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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화 마검 포르테(Forte) (10) - 멜로디
진실이란 무섭고도 두려운 것이다.
무언가를 숨기고 은폐한 이에게는 더욱 그렇다.
‘들켜선 안 된다.’
청년에게는 비밀이 있었다.
세간에 밝혀지는 순간 그의 사회적 생명을, 어쩌면 물리적 생명마저도 끝장낼만한 비밀이었다.
‘내가 악마 계약자라는 사실을…!’
피나 발레스티아.
용사의 후손인 그 검은 머리 소녀의 일행, 아니 짐꾼에 불과한 청년이 사실 악마 계약자였다는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 세상은 절대로 그를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만신전의 광신도 놈들은 청년 자신은 물론이고 청년의 가문까지도 탈탈 털어 그의 인생사 하나하나를 자근자근 짓밟을 터.
살아 남기도 어렵고, 설령 살아남는다고 해도 철저한 추격을 피해 평생을 도망자로 살아야겠지. 불신자들의 나라로 유명한 제국이라고 한들 구태여 그를 지키기 위해 만신전과 각을 세우진 않을 테니까.
다행히 여태까지는 잘 해왔다.
이대로 저 무시무시한 용사 후손의 곁에서, 임무를 끝까지 완수할 수만 있다면 편안한 은퇴 라이프를 즐길 수 있을 터.
가문의 족쇄도 책임도 전부 벗어 던진 채, 경애하는 디바나 님과 필시 알콩달콩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만, 했는데.
“어, 음, 죄송해요. 아니, 죄송하다는 것도 좀 이상하긴 한데, 으음.”
사신이 청년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치렁치렁하게 긴, 그런 주제에 딱히 상한 곳 하나 없이 윤기가 흘러넘치는 검은 묶음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면서.
평소에는 그 모습을 괘종시계의 시계추 같다고 생각했던 청년이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건 차라리 교수대의 밧줄과 닮아 있었다.
청년의 목이 저곳에 걸리는 순간, 그의 몸 역시 대롱대롱 매달릴 것처럼.
“일단 용사의 후손 나부랭이래서, 악마 계약자를 그냥 내버려두는 건 안 되거든요….”
소녀의 모습은 평소와 똑같았다.
사람과 시선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한 채 이리저리 눈을 굴렸고, 말끝도 어영부영 흐렸다.
자신감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무해하고 나약해보이는 모습.
허나 청년은 속아 넘어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저 소녀는 저거랑 똑같은 얼굴과 똑같은 말투로 온종일 던전에 틀어박혀 몬스터를 쳐 죽일 수 있는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골렘도 썰고 미믹도 썰고 독가스도 썰고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관념도 썰고 아무튼 다 썰 수 있는 살육 인형이었기 때문이다.
미친 것 같은 광경에서 홀로 제정신인 놈이 있다면 그놈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존재인 법.
청년은 소녀의 맑은 금빛 눈에서, 형언할 수 없는 광기를 엿보았다.
“오, 오지 마.”
“최, 최대한 안 아프게 할게요! 주사 한 방 맞는다는 느낌으로!”
“내…! 내…!”
“그동안 신세 많이 졌습니다! 부디 편히 가시기를!”
“내 곁에 다가오지 마아아아아아아아아아─!!”
“아, 마검님도 인사 전해달라고 하시네요! 그러면, 에잇!”
서걱!
“으아아아아아악!!”
청년은 비명과 함께 침대에서 일어났다.
《뭐, 뭐야? 무슨 일 있어?》
장신구 안쪽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악마, 디바나가 당황하며 목소리를 냈다.
청년은 멍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이내 더듬더듬 제 목을 매만지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 다행이다.”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악몽이라도 꿨어?》
“던전 돌파 인형이 제 목을 날려버리고 피가 튀었다면서 힝힝거리는 꿈을 꾸었습니다…. 꿈이라서 정말로 다행이군요.”
《…….》
악마 디바나는 생각했다.
이거 망가졌나? 그리 오래 쓰진 않은 것 같은데?
디바나에게서 이거 불량 상품 아닌가 의심하는 시선을 받긴 했지만, 다행히 청년은 반품되는 일 없이 계약자 자리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그녀가 특별히 자비로워서 그런 건 아니었고, 그저 천공 학원 내에서 계약을 해제한 뒤 새 계약자를 찾는 일은 모 C 영애가 모 C 하인을 상대로 계약상 주도권을 잡는 것과 비슷한 난이도였기 때문이다.
이래서 계약이라는 건 함부로 하면 안 되는 법이었다.
운명공동체(지역 한정)가 된 악마와 계약자는 작전명 마검 배제하기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전투 중 휴식 시간에 훔치는 건 어때? 가짜라면 내가 만들어줄 수 있으니까, 잠깐 한눈판 타이밍에 슬쩍 바꿔치기하는 거야.》
디바나의 제안을 들은 청년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경애하는 여악마의 무지를 질책하지 않았다.
천공 학원이라는 특수한 환경 탓에, 그녀가 24시간 내내 바깥을 지켜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디바나 님. 그건 불가능합니다.”
《어째서?》
“그녀는 밥 먹을 때 한 손으로 칼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 스푼을 들기 때문입니다.”
《미친년인가?》
첫 번째 작전, 상대가 미친년이라서 폐기.
《그러면 무기 정비할 때 손을 보는 건? 네 인맥을 동원해서, 무기 관리에 특화된 선배가 있다고 말하는 거야. 그토록 검을 아끼니, 검이 더 강해질 수 있다고 하면 걔도 좋아라 하지 않겠어?》
“오오, 디바나 님! 역시 지혜로우십니다! 오늘 던전에 가면 바로 이야기를 걸어봐야겠군요!”
그리고 다음 날.
《…….》
“…….”
《그, 걔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니? 내가 요즘 신경 쓸 게 많아서 그런가, 청력과 기억력에 좀 혼란이 있는 것 같네.》
“‘마검님께서 무구 강화 같은 사도를 걸을 시간에 퀘스트 하나를 더 깨라고 하셨기 때문에 괜찮아요!’였습니다.”
《시발.》
두 번째 작전, 청력과 기억력이 멀쩡했으므로 폐기.
《차라리 정공법으로 가보자. 같은 검사로서 그 검을 한 번만 빌려보고 싶다고 말하는 거야.》
“제가 사용하는 건 숏소드, 그것도 외날 계열이고 그건 아무리 봐도 양날의 롱소드나 바스타드 계열입니다만.”
《검이면 다 똑같은 거 아니야?》
“그게 무슨 언월도 대검 되는 소리십니까?”
《……?》
세 번째 작전, 무기 음악성이 달라서 폐기.
청년과 디바나에게는 ‘전통을 살리면서도 신세대 느낌 나게, 거 이 쉬운 걸 몰라?’ 같은 망언을 지껄이면서 컨펌을 낼 상사가 존재하지 않았기에, 다행히 그들은 네 번째 작전에서 합의에 도달할 수 있었다.
밤중에 몰래 들어가 훔치는 수밖에 없다, 라고.
“여기 천공 학원은 온갖 행동이 퀘스트와 보상으로 이루어집니다. 그 탓에 빈틈이라곤 없는 곳으로 인식되기 쉽지만, 사실 내부의 규율 그 자체는 그렇게까지 철저하지도, 엄격하지도 않습니다.”
자잘한 건 다 둘째 치더라도, 일단 교직원 수가 극단적으로 적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아무리 천공 학원의 학생 수가 다른 두 대표학교에 비해 적은 편이라고는 해도 세 자릿수는 넘는다.
그에 반해 학원을 관리하는 ‘교수’는 셋, 기타 교직원을 합쳐도 열 손가락을 넘지 못한다.
교수 세 명이 전부 천공 학원의 범위 내에서는 어마어마한 힘을 발휘하는 강자이긴 하나, 그런 숫자로 학생들 전원을 하나하나 세심하게 관리하는 건 불가능하다.
학원 측에서 저렇게 교직원을 적게 유지하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는 청년과 디바나에게는 명백한 기회였다.
물론, ‘야심한 밤에 여학생 방에 들어가 검을 훔침’이라는 행위가 드러나는 순간 청년은 정말로 여러 가지를 잃게 되겠지만, 청년은 그 리스크를 기꺼이 감수하기로 했다.
본래 큰 일을 하기 위해서는 다소의 위험 부담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절대로 휴식 없이 던전에 틀어박혀 살았더니 살짝 돌아버린 게 아니다.
칠흑 같은 밤.
검술 교수 라이제놀이 마지막 순찰을 끝낸 것을 확인한 뒤, 청년은 조심스레 피나의 방에 접근했다.
악마 계약자의 능력은 악마 자신이 지닌 능력과 연관이 있는 법.
그리고 『기만』 세력의 악마들은 환영, 환상 계열의 마법을 기본 소양처럼 다루었기에, 잠입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청년이 내딛는 발걸음 소리나 호흡음 등은 모두 지독한 침묵으로 덮어 씌워졌고, 환영은 청년의 모습을 어둠 속 그림자처럼 덧씌웠다.
잠금장치를 억지로 해제한 뒤 방에 들어서자, 고요한 정적이 청년을 맞이했다.
피나는 침대 위에서 새근새근 잠에 빠져 있었는데, 그 옆에 있는 선반에 검 한 자루가 놓여 있었다.
다만, 한 가지.
‘…왜 검 밑에 방석을 깔아둔 거지?’
귀중한 무구를 정중하게 보관했다고 하면 그렇게까지 이상할 건 없지만, 청년은 그 광경에 왠지 모를 위화감을 느꼈다.
무기 자체를 상전으로 모시는 듯한 기분이 든다고 하면 착각인 걸까.
‘후우, 그래. 베개 아래에 깔고 자거나 아예 끌어안고 자는 게 아닌 것만으로도 어디냐.’
청년의 머릿속 피나는 이미 그런 짓을 해도 이상하지 않은 괴인이었기에, 그는 이 정도면 충분히 양호한 상태라고 자신을 설득했다.
각종 주문 덕에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검에 손을 뻗은 청년.
손잡이를 움켜쥔 그가 방을 떠나려 한 그때였다.
“마검님….”
흐끅!
무심코 새어 나올 뻔한 딸꾹질을, 청년은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덜덜 떨면서 등 뒤를 바라보자, 침대 위를 뒹구는 피나가 흠냐흠냐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자, 잠꼬대였나.’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며 내심 투덜거리면서, 청년은 그대로 방에서 빠져나왔다.
그가 긴장을 늦춘 바로 그 순간.
~ ♬ ~
소리가, 들렸다.
~♪ ♫ ♪ ♫ ♪ ♫ ♪ ♫ ♪ ♫ ♪ ♫ ♪ ♫ ♪ ♫~
오르골에서 들려오는 것 같은 멜로디.
~♪ ♫ ♪ ♫ ♪ ♫ ♪ ♫ ♬ ♪ ♬ ♪~
언뜻 자장가와 비슷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음산한 그것.
“뭐, 뭐야!?”
그래선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청년은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디, 디바나 님? 이게 대체….”
《몰라, 뭐야 이거. 뭔데.》
당황한 건 디바나 역시 마찬가지였기에, 그녀는 계약자에게 적절한 대답을 건네주지 못했다.
이 기분 나쁜 멜로디가 어디에서 들려오는 건지 확인하기 위해 다급히 주변을 둘러보던 그들은, 이내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멜로디는 검에서 울려 퍼지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열린 문틈 사이로 그를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는 누군가를.
“…….”
“…….”
청년과 디바나는 지금 울려 퍼지는 멜로디가 한때 핸드폰 벨소리로 유명했던 어느 공포 영화의 ost라는 걸 알지 못했다.
본래 장발이라는 건 관리가 상당히 힘들어서 그냥 자연스레 놔두면 얼굴 앞을 가린다는 것도, 피나가 아직 비몽사몽인 상태라 그 눈매가 매우 더럽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고로, 그들은 자신이 놓인 상태를 아주 주관적으로 해석했다.
어두컴컴한 복도.
음산한 멜로디.
열린 문 틈새, 산발이 된 흑발 사이로, 눈동자에 핏발을 세운 채 그들을 노려보는 귀신의 모습을.
“으아아아아아악!”
《어, 어어어?》
청년은 도주를 개시했다.
악마는 얼이 빠졌다.
검은 산발 괴인이 그 뒤를 쫓았다.
호러 추격전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