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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화 거지 그리츠(Gritz) (2) - 오크통 찾아 담 넘기
세상에는 옆길로 샜을 때 그 집중력이 배로 증가하는 것들이 존재한다.
시험 기간에 하는 게임이라든가, 이삿짐 정리 도중에 구석에 박혀 있던 앨범 보기 같은 것들 말이다.
이들의 집중력 강화 효과는 실로 엄청난 수준이라, 아차 하는 순간 본래 자기가 하려던 일은 까먹고 새로운 행위에 정신없이 몰두해 버리고는 만다.
그레이스의 현 상태도 이와 비슷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스스로가 처한 상황과 앞날에 대한 고민으로 머릿속이 가득하던 그녀였지만, 지금 그녀의 뇌리에 그런 자잘한 것들은 흔적조차 남아 있지를 않았다.
홀로 굴러다니는 걸로 모자라, 막대 하나를 다리처럼 사용해 요리 뛰고 저리 뛰는 정체불명의 오크통은 그 정도의 임팩트를 지니고 있었다.
‘아까 그거, 팔이랑 지팡이였지? 안에 사람이 들어 있는 건가? 대체 왜? 어째서?’
본래부터 호기심이 많고 궁금한 게 있으면 일단 들이받아 봐야 직성이 풀리는 그레이스였다.
일단 오크통을 붙잡아 말이라도 걸어보려 했지만, 막상 오크통을 따라 달려보고 나니 이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근데 뭐가 저리 빨라!?”
데구르르르르르!
바닥을 굴러가는 오크통의 속도는 어지간한 수준이 아니었다.
뜀박질에 꽤 자신이 있는 그레이스가 전력을 다해 추적하고 있는데도, 어찌어찌 놓치지 않는 게 한계일 정도.
하지만 그레이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 길에는 장애물이 많아. 아까처럼 잠깐 멈췄을 때 따라잡으면 돼!’
그녀의 예상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오크통이 나아가는 길 앞에 제법 커다란 단(段)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도 성인 남성의 무릎 정도 높이의, 상당히 높은 녀석.
저거라면 저 오크통도 일단 멈출 수밖에 없으리라 그녀가 확신한 그 순간이었다.
파밧!
구르는 오크통에서 뻗어 나온 막대가 바닥을 후려치는가 싶더니, 오크통이 구르던 기세 그대로 하늘로 솟구쳐 단 위에 착지했다.
그것도 가로가 아니라 세로로.
마치 높이뛰기 후 두 발로 착지한 사람처럼 위아래로 길쭉이 서 있는 오크통의 모습에 그레이스가 멍하니 넋을 놓고 있자니, 오크통 밖으로 빠져나온 팔이 지팡이를 옆으로 까닥까닥 흔들었다.
왜일까, 말 한마디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레이스는 그 의미를 즉각 이해할 수 있었다.
-훗.
“…하!”
그레이스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가 무녀니 뭐니하는 귀찮고도 무겁기 짝이 없는 직책과 아무런 연관도 없던 시절.
주변 사람들이 보고서는 ‘저년 또 발광하려고 저런다’라며 혀를 내둘렀던, 바로 그 웃는 얼굴이었다.
“그래, 누가 이기나 해보자.”
으득, 으득, 빠직, 쭈욱. 그레이스가 제 몸을 풀었다.
만약 여기에 객관적이고도 냉정한 시선으로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제삼자가 있었더라면 ‘저 오크통도 그레이스를 인식한 것 같으니 그냥 이 상태로 말 걸면 되는 거 아닌가?’라는 지적을 할 수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인물은 없었다.
사실 있어봤자 무의미했을지도 모른다.
이건 이미 하나의 승부였으니까.
탓!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그레이스가 땅을 박차고 오크통이 구르기를 재개했다.
여태까지의 추격전과 달라진 부분은, 그레이스가 더 이상 오크통의 뒤를 쫓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오크통이 나아간 길로 똑같이 달리는 대신, 그 옆쪽 골목을 향해 질주했다.
언뜻 승부를 포기한 것 같은 행동이었으나, 그 진짜 의미는 그리 오래 기다릴 필요 없이 드러났다.
기세 좋게 바닥을 구르는 오크통의 우측 전방.
마치 사냥감의 측면을 노리는 맹수처럼, 그레이스의 몸이 오크통을 덮쳐들었다.
골목길은 알기 쉬운 직선 경주 코스 같은 게 아니다.
여기저기가 휘고 꺾이고 갈라지고 이어진 복잡한 미궁이고, 그렇다면 상대의 경로를 예측한 뒤 지름길로 나아가는 것 또한 가능한 일이었다.
‘이번에야말로 잡는다!’
주변 지리에 빠삭한 토박이의 장점을 살린 완벽한 기습을 가하면서도, 그레이스는 결코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아까 전 오크통이 보여준 그 기동력을 고려하면, 아직은 안심할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지팡이가 바닥을 내려치는 것과 동시에 오크통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허나 제아무리 기막힌 회피라고 한들 이미 예측 당한 상황에서야 무용지물.
전력으로 몸을 날리는 대신 여력을 남긴 그레이스는 곧장 돌진 궤도를 수정할 수 있었고, 오크통이 중력의 법칙에 따라 그레이스의 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아니, 떨어져 내려야 했다.
콰직!
머리 위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그레이스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그리고 고개를 치켜올린 뒤에는 눈까지도 의심했다.
골목길 상공.
오크통이 높은 곳에서 정지해 있었다.
마치 박아놓은 못처럼, 가느다랗게 뻗어 나온 지팡이가 벽을 꿰뚫어 오크통 전체를 지지했고, 잠시 후에는 그 지팡이를 축 삼아 재차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상상조차 하지 못한 2단 점프 앞에서 그레이스의 포획 계획은 무용지물로 전락했고, 높은 담벼락 위에 재주 좋게 착지한 오크통은 이번에도 훗, 하고 지팡이를 옆으로 까닥였다.
네깟 게 날뛰어봐야 손바닥 안이라는 듯한 그 오만한 제스처를 보고 그레이스는 다시금 덤벼들었고, 오크통은 담벼락 너머로 모습을 감춘 뒤 재차 도주했다.
휴일이 끝나가도록 돌아오지 않는 무녀를 찾으러 온 카닐리안의 하인들이, 원숭이 뺨치는 솜씨로 담벼락을 넘나들던 그레이스를 발견하기 까지는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무녀님. 이러시면 무척이나 곤란합니다. 가주님께서 무녀님께 온전하고도 자유로운 휴일을 허가 하신 것은 그만큼 무녀님을 믿으셨기 때문일 텐데, 그 신뢰를 이리도 가볍게 박살 내시면─”
길게 이어지는 집사의 잔소리를, 그레이스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냈다.
들어봐야 별로 중요할 게 없는 내용이다.
이 저택의 인간들이 만약 그레이스라는 ‘개인’을 진심으로 아끼고 걱정하여 저리 말했더라면 그녀 역시 못내 죄책감을 느꼈겠지만, 그녀와 저들의 관계는 그런 것이 아니다.
오직 특별한 손님에게 바치기 위해서만 도축일을 받아놓은 소가 있다고 치자. 목장 직원이 도축일까지 소를 애지중지 다룬다고 해서 소가 감사해야 하나? 좁은 우리가 아니라 넓은 들판을 뛰놀게 해준 것에 고마움을 표해야만 하나?
대답은 ‘아니오’다.
포상이니 뭐니 해봐야 그 본질은 상품 관리다.
적절히 풀어놓고 운동도 하게 해줘야 소가 스트레스로 말라붙거나 광증에 휩싸여 자해할 가능성이 낮아진다.
그래서 저들은 가축을 들판에 풀어놓은 것뿐이고, 그 소가 제시간에 우리로 돌아오지 않는다고한들 곤란해하는 건 목장 직원이지 목장 주인은 아니다.
목장 주인이 곤경에 빠지는 건, 그래서 화를 내는 건 소가 도축일을 두려워하며 아예 농장을 탈출하려고 했을 때뿐이다.
그리고 그레이스는 도축일을 회피할 생각도, 아예 이곳을 도망칠 생각도 없다.
그러니 그녀는 혹여라도 일이 잘못될까 두려워 쓴소리를 늘어놓는 집사의 말을 적당히 흘려보낼 수 있었다.
어차피 저 집사의 심정이 어쨌든 간에, 목장 주인. 그러니까 가주가 직접 말을 철회하지 않는 한 일주일에 한 번씩 그녀의 휴일은 보장될 테니.
“…앞으로는 부디 주의해 주시길 바랍니다.”
집사 역시 그 사실을 새삼 인식했는지, 조금은 감정이 담겨 있던 그의 목소리가 빠르게 가라앉았다.
오늘 아침 그녀를 마중할 때 보여주었던 그 모습처럼.
정중하게, 우아하게, 그리고 인간미 없게.
잔소리에서 해방되어 방으로 돌아온 그레이스는, 침대에 누운 채 천장을 바라보았다.
저택은 고요하고, 그녀의 방 주변은 특별히 더 그렇다.
그리고 고요는 별 쓰잘머리 없는 상념들을 불러오기에 아주 적합한 미끼다.
앞으로의 미래라든가, 자신을 향한 사람들의 복잡 미묘한 시선이라든가, 진짜 집이라고 할 수 있는 고아원조차도 편히 가서 쉴 수 없게 된 상황이라든가, 그런, 생각하면 할수록 우울해지고 그렇게 고민다고 해서 딱히 답이 나오지도 않는 문제들.
그런 의미에서 ‘대체 어떻게 해야 그 얄미운 오크통을 붙잡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은 무척이나 훌륭했다.
고민하는 보람이 있고, 오래 생각한다고 해서 가슴이 괴로워지지도 않으니까.
“우선은 정보 수집이 중요하겠네요.”
그리하여 돌아온 휴일.
6일 내내 받은 ‘교육’의 성과로 다시금 정중하게 돌아온 말투를 사용해, 그레이스는 그리 중얼거렸다.
혼잣말이라기에는 영 크고 또박또박한 발음에 몇몇 행인들이 흘끗 시선을 향했지만, 이내 그녀의 의복을 확인하고는 다급히 눈을 피했다.
그레이스는 신경 쓰지 않았다.
더 크고 중요한 문제를 눈앞에 두고 있으면 자잘한 고민은 뒤로 제쳐둘 수 있는 법이다.
고아원에 ‘선물’은 제대로 전달했고, 비교적 무게 잡지 않고 가벼운 느낌으로 이별도 끝마쳤다.
이런 식으로 웃는 얼굴을 잔뜩, 또 꾸준히 보여주고 나면, 여차했을 때 남겨진 이들이 짊어질 무게감 역시 조금이나마 줄어들 터다.
적어도 저들의 상상 속에서 불길함을 먹고 자라날 ‘저택에 갇힌 채 자기를 팔아넘긴 가족들을 원망하는 소녀’ 따위보단 훨씬 좋을 터.
할 수 있는 건 했고, 그러고도 시간은 남았으니, 이제 이 시간은 온전히 자신만을 위해서 사용할 뿐.
처음엔 말을 거는 ‘무녀님’을 향해 부담감을 팍팍 드러내던 주민들도, 그레이스의 열정에 감화되었는지, 아니면 이대로 놔뒀다간 더 성가실거라 여겼는지 이내 성실히 답변을 돌려주었다.
“굴러다니는 오크통 말입니까? 직접 보진 못하고, 소문은 들은 적 있습니다. 가끔 사람 모이는 광장 같은 곳에서 재주를 보여주고 먹을 거나 돈 같은 걸 받는다던데요?”
“통에서 지팡이를 든 팔 하나가 불쑥 솟아나 이리저리 움직이는데, 신기하게도 그 안쪽은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는 모양입니다.”
“그 오크통도 생각해 보면 신기한 물건이지요. 참나무 술통이 제법 튼튼한 거야 사실이라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요기조기 통통 튀어 다니고도 멀쩡할 놈은 아닌데 말입니다.”
탐문 결과, 시민들 중 오크통의 정체를 아는 이들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가 어디서 나타났는지, 왜 오크통 안에 들어가 있는 건지, 그의 외모나 목소리가 어떠한지, 그 무엇 하나 제대로 된 정보가 돌아다니질 않았다.
허나 되려 그러면 그럴수록 그레이스의 눈은 반짝반짝 빛나고, 가슴 속에는 불꽃이 타올랐다.
알면 알수록 오크통은 기이했고, 또 신기했다.
붙잡고 싶다. 얼굴을 마주하고 싶다. 어떻게 생기고 어떻게 말하는지 보고 듣고 싶다.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이만한 한눈팔기가 달리 또 어디 있겠는가.
그레이스 잠시간의 고민 후, 예로부터 검증된 확실한 수단을 먼저 사용하기로 했다.
“여러분, 구르는 오크통을 목격하면, 부디 저에게 알려주세요. 저를 오크통을 목격할 수 있는 장소까지 데려가 주신 분에게는 충분한 사례를 할 테니까요. 당연히 협력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추적 및 수색 작업도 편해지겠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구르는 오크통을 찾아 헤매는 이들이 도시 곳곳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인해 전술이란 참으로 좋은 전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