침대에 몸을 기댄 채 낮에 그가 남기고 간 월병을 아기 새처럼 아주 조금씩 씹고 있었다.
- 깨작깨작.
입안에, 부드러운 단맛이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 단맛과 함께 의원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이제 유월 씨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입니까?’
하고 싶은 것.
그녀는 그 단어를 평생 처음으로 진지하게 곱씹어 보았다.
무림맹주가 되는 것?
어머니에게 은혜를 갚는 것?
그러나 그 두 가지의 선택지 외에는 머릿속은 백지장처럼 텅 비어 있었다.
설유월의 삶에는 단 한 번도 ‘하고 싶은 것’이 존재한 적이 없었으니까.
그녀의 하루는 동이 트기 전 검을 쥐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수천 번의 검무.
팔의 감각이 사라질 때까지.
수백 권의 무공서.
머리가 깨질듯한 아픔이 있어도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을 때까지.
어머니가 정해준 길이자, 그녀의 목표.
하고 싶다는 감정도 하기 싫다는 감정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해야만 한다는 의무만이 있을 뿐.
그것은 어머니가 하루아침에 사라진 후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어머니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무림맹은 차기 맹주를 선출하기 위해 분주했고, 설유월 또한 당연히 그 후보에 올랐다.
하지만 원로들이 뱉은 이름은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차대 무림맹주로, 원로회의의 철혈검제를 추대한다!’
그녀는 실패했다.
스스로도 실패했다 여겼으며.
그녀는 모든 것이 자신의 부족함 탓이라 여겼다.
그날 이후, 그녀는 세상과 문을 걸어 잠갔다.
폐관수련이었다.
어머니가 남기신 무공의 구절들을 미친 듯이 되뇌고, 또 되뇌었다.
하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무공의 전진도, 경지의 발전도 없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막막함.
어머니가 없으니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남겨주신 구절들을 무한히 반복할 뿐.
그렇게 몇 달.
마침내 그녀의 정신이 먼저 부서져 내렸다.
심마(心魔)가 찾아왔다.
극심한 고통과 함께, 의식이 아득해졌다.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끔찍한 감각.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목이 타는 듯한 갈증에, 그녀는 비틀거리며 동굴 안쪽 물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어둠 속 고요한 물웅덩이 위로 자신의 모습을 비췄다.
그녀의 검은 머리칼 절반은 죽은 재처럼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그것은 설유월에게 있어, 실패의 낙인이었다.
그 끔찍한 기억이 다시 한번 설유월의 숨통을 조여왔다.
갑자기 견딜 수 없이 불안해졌다.
방 안의 고요함이 그때 그 동굴의 어둠처럼 그녀를 집어삼킬 것 만 같았다.
팔이 느껴질 정도로 덜덜 떨릴 그때.
- 부스럭.
설유월은 반사적으로 옆에 놓인 월병 봉투를 낚아챘다.
떨리는 손으로, 마지막 남은 조각을 꺼내 입안에 천천히 밀어 넣었다.
차가운 과자가 혀 위에서 서서히 녹아내린다.
“아….”
그 단맛이 그녀를 괴롭히는 지독한 쓴맛을 조금씩 씻어내기 시작했다.
설유월은 아직도 의원의 던졌던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는 못했다.
그러나.
하나 원하는 것이 생겼다.
“내일은… 와주실까…?”
와주셨으면 좋겠다.
다시 만나고 싶다.
그것이 설유월이 자신의 의지로 처음 떠올린, 원하는 일이었다.
알람이 울리지 않는 아침.
“아….”
오늘은, 일요일이었다.
사실 원래 어제도 토요일이었지만 쉴 수 없었다.
이방인이라는 변수가 발생한 바로 다음날이었기에 일을 했어야 했고.
하지만 괜찮다.
설유월과의 대화는 성공적으로 끝났고, 이서령과의 만남도 일단은 나쁘지 않게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오늘은 마침내 찾아온 완벽하고 공식적인 휴일.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오늘은 상담사 유선우가 아닌 그냥 유선우로서 하루를 보내는 날이었다.
부엌으로 가 그릇에 시리얼을 쏟아붓고 차가운 우유를 부었다.
요즘 너무 피곤하게 살긴 했다.
잠은 늘 부족했고, 자료를 조사하느라 밤을 새우는 일도 잦았다.
아직 상담사가 된지 얼마 안 됐으니까, 익숙해지면 괜찮아지겠지.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숟가락을 입으로 가져갔다.
방금 막 킨 TV 화면에서는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틀었다.
- 어제부로 서울숲 일대에서 발생했던 전이 침식 현상이 안정화되었습니다….
다행히 설유월이 넘어오면서 발생했던 침식은 무사히 수습된 모양이었다.
협회는 꼼꼼한 안전 검수 후, 다음 주부터 다시 서울숲을 시민들에게 개방한다고 한다.
나는 멍하니 뉴스를 보며 시리얼을 씹었다.
사고에 대한 회복이 빠르다.
이제 이 세계는 이방인이라는 존재에 완벽하게 익숙해져 있었다.
내가 이곳으로 올 때만 하더라도 전이가 발생하면, 도시 하나가 마비되는 것은 기본이며 사람들은 공포에 떨었다.
하지만 이제는 어지간한 대규모 전이가 아닌 이상 해프닝일 뿐.
시민들은 정해진 매뉴얼에 따라 대피하고.
협회는 신속하게 현장을 통제하며.
헌터들은 묵묵히 제 할 일을 한다.
그리고 이후에 있을 뒷일은 이제… 내가 맡게 됐다.
나는 다 먹은 그릇을 흐르는 물에 깨끗이 헹궜다.
다시 말하지만, 오늘은 휴일이다.
그럼 이제 뭐 하냐고?
뭐 하긴.
공부해야지.
모녀가 한꺼번에 내 내담자가 되었다.
당연히 공부할 거리도 두 배다.
모처럼 시간이 생겼으니, 밤샐 필요 없이 느긋하게 자료를 볼 수 있다.
얼마나 좋은 일인가?
하지만 그전에.
“빨래부터 좀….”
며칠간 쌓아둔 미뤄왔던 집안일.
나는 세탁 바구니를 들고 빨랫감들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수건, 속옷, 그리고 흰옷들.
그런데.
- 뒤적뒤적.
- 뒤적뒤적.
아무리 빨래 더미를 뒤져봐도 있어야 할 것이 보이지 않았다.
'내 가운.'
“아니… 없는데?”
상담실에 없었기에 집에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없다.
“집에도 없어.”
대체 어디로 간 거지?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 킁킁….
“대체 뭐야아아….”
루나는 따뜻한 온기가 남아있는 건조기 문 앞에서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
이번이 벌써 세 번째였다.
어제 선생님의 상담실에서 훔쳐… 아니, 가져온 의사 가운.
그녀는 죄책감을 덜기 위해 집에 오자마자 가장 좋은 세제로 가장 깨끗하게 세탁을 마쳤다.
향기로운 섬유 유연제까지 듬뿍 넣어서.
첫 번째 건조가 끝났을 때, 그녀는 만족스럽게 가운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루나는 화들짝 놀랐다.
선생님의 기분 좋은 향은 아주 은은하게 남아있었다.
그거야 뭐, 선생님의 옷이니까.
문제는, 정신을 차리고 맡으니.
그 위에 다른 향이 아주 진득하게 덧씌워져 있다는 것이었다.
건조까지 마친 새하얀 가운에서 나올만한 향은 절대 아니다.
짙고, 농후한… 수인 특유의 달콤하고 노골적인 향기.
페로몬 향.
세탁 이후라 그런지 누군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무튼 페로몬 향인 건 확실했다.
‘설마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루나는 자신의 몸이 멋대로 반응했다는 사실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선생님의 물건에 흔적을 이렇게 진하게 남겨버리다니.
선생님은 평범한 인간이라 모를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수인은 다르다.
엘리스나… 유니온의 다른 수인이 맡는다면 단번에 알아챌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얼굴이 터질 것처럼 뜨거워졌다.
루나는 재빠르게 두 번째 세탁을 했다.
세제를 두 배로 넣었다.
- 띠리리리링~
건조기가 끝나는 알림음.
- 킁킁….
“아.”
결과는 똑같았다.
- 띠리리리링~
세 번째도 마찬가지였다.
도무지 빠지지가 않는다.
이건, 돌려드릴 수가 없다.
“안돼애….”
그녀가 절망에 빠져 고개를 숙이고 있던 바로 그 순간.
- 달칵.
엘리스가 하품을 하며 세탁실의 문을 열었다.
“하아암… 언니 뭐해 거기서?”
루나는 거의 울상이 된 얼굴로 동생을 붙잡았다.
그래, 엘리스는 나보다 더 성숙하니까.
“엘리스…! 큰일 났어! 혹시… 페로몬 지우는 법 알아?”
물론 엘리스도 모르는 건 똑같다.
“페로몬? 언니가 페로몬을 무슨….”
엘리스는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루나의 손에 들린 가운으로 코를 가져갔다.
그리고 한번 킁하고 냄새를 맡더니 그대로 표정이 굳었다.
“어…?”
이건 언니의 향이 아니다.
굉장히 짙고 농후하다.
정확히 구별할 수는 없지만···.
이거….
‘나잖아?’
어젯밤 언니의 방 문이 닫힌 것을 확인하고 그녀는 몰래 세탁실로 향했었다.
그리고 루나가 자는 내내 한참 동안, 아주 한참 동안 킁킁거렸다.
밀폐된 공간에서 그러고 있다 보니 그녀의 향이 완전히 밴 모양이었다.
자신의 향은 자신이 가장 잘 안다.
엘리스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다시 한번 가운에 코를 깊게 묻었다.
이번에는 훨씬 더 진지하게.
그리고 확인했다. 의심할 여지조차 없다.
그녀의 향이다.
“어떡해… 너무 진하지? 너무 노골적이지?”
옆에서 루나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발을 동동 구르며 걱정했다.
“…….”
내 건데.
“나 요즘 미쳤나 봐… 몸이 이상해….”
그러게.
“…….”
엘리스는 차마 어떤 말도 해줄 수가 없었다.
순진한 언니가 자신이 한 변태 같은 일을 전부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응… 언니 조심해야겠다….”
“이이잉….”
루나는 결국 주저앉아, 얼굴을 두 손에 파묻었다.
- 토닥토닥.
엘리스는, 그런 언니의 등을 아주 복잡한 표정으로 토닥여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