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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화 사서 에른스트(Ernst) (10) - 엄격한 조건
언덕 위에 세워진 대마법사의 집.
알드리지 강습소의 교사이자 델피나리스의 제자 중 한 명이기도 한 메리 위스턴은 오랜 인연을 함께 해온 스승을 응시했다.
“꼭 그러셔야 했나요? 저는 에리스와 그렇게까지 친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 애가 스승님한테 인정받기 위해서 얼마나 치열한 노력을 했는지는 알아요. 변변한 취미 하나 없이, 또래 아이들이라면 흔히 즐기는 놀이들도 외면한 채, 오직 공부와 훈련만을 계속 반복해 온 애라고요. 그걸 아시면서, 꼭 그렇게 하셔야 했냐고요.”
적잖은 책망의 감정이 담긴 꾸짖음에, 스승은 시선을 회피한 채 대답했다.
“새 제자를 받은 게 나쁜 일은 아니잖니. 더 이상 막내가 아니게 되었을 뿐, 에리스는 변함없이 내 제자야.”
“평범한 제자였다면 저도 이런 말은 안 해요. 하지만, 스승님이 그 마리크라는 소년을 대하는 태도는 그게 아니잖아요?”
온화하고 인품 좋은 마법사.
그것이 대외적인 델피나리스의 평가였다.
6위계쯤 되는 경지에 오른 마법사들은 많든 적든 괴팍한 성품을 지닌 것이 보통인데, 델피나리스는 그렇게까지 까탈스럽지도, 거만하게 굴지도 않았기에 주어진 평가였다.
허나 메리를 비롯한 델피나리스의 제자들은 알고 있었다.
평소에는 온화한 델피나리스지만, 정말로 벌을 내려야 한다고 판단했을 때는 단호하고 엄격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을.
온화하다는 건 절대 만만하고 우습게 봐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을.
그런데, 그런 델피나리스가 어째서 마리크에게만은 그토록 무른 것인가.
“재능은 뛰어날지 몰라도, 걔는 성품이 글러 먹었어요. 스승님 보는 앞에서만 슬쩍 내숭을 떨 뿐, 다른 제자들은 거의 아랫것들 보듯이 본다니까요?”
“아직 어리잖니. 원래 이런저런 경험을 해가면서 점점 사람이 되어 가는 법이야.”
“그렇게 믿고 싶으신 건 아니고요?”
“…….”
델피나리스는 침묵했다.
굳게 다문 입가에서 느껴지는 완고함에, 메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녀는 에리스처럼 제국의 황태자와 얽힌 델피나리스의 속내를 들은 적은 없다.
당시에는 술기운이 잔뜩 들어간 것과 막역한 지인이 상대였던 것 등 온갖 조건이 겹친 탓에 무심코 말실수를 했을 뿐, 평소 제자들 앞에서 너희의 재능이 부족하니 어쩌니 하는 말을 떠들 만큼 델피나리스는 인격적으로 모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허나, 메리를 비롯해 제자 중에서도 고참에 속하는 몇몇 이들은 델피나리스가 느끼는 초조함. 그리고 재능 있는 제자를 향한 집착을 막연하게나마 깨닫고 있었다.
그 원인 중 하나가, 자기들이 델피나리스가 만족할 만한 경지에 오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도.
6위계 특유의 장수로 인해 메리 자신과 비슷한 연령대로 보일 뿐, 본래 델피나리스는 이미 관에 들어갔어도 그리 이상하지 않은 나이다.
인생의 황혼을 준비하는 노인에게, ‘제자 복 없는 스승’ ‘가르치는 능력은 부족한 대마법사’ 같은 세간의 평가가 얼마나 큰 한이자 상처가 되었겠는가.
이건 말로 설득하려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니었다.
“받으세요.”
“…이게 뭐니?”
메리가 내민 편지를 본 델피나리스가 되물었지만, 메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보면 안다는 듯이 눈짓했을 뿐.
델피나리스는 의아해하면서도 편지를 꺼내 그 내용을 살폈고, 이내 그녀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이번 모의전. 꼭 보러와 주세요. -에리스-」
격식을 갖추기 위해 편지봉투에 집어넣고 밀랍으로 봉인하는 과정을 거쳤을 뿐, 편지의 내용 그 자체는 메모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간단했다.
허나, 그 짧은 문장이 남긴 여운은 절대 간단하지 않았다.
“각오와 두려움, 용기가 마구 뒤섞인 눈이었어요. 그 편지를 보내기 위해 얼마나 고민했을지, 그걸 전해달라고 저에게 말하기까지 얼마나 망설였을지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을 만큼.”
메리가 저택을 떠나간 뒤에도 한참,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델피나리스는 그 편지를 조용히 응시했다.
수학여행이라고 하면 반 친구들과 단체로 놀러 가는 거라고 생각하는 학생들은 인정하지 않겠지만, 수학여행의 본질은 학습이다.
어디 유적이나 박물관에 찾아가 그 내용을 구경하고 학습하는 게 본질이지, 담력 시험, 캠프파이어, 베개 싸움 등은 덤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강습소 교류회에서 학생 대표 간의 모의전이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 높지 않았다.
일종의 마무리 행사 겸 높으신 분들의 눈요깃거리로서 제법 많은 관심을 받기는 했지만, 시간으로 따지면 극히 일부뿐.
교류회 일정표 대부분을 차지하는 건 훈화 말씀, 토론회, 합동 수업 같은 내용들이었고, 이는 많은 학생들에게 지루함을 선사했다.
악마 계약자, 마리크 그림룬으로 말하자면 지루해하는 걸 넘어 거의 고통을 느낄 정도였다.
‘빌어먹을. 그냥 대충대충 끝나고 빨리 모의전이나 시작할 것이지, 뭐 이리 쓸데없는 과정이 많아!’
마음 같아선 당장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가고 싶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여러 높으신 분들의 이목이 한데 모인 곳에서 그런 망나니짓을 했다간 아무리 양자의 마법적 재능에 흠뻑 취한 그림룬 백작이라고 해도 노발대발할 게 뻔했으니까.
거기에 악마와의 계약도 있었다.
[오, 친구. 조금만 참으라고. 안 그래도 이론 수업에서 내내 졸고 있는 탓에 성적이 아슬아슬한데, 이번 교류회에서 성과를 보이지 못하면 그땐 정말로 천공 아카데미 입학권은 물 건너가 버릴 테니까.]
악마 발자레스는 언제나처럼 친근하고 경박한, 하지만 은근한 경고를 담아 속삭였다.
[너는 반드시 천공 아카데미로 가서, 내가 지시한 내용들을 완수해야만 해. 대가를 제대로 치르지 못했을 때는 알지?]
발자레스의 으름장에, 마리크는 내심 움츠러들면서도 허세를 담아 대답했다.
‘알고 있으니까 괜한 걱정 말고 기다려!’
[하하, 그래, 그러지. 재촉한 거 같아서 미안하군!]
그렇게 지루한 일정들을 하나하나 처리해 나가기를 얼마쯤.
시야 속에 비친 어떤 인물의 모습을 확인하고, 마리크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만큼 눈에 띄는 외모와 아우라.
화려한 적금발을 지닌 미인, 에리스를 향해 마리크는 거침없이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에리스 양.”
힐끗, 하고 녹색의 차디찬 눈이 마리크 쪽을 향했다.
가까운 곳에서 보니 한층 더 빼어난 미모를 보고, 마리크는 내심으로 감탄했다.
‘저번 모임 때 얼핏 봤을 때도 좋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이건 생각보다 더 훌륭한데? 가슴은 좀 아쉽지만 한두 번 노는 정도라면야 뭐.’
당사자가 들었으면 어떻게 반응했을지 알 수 없는 저열한 생각을 품은 채, 마리크는 웃는 얼굴로 말을 이어 나갔다.
“저번에는 제대로 인사도 나누지 못해서 아쉬웠습니다. 몸은 이제 좀 괜찮으십니까?”
“네, 괜찮아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것참 다행입니다. 마침 점심 시간이기도 하니, 잠시 이야기라도 나누는 게 어떠십니까?”
“죄송하지만, 이미 같은 반의 친구들과 선약이 있어서요.”
“하하, 같은 반 친구야 언제든 만날 수 있지만, 다른 강습소의 학생 어울릴 수 있는 건 이때뿐이잖습니까. 친구분들께서도 이해해 주실 겁니다.”
말투 자체는 델피나리스의 저택 때보다 그럭저럭 괜찮은 편에 속했지만, 그 내용은 무척이나 고압적이고 이기적이었다.
본인과의 약속을 위해 기존 약속 따위는 취소하라고 강요하는 셈이었기 때문이다.
에리스의 미간이 한층 더 깊어졌지만, 마리크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럭저럭 잘 보일 필요가 있는 백작, 대마법사, 악마 같은 경우와는 달리, 마리크의 인식 속에서 에리스는 이미 자기보다 아래쪽에 있는 약자였기 때문이다.
“아뇨, 그러기는 어려울 것 같네요.”
허나 반복된 권유에도 에리스는 냉정하리만큼 마리크를 무시했고, 이에 마리크 역시 더욱 노골적인 말을 퍼부었다.
“정말 그러셔도 괜찮겠습니까? 일단 같은 스승님 밑에서 배우는 제자니까, 에리스 양이 너무 민망하지 않도록, 모의전에서 적당히 조절할 생각이었는데요.”
우뚝.
계속해서 사무적인 대응을 이어 나가던 에리스의 몸이 경직됐다.
그걸 호재로 해석한 마리크는 은근한 목소리로 발언을 계속했다.
“다른 사형제분들은 오해하는 것 같지만, 저도 그렇게까지 막 나가는 성격은 아니거든요? 에리스 양이 잘만 해주시면 저도 적당히─”
“─저기요.”
순간, 에리스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신비로우면서도 친절한 우등생의 가면이 벗겨지고, 그 아래에 있는 집요하고 끈적거리는 분노가 모습을 드러내자, 마리크는 본능적으로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그런 마리크를 향해 에리스는 한바탕 독설을 퍼부으려다가, 이내 주변의 시선을 인식하고는 싱긋 웃은 뒤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마리크 씨는 레이디를 대하는 기본 예의를 배우지 못하신 듯하네요. 가문의 명예와 델피나리스 스승님의 이름에 먹칠을 할 수 있으니, 그런 건 부디 자제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에리스의 목소리 자체는 그렇게까지 큰 게 아니었지만, 또박또박 명쾌한 발음은 많은 인파로 인한 혼란 중에서도 주변 사람들의 귀에 쏙쏙 들어왔다.
안 그래도 마리크의 치근덕거림에 눈살을 찌푸리고 있던 주변 사람들은 에리스의 발언과 벙찐 마리크의 얼굴을 보고는 입에 웃음을 머금었다.
저벅, 저벅.
당당하고 우아한 모습으로 떠나가는 에리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마리크는, 한발 늦게 본인이 주변의 웃음거리가 됐다는 걸 깨닫고는 새빨갛게 얼굴을 붉혔다.
그는 빠득, 하고 이를 갈았다.
‘좋게 좋게 대해주려니까, 감히 날 무시해!?’
반드시 후회하게 해주겠다.
많은 이들이 보는 앞에서, 저 새침한 얼굴이 처참하게 무너질 만큼 너덜너덜하게 만들어주리라.
독기를 품은 마리크는 당장이라도 에리스의 얼굴에 주문을 때려 박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기다리며 또 기다렸고, 마침내 그가 기대하던 시간이 찾아왔다.
“알드리지 강습소 대표, 에리스. 로우튼 강습소 대표, 마리크 그림룬. 양자 모두 준비됐습니까?”
“네. 준비됐습니다.”
“예!”
에리스는 변함없이 도도하게, 마리크는 물어뜯기라도 할 것처럼 거칠게.
두 명이 전투 준비를 끝낸 것을 확인한 심판이 시작신호를 울리고, 에리스가 마리크를 향해 지팡이를 뻗었다.
화살 형태가 되어 날아드는 압축된 물을 인식한 순간, 마리크의 머릿속에 그 사용법이 본능적으로 새겨졌다.
검술이나 마법 같은 걸 전혀 모르는 플레이어가 단축키 한 번에 캐릭터의 스킬을 사용할 수 있듯이, 이해도 분석도 불필요한 권능.
허나 마리크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이미 에리스를 철저하게 굴복시키기로 마음먹은 뒤였기 때문이다.
자동으로 완성되어 가는 주문에, 마리크는 본인이 지닌 막대한 마력을 힘껏 집어넣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생성 중이던 화살이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어?”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마리크가 얼빠진 소리를 낸 직후, 에리스가 발사한 물의 화살이 마리크의 얼굴 한복판에 직격했다.
퍽! 하고 얼굴에 물바가지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마리크는 별다른 대항조차 하지 못한 채 바닥을 나뒹굴었다.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마리크를 응원하던 이들도, 에리스를 응원하던 이들도, 양쪽 모두 이 갑작스러운 사태를 곧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넋을 놓았다.
그 정적을 깬 것은, 허우적거리며 몸을 일으킨 마리크였다.
“퉷! 펫! 뭐야 이거!!”
짜증이 잔뜩 어린 목소리로 몸을 일으킨 마리크는, 분노에 찬 눈으로 에리스를 노려보았다.
허나 그가 추가로 말을 내뱉는 것보다 먼저 에리스가 또 다른 술식을 발사했다.
투명한 공기에 푸르스름한 기운만이 어우러진 주먹 크기의 마력탄은 눈으로 인식하기 까다로웠지만, 상관없었다.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해도, 눈으로 보지 못해도, ‘그런 게 있다’라는 걸 인식한 순간 악마의 권능은 발휘되니까.
카피에 성공한 마리크는 방금 모욕당한 분노까지 담아 힘껏 주문을 발현했고.
퍼어어엉!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 술식은 그대로 붕괴했다.
퍽!
뼛속까지 시린 냉기의 탄환에 얻어맞고, 아직 물기가 남아 있던 마리크의 얼굴 곳곳에 하얀 성에가 끼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코에서 줄줄 새어 나오는 피가 흘러내렸다.
경악으로 부릅뜬 눈과 절묘한 조화를 이룬 그 광경에, 몇몇 관객들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한편, 에리스는 내심으로 전율했다.
사서, 에른스트의 말이 진짜였다는 걸 확인했기 때문이다.
「주문을 ‘그대로’ 카피해서 더 강한 위력으로 되돌려 준다라.」
「그 세세한 구조는 일단 나중 문제라고 치고, 공략법은 그리 어려울 게 없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대개의 주문들은, 무척이나 가변적입니다. 10의 마력을 넣으면 10의 결과가 나오는 게 아니라, 8에서 12 사이의 마력을 넣으면, 결과도 8에서 12 사이가 나오는 식이죠. 특정 주문마다 ‘가장 가성비가 좋은 수치’는 있지만, 그보다 조금 모자라거나 더 많아도 일단 주문을 발동하는 데는 별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면 반대로, 그런 융통성을 극한까지 줄여본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10의 결과를 내기 위해선 반드시 10의 마력을 넣어야 한다면. 아니, 10.12515라는 식으로 아주 세밀한 영역까지 ‘조건’을 걸어둔다면?」
「조건보다 아주 조금이라도 마력이 모자란 순간, 주문은 제대로 구현되지 못할 겁니다. 조건보다 아주 조금이라도 마력이 넘치는 순간, 주문은 그대로 자괴하겠지요.」
「예, 알고 있습니다. 새로운 주문을 탄생시키는 건 5위계의 영역이라는 걸. 이건 창조가 아니라 변형이긴 하지만, 그래도 어지간한 지식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겠지요.」
「하지만 당신은 가능할 겁니다.」
「말했잖습니까. 쉬엄쉬엄해도 된다고. 왜냐하면…」
“…평소에 이미 잔뜩 노력했으니까.”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에른스트의 대사를, 에리스는 무심코 입으로 중얼거렸다.
사무적이고 무덤덤한 그 목소리가, 왜인지 너무나 달콤하게 들려왔다.
그녀는 앞을 바라보았다.
도저히 질 것 같지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