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dd 3 AI agents (writing, revision, story-continuity specialists) - Add 4 slash commands (rovel.create, write, complete, seed) - Add novel creation/writing rules - Add Novelpia reference data (115 works, 3328 chapters) - Add CLAUDE.md and README.md 🤖 Generated with [Claude Code](https://claude.com/claude-code) Co-Authored-By: Claude Opus 4.5 <noreply@anthropic.com>
14 KiB
#97화 사서 에른스트(Ernst) (18) - 에리스의 작별
“떠난…다고요? 당신이?”
“예.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났습니다.”
“그, 그래요.”
에른스트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평탄했다.
딱히 대단할 것도 놀라울 것도 없는, 그저 평범한 일을 말할 뿐이라는 듯한 태도.
거대 상회에 속한 직원이 여기저기 일자리를 옮겨 다니는 건 그리 드물지 않은 일이었으니, 객관적으로 봤을 때 딱히 이상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에리스에게는 아니었다.
그녀는 막연히, 에른스트가 앞으로도 계속 이곳에 남아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알드리지의 외곽.
사람의 발길이 쉽게 닿지 않는, 이 고요하고도 그리운 공간에 언제까지고 머무르리라고.
그러니까 천공 학원으로 가게 되어 헤어질 날이 가까워졌음에도 아쉬움을 느낄지언정 그리 절박해하지는 않았다.
몇 년 정도 수업을 받고 난 뒤 여기 알드리지로 돌아오면 에른스트와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었으니까.
헌데, 그게 아니라면.
만약 이번 이별이 정말로 마지막이라고 한다면.
‘…아냐, 그럴 리가 없어.’
무심코 부정적으로 빠지려고 하는 생각을, 에리스는 애써 바로 잡았다.
“어디로 발령 나는 건가요?”
“죄송합니다만, 그건 업무상 비밀입니다.”
“일개 직원의 거처가 업무상 비밀씩이나 되나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아무래도 상부에서는 저를 평범한 일개 직원으로 봐주지 않는 듯하군요.”
그거야 당연한 일이다.
세간에서는 보통 5위계를 ‘영지급 전력’, 6위계를 ‘국가급 전력’이라고 평가한다.
5위계 기사는 영주성에 기습으로 쳐들어가 영주의 목을 벨 수 있고, 5위계의 마법사는 그 화력으로 영지에 속한 마을 하나쯤은 단숨에 불태울 수 있다.
집단에서 보유한 총 전력과 정면에서 맞붙어서 이길 정도는 아니지만, 일개 개인인 그들은 그 몸가짐이 무척이나 홀가분하다.
상대가 전력을 모으는 낌새가 보이면, 슬그머니 뒤로 빠진 뒤 틈을 노리거나 아예 다른 곳을 치면 그만인 것이다.
그리고 6위계는 저 전술을 국가 상대로 펼칠 수 있다.
영주 대신 국왕의 목을, 마을 대신 도시를 날려버릴 수 있다는 뜻이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같은 6위계급 전력으로 맞받아치거나, 그보다는 좀 뒤떨어지더라도 최대한 질과 양을 겸비한 전력을 잔뜩 준비해 놓아야 한다.
당장 라벨로시아보다 강대한 이웃 국가들이 이 작은 나라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이유 역시, 다름 아닌 델피나리스가 있어서 아닌가.
왕가에서도 델피나리스의 사후를 걱정하며 어떻게든 그녀의 뒤를 이을 인재를 키우기 위해 노력하는 중에, 아무리 국내 1위라고는 해도 일개 상회에 6위계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본래라면 말도 안 되는 일.
에른스트는 오랜 시간 개조한 공방이 아니면 마법 하나 쓸 수 없는 반푼이라고 자신을 평가했지만, 설령 그 주장을 받아들여 평가를 낮춰도 5위계다. 여전히 높다.
실력을 밝히는 순간 곧장 왕실에서 스카우터가 찾아와도 이상하지 않은 인재를, 어찌 ‘일개 직원’으로 볼 수 있겠는가.
아니, 그 이전에.
‘이런 인재가 대체 왜 여기서 사서 노릇이나 하고 있었던 거지?’
정답은 『실용성이고 뭐고 상관없이 그냥 본인이 읽고 싶은 책을 지겹도록 읽고, 가끔 찾아오는 이들과 감상도 나눌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해서 새로운 직장과 신분을 만들어냈다』였지만, 알드리지 강습소의 우등생 에리스는 저런 미치광이 같은 진실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녀는 지극히 이성적이고 상식적으로 생각했다.
6위계의 능력자가 이런 시골에 처박혀 있어야 했던 이유. 그리고 이제 떠나가려 하는 이유.
그런 건 하나뿐 아니겠는가.
‘악마 퇴치. 그래, 애초에 그게 목적이었어!’
진실을 깨달은 순간, 에리스의 목뒤로 짜릿한 전율이 흘렀다.
예전의 그녀였다면 이 시점에서 결론을 확정 지었겠지만, 여러 경험으로 한층 성장한 에리스는 한 번 더 신중함과 소통의 미덕을 발휘했다.
“에른스트. 진지하게 대답해 주세요.”
“예?”
“당신이 이곳을 떠나는 이유는, 정말로 상회의 명령 때문인가요? 그 외의 다른 이유, 예를 들면 해야 할 ‘일’을 다 끝내서는 아닌가요?”
“…….”
에른스트는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에리스를 빤히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그녀가 그의 ‘책 읽기’를 ‘일’이라고 평가했던 걸 떠올렸다.
독서를 일이라고 말하는 에리스식 표현을 빌린다면, 도서관의 책을 전부 읽은 자신은 확실히 ‘일을 끝낸’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어깨를 으쓱인 뒤 대답했다.
“제 개인적 주관으로 말하자면 그걸 일이라고 하는 건 그다지 내키지 않습니다만…. 뭐 손님의 표현을 따른다면 그렇게 되겠군요. 저는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을 다 끝냈습니다.”
에른스트의 긍정을 받고, 에리스의 두 눈이 크게 떨렸다.
그녀는 조심스레 방금 에른스트에게 받은, 아마도 악마를 재료로 삼았을 마도서를 들어 올리며 물었다.
“그건, 이것(악마)과 관련이 있나요?”
“그야 그것(책) 말고 뭐가 있겠습니까?”
이쯤 되면 거의 대놓고 말해준 거나 다름없다.
적어도 에리스는 그렇게 판단했다.
허나 여전히 의문은 남아 있었다.
대체 일개 상회의 직원이 구태여 악마를 사냥하고 다닐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완벽한 초인 황태자…? 음, 뭔가 오해가 있는 듯하군요. 제가 아는 제국의 황태자는 생각보다 놀고먹기 좋아하는 인간입니다만.」
「자나 깨나 황태자의 의무를 다할 생각밖에 없는 나머지 다른 길에는 한눈조차 팔지 않는 인간이라니, 대마법사께서 착각하신 듯합니다.」
「빈말이 아니라 진짜입니다. 그 인간을 그렇게까지 높게 평가하면 실체와의 괴리를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문득, 에리스의 뇌리에 에른스트와 나누었던 대화가 스쳐 지나갔다.
당시에는 딱히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도서관의 일개 사서가 제국의 황태자에 대해 잘 알 리가 없으니까.
허나, 에른스트의 실력을 알게 된 지금은 이야기가 달랐다.
그때 그게 아무렇게나 떠든 게 아니었다면?
정말로 에른스트가 황태자라는 인물을 알고서 말한 거라면?
그렇다면,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라벨로시아 같은 소국에 5위계의 인재는 더할 나위 없는 보물이지만, 대륙에서 이름을 떨치는 강대한 열강 중에는 6위계를 복수 보유하고, 5위계를 집단으로 운용할 수 있는 국가도 존재하니까.
온전한 6위계도 다수 보유한 국가들이 볼 때, 에른스트처럼 어설픈 6위계는 귀중할지언정 대체 불가능한 인재는 아닐 터.
그가 만약 제국에서 운용하는 어떤 조직의 일원이고, 그렇기에 황태자에 관해서 먼발치에서나마 그 인품을 알고 있던 거라면… 모든 게 맞아떨어졌다.
그녀는 흔들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런 일을, 여태까지 계속해 왔던 건가요?”
“그렇진 않습니다. 이렇게 작정하고 한곳에 눌러앉은 채 몰두해 본 건 처음이니까요.”
“해오긴 해왔다는 거네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에리스는 머뭇거리며 말을 고르다가, 이내 결의를 품고 질문했다.
“제가, 당신을 도울 방법은 없나요?”
악마 토벌이란 무척이나 위험한 일이다.
게다가 에른스트가 정말로 제국의 요원 중 한 명이라면, 그의 임무는 악마 토벌 외에 다른 것도 뒤섞여 있을지 모른다.
뭣보다 에리스에게는 천공 학원에 입학한다는 계획도 있다.
에른스트를 돕는다는 건, 그 모든 위험을 감수하면서 본래 그녀의 미래 계획까지 바꿔야 하는 리스크가 가득한 일이다.
그래도, 에리스는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모든 걸 감수해서라도, 그녀는 그를 돕고 싶었기에.
에른스트는 고개를 갸웃하며 에리스의 의도를 파악하려는 듯한 얼굴을 했다.
에리스의 눈에는 그것이, 한 번도 누군가에게 ‘돕겠다’라는 호의를 받아본 적이 없어 낯설어하는 이의 모습처럼 보였다.
이내, 에른스트가 대답했다.
“당신은 이미 저를 도왔습니다. 같은 책을 읽고, 함께 감상을 나누는 것. 그거야말로 계속해서 쫓기듯 살아왔던 제 소원 중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 이상의 도움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악마 토벌을 업으로 삼는 이의 입에서 나왔다기에는 너무나도 소박한 감사의 말.
에리스는 가슴이 아려오는 걸 느꼈다.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에른스트의 말은 에리스의 제안을 거부하기 위한 변명이 아니었다.
에리스와 함께 보낸 그 사소하고 잔잔했던 시간이야말로 에른스트가 원하던 것이었노라고, 그는 진심을 다해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눈물이 새어 나올 것 같은 기분을 억누르며 말했다.
목소리가 흐트러지지 않게 하는 것이 너무나 고역이었다.
“겨우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해줄 수 있어요. 이렇게 직접 만나서. 그게 불가능하다면 편지로라도.”
“직접 만나는 건 어렵습니다. 편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잔혹하리만큼 냉정하게 잘라내는 말에, 에리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허나, 에른스트의 말은 끝이 아니었다.
“다만 당신이 제가 알려준 고유 주문을 극한까지 가다듬어 지금 손에 쥔 마도서와 하나로 합쳐버릴 수 있다면. 그래서 진정 하나의 『도서관』처럼 만들어낸다면, 당신의 도서관과 저의 도서관이 하나로 이어질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된다면, 서로 책을 교환할 수도 있겠지요. 감상을 적은 메모 같은 걸 끼어서 말이죠.”
에리스는 헛웃음을 흘렸다.
영리한 그녀는 에른스트의 말을 실현하기 위해 넘어야 할 난관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었다.
에른스트가 창조하여 그녀에게 알려준 주문은 그 자체로 새로운 학파의 씨앗이 될 만큼 파격적인 물건이다.
단순히 사용하는 것 정도는 몰라도 극의에 오르기는 어렵고, 하물며 악마를 재료로 삼아 만들어낸 마도서를 온전히 지배하고 합쳐버리는 건 그녀의 스승 델피나리스라도 가능할지 어떨지 모르는 영역.
그러니까, 에른스트의 말을 알기 쉽게 해석하면 이런 것이었다.
에리스의 말이 진심이라면, 어디 한번 그녀의 스승을 뛰어넘어 보라고.
“하. 하하.”
그녀의 입에서 마른 웃음이 새어 나왔다.
울적함과 슬픔으로 젖어 들어가던 목소리는, 어느새인가 뜨거운 열기에 바싹 메마른 뒤였다.
에리스의 녹색 눈이 힘을 품었다.
꺼져 들었던 가슴 속의 불꽃이 다시금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다만 그것은 과거 그녀가 품었던 불꽃과는 그 기질이 조금 달랐다.
집요할지언정 질척이지 않았고, 그녀 자신의 속을 불태우던 예전과 달리 오히려 끝없는 활력을 부여했다.
“좋아요, 각오해 두세요. 당신이 읽다가 질릴 정도의 분량을, 한꺼번에 몰아서 잔뜩 퍼부어 줄 테니까요.”
“기대해 두겠습니다.”
에리스의 결의 어린 선언에도 불구하고 에른스트의 대답은 변함없이 평탄했다.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 대화일지도 모르는데도, 그는 사무적인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그건 에리스와 이대로 헤어진다 해도 아쉬울 게 없다는 심정의 표현일까, 아니면 다시 만날 것을 확신하기에 호들갑 떨 거 없다는 의미일까.
후자였으면 좋겠다고, 아니 후자로 만들겠노라고 결의하면서, 에리스는 도서관을 떠나려 했다.
그때, 문득 그녀의 등 뒤에서 에른스트가 질문했다.
“그러고 보니, 손님. 한 가지 질문해도 되겠습니까?”
에리스가 걸음을 멈췄다.
“뭐죠?”
“저는 좋은 사서가 될 수 있었습니까?”
에리스는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아니요.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당신은 여러모로 아웃이었어요.”
“그렇습니까.”
“그렇지만.”
“…?”
에리스는 담담히 뒷말을 이었다.
“저한테는 나쁘지 않았어요.”
에른스트는 눈을 한 번 깜빡인 뒤, 이내 입꼬리를 슬쩍 위로 비틀었다.
변함없이 웃음이라 보기에는 너무 어색하고 사악한 무언가였지만, 나름대로 보는 재미가 있긴 했다.
이번엔 에리스가 질문했다.
“저는 좋은 손님이었나요?”
“이용 수칙적으로 말하면 썩 좋진 않았습니다. 본래 이 도서관은 서적 외부 반입이 불가능인데, 손님께서는 대부분 정식 등록이 아닌 책만 보셨던 터라 계속 예외 취급이었으니까요.”
“그런가요.”
“그렇지만.”
에른스트는 가감 없이 말을 덧붙였다.
“개인적으로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에리스는 미소를 지었다.
에른스트의 어색한 미소와는 달리, 보는 이들이 무심코 숨을 삼킬 만큼 아름다운 미소였다.
잠시 함께 웃던 불량 사서와 불량 손님.
그중 손님은 그대로 등을 돌려 도서관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어쩌면 최후일지도 모를 작별을, 그렇지 않게 만들기로 각오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