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les
Ex2-novel-agent/content/references/novelpia/330363/64.md
rupy1014 f66fe445bf Initial commit: Novel Agent setup
- Add 3 AI agents (writing, revision, story-continuity specialists)
- Add 4 slash commands (rovel.create, write, complete, seed)
- Add novel creation/writing rules
- Add Novelpia reference data (115 works, 3328 chapters)
- Add CLAUDE.md and README.md

🤖 Generated with [Claude Code](https://claude.com/claude-code)

Co-Authored-By: Claude Opus 4.5 <noreply@anthropic.com>
2025-12-14 21:31:57 +09:00

13 KiB
Raw Blame History

#95화 사서 에른스트(Ernst) (16) - 마무리 전의 휴식

펄럭, 펄럭.

책의 내용을 대충 훑어보듯이 페이지를 넘기는 에른스트의 모습을, 에리스는 복잡한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았지만, 개중 무엇을 먼저 물어야 할지 몰라 고민하기를 얼마쯤.

그녀의 열렬한 시선을 눈치챘는지, 에른스트가 문득 미간을 찡그렸다.

처음 보는 사람이 보면 화가 나서 노려보는 게 아닐까 싶은 시선으로 에리스를 응시하던 에른스트는, 문득 자기 손에 쥐고 있는 책을 보고는 “아.”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그리고 말하기를.

“이거 하나뿐입니다.”

“네?”

“도서관에 있는 다른 책들은 다 멀쩡한 책이라는 뜻입니다.”

에리스는 눈을 두어 번 껌뻑이다가, 에른스트가 내뱉은 말을 어찌어찌 해석했다.

그러니까, 이거 지금, 변명하는 건가?

자기는 마음에 안 드는 인간들을 전부 책으로 만들어 도서관에 전시하는 미치광이가 아니니까 안심하라고?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한 얼굴로 본인의 무고함을 주장하는 금발 사서의 모습을 바라보던 에리스는,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하, 하하! 뭐예요, 그게! 지금 이 상황에, 제일 먼저 나오는 게 그 말인가요?”

불과 얼마 전 강대한 악마에게 큰 위협을 당했고, 그 악마가 책으로 봉인되는 꼴을 눈앞에서 봤으며, 정체 모를 대마법사와 그의 거점에서 단둘이 남겨졌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태평하게 웃음이나 터트릴 상황이 아니었지만, 도리어 그렇게 객관적으로 상황을 분석하면 할수록 웃음은 더욱 커졌다.

심각하기 짝이 없는 상황과 저기 저곳에서 미묘하게 부루퉁한 기색으로 에리스를 빤히 바라보는 에른스트의 모습이 자아내는 갭이 그 정도로 강력했기 때문이다.

그 후에도 한참을 웃어 젖힌 에리스는, 지나친 웃음으로 살짝 현기증이 날 무렵에야 겨우 폭소를 멈출 수 있었다.

“후우.”

타인이 보는 앞에서 이렇게 웃어본 게 대체 얼마만의 일일까.

눈가에 살짝 남은 물기를 닦아낸 뒤, 에리스는 조금 진지한 얼굴로 질문했다.

“저를 속이고 있었던 건가요?”

“무얼 말하시는 건지 알기 어렵습니다만.”

“이만한 마법 실력을 지니고 있었으면서, 저에게는 비밀로 했잖아요.”

추궁하는 듯한 질문이었지만, 에리스는 어째서인지 에른스트의 대답을 예상할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에른스트는 태연히 대답했다.

“딱히 숨긴 적은 없습니다만? 그저 보여드릴 기회가 없었을 뿐입니다.”

“아, 그래요.”

너무나 예상 그대로인 대답에, 에리스는 피식하고 웃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반응에 내심 놀랐다.

‘…이상하네, 본래라면 화가 치밀어야 할 텐데.

에리스는 본인의 성격을 어느 정도 자각하고 있었다.

승부욕이 강하고, 질투가 심하고, 속도 그렇게 넓지 않다.

얼마 전의 에리스가 만약 이 상황을 알게 되었더라면, 필시 이를 악물며 에른스트에게 분노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나를 속여왔냐고, 자기보다 훨씬 뒤떨어지는 내가 사소한 마법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는 걸 보며 속으로 얼마나 비웃었겠냐고, 그렇게 에른스트의 생각을 단정 짓고 그를 규탄하고 비난했을 것이다.

그래야 본인의 자존심을 지킬 수 있으니까.

하지만, 어째서일까.

지금은 딱히 그런 기분이 들지 않았다.

한바탕 웃어 젖더니 이거고 저거고 아무래도 좋아진 걸까.

아니면 이 남자가 속에 그런 꿍꿍이를 숨기고 있었을 리가 없다는 신뢰일까.

어느 쪽이든 나쁜 기분은 아니었기에, 에리스는 부정적인 감정 대신 순수한 호기심과 탐구심으로 입을 열 수 있었다.

“그나저나 놀랄 일이네요. 이 작은 나라에 설마 스승님 말고도 다른 대마법사가 또 있었을 줄이야.”

에리스의 말에, 에른스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개 사서와 델피나리스 님을 비교하시는 건 옳지 않습니다.”

“지금 눈앞에서 실력을 보여줘 놓고 그런 소리를 해봐야 설득력이 없어요.”

“제가 정말로 자유롭게 그분 급의 실력을 뽐낼 수 있었다면, 애초에 여기까지 도망칠 것도 없이 그냥 정면에서 악마를 때려잡았겠지요. 제 힘은 어디까지나 이 장소, 이 환경에 한정된 것에 불과합니다.”

그리 말하며 에른스트가 발을 구르자, 은은한 마력의 파동이 번져나갔다.

그러자 그 마력에 반응하듯이 도서관 곳곳에서 기이한 선과 표식들이 떠올랐다.

그 모습을 확인한 에리스가 탄성을 내뱉었다.

“결계 형태의 고유 주문이었군요. 이 도서관 자체가 당신의 영역이나 마찬가지였어요.”

5위계 마법사의 특질, 고유 주문 창조.

개중에는 불의 주문과 물의 주문을 합쳐 증기를 만들어내는 식으로 비교적 상식적인 것도 있지만, 대체 뭘 어떻게 해서 이런 효과를 만들어낸 건지 상상도 가지 않는 것도 있다.

에른스트의 주문은 전형적인 후자였다.

델피나리스의 제자로서 나름 여러 고유 주문을 보고 관찰해 온 에리스조차, 그가 만들어낸 이 주문의 구조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한참이나 마력의 선과 표식들을 빤히 바라보던 에리스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당황해서 얼굴을 붉혔다.

기사가 자기만의 비전 검술을 수련할 때 그 모습을 구경한다면, 분노한 기사에게 칼로 베어져도 불만을 말하지 못한다.

마법사의 고유 주문 역시 그 정도로 귀중한 것인데 이를 대놓고 보며 분석하려고까지 했으니 뭐라 변명하기 힘든 무례였다.

“저기, 그, 미안해요.”

“딱히 상관없습니다. 원하시면 아예 가르쳐드려도 상관없고요.”

에리스의 동작이 잠시 멈칫했다.

그녀는 잠시 믿을 수 없는 것을 보듯이 에른스트를 봤지만, 사서는 태연자약했다.

“…진심인가요?”

“어차피 당신 이외는 잘 쓰지도 못할 것 같거든요. 이게 여러 가지 책에 깊게 몰두하고 그 내용을 기억하지 않으면 쓰기 어려운 주문이라서.”

“딱히 소설에 몰두한 적은 없는데요!”

“전 소설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만, 혹시 이게 바로 그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그겁니까?”

“시끄러워요!!”

에리스는 아까까지의 우아하고 차분한 모습은 어디 갔는지 다시 도끼눈을 떴고, 에른스트는 늘 그렇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이를 흘려넘겼다.

그렇게, 긴 하루가 마무리 되었다.


마리크 그림룬이 사실 악마 계약자였고, 이윽고 악마에게 완전히 홀려 에리스를 죽이려 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사실 널리 알릴 방법도 마땅치 않았다.

만약에 에리스가 이번 일에 대해 곧이곧대로 주변에 털어놓았다고 한들, 그 반응은 시원치 않았을 것이다.

일단 악마 계약자를 양자로 받아들였다는 오명을 쓰게 될 판인 그림룬 백작가는 필사적으로 저항하겠지.

자기네 학생 중 한 명이 악마 계약자였던 데다가 그 악마 계약자가 다른 우등생을 죽이려고 했는데 그 과정을 인지하지도, 막지도 못한 무능한 놈들이라는 낙인이 찍힐 강습소 역시 찝찝한 반응을 보일 터.

강습소의 뒷배가 왕실이라는 걸 모르는 이는 없으니, 자칫하면 왕실에서 나서서 함구령을 내릴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유일하게 델피나리스만큼은 설령 본인의 이름값이 더럽혀지는 일이 있어도 에리스를 위해 나섰을지 모르지만, 그건 에리스가 원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 막대한 반발과 부담을 무릅쓰고 이번 일을 널리 알린다고 해도, 거기에 대체 무슨 이득이 있단 말인가.

기껏해야 명성과 연관 세력들에게 보상을 요구하는 정도인데, 명성 쪽은 이름이 높아지기커녕 허풍쟁이 취급을 받을 가능성이 높았고, 보상 역시 돈푼 얼마쯤 받고 해당 세력과 원수지간이 되느니 그냥 처음부터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넘어가는 게 에리스로서도 편했다.

혹여 아들을 잃어버린 백작가 쪽에서 움직일지도 모른다고 걱정했지만, 이는 기우로 끝났다.

“마리크가 행방불명됐다고? 쯧, 됐다. 뒷일을 감당하기 버거울 것 같으니 도망친 거겠지. 책임감이라고는 없는 놈.”

안 그래도 결투 사건 이후 마리크를 골칫거리로 여기던 백작은 그의 존재를 흐지부지 없는 걸로 해버렸고, 가신들도 이에 반발하지 않았다.

평소 본인이 쌓아온 업보를 그대로 돌려받은 셈이었다.

발자레스가 강습소 전체에 환영과 인식 저해 계열의 주문을 흩뿌려둔 탓에 에리스의 밤중 나들이가 들키는 일도 없었고, 델피나리스는 에리스에게 살짝 묘한 기색을 감지한 듯했지만, 에리스가 대답을 기피하는 모습을 보이니 강하게 나오지 못했다. 업보가 많은 스승은 본디 발언권이 약한 법이었다.

그 결과, 에리스는 오늘도 주변의 방해를 받는 일 없이 조용히 도서관 죽돌이, 아니 죽순이가 될 수 있었다.

“『그녀의 몸은 바다의 거품이 되어, 더 이상 바다의 딸이 아니게 되었다.』”

에리스가 주문을 외우자, 그녀의 손 위에 머그잔 한 컵 분량 정도의 물과 거품이 생겨났다.

그녀의 곁에서 책을 읽던 사서가 눈만 흘끗 돌린 뒤 지극히 평탄한 어조로 말했다.

“성공하셨군요. 축하합니다.”

“축하의 인사를 하고 싶다면, 조금 더 감정을 담아주세요.”

“흠.”

에른스트는 잠시 고민한 뒤,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성공하셨군요. 축하합니다.”

도레미파에서 ‘도’ 대신 ‘파’로 음의 높이가 올라갔지만, 그 외에는 방금 대사와 토씨는커녕 단어의 간격까지도 똑같은 대사였다.

“…그냥 됐어요.”

“먼저 요구하셨으면서 너무 무례한 반응 아닙니까?”

“욕을 퍼붓지 않는 것만으로도 저는 지성인으로서 품격을 지키고 있거든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뒤, 에리스는 손 안의 물 덩어리를 바라보았다.

“이게 정말 될 줄이야.”

그녀는 내심은 기쁨 반 황당함 반이었다.

입으로 특정한 단어나 발음을 말하며 주문 사용을 보조하는 ‘영창’은 마법에서 그리 드문 건 아니다.

하지만 그냥 책에서 적당한 문구를 선정한 뒤에, 그 문구가 나타내는 상징이나 비유를 그대로 현실에 구현한다는 건 그야말로 듣도 보도 못한 기이였다.

특히 에리스 본인의 이미지나 감정이 확고하고 강렬할수록 주문의 효과 역시 강해진다는 성질은, 마법을 수학처럼 배워왔던 에리스에게는 그야말로 가치관을 뒤엎을 정도의 충격을 주고 있었다.

“어떻습니까? 공부도 좋지만 가끔은 문학을 즐기는 것 역시 인생에 도움이 되는 법입니다. 제가 이 주문으로 그걸 증명해 냈지요.”

표정은 변함없이, 하지만 분위기만큼은 어쩐지 우쭐한 것 같은 에른스트.

에리스는 그런 그를 빤히 응시했다.

확실히 천재적인 주문이긴 했다.

에리스도 이미 만들어진 주문을 배워서 쓰라고 하니까 쓰는 거지, 본인이 이런 걸 만들라고 했으면 평생 걸려도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다만, 한 가지.

“…근데 이러면 당신이 그토록 주장하는 ‘휴식의 중요성’은 물 건너간 거 아닌가요? 이래서야 그냥 순수한 오락 소설을 읽을 때도 이 문구는 어떤 효과가 될지 떠올리면서 읽게 될 것 같은데요.”

아무리 봐도 휴식이랍시고 놀다가 일을 떠올리는, 일과 취미의 구분이 불분명한 인간이 떠올릴 것 같은 주문 아닌가.

뭐, 어떤 의미로는 지극히 에른스트다운 주문이긴 하다며 별생각 없이 흘려넘긴 에리스는 알지 못했다.

방금 본인이 남긴 한마디에, 에른스트가 그대로 돌처럼 굳어버렸다는 것을.

그리고 저 멀리에 있는 황태자가 침음성을 흘리고, 곁에 있던 대악마가 배를 움켜쥐고 폭소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