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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이야기 좀 하지, 도연이와 도진이. 둘에 관해서.”
“좋습니다.”
안경을 밀어 올리고는 천천히 다가오는 도학훈 협회장. 그는 대략 나랑 10걸음 정도 벌어진 거리에서 발을 멈추었다.
“혹시 도연이와 도진이에게 나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가?”
“도진이한테는 들은 적이 있습니다, 남매를 버리고 새 가정을 차린 파렴치한 부모라고요.”
“……그런가, 틀린 말은 아니지.”
씁쓸한 표정을 짓는 도학훈.
그는 내 눈을 바라보더니, 이내 전혀 상상 못한 돌발행동을 벌였다.
털썩!
“………!?”
갑자기 내 앞에 무릎을 꿇는 도학훈.
나는 이 갑작스러운 전개에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협회장님, 갑자기 무슨…!”
“참으로 염치없는 건 알지만, 한 번만 도와줄 수 없겠나.”
“도와달라니, 뭘 말입니까.”
“…내가 잘못한 부분은 사과하고, 오해가 있는 부분은 바로잡고 싶네. 내 딸과 아들 모두와 가까운 자네밖에 기댈 사람이 없다네.”
“으음.”
도진에게 이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나, 보육원에서 마주쳤을 때 뭔가가 있을 거라 생각은 했다만.
“들어는 보겠습니다만, 제 기준에 아니다 싶으면 돕지 않겠습니다. 불만 없으십니까?”
“…그 정도면 됐네, 그 이상 바라는 것도 과욕이겠지.”
“그럼 들려주시죠, 그 사정이라는 게 뭔지.”
고개를 끄덕인 도학훈.
그는 다소 슬픈 눈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시절, 우리 가족은 정말로 행복했다네.”
#######
도학훈은 프로팀의 착실한 내야 백업이었다.
주전은 아니었어도, 주전이 빠지면 늘 든든하게 자리를 채우며 팀에 기여하는 선수였다.
이름난 선수는 아니었지만 그는 행복했다.
사랑하는 아내가 있고, 딸이 있으며, 아장대는 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백업이긴 해도 한국은 세계 최고의 리그.
충분히 고액 연봉자인 그였지만 안심할 수는 없었다.
재능 있는 젊은 선수들은 매년 리그에 들어오고 있었고, 그의 자리를 호시탐탐 노렸기 때문이다.
‘벌 수 있을 때 최대한 벌어놔야 해.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불안정한 야구 선수라는 직업 특성상, 언제든 모가지가 날아갈 수 있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아는 도학훈.
그는 사랑하는 가족과 더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기량을 높이는 데 시간을 더 많이 할애했다. 도연과 도진의 케어는 아내에게 맡긴 채로 말이다.
“여보, 돈 관리는 당신에게 전부 맡길게.”
“정말 괜찮겠어요? 당신이 힘들게 번 돈인데….”
“당연하지, 우리 내조의 여왕님이 안 맡으면 누가 맡겠어!”
그렇게 돈 관리를 일임하게 된 도학훈의 아내.
그녀는 처음에는 남편과 뜻을 맞춰, 최대한 허리띠를 졸라매며 아껴보려 했다.
그런데 돈이 있는 사람에게는 똥파리가 꼬인다고, 그가 프로 선수의 아내인 것을 안 아파트 주부들이 스멀스멀 제안을 던지기 시작했다.
“도연 엄마, 돈 불릴 수 있는 자리 관심 없슈?”
“네? 돈을 불려요…?”
“그래! 옆집 김 서방은 세배로 불렸다니까!”
“……!”
어디까지나 시작은 선의였다.
물론 결과는 최악이었지만.
“뭐, 뭐라고? 다시 한번 말해봐.”
“미안해요, 나는 불려보려고 한 건데, 그게….”
깊은 한숨을 내쉰 도학훈.
같은 아파트 아줌마들을 따라 불법 도박판에 따라갔는데, 상당한 돈을 잃었다고 한다.
세상 물정을 너무 모르던 아내의 실수.
그는 이번엔 용서하고 어떻게든 덮으려 했다.
“후우, 그래 얼마나 날린 건데?”
그가 모아둔 뒤 아내에게 준 돈이 대략 5억.
알거지가 됐다고 해도 다시 모으면 그만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10억….”
“뭐……!?”
“그, 판돈이 없으면 다음에 갚으라고 해서, 당신 도장을 잠깐 가져다가 차용증 쓰고 돈을 좀….”
“당신 진짜 미쳤어……!!”
콰앙!
“꺄악…!!”
분을 참지 못하고 벽을 쾅 내리치자, 땅바닥에 주저앉는 아내. 그는 자기도 모르게 분노를 터트린 것을 보고 숨을 들이켰다.
“여보, 이건 그게….”
수습해보려 했지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최악의 연쇄작용이 벌어졌다.
“엄마, 아빠? 무슨 일 있어요…?”
끼이익!
“………!!”
문을 열고 들어온 도연이 깜짝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분노해서 울그락불그락 한 아버지의 얼굴, 그리고 방바닥에 주저앉아 얼굴을 감싼 채 벌벌 떠는 엄마.
쾅!
도연은 충격을 받고는 현장에서 도망쳤다.
“도연아, 도연아…!”
그가 뒤늦게 수습해보려 했지만, 사태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떨어진 지 오래.
5억이라는 막대한 빚을 짊어지게 된 상황에서 부부는 이전처럼 화목할 수 없었다. 매일같이 이어지는 부부싸움이 이어지며, 결국 도학훈은 참다못해 법원에 이혼 소송을 제기했다.
물론 도연과 도진에 대한 양육권은 본인이 가질 생각이었다. 증거는 충분했다. 그녀가 도박으로 엄청난 빚을 만들며 가정 평화를 깨트린 정황이 명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1심 법원은 그녀의 손을 들어줬다.
“도박빚으로 가정을 다소 어려운 형편으로 만들었다는 원고의 논지는 일부분 인용하는 부분입니다만….”
“두 자녀의 어린 나이를 고려, 아이가 자라나는 데 있어 정서적 안정에 어머니의 역할이 지대하다는 점을 결코 무시할 수 없습니다. 이에 본 판사는 양육권이 친모 김윤서 양에게 있음을 판결하는 바입니다.”
“………!!”
현대의 한국은 자녀의 복리를 최우선으로 하여 경제력, 양육 환경, 도덕성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지만, 그 시절에는 가정에서 어머니와 모성에 좀 더 가중치를 두던 때였다.
도학훈은 결국 양육권을 아내에게 빼앗겼다.
변호사 역시 분개하며 그에게 2심을 제안했다.
‘말도 안 되는 판결입니다, 이건 무조건 이길 수 있어요…!’
그 말에 격히 공감하며 2심을 준비하는데, 아내가 도학훈을 찾아왔다.
“나, 오래 못 살아요. 불치병이래요, 길어야 3~4년이라고 의사가 그러네요.”
“뭐……?”
“이혼에 내 잘못이 일부 있는 건 인정해요. 그런데 당신은 내 얼마 안 남은 시간 동안 아이들마저 빼앗아 갈 셈인가요? 내가 힘들게 아이들을 키우며 병들어 가는 동안, 맘 편하게 운동만 해왔던 당신이…?”
“……….”
아내의 진단서를 보고 마음이 약해진 학훈은 결국 양육권 분쟁을 포기했다.
‘시간이 해결해주겠지, 시간이….’
어차피 오래 살지 못하는 아내다.
무서운 이미지로 각인된 아빠 보다는, 남은 기간만이라도 엄마랑 자라게 두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는 더욱더 야구에 매진했다.
양육비를 보내고, 빚을 탕감하기 위해선 이전보다 더 노력해야 했다.
잠도 줄이고, 휴식도 줄여가며 노력했다.
그러다가 일이 터졌다.
“크아악…!”
제대로 몸을 돌보지 않고 무리한 대가는 잔혹했다. 그는 더 이상 선수 생활을 이어갈 수 없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야 말았다.
쏴아아아-
“……….”
비 오는 날, 그는 밖을 하염없이 걸었다.
셔츠가 축축하게 젖고, 물에 젖은 생쥐 꼴이 됐지만 그저 걸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
가족을 믿은 것이 죄란 말인가.
좀 더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살려고 발버둥 쳤을 뿐인데, 어느 순간 나락의 구렁텅이에 빠진 자신을 보게 되었다.
그에겐 야구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다.
나름 똑똑하다는 말을 많이 듣긴 했지만, 어릴 때부터 야구에만 매진한 그는 가족에 이어 야구마저 빼앗기자 가슴 한쪽에 구멍이 뻥 뚫린 기분이었다.
‘이제 쉬고 싶군….’
어느덧 도착한 곳은 한강 다리 위.
그는 그 위로 몸을 던지기로 했다. 그 순간….
“안 돼요…!!”
“………!?”
갑자기 뒤에서 확 자신을 끌어당기는 누군가가 있었다. 그렇게 난간에서 내려온 순간, 그는 정신이 확 들었다.
“내, 내가 무슨 짓을….”
그리고 자신을 구해준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보다 두어살 어려 보이는, 20대 후반의 여자였다.
“하아, 하아, 이런 날씨에 넋 나간 표정으로 걸으시는 거 보고 위험하다 싶어서 따라왔어요, 그런데 진짜로 죽으려 하시다니…!”
“………….”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거예요? 저라도 괜찮으시면 들어드릴게요.”
평소라면 초면의 여자에게 이야기를 털어놓을 리 없는 도학훈이지만, 그는 지금 기댈 사람이 단 하나도 없는 상황.
결국 가슴에 응어리진 이야기를 전부 털어놓았다.
“어떻게 그런….”
제 일처럼 슬퍼하며 눈물 흘리는 여자.
그녀는 흘리던 눈물을 쓱쓱 닦고는, 도학훈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안 되겠다, 일단 가요!”
“가다니, 어디를….”
“당연히 저희 집이죠!”
“……!?”
물론 그렇고 그런 일은 없었다.
그에게 따뜻한 목욕탕을 빌려주고, 밥을 한 끼 해주었을 뿐.
그게 도학훈의 마음을 동하게 했다.
상처를 치유한다는 목적하에 만남이 잦아진 둘은, 점점 서로에게 끌리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선을 그었다.
이혼했다고는 하나 전처가 존재했고, 그 밑에 멀쩡히 딸과 아들이 있는 상태.
한 번 다녀온 그가 아직 미래가 있는 여성과 식을 올리기엔 미안함이 컸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사정조차도 이해해주었다.
“저는 괜찮아요, 당신이 결혼했었고, 아이들이 있어도….”
“당신….”
“식은 당장 올리지 않아도 괜찮아요. 나중에 제가 아이들에게 새엄마로 인정받게 되는 그때 올려도 충분해요.”
따로 법적 절차나 식은 올리지 않은 채, 사실혼으로 동거를 시작한 둘.
이 소식이 불치병을 앓는 전처에게 들어가자, 그녀는 미치고 팔짝 뛰었다. 그리고는 아이들에게 학훈에 대한 악담을 퍼부었다.
“엄마, 아빠 언제 와요? 아빠 보고 싶어요….”
“아빠는 안 오신단다, 엄마를 두고 다른 여자한테 사랑에 빠지셨거든.”
“…………!!”
다시 한번 트라우마가 각인된 도연.
아직 초등학생일 뿐인 그녀가, 가족이 다시는 화목해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너무나도 잔혹한 일이었다.
“이상하다, 왜 연락이 안 되지…?”
무슨 수를 써봐도 아이들에게 닿을 수 없는 학훈. 원래 살던 곳에서는 이사한 지 오래고, 학교도 전학을 간 상태.
그렇게 연락할 수 없는 상태가 된 지 얼마나 지났을까, 학훈은 전처의 부고 소식을 듣게 됐다.
아무리 법원까지 가며 싸웠어도, 한때는 죽고 못 살 정도로 사랑했던 사이. 당연히 장례식을 찾아가 보았지만….
“네 놈이 여길 어디라고 찾아와!”
“이런 파렴치한 놈! 썩 꺼지지 못해…!!”
장인어른을 비롯해, 외가 가족들에 의해 문전박대당할 뿐이었다. 그는 그래도 단 한 가지 만을 위해 수모를 버텼다.
“…전부 제 잘못입니다. 분이 풀리실 때까지 사과드리겠습니다, 대신 도연이랑 도진이만 만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이런 미친놈이! 정신을 못 차렸군, 경비! 경비…! 빨리 끌어내!”
“크윽, 놔주십쇼!! 도연아, 도진아……!!”
결국 그는 장례식장에서도 두 아이의 곁을 지켜주지 못했다.
불행은 연속해서 닥쳐온다고 하던가.
그는 집에 돌아가던 길에 최악의 전화를 받았다.
“네? 병원 말입니까…!?”
다급히 달려간 그곳에는, 교통사고로 숨이 끊어지기 직전인 아내가 보였다.
“수를 써봤습니다만, 곧 숨이 멎으실 겁니다. 마지막 인사 나누시지요….”
“당, 신….”
“…!!”
“꼭, 그 아이들에게, 돌아가요. 당신이,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
삐,삐,삐--
“크으아아아아악……!!”
목놓아 통곡한 도학훈.
그는 며칠 뒤 호출을 받았다.
사망한 그녀의 친부에게 말이다.
으리으리한 건물, 한국 야구 협회의 최고층으로 올라가자 그를 만날 수 있었다.
한국 야구 협회장, 정기표.
그와의 첫 만남 순간이다.
“…네 놈이구나, 희야와 같이 살고 있다던 녀석이.”
“예, 맞습니다.”
“쯧, 집을 박차고 뛰쳐나갔으면 행복하게 살기나 할 것을….”
씁쓸한 목소리로 담배 연기를 내뱉는 정기표. 그는 이내 의자를 돌리더니, 도학훈에게 제안을 던졌다.
“이제 희야는 세상에 없다.”
“…예, 없지요.”
“이제 내 딸아이의 마지막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건, 오직 네놈에게서 뿐이구나.”
끼익!
의자에서 일어나 도학훈에게 다가오는 남자.
그는 대뜸 한 가지 제안을 던졌다.
“내 밑으로 들어와라.”
“예? 그게 무슨….”
“아마 죽도록 힘들 거다. 언제 끝날지도 모르고 말야. 그런데 내가 내준 일들을 전부 마치는 순간, 그 누구도 널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자리에 앉게 해주마.”
“………!!”
“대신 못 버티면 국물도 없다, 이건 어디까지나 죽은 희야를 위해 주는 기회. 여기서 뒤돌아서는 순간 네놈은 영원히 나랑 남남인 게야.”
“……….”
눈을 질끈 감은 도학훈.
부상으로 망가진 몸으로 막노동을 하며 버티던 상황이다.
몸 이곳저곳에서 비명이 들리던 와중이었기에, 그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하겠습니다.”
“끌끌, 잘 생각했다.”
그렇게 정기표의 밑에 들어간 도학훈.
그는 야구계의 밑바닥이라 해도 될 정도로 더러운 꼴도 많이 봤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많았지만 이를 악물고 버텼다.
‘버텨야 한다, 아이들에게 돌아가기 위해서…!’
하루에 잠을 3시간씩밖에 못 자며, 버티고 버텼다.
‘법적으로 따지고 들면, 아이들을 되찾을 수는 있겠지만….’
지금 당장은 돌아갈 수 없다.
정기표가 내어준 과제들을 수행하면서 아이들까지 케어하는 건 불가능한 상황.
그래서 넌지시 정기표에게 말해보기도 했다.
“협회장님, 아이들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제가 자는 시간을 더 줄여서라도 맡기신 바는 전부 수행해낼 테니, 어떻게든 조정을….”
“못 해줄 거야 없다만, 괜찮겠나?”
“뭘 말씀이십니까…?”
“지금 이 일에 몰입하지 못하면 자넨 어중이떠중이밖에 되지 못해. 어디 가서 명함 정도는 내밀 수 있는 인간이 되어서 돌아가는 게, 장기적으로 네 자식들에게 좋을 거라 생각하지 않냐?”
“……….”
당장 비빌 언덕이라고는 정기표 하나뿐인 상황. 학훈은 그의 조언을 따르기로 했다.
그러나 그는 그 조언을 따른 것을 후회했다.
그때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정기표 또한 한때 딸이 집을 박차고 나가게 만든, 아버지로서는 낙제점인 인물이란 걸.
아무튼 당장은 아이들을 케어할 수 없는 상황. 그런 상황에서도 믿을 구석이 하나 있었다.
‘…처남, 처남은 믿을만해.’
항상 도학훈을 챙겨주던 처남.
그는 똑똑한 머리에, 항상 누군가를 챙기는 훌륭한 인성의 소유자였다.
실제로 아내와 트러블이 있을 때, 장례식에서 쫓겨날 위기일 때 학훈을 챙겨준 것도 그였다.
‘아이들? 당연히 괜찮지, 내가 책임지고 케어할게…!’
고맙게도 아이들을 관리해주겠다는 처남. 학훈은 그의 말을 믿고 일하며 번 돈 상당수를 처남에게 보냈다.
그래도 아비 된 입장에서, 아이들을 못 본 지 오래됐기에 아이들이 사무치게 보고 싶을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처남은 말했다.
‘도연이가 매부를 아직 무서워해, 트라우마가 남았는지….’
‘도진이도 누나한테 이야기를 들었는지 무서워하는 건 매한가지고.’
‘편지라도 써볼래? 애들도 언젠가는 매부의 진심을 알게 되지 않겠어?’
‘………으음.’
도연이 아직 자신을 무서워한다는 말.
솔직히 많이 서운하기는 하지만, 그날 아내를 향해 벼락같은 화를 내던 자신을 본 도연의 눈빛에는 상당한 공포가 서려 있었다.
아직 미성년자인데다 감수성이 풍부한 여자아이인 만큼, 그날의 상처가 오래 간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생각했다.
그렇게 또다시 몇 년을 참던 어느 날, 도학훈은 보게 되었다.
가장 공부에 열중해야 할 고등학교 3학년에, 동네에서 힘들게 전단지를 돌리고 있는 도연을.
“어, 어째서…!?”
그제서야 깨달았다.
자신이 보낸 돈 대부분이 처남의 뒷주머니로 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는 극심하게 분노했다.
“네 이놈…!!”
콰앙!
“대체, 대체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이런 금수만도 못한 짓을 한단 말이냐…!”
“하하, 매부. 적당히 챙길 거는 다 챙겨줬다고, 나는 그냥 남는 거 조금 챙겼을 뿐인데.”
“네가 진정 정신을 못 차리고…!”
“나 참, 어이가 없네.”
적반하장으로 화를 내는 처남.
그는 침을 찍 뱉으며 성을 냈다.
“야이씨, 그럼 니가 애들 데리고 살던가. 근데 애들이 네 말 듣겠어? 불치병 걸린 엄마 버리고 딴 년이랑 새살림 차린 애비를?”
“……!”
“걔네들 이미 너 없이도 잘 살아, 힘들지만 적응해서 나름 살고 있다고. 너에 대한 분노가 동력이 된 거겠지. 괜히 애들 흔들지 말고 그냥 쥐 죽은 듯 살아, 그게 걔네들한테도 좋을 테니까.”
쌩 하고 가버린 매부.
그에게 결국 돈을 상당 부분 받아내긴 했지만, 아이들의 양육에 제때 들어갔어야 할 돈을 뒤늦게 받아봐야 소용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병원으로 자신을 부르는 정기표의 부름을 받았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중환자실에 누워 자신을 바라보는 그를.
“아아, 왔는가.”
“어르신, 이건…?”
“뭐기는, 갈 때 된 노친네 처음 보나.”
별거 아니라는 듯 말하는 정기표.
그는 학훈 쪽으로 툭하고 파일철을 던졌다.
“다음 달 부터는 자네가 협회장이야, 한국 야구는 이제 자네가 이끌어 가는 것일세. 이미 손은 다 써뒀네.”
“……그, 그게 무슨!”
한국 야구 협회장이 무슨 자리인가.
자타공인 한국 야구의 지존 아닌가.
세계 최고인 한국 야구의 모든 부분에 입김을 불어넣을 수 있는 자리다.
그는 당황하며 연거푸 거절했다.
“너무 과한 자리입니다! 다시 생각해 주십시오…!”
“아니, 네 녀석은 협회장 감이 맞아. 희야 그 아이가 꽤 괜찮은 남자를 만났더군….”
“…………!”
“협회장쯤 달면 네 아이들에게도 면이 설 테지, 그만 가보게. 가는 길 정도는 혼자 있고 싶으니까.”
“……편히 쉬십시오, 어르신.”
삑, 삑, 삐이이이익!
그가 문을 열고 나오기 무섭게, 들려오는 죽음의 소리.
도학훈은 결국 정기표의 뒤를 이어 한국 야구 협회장에 취임했다. 때마침 도연의 수능이 끝난 상황.
그는 이번이 절호의 기회라 생각했다.
마침 자식들에게 자랑스러운 아빠가 될 수 있는, 상당한 직책까지 얻지 않았는가.
‘…만나서 이야기하자, 그리고 오해를 푸는 거야.’
그렇게 도학훈은 딸을 찾아갔다.
“도연아, 이 아비를 용서해주지 않으련?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설명할 수 있단다.”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찾아간 그가 보게 된 것은, 악에 받친 딸의 눈초리였다.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몇 년 만에 나타나서 하는 소리가 고작 그거에요?”
“……….”
“제가 너무 힘들어서 매일같이 울고 있을 때, 전 아빠 그림자조차 구경 못 했어요. 그런데 다 설명할 수 있어요? 뭐를요? 그 이유가 저희를 한 번도 보러 오지 못할 정도로 대단한 이유에요?”
“도연아….”
고개를 떨군 도학훈.
악재에 악재가 겹쳤다고는 하지만, 결국 인생이란 사람 개개인이 일인칭 시점으로 겪는 것.
학훈이 학훈대로 힘든 것 이상으로, 도연은 그 어린 나이에 모진 사회의 풍파를 감당해내야 했다.
그녀가 외가의 무관심 속에 이렇게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좀 더 일찍 나섰겠지만, 후회해봤자 이미 그녀의 마음속에는 넘을 수 없는 장벽이 세워져 있었다.
“다시는 저랑 도진이 앞에 나타나지 마세요, 저희는 이제 당신 없이도 잘 살 거니까.”
“그래, 그렇구나….”
힘없이 처진 어깨로 돌아선 도학훈.
그는 근처 공원 벤치에 앉아 한없이 오열했다.
“크흑, 큽, 끄윽…….”
선수 시절만큼은 아니어도 든든한 아버지로서 아이들에게 돌아가 보려 했지만, 긴 시간 동안 너무나도 많은 게 바뀌어 있었다.
결국 곁에 가족이라 부를 수 있는 존재가 아무도 남지 않은 도학훈.
그에게 남은 건 빈껍데기 같은 ‘한국 야구 협회장’이라는 직위뿐이다. 그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최연소 협회장으로서, 많은 의문의 눈초리를 받았지만 능력으로 증명했다.
‘공정’을 슬로건으로 내세우며, 많은 개혁을 단행. 21세기 최고의 협회장이라는 칭송까지 받았다.
‘이게 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으리으리한 건물의 최고층.
그를 모시는 수많은 직원이 있고, 야구계 관료가 올라올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왔음에도 행복하지 않다.
단출한 아파트에서 가족 모두가 행복했던 시절.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생각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이미 그는 자녀들에게 없는 것보다 못한 아비인 것을.
“후우….”
그는 조용히 자녀들의 주변을 맴돌았다.
딸이 보육원 봉사를 한다고 하면 멀찍이서라도 지켜봤고, 아들의 경기가 있다고 하면 변장한 채로 찾아가 보곤 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이상한 일이 생겼다.
남매가 고스란히 한 명의 남자와 접점이 생기기 시작한 것.
“……금성묵?”
현세대의 고교야구는 황금세대 그 자체.
두각을 드러내는 선수는 전부 꿰고 있는 그였으나 금성묵이라는 이름은 처음 듣는 것이었다.
그 녀석은 어느덧 도진을 자기 팀에 데려가고, 도연에게 전력 분석을 맡기더니 매일같이 승승장구했다.
남매와 사적으로 친해지는 것은 덤.
늘 혼자 보육원에 가던 도연이 성묵과 같이 그곳에 간 것만으로도 그 거리감이 남다르다고 할 수 있겠다.
‘저 친구라면, 혹시….’
그런 생각으로 상념에 빠져있는데, 금성묵에게 들켜버리고 말았다. 그것도 몰래 도연을 지켜보던 걸 말이다.
안 그래도 아버지에 대한 딸의 인식이 땅바닥을 기는데, 이 사실이 알려졌다간 내핵을 뚫고 들어갈지도 모르는 상황.
이제는 물러설 수가 없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그동안 자녀들과 화해한다는 실낱같은 희망만을 보고 살아온 그다. 이번마저 실패한다면, 극단적인 선택까지 하게 될지 모르는 상황.
그런 일념하에, 도학훈은 성묵을 찾아왔다.
그리고 무릎을 꿇었다.
“참으로 염치없는 건 알지만, 한 번만 도와줄 수 없겠나.”
“……….”
이 세계관에서 권력층 최상층에 속한 인물이고, 원래 같으면 말 한 번 섞어볼 일 없는 사람이 눈앞에 무릎을 꿇고 있다.
그것도 구구절절한 사정을 다 털어놓은 채로.
‘쓰읍, 곤란하네….’
성묵은 머리를 긁으며 뒤쪽 계단을 바라보았다. 어떤 연유인지, 방금까지 닫혀있던 계단 문은 조금 열려있었다. 그것도 아주 조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