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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4 21:31:5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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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화 마검 포르테(Forte) (25) - 피나의 전승

“…하아, 역시 읽는 것 하고 쓰는 건 여러모로 다르네.”

천공 학원의 도서관.

이용률이 워낙 저조한 탓에 사실상 본인의 개인 공간 비스름한 무언가가 되어버린 공간에서, 주황빛 머리의 소녀는 나지막이 탄식했다.

소녀의 책상 위에는 여러 장의 원고지와 펜 따위가 널려 있었는데, 최근 소녀가 몰두하고 있는 ‘작업’의 결과물이었다.

소녀는 조용히 창가로 다가가 밖을 바라보았다.

도서관은 천공 학원 내에서도 꽤 외곽에 있는 건물인 터라, 본래 이곳에서 바깥을 바라보면 드넓은 창공의 풍경이 보이고는 했다.

하지만 지금 보이는 것은 넓게 펼쳐진 초원뿐.

그야 뭐 문학적 표현을 따르자면 하늘의 색도 초원의 색도 전부 ‘푸르다’라고 할 수 있겠지만, 막상 두 눈으로 그 모습을 담는 이의 감상은 다른 법이다.

천공 학원에서 벌어진 영문 모를 집단 수면 사건으로부터 이주일.

그동안 학원에서 벌어진 혼란은, 그야말로 난장판이라고 할만했다.

갑작스러운 잠에서 깨어난 이들은 학원 곳곳에 남아 있는 파괴의 흔적을 보고 경악했고, 또 그런 사태가 벌어지는 동안 자기들이 쥐 죽은 듯이 잠만 잤다는 사실에 기겁했다.

그야 자칫했으면 영문도 모르고 숨통이 끊어질 뻔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교수들을 비롯하여 상황 파악이 빠른 일부는 곧바로 현장으로 돌진했고. 그들은 파괴 현장의 중심에서 부러진 검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는 피나 발레스티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들은 당황하면서도 피나에게 사정을 물었지만, 피나는 전투의 후유증과 여러 가지 피로로 쓰러져 버린 탓에 제대로 된 대화가 불가능했다.

사람들은 더욱 혼란스러워했고, 개중에는 피나를 향해 의심의 시선을 보내는 이들도 없잖아 있었다.

【진정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제가 모든 걸 설명하겠습니다.】

시스템, 아니 본인의 설명을 따르자면 ‘현자의 의지’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러했다.

현자의 의지가 설명한 정황은 다음과 같았다.

현자가 생전에 봉인해 두었던 마왕의 잔해가, 오랜 시간에 걸쳐 시스템을 침식했다.

침식이 한도를 넘어선 순간 마왕은 시스템의 권능을 역이용해 학원 전체를 무력화시켰고, 그대로 학원 구성원들을 제물 삼아 온전한 부활을 이루려 했다.

하지만 ‘마왕을 토벌한 용사의 핏줄’인 피나에게는 이러한 수작이 통하지 않았고, 피나가 마왕의 화신체를 쓰러트려 준 덕분에 시스템이 주도권을 되찾을 수 있었다.

다만 침식의 악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는 터라, 머지 않아 시스템 역시 소멸할 것이다.

다른 건 둘째 치고 힘을 아껴야 하니 일단 섬부터 착륙시키겠다. 등등.

사람들의 반응은 그야말로 볼만한 것이었다.

골렘 등에 사용되는 인공지능과 비슷한 것이라고 여겼던 시스템이 현자 본인의 의지였다는 것도, 그 의지가 마왕에게 침식당했다는 것도, 시스템이 조만간에 사라져 버릴 거라는 것도 뭐 하나 충격적이지 않은 게 없었으니까.

새로운 용사의 탄생이라며 자신들의 목숨을 구해준 피나를 칭송하는 목소리도 있었고, 이번 사태에 대해 천공 학원 측에 항의하는 이들도 있었으며, 천공 학원이 사라질 경우 생겨날 여파를 대비하는 이, 현자라는 살아 있는 역사 사전에게 이것저것 질문하는 이 또한 있었다.

혼비백산, 혼란무도, 혹은 아비규환.

그 어떤 단어를 사용해도 당시의 개판을 표현하기에는 다소 부족함이 있었으리라.

“가짜 이야기로도 이 정도인데, 진짜가 밝혀졌으면… 끔찍했겠네.”

그리고 주황빛 머리의 소녀로 말하자면, 시스템이 밝힌 저 사연이 적잖은 거짓으로 뒤덮여 있다는 걸 아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입조심하거라, 아해야. 누가 듣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리 입을 가볍게 놀리는 거냐?】

전조 하나 없이, 소녀의 눈앞에 반투명한 남자의 형상이 출현했다.

무척이나 걸걸하고, 괴팍하고, 그냥 대충 훑어만 봐도 성격 더러운 것이 느껴지는 얼굴 생김새.

대외적으로 알려진 ‘현자’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외모의 남성을 향해, 소녀는 태연히 응답했다.

“작업 중에는 항상 결계를 쳐두니까 시각적으로든, 청각적으로든 정보가 새어 나갈 걱정은 없어요.”

【그 알량한 실력 가지고 자부가 지나치구나.】

“실력만 높았지 자기 제어도 제대로 못 해서 후인들에게 민폐 끼치는 어느 노인네보다는 더 나은 거 아닌가요?”

【아휴, 피나 그 아이도 왜 하필 이런 성격 더러운 년을 친구로 삼아서는. 그것만 아니면 묻어버려도 진즉 묻었을 것을.】

현자의 한탄에, 소녀, 에리스는 코웃음을 쳤다.

“제가 사람들을 대피시키지 않았으면, 상황이 꼬여도 더 꼬였을 텐데요? 은혜를 원수로 갚으시려고요?”

그랬다.

학원 내의 거의 모든 이들이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때, 에리스는 멀쩡히 의식을 유지한 채 학원을 활보하고 있었다.

그녀가 학원 교수들보다도 더 뛰어난 실력을 지녀서는 아니었고, 그냥 입학 후 사건 발생까지 퀘스트를 계속 무시하고 있었던 결과였다.

시스템의 억제력은 시스템의 혜택을 많이 본 이들일수록 강력하게 작용했기에, 반대로 그 혜택을 거의 보지 않은 에리스는 예외로 취급된 것.

【애초에 그걸 무시할 거면 학원에 들어오면 안 됐던 거 아니냐?】

“일단 그 ‘보상’이라는 게 몸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분석부터 한 뒤에 받아들이려 했을 뿐이에요. 남이 준 힘을 무턱대고 사용했다간 결말이 좋지 않다는 걸 아니까요. 실제로 이번에도 증명됐잖아요?”

【쯧.】

차마 뭐라고 반박할 말은 없는지, 현자는 조용히 혀를 찼다.

남들이 포인트 쌓고 스펙 올린다고 퀘스트에 전념할 때 오직 시스템 분석에만 열중하던 에리스는 사건 발생 당시 꽤 터무니없는 일을 해냈는데, 다른 것도 아니고 시스템을 일부나마 해킹해 학원 내의 정황을 파악하는 데 이용한 것이다.

물론 현자와 마왕의 주도권 다툼, 마왕의 리소스 대부분이 피나 일행에게 몰려 있었던 것, 에리스가 제어권을 빼앗느니 어쩌느니 하며 무리하는 대신 말 그대로 ‘훔쳐보기’에만 전념한 것 등 다양한 요소가 겹친 결과였지만, 에리스의 위계가 5위계라는 걸 고려하면 그것만으로도 기가 막힌 성과였다.

본인이 개입하기에는 전투의 수준이 지나치게 높다는 걸 파악하고, 기절한 사람들을 대피시키는 등 간접적 도움에 전념했다는 것도 고평가할 요소였다.

디바나와 카일런의 능력만으로는 피난 작업이 다소 버거웠던 것도 사실이라, 에리스가 없었더라면 희생자가 나오는 걸 막긴 힘들었을 것이다.

만약 희생자가 나왔으면 지금보다 뒷정리가 더 개판이 됐을 터였고.

현자가 이러니저러니 투덜대면서도 에리스에게 함부로 하지 못하는 이유 중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역시 에리스가 피나와 친해졌다는 부분이겠지만.

【어쨌든, 마법사란 항상 만약을 대비해야 하니 더욱 철두철미, 윽.】

갑자기 현자의 허상이 단숨에 모습을 감추었다.

명석한 두뇌로 그게 무슨 의미인지를 곧장 파악한 에리스는, 즉각 결계를 살짝 느슨하게 했다.

아니나 다를까. 도서관의 문이 벌컥 열리며 피나 발레스티아가 뛰어 들어왔다.

“에, 에리스! 숨김! 숨김!”

검은 묶음 머리를 꼬리처럼 흩날리며 허둥지둥 대는 피나의 모습에, 에리스는 말없이 어깨만 으쓱해 보였다.

그 직후, 도서관의 문이 열리며 몇몇 사람들이 도서관 안으로 들이닥쳤다.

그들은 매서운 눈매로 도서관을 이리저리 훑어댔는데, 에리스와 피나가 바로 근처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녀들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여기엔 없다! 다른 곳을 찾아!”

추적자들이 떠나간 후, 다시금 고요해진 도서관.

“후우….”

안도한 듯이 책상 위에 엎드린 채 축 늘어지는 피나의 모습을 에리스는 한심한 듯이(짓눌린 흉부를 바라볼 때는 눈썹을 미미하게 떨며) 바라보았다.

학원 전체의, 그러니까 에리스 본인에게도 생명의 은인이라 할 수 있는 피나가 주변의 과도한 관심을 견디지 못하고 쩔쩔매는 모습을 보다 못해 도와준 것을 계기로, 과장 살짝 보태 거의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상이었다.

“그래서, 이번엔 또 뭐야? 또 전속 기사 권유?”

“으음, 그건 아니고, 천공 학원을 대신해서 새로운 교육 기관을 만들 예정인데 거기 학생으로 와줄 생각 없냐고 해서.”

“학생은 무슨. 스물도 안 돼서 6위계에 발을 들인 천재를 가르치긴 누가 가르쳐?”

“처, 천재 아닌데. 그냥 마검님이 다 해주신 건데… 그리고 이것저것 편법으로 도달한 거라서 아직 기초 능력도 한참 부족하고… 솔직히 6위계는커녕 제대로 된 5위계하고만 싸워도 질 것 같고… 다들 과대평가하는 것뿐이고….”

세간에 알려지기를 무려 마왕의 화신체를 단신으로 썰어버린 차기 용사라기에는 너무나 쭈굴쭈굴한 그 모습에, 에리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사실 피나는 본인이 얻은 명성에 적잖은 부담을 느끼고 있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본래 이 명성을 얻어야 할 건 마검님인데, 그 공훈을 본인이 독차지했다면서.

이는 현자가 공개한 ‘진실’이 여러모로 실제와는 달랐던 탓인데, 피나에게서 이런저런 사정을 들은 에리스는 현자의 판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지나치게 수상하니까.

피나의 말에 따르면 그 ‘마검님’이라는 존재는 그녀가 천공 학원에 입학하기도 전부터 나타나, 피나를 노리는 악마들의 공세를 차례차례로 분쇄했다고 한다.

그 말은 즉 어디에선가 악마들이 피나를 노릴 거라는 사실을 알고 접근했다는 뜻인데, 정작 피나는 그 부분에 대해선 딱히 고민해 본 적이 없는지 모르겠다는 말만을 반복했다.

현자는 현자대로 침식당하고 있던 시절의 기억엔 다소 구멍이 있고, 달리 사정을 알 것 같은 카일런과 디바나 2인조는 학원이 한창 혼란한 틈을 타 모습을 감추었다.

에리스의 조사에 따르면 아예 가문에도 돌아가지 않았다고 하니, 그야말로 종적이 끊어진 셈.

피나 본인도 돌아가는 판을 완벽하게 모르는 상태에서, 악마가 피나를 노렸던 일이나 기타 사건의 전개를 곧이곧대로 전부 사실대로 밝힌다?

주변의 의혹을 살뿐더러 자칫했다간 피나 본인이 책임을 뒤집어쓰게 될 위험이 적지 않다.

현자가 피나의 혈통에 관한 미심쩍은 부분이나, 마왕 토벌 당시에 있었던 추잡한 뒷거래에 대해 모조리 침묵한 것 또한 같은 맥락이리라.

용사 전설이 세간의 인식처럼 아름답지 않고 추잡했다는 게 알려지고 나면, 발레스티아 가문이 어쩌면 용사의 진짜 후예가 아니라는 게 알려지고 나면, 그 위광을 통해 보호받고 있는 피나까지 덤터기를 쓸 테니까.

거기에 한순간에 악당들의 후손으로 낙인찍힐 각국의 통치자들이 어찌 반응할지도 예상하기 어렵고.

‘마검님’ 역시 이런 사태를 예상했는지 피나에게 진실을 숨기라고 했던 모양이지만, 피나는 그게 못내 죄스러운 모양이었다.

현자는 현자대로 피나를 위해서라지만 또 역사 왜곡을 시도한 게 영 꺼림직한지, 피나에겐 시스템 특유의 딱딱하고 기계적인 말투로 메시지만 보낼 뿐, 에리스 앞에서처럼 허상을 드러내는 일은 없었다.

결국 시스템을 해킹한 죄로 이런저런 사정을 알게 된 에리스만 양쪽 사이에 껴서 기묘한 입장에 처하게 된 것이다.

‘정작 나도 책으로 치면 줄거리 요약 정도밖에 사정을 모른다는 게 코미디지만.

예를 들어 ‘피나가 일종의 환상을 통해 용사 시절의 사건을 체험했다’까지는 알아도, 그 안에서 실제로 어떤 경험을 했는지, 어떤 생각을 품고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리고 사실 그 이상으로 알 생각도 없었다.

그녀가 가슴 속에 품은 어느 사서와의 추억처럼, 사람에게는 은밀히 간직하고 싶은 추억이 있다고 여겼으니까.

문제는, 피나가 추억을 소중히 여기는 방식은 에리스와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나저나, 그, 작업은 잘 되어가?”

책상 위에 있는 원고지들을 힐끔힐끔 바라보며, 피나가 조심스레 질문했다.

에리스는 매정하게 대답했다.

“아니, 전혀.”

“흐잉.”

“애초에 책을 많이 읽으니까 글도 잘 쓸 거라는 발상이 조잡해. 나는 작가가 아니거든?”

“그, 그래도, 나보다는 훨씬 잘하니까!”

─마검님과의 이야기를 책으로 남기고 싶다.

그것이 피나가 에리스에게 건넨 ‘부탁’이었다.

지금 자신은 작고 나약해서, 마검님과의 이야기를 떳떳하게 밝히는 것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언젠가 그녀가 강해진다면.

세상 사람들의 미심쩍은 시선도, 복잡한 정치 관계도 전부 정면에서 맞설 수 있게 된다면.

그때는 진짜 진실을, 마검님의 활약을 밝히고 싶다고 하면서.

그리고 에리스는 그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첫 번째 동기.

자기가 소멸할 때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생전에 습득하고, 시스템으로 변하며 수집해 왔던 온갖 종류의 데이터들을 모조리 에리스의 ‘책’에 옮겨주겠다는 현자의 거래가 있었으니까.

두 번째 동기.

처음에는 빚지고 사는 건 성미에 안 맞아서 도와준 것뿐이었을지언정, 지금은 피나가 제법 마음에 들었으니까.

세 번째 동기.

솔직히 작문에도 관심이 없진 않았으니까.

“흐음.”

에리스는 잠시 고민에 잠겼다.

피나에게는 잘 안되고 있다고 말하긴 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작문 자체는 순조로운 편이다.

내용을 아예 창작하는 것도 아니고,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를 적당히 편집하는 것뿐이니까.

다만 에리스의 개인 취향을 논하자면, 그리 마음에 드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이왕 쓸 거면 해피엔딩을 쓰고 싶은데.”

“응?”

“그 ‘마검님’. 그 상태로 계속 둘 건 아니잖아?”

에리스의 지적에, 피나의 숨이 잠시 멈추었다.

피나의 허리춤.

평범한 칼집처럼 칼날을 넣어 고정하는 게 불가능한 탓에, 손잡이에 끈을 묶어 일종의 부적처럼 매달고 있는 칼 손잡이.

더 이상 아무런 대답도 돌려주지 않는 피나의 ‘마검님’.

“고치러 갈 생각이지?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새 검을 준다고 해도 다 거절하는 거잖아.”

“…응.”

평소처럼 조용히.

하지만 우물쭈물하는 기색이라곤 없이 단호하게, 피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야기로 만들 거라면 해피엔딩이 확정된 뒤에 끝까지 쓰는 게 좋을 것 같네. 이를테면 용사와 마검의 재회 장면 같은 거.”

“그야 나도 그쪽이 기쁘긴 하지만, 언제 고칠지, 어디로 가야 할지도 아직 정하지 못했는데.”

“브라운 상회에서 보낸 선물 더미에 섞여 있던 검이라면서? 그쪽을 탐색해 보면 뭐라도 나오겠지.”

학원이 망해버린 탓에 본래 예정이었던 대마법사 초월 계획에 다소 지장이 생기긴 했지만, 천공의 현자가 보유한 모든 지식을 넘겨받게 되었으니 손해는 아니다.

아니, 철저한 이론파인 에리스에겐 오히려 어설픈 스펙 상승보다 이쪽이 훨씬 값진 성과.

그러니까, 다소는 친구의 인연 되찾기에 협력해 줘도 문제는 없을 거다.

이전과 달리 지금의 에리스는 노력만큼이나 휴식이 중요하다는 것도 알고 있으니까.

‘어차피 진짜 신분은 따로 있겠지만, 일단은 그 상회 직원이라는 걸로 되어 있는 어떤 사서의 정보가 나올지도 모르고. 뭐, 꼭 편법을 안 써도 책을 통해 언젠가는 도달하겠지만, 방법은 다양하게 준비해 두는 게 현명한 마법사니까.

누구에게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변명을 속으로 삼킨 채, 에리스는 입을 열었다.

“어때?”

“응, 할게! 해보자!”

막연했던 목표에 명확한 길이 생겨난 것이 기쁜지, 피나가 얼굴에 화색을 드러내며 웃었다.

그런 두 소녀의 모습을, 새로운 시대의 용사와 현자의 모습을, 과거의 현자는 말없이 바라보았다.

【성녀까지 함께하면 더 좋겠다, 그리 생각해 버리는 건 역시 늙은이의 헛된 미련일까? 너희는 어찌 생각하느냐.】

누구의 눈길도 닿지 않을 학원의 사각지대.

옛 동료들을 향해 중얼거린 말에,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너무나 당연한 인과에 현자가 쓴웃음과 함께 모습을 감추려 한 그 순간.

현자의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푸른 꽃잎 한 장과 구름 사이로 내리쬐는 빛살 한 줄기.

단순한 우연에 불과하다.

별것 아닌 자연현상에 무의식중에 그럴듯한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확증편향일 뿐.

그걸 알면서도 어째서인지 기꺼운 기분이 들어, 현자는 웃음을 터트렸다.

웃고, 웃고, 웃어.

불어온 바람에 그 마지막 그림자마저 흩어질 그 순간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