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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화 마검 포르테(Forte) (24) - 만개(滿開)
『천공의 현자』라는 이름의 초월자를 구성하는 요소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한때 『학살』이라 불렸던 마왕의 잔재.
다른 하나는 그 마왕을 쓰러트렸던 현자 본인.
현재 둘 중 주도권을 붙잡고 있는 것은 마왕 쪽이며, 피나를 추적하는 ‘흑기사’를 움직이는 것 또한 마왕의 의지다.
하지만 현자의 의지 역시 사라진 건 아니다.
오염되고 왜곡되었을지언정, 노력하는 이가 정당한 대가를 받길 원한다는 현자의 핵심만큼은 마왕조차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다.
포르테가 승산을 본 것 역시 바로 이 부분이었다.
초월자가 아닌 이가 초월자를 쓰러트리는 건 한없이 불가능에 가깝지만, 초월자 본인의 힘을 빌린다면 동등하진 않을지언정 최소한 칼이 닿는 영역까진 올라갈 수 있을 테니까.
“허억…. 허억….”
허나, 가능성이 있는 것과 실제로 이를 행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
이론상의 승산을 거머쥐기 위해서, 피나 발레스티아가 견뎌야 할 고난은 어중간한 것이 아니었다.
얼굴은 붉게 달아오르다 못해 점점 거무죽죽해지고, 신체 곳곳에서 흐르는 피와 땀이 뒤섞인 채 의복을 적신다.
그런데도 휴식 따윈 허용되지 않는다.
서걱!
피나가 방금까지 있었던 장소를, 검은 참격이 스쳐 지나간다.
단순한 집을 넘어 저택이라는 표현이 아깝지 않은 건축물이, 변변한 저항조차 못 해본 채 둘로 갈라져 버린다.
조금이라도 속도를 늦추면 죽는다.
조금이라도 판단을 그르치면 죽는다.
오직 도주에만 전념해도 아슬아슬한 상황이지만, 그렇다고 몬스터 토벌을 그만두면 성장이 멈춰 승산이 사라진다.
“윽?!”
덜컥, 하고 피나의 몸이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점점 더 빨라지는 자신의 속도를 제어하지 못하고 넘어지고 만 것이다.
거친 지면에 팔다리가 쓸려나가지만, 그 아픔에 비명을 지를 시간조차 없이 피나는 재빨리 몸을 옆으로 굴렸다.
푸슉, 하고 몸 어딘가가 베어져 나갔다.
몇 번이고 넘어지고 쓰러지고 부딪쳤다.
흙더미에 처박히고 살이 쓸려나갔다.
그야말로 만신창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상황.
파직!
포르테라고 한들 무사한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현자의 법칙을 이용하고 있다고 한들, 그 힘을 흡수하고 가공하는 건 결국 포르테의 역할이다.
초월자에게 닿을 정도의 힘을 피나에게 부여하는 반동으로, 포르테는 점점 더 자괴하고 있었다.
“…….”
《…….》
포르테도, 피나도, 이대로라면 승리보다 패배가 더 가깝다는 걸 알고 있었다.
마검도, 사용자도, 이것보다 좀 더 승산이 높은 방법을 깨닫고 있었다.
사람을 죽이면 된다.
저항하거나 도주하는 몬스터를 하나하나 토벌해서 힘을 쌓는 것보다, 이미 그 힘을 몸에 잔뜩 축적해 둔 사람을 베는 쪽이 편하다.
그렇게까지 많이 죽일 필요도 없다.
시스템은 그녀가 6위계 최상위에 도달하기 위해 전체 학생 중 절반을 죽여야 한다고 평가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영구적인 강화를 전제로 한 것.
오직 이 순간, 지금 한순간을 이겨내기 위해서 필요한 희생은 그보다 훨씬 적다.
누구도 그들을 비난하지 못할 것이다.
애초에 보는 눈도 없을뿐더러, 지금 그녀가 흑기사를 토벌하지 못하면 어차피 다들 죽은 목숨이다.
소수의 희생으로 다수를 구할 수 있다면 이 어찌 합리적인 일이 아니겠는가.
“하아아아앗!”
그걸 알면서도, 피나는 묵묵히 싸움을 이어 나갔다.
그걸 알면서도, 포르테는 묵묵히 검으로서 제 역할을 다했다.
합리적이지 않으면 뭐가 어떤가, 효율적이지 않은 게 뭐가 어떤가.
누군가를 죽이고, 희생시키고, ‘어쩔 수 없다’고 중얼거리는 게 현명한 행동이라면, 그들은 차라리 바보로 사는 편이 좋았다.
그런 피나와 포르테의 모습을, 흑기사가 바라보았다.
한없이 무감정하며 무기질적이었던 두 눈에, 명확한 경계의 감정이 떠올랐다.
영원히 열릴 것 같지 않던 흑기사의 입이 열렸다.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일은 없었으나, 대신 시스템이 반응했다.
【퀘스트: 허공에 칼을 휘두른다】【보상: 피나 발레스티아를 즉사시킨다】【오류】
【퀘스트: 3초간 멈춰서 움직이지 않는다】【보상: 순간 이동 능력을 획득한다】【오류】
【퀘스트: 1시간 동안 호흡을 멈춘다】【보상: 1시간 동안 학원 내 생물체들의 호흡을 금지한다】【오류】
【퀘스트: 24시간 동안 공격을 회피하지 않는다】【보상: 12시간 동안 자신의 공격이 필중한다】【오류】
오류, 오류, 오류.
천공 학원을 지배하는 법칙이, 모여들었다가 완성되지 못한 채 부서지기를 반복한다.
천칭의 균형은 흑기사 자신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피나가 받아내는 보상을 막아낼 수 없듯이, 흑기사가 노력에 합당하지 않은 성과만을 얻어내는 것도 불가능하다.
반대로 말하자면.
【퀘스트: 학원 내 몬스터들을 전부 자멸하게 한다】【보상: 자멸한 몬스터의 포인트에 상당하는 분신 생성 능력을 획득한다】【오류】
【퀘스트: 학원 내 몬스터들의 제어권을 포기한다】【보상: 자유를 얻은 몬스터의 포인트 절반에 상당하는 분신 생성 능력을 획득한다】【승인】
─천칭의 균형이 맞아떨어지는 순간, 학원의 법칙은 흑기사에게도 미소 짓는다.
빠드드드드득!
지상 곳곳.
지면을 뒤덮은 벽돌이며 마감재 따위를 부수고, 나무뿌리가 솟구쳤다.
뿌리들은 서로 얽히고설키며 인간의 형상을 이루었고, 검은 어둠이 갑옷처럼 이를 감쌌다.
그렇게 생겨난 것은 흑기사와 동일한 외형을 지닌 수백여의 분신들.
그들이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일제히, 피나를 향해서 돌격했다.
서걱!
피나가 휘두른 참격이 분신 중 하나의 허리를 단숨에 양단했다.
포르테에 의해 극한까지 강화된 기초 능력에 더해, 그녀에게는 용사로서 체험했던 여러 모험의 기억까지 있다.
흑기사 본체라면 몰라도, 열화판인 분신 정도로는 피나를 막을 수 없었다.
【흑기사(분신)을 쓰러트렸습니다】【#@#*&(를 획득했습니다】
허나, 분신을 쓰러트렸음에도 보상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예 들어오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분신의 강함과 비교하면 기괴할 정도로 적은 보상.
시스템 역시 이상을 느낀 듯이 메시지 일부가 깨져 있었지만, 이를 느긋하게 고찰할 여유는 주지 않겠다는 듯이 곧바로 다음 분신이 덤벼들었다.
하나를 베면 둘이 덤벼들고, 둘을 쪼개면 넷이 몸을 날렸다.
심지어 흑기사들은 서로를 방패로 삼거나 아예 동료와 함께 피나를 꿰뚫는 것도 망설이지 않으니, 피나의 몸에는 점점 상처가 늘어났다.
이대로라면 소모전으로 압도당한다고 판단한 그녀가, 무리해서라도 강렬한 일격으로 주변을 단숨에 휩쓴 그때.
【퀘스트: 3분간 제자리에서 행동하지 않는다.】【보상: 3초간 신체 능력이 강화된다.】【승인】
줄곧 제자리에 멈춰서 분신들의 싸움을 지켜보기만 하던 본체가, 힘껏 땅을 박찼다.
빛이 번뜩였고, 그 뒤를 공기가 뒤따랐다.
아직 흑기사가 접근한 것조차 인식하지 못한 피나의 몸을, 검디검은 참격이 일도양단했다.
파직!
공격은 먹혔으나, 피는 튀어 오르지 않았다.
대신, 포르테의 검신이 1/3쯤 깎여나갔다.
기괴한 현상을 앞두고도, 흑기사는 당황하지 않고 전술을 바꿨다.
흑기사는 계속해서 피나를 베어내는 대신, 다리를 걷어차 균형을 잃게 한 뒤, 그 뒤통수를 지면에 메다꽂았다.
이번에도 포르테가 피해를 대신 받아낸 듯이 피나의 몸에는 상처가 없었으나, 흑기사의 분신들이 몸으로 그녀를 억누르자 피나는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흑기사는 검을 드높였다.
이대로 포르테가 한계에 도달할 때까지 피나를 내려칠 의도라는 건 너무나 명확했다.
우우우우우우웅!
포르테의 검신이 검명을 울렸다.
검신을 이루고 있던 금속 일부가 스스로 떨어져 나가며, 그 파편이 수없이 많은 칼날로 쪼개져 주변을 휘몰아쳤다.
흑기사 본체는 어렵지 않게 회피에 성공했으나, 분신들은 그렇지 못했다.
수십을 넘는 분신이 단숨에 휩쓸려 나가며, 그들을 이루고 있던 자원이 포르테에게 흡수되었다.
【흑기사(분신)을 쓰러트렸습니다】【#@#*&(를 획득했습니다】
【흑기사(분신)을 쓰러트렸습니다】【#@#*&(를 획득했습니다】
【흑기사(분신)을 쓰러트렸………】
이번에도 보상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흑기사는 차분히 다음 수를 놓았다.
【퀘스트: 의식을 잃어버린 ‘임시보관소’ 전원을 해방한다】【보상: 다음에 사용하는 주문의 ‘1회’의 위력이 증폭된다】【승인】
두두두두두두두두!
천공 학원이, 어지간한 도시보다도 규모가 큰 하늘 위의 섬이 떨렸다.
마력 그 자체를 물질화해 창을 만든 뒤, 그것을 투척하는 『학살』의 특기 주문.
허나 이번 것은 그 규모가 달랐다.
창대는 거목의 몸체를 통째로 사용한 것처럼 굵고 길었고, 창날은 몸을 관통하기는커녕 아예 짓이겨 버릴 만큼 거대했다.
그런 것이 수백 개.
아득한 하늘 위에서, 지상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 ──! ──! ──! ──! ──!
──! ──! ──! ──! ──! ──!
──! ──! ──! ──! ──! ──!
소리가 사라졌다.
지나친 굉음이 연달아 울려 퍼지자, 이를 견뎌내지 못한 청각이 그 책무를 포기했다.
거리를, 공원을, 가택을, 무엇 하나 차별 없이 꿰뚫어 고슴도치로 만드는 파괴의 비.
일개 개인을 살해하기에는 차고 넘치는 위력이었으나, 흑기사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창의 옆면이 울퉁불퉁 꿈틀대더니, 이내 수천수만 개의 가시가 주변으로 뻗어 나오며 온갖 것들을 꿰뚫었다.
만에 하나 살아날 가능성조차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이, 철두철미하고 집요한 공격.
학원 전체 면적 중 1/10 정도가, 단숨에 누구도 살 수 없는 불모지로 뒤바뀌었다.
그 중심에서 피어난, 한 송의 꽃이 있었다.
흑기사의 몸이 조금, 아주 조금이나마 멈칫했다.
필살을 확신한 공격이었다.
회피도, 방어도 불가.
설령 전처럼 피해를 대신 넘겨받더라도, 그걸로 감당할 수 있는 수치를 넘어서 죽여버릴 만한 광범위의 파괴.
거기서 문득, 흑기사는 위화감을 깨달았다.
『학살』이었더라면, 온갖 것들을 그저 수치로 판단하는 그 마왕이었더라면, 방금 같은 공격은 시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겨우 피나 하나 죽이자고 이 학원에 존재할 수많은 강자들을 해방하는 건, 리스크가 너무 크다.
애초에 인간 하나의 생명을 끊을 때 이런 광역 공격은 불필요하다.
헌데 어째서 자신은 무리해서까지 피나를, 포르테를 끝장내려고 했는가?
아니, 그 이전에 왜 아직 완전히 통제에 들어오지 않은 시스템 따위를 이용하려 했는가?
그야, 닮았으니까.
한때 마왕을 쓰러트렸던, 그 비합리적이고도 예측불허한 몽상가들의 눈과 저 소녀의 눈이 무척이나 닮아 있었으니까.
어설프게 여력을 남겨둔 채 싸움을 길게 끌면, 혹시 모를 전개로 이어질지도 모른다고, 무의식 중에 판단했으니까.
그리고, 흑기사(마왕)의 눈에 피나의 모습이 용사와 겹쳐 보였다면.
시스템(현자)의 눈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보상 정산에 오류가 확인되었습니다】
【재정산을 개시합니다】
【지급되지 않은 포인트를 지급합니다】
【새로운 퀘스트를 발급합니다】
【퀘스트: 무고한 이들을 누구 하나 휘말려 죽게 하지 않을 것】【클리어】
【퀘스트: 이길 수 없는 적을 상대로 용감하게 맞서 싸울 것】【클리어】
【퀘스트: 짊어지지 않아도 될 책무를 짊어질 것】【클리어】
【퀘스트: 괴롭고 어려운 길을 포기하지 않은 것】【클리어】
【퀘스트: 못난이의 뒤처리를 떠맡게 된 것】【클리어】
【퀘스트: 우리의 이야기를 지켜봐 준 것】【클리어】
【퀘스트: 승리할 것】
피나는 포르테를 바라보았다.
포르테의 상태는 처참했다.
부러지고, 망가져, 더 이상 검날조차 제대로 남아 있지 않은 모습.
《…이것 참, 한심하군. 검의 역할조차 다 할 수 없는 검이라니. 마검의 이름에 부끄러워.》
“아뇨, 괜찮아요. 마검님.”
피나는 조용히 포르테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강하게, 강하게, 포르테의 안에서 모래처럼 흘러넘치는 무언가를, 조금이라도 붙잡듯이.
푸른빛으로 빛나는 오러가, 포르테의 칼날이 있었던 자리를 대신했다.
포르테에 의해 강제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 그녀 본인의 오러.
“저에게 최고는 당신이니까요.”
꽃보라가 휘몰아쳤다.
지면에서, 무너진 건물의 잔해에서, 학원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로부터, 빛이 흘러넘치며 꽃잎과 뒤섞였다.
더욱 선명하게, 더욱 밝게, 더욱 많이.
화려하게 만개하는 용사의 꽃이, 흑기사를 뒤덮었다.
흑기사는 어떻게든 꽃보라에서 벗어나려는 듯이 발버둥 쳤지만, 머지않아 정적이 찾아왔다.
잠에서 깨어난 사람들은 멍하니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푸른 꽃잎이, 어디까지라도 아름답게 춤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