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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오후의 첫 상담은 순서상 루나였다.
그러나 나는 태블릿 위에 떠 있는 두 사람의 이름을 보며, 잠시 고민에 빠졌다.
엘리스는 그 속을 알 수 없긴 하지만, 적어도 겉으로 드러난 문제는 없어 보였다.
그녀의 상담은 아마 길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루나와의 상담은 길어질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순서를 바꾸는 것이 좋아 보인다. 엘리스 입장에서도 기다리는 것보다는 이 편이 나을 테니까.
나는 인터폰의 버틀을 눌렀다.
“다음 상담… 엘리스 헌터님 들어오시라고 전해주시겠어요?”
- 똑똑.
채 1분도 지나지 않아, 문에서 가벼운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갈게여~”
그러나 내 대답은 기다릴 생각도 없었다는 듯, 명랑한 목소리와 함께 문이 활짝 열렸다.
루나와 상반되는 짙은 회색빛의 머리카락과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선명한 붉은 브릿지.
그리고 그 위로 쫑긋하게 솟아있는 한 쌍의 토끼 귀까지.
엘리스였다.
그녀는 소리 없는 걸음걸이로 안으로 들어왔다. 루나도 그렇고 엘리스도 그렇고, 발소리를 죽여 조용히 걷는 것은 토끼 수인의 종족적 특징인 것처럼 보였다.
엘리스는 아주 자연스럽게 맞은편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았다.
그리고는 아주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도 발견했다는 듯, 흥미로운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
엘리스의 입꼬리는 살짝 올라가 있고, 붉은 눈은 크게 뜨여 있었다.
나는 그녀의 그 노골적인 시선을 받으면서 조용히 능력을 사용했다.
[엘리스]
[메인 스탠스]
[어제 언니에게 커다란 변화가 생긴 것을 보고, 그 원인인 당신에게 강한 호기심을 느껴 찾아왔습니다. 사실, 오후에 잡혀있던 귀찮은 임무를 합법적으로 땡땡이칠 수 있어서, 이득이 1+1. 더욱 좋습니다.]
[적합 답변] [만족 적합률 90%]
[예의상이라도, 왜 왔는지 물어보세요.]
나는 뒤의 말을 보고 웃음을 참았다.
어차피 고민 없으니 물어보기라도 하라는 소리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고개를 끄덕거리며, 엘리스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조명에 비쳐 루비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
“엘리스 헌터님은 무슨 고민이 있으셔서 직접 상담을 신청하셨나요?”
나는 진짜 예의상, 정말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내 질문에 엘리스는 잠시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내 '아, 맞다. 여기 상담소지.' 하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그녀는 깊고, 긴 한숨을 내쉬며 책상 위로 턱을 괸 채 말문을 열었다.
그녀의 쫑긋한 귀가 슬픔에 잠긴 듯 축 처지기까지 했다.
“사실… 제가여….”
“네.”
나는 받아 적는 척을 하며 노트와 펜을 꺼내 들었다.
그러나 이어질 말은.
“요즘, 본능 발현기에요…."
“…….”
- 빠각.
팬심이 부러지는 소리가 상담실 안을 울렸다.
나는 펜을 쥔 채, 그대로 모든 움직임을 멈췄다.
말이 본능 발현기지, 그게 뜻하는 바가 뭔지는 나도 알고 있었으니까.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조금 전까지, 세상의 모든 시름을 짊어진 듯 슬픈 표정을 짓고 있던 그녀는 온데간데없었다.
엘리스는 내 반응이 아주 만족스럽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며 요염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손에서 펜을 소리 없이 내려놓았다.
당황스럽긴 하나, 여기서 그녀의 페이스에 끌려다니는 것은 원치 않는다.
본질과 내면이 어찌 되었든, 현재 엘리스는 내 내담자다.
내담자에게 끌려다니는 것은 상담사로서는 저지르면 안 되는 실수이자 자격 박탈이다.
상담사로서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이, 내담자의 이러한 ‘전이’ 현상에 대한 경고이니까.
나는 즉시 개인적인 감정을 지우고,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사무적으로 답했다.
“그렇군요. 본능 발현기시군요. 많이 힘드셨겠습니다.”
“네…? 아… 네….”
내 예상 밖의 담담한 반응에, 엘리스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진단을 위한 질문을 이어갔다.
“혹시 그 증상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나요?’
“태, 태어날 때부터요….”
엘리스는 여전히 도발적인 자세를 유지하러 애썼지만, 목소리가 아까보다 떨리고 있었다.
“아, 그러시군요.”
골때리는 토끼 같으니라고.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며, 다음 질문을 던졌다.
“그 기간이 되면, 심리적인 상태나 기분에 변화가 생기는 점이 있을까요?”
“…네, 기분이… 아주 좋아져요….”
그녀는 간신히 대답했지만, 나는 쉬지 않고 곧바로 질문했다.
“그럼, 구체적인 증상은 어떻게 되시죠?”
“… 네…?”
이번 그녀의 되물음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당황 한 번 해보라는 느낌으로 생각없이 던진 미끼를 해부용 메스로 진지하게 분석하고 있으니, 오히려 그려가 당황할 수밖에.
나는 펜을 다시 고쳐 잡으며, 아주 친절하고 전문적인 태도로 부연 설명했다.
“증상이요. ‘기분이 아주 좋아지는’ 것 외에, 본능 발현기로 인해 구체적으로 일상생활의 어떤 부분이 힘드신 건지. 제가 아무래도 수인 분들의 본능 발현기에 대해서는 경험이 부족해서요. 자세히 말씀해 주실수록, 제가 더 정확한 도움을 드릴 수 있습니다.”
내 말에 엘리스의 입가에 걸려있던 요염한 미소가 마침내, 완전히 사라졌다.
“아… 아… 네…. 그, 그니까 그게에….”
그녀는 시선을 피하며,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는 듯했다.
“그니까 그게에… 귀가… 쫑긋, 서고… 볼이 붉게 달아오르고요… 배, 배 안쪽이 찌릿… 찌릿 ….”
말을 하면 할수록 목소리가 점점 더 기어들어 갔다.
그러다 마침내, 그녀는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쫑긋했던 잿빛 귀가 비 맞은 종이처럼 축하고 늘어졌다.
“죄송해요오….”
마침내 항복 선언.
“왜 그런 거짓말을 하셨을까요….”
“그냥… 궁금해서어….”
[엘리스]
[메인 스탠스]
[자기도 모르게 종족의 본능 발현기의 특징을 다 말해버렸습니다. 더 장난치다간 그녀 자신이 위험해질 것 같습니다.]
잠깐만.
그니까 방금 횡설수설 내뱉은 그 증상들이 진짜 토끼 수인들의 증상이라고?
뭔가 알면 안 되는 비밀을 알아버린 느낌인데.
엘리스는 골 때리긴 해도 솔직한 토끼인 듯했다.
그리고 능력은 다음 선택지를 제시했다.
[적합 답변] [만족 적합률 100%]
[가서 언니 데리고 와.]
‘데리고 와.’는 반말인데.
하지만 그 옆에 떠 있는 100%라는 숫자가 내 고민을 멈추게 했다.
이건 무조건이라는 소리다.
그러나 내 성격상 ‘데리고 와’라는 말은 좀 그렇고.
적당히 내 방식으로 포장하기로 했다.
“가서 언니 좀 데리고 올래요?”
나는 미소 지으며 질문과 함께, 가방에서 작은 마카롱 상자를 꺼냈다.
어제, 루나를 위해 시내에서 가장 유명한 파티셰리에서 사두었던 수제 마카롱이었다.
그날 어째서인지 두 개를 사두었던 나의 선견지명에 감사했다.
나는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붉은 딸기 마카롱과 새하얀 바닐라 마카롱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크림이 두툼하게 발린 바닐라 마카롱 봉지 하나를 집어 엘리스의 눈앞에 내밀었다.
바로 그 순간 내 능력이 환호성을 질렀다.
[!! 그것이 더 탁월한 선택입니다!!]
응 땡큐.
내 제안에 엘리스의 붉은 눈동자가 마카롱에 고정되었다.
그녀의 잿빛 귀가 저도 모르게 쫑긋, 하고 섰다.
“네에….”
나직하게 대답하며 마카롱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나는 그녀가 마카롱을 받아 들고, 약속대로 루나를 데리러 갈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
- 부스럭.
“……?”
- 부스럭… 킁킁….
엘리스는 마카롱을 받아들더니 봉지를 찢고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 와작.
그리고는 씹어 먹었다.
“냠냠.”
“…?”
얘, 왜 안 나가.
엘리스는 자리에 앉아 행복한 표정으로 오물거리며 맛을 음미하고 있었다.
그녀는 마카롱을 반쯤 먹어 치우고 나서야,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엘리스의 축 처져 있던 귀는 어느새 다시 쫑긋하게 솟아 활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양 다리를 휘적휘적 젓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음… 마카롱 값은 해야지. 그렇져 선생님?”
“아니요. 괜찮은데요.”
내 대답에도 그녀는 다시 내게 요염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우리 순진한 언니 때문에 앞으로도 고생 좀 하실 것 같아서, 제가 수인에 대한 중요한 꿀팁 하나 드릴게여.”
이거는 좀 흥미로운데….
출처가 엘리스라는 것만 제외하면, 들어볼 만한 이야기처럼 보였다.
나는 그녀의 진짜 의도가 무엇인지, 경계심을 늦추지 않은 채 물었다.
“… 뭐죠?”
“우리 수인들에게는, 서로에게만 하는 칭찬이자… 아주 기분 좋은 인사가 있어여.”
그러고는 엘리스가 갑자기 고개를 숙여, 자신의 얼굴 대신 길고 쫑긋한 잿빛 귀를 내 쪽으로 내밀었다.
하얀 목덜미의 선이 무방비하게 드러난다.
- 쫑긋, 쫑긋.
그녀의 귀가, 나를 유혹하듯 가볍게 움직였다.
“오른쪽… 그러니까 선생님의 입장에서 오른쪽 바깥쪽 귀를, 이렇게… 스윽, 하고 쓰다듬으면 그게 우리 수인 사이의 기분 좋아지는 인사예여.”
흠….
나는 즉시 엘리스의 상태를 확인했다.
도통 믿을 수가 있어야지.
[엘리스]
[메인 스탠스]
[수인 사회에서, 이 행위는 ■칭찬과, ■적으로 기분 좋은 인사로 통용됨을 알려주고자 합니다. 당신이 이것을 루나에게 사용하길 원합니다.]
뭐지.
중간중간 글자가 노이즈가 낀 것처럼 지지직거리며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칭찬, 기분 좋은 인사. 등 루나에게 사용하길 원한다는 내용은 전체적으로 좋은 느낌을 주긴 했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그래도.
- 스윽.
확인은 해봐야지.
나는 그녀의 말을 확인하기 위해, 엘리스의 오른쪽 바깥쪽 귀를 내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눈앞에 가장 좋은 실험 대상이 있는데, 안 하는 것도 이상하니까.
루나는 섬세하니, 모든 것은 먼저 시험해 봐야 했다.
‘와….’
손끝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럽고 따뜻한 감촉이 느껴졌다.
상당히 중독성 있는데.
“!”
그 순간, 엘리스의 몸이, 전기가 흐른 것처럼 파르르 떨리며 굳었다.
그녀의 뺨이 살짝 붉어지며… 마침내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그렇게여. 잘… 하시는데여?”
그녀의 목소리는 방금 전과는 달리 약간 고양되어 있었다.
엘리스의 표정을 살피니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진짜 정보인 듯했다.
“감사합니다. 아주 유용한 정보였어요. 그런데… 그것보다는 루나님이 제 앞에서 귀를 꺼내시게끔 하는 게 먼저겠네요.”
그녀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앗? 그, 그러네여…. 그럼, 파이팅…."
엘리스는 갑자기 반쯤 남은 마카롱을 허둥지둥 집어 들더니 엉거주춤 아랫배를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거의 도망치듯 상담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들어올 때도 마음대로더니, 나갈 때도 자기 마음대로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엘리스가 나간 뒤를 바라보다, 인터폰을 들었다.
“루나 헌터님. 다음 차례라고 전해주시겠어요?”
결국, 메인 내담자는 루나였다.
“하아… 하아….”
엘리스는 상담실에서 뛰쳐나와, 차가운 복도 벽에 등을 기댄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는 아랫배를 움켜쥐었다. 그의 넓은 손바닥이 귀를 스쳤을 때 배 안쪽에서부터 피어올랐던, 아찔하고도 짜릿한 감각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고개를 살짝 들자, 복도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홍조로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리고 쫑긋 솟은 귀는 의지와 상관없이 파르르 떨리고 있다.
“…… 설마 나한테 할 줄은….”
설마 했다.
그런데 그는 망설임 없이 귀를 쓰다듬었다.
겨우 참았다.
못 참을 뻔했다. 그 자리에서 이상한 소리를 내지 않은 것만으로도 엄청난 인내심이었다.
얼른 튀어나오길 잘했다.
그러나 그때.
“엘리스, 뭐해?”
코너에서 차분한 목소리와 함께, 하얀 토끼 루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 아, 아니… 갑자기 배가 좀 아파서….”
엘리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재빨리 평소의 여유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나 루나는 속지 않았다. 그녀의 붉은 눈이, 의심스럽다는 듯 가늘어졌다.
“선생님 곤란하게 한 건 아니지?”
루나는 엘리스를 추궁했다.
“응, 아니야. 절대.”
‘내가 곤란해졌어.’
엘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루나의 시선이 엘리스의 손에 반쯤 남은 채 쥐어져 있는 바닐라 마카롱으로 향했다.
“그거는… 선생님이 주신 거야?”
“응. 맛있던데?”
그 말에, 루나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
그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엘리스를 지나쳐 상담실로 향했다.
그리고 그 발걸음은, 가볍고 경쾌하게 변해 있었다.
‘오늘은··· 마카롱인가?’
마카롱은 루나가 사랑하는 여러 디저트들 중 하나였다.
루나의 기분이 한 층 좋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