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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화 사서 에른스트(Ernst) (4) - 충고를 외면한 결과

오해를 막기 위해서 말해두자면, 에리스는 딱히 공부에는 손도 안 대고 딴짓만 한 건 아니었다.

대마법사가 되고자 하는 그녀의 의지는 진짜고, 새로운 이론서를 탐구하려는 마음에는 어떤 거짓도 없다.

다만 에리스는 귀찮고 번거로운 일은 먼저 해결하는 타입이다.

음식을 먹을 때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부터 시작해 맛있는 걸 나중에 먹고, 숙제 같은 게 있으면 아슬아슬하게 미뤄두는 게 아니라 받자마자 끝내둔다.

에리스 입장에서 그 성격 나쁜 사서가 건네준 책을 읽는 건 숙제나 다름없는 일.

그렇기에 다른 것보다 우선해서 끝냈을 뿐, 절대로 공부가 싫어서 소설을 먼저 읽은 건 아니다.

…뭐 적당한 시점에서 마무리 짓고 다음 날 이어 읽으면 될 것을 그냥 끝까지 읽어버리게 된 건 오산이었지만, 덕분에 시간을 아끼게 됐으니 결과적으로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점심시간.

에리스가 부족한 수면 시간과 지루한 수업 탓에 생겨난 졸음기를 커피로 내쫓고 있자니, 같은 테이블에 앉은 귀족 영애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떠들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그거 아시나요? 로우튼 강습소에 괴짜가 나타났다고 하네요.”

“괴짜요?”

“그림룬 백작님의 양자인데, 이론 수업은 바닥 중의 바닥인데 실기 수업은 아무도 못 따라온다고 해요. 그래서 이번 교류회 때 대표 중 한 명으로 나온다는 소문이 있어요.”

라벨로시아 왕국에 존재하는 ‘강습소’는 현재 네 곳.

각 강습소는 일정 주기마다 교류회를 열어 서로 우호를 다졌는데, 이런 행사가 으레 그러하듯이 강습소 사이의 경쟁이나 비교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그중에서도 하이라이트는 각 강습소의 대표 학생들이 서로 실력을 겨루는 모의전이었는데, 모의전의 관객 중에는 왕실이나 천공 아카데미 측의 인사들도 포함되어 있었기에, 출세욕이 강한 학생들은 어떻게든 강습소의 대표로 뽑히기 위해 애를 쓰고는 했다.

물론, 에리스와는 크게 관련이 없는 이야기이긴 했다.

그녀의 실력은 알드리지 강습소 내에서도 독보적이라 그녀가 대표가 아니면 대체 누굴 대표로 내보내야 하냐는 수준이었고, 실제로 저번 교류회 때는 압도적인 실력으로 다른 강습소의 대표들을 때려눕혔으니까.

“에리스 양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어떻게 생각하기는. 이런 수준 낮은 곳의 학생과 나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불쾌하지.’

“이번에도 저번처럼 이기실 수 있는 거죠? 그렇죠?”

‘이기는 게 당연하잖아. 그걸 질문이라고 하는 거야?’

“저희 강습소가 다른 곳에 밀리면 안 돼요! 그래야 부모님한테 자랑할 수 있단 말이에요!”

‘알드리지 강습소가 승리해도, 그건 내가 뛰어난 거지 네가 뛰어난 게 아닌데 대체 뭘 자랑한다는 건지 모르겠네.’

영애들의 질문에 속으로 냉소적인 대답을 하면서도, 에리스는 그걸 겉으로 드러내지 않은 채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기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마법의 세계란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곳이니 방심은 금물이겠지만, 그래도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생각이랍니다.”

겸허함과 우아함을 동시에 담은 에리스의 말에, 영애들은 꺄악꺄악 둥지에 모인 새처럼 반응했다.

만들어진 미소로 그녀들을 상대하며, 에리스는 내심으로 한숨을 쉬었다.

육체적인 것과는 다른 의미의 피로감이 느껴졌다.

이렇게 쓸데없는 일에 시간과 정신력을 소모하느니, 차라리 그 사서가 건네준 소설이라도 읽는 게 유익…

‘…아니지, 무슨 말도 안 되는 생각을.’

머릿속에 떠오른 상념을, 에리스는 애써 날려버렸다.

잠이 덜 깨서 그런 게 틀림없으니, 커피라도 한 잔 더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

에리스가 도서관에 재차 방문한 것은, 이론서를 받고 3일 차가 되는 날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에 가장 놀란 것은 다름 아닌 에리스 본인이었다.

‘이론서 하나를 완독하고, 온전히 습득하는 데 고작 3일밖에 안 걸리다니.’

예전에 비슷한 수준의 이론서를 습득하는 데 거의 3주를 끙끙거려야 했던 걸 생각하면, 실로 어마어마한 수준의 격차가 아닐 수 없었다.

읽기 쉬운 해석본이 있다는 것만으로 결과가 이렇게까지 달라질 줄이야.

아직 손에 넣지 못한 마도서의 존재도 그렇고, 그 도서관을 발견한 건 여러모로 행운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저기 저, 손님이 들어오든 말든 카운터에서 본인 책만 읽고 있는 어떤 사서만 아니었다면 더욱 큰 행운이었을 것을.

“어흠!”

헛기침으로 인기척을 내자, 그제야 사서의 눈이 에리스 쪽을 향했다.

변함없이 날카로운 눈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에리스는 볼멘 소리를 냈다.

“…당신은 접객이라는 개념을 모르는 건가요?”

사서가 어깨를 으쓱였다.

“특정 직업에 종사하는 모든 인물이 해당 직업에 있어서 완벽할 수는 없는 법이지요. 가끔은 이렇게 한 군데 모자란 사서가 있어도 좋지 않겠습니까.”

혹시 지금 이걸 농담이라고 한 걸까.

에리스는 사서를 지긋이 바라보았지만, 무표정한 얼굴에서 어떤 감정을 읽어내기란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책들을 반납했다.

이론서 원본. 이론서 해례본. 그리고 그럭저럭 볼만했던, 아니 쓸모없는 소설 하나.

“다음 책은 마도서로 해주면 더 좋을 텐데 말이죠.”

“아쉽게도 그건 확답을 돌려드릴 수 없겠군요.”

“손님이 원하는 책을 요구하면 그걸 찾아주는 게 사서의 역할 아닌가요?”

“1층 내의 책이라면 그렇겠지요. 2층에 있는 건 굳이 따지자면 비매품에 가까운 무언가입니다.”

어떻게 해도 한마디를 안 진다.

에리스는 한숨을 내쉰 뒤 손을 내밀었다.

“됐으니까 문제나 내놔요.”

“알겠습니다.”

사서는 서랍에서 종이 하나를 꺼내 에리스에게 건넸다.

[작중, 주인공 랄프는 공복에 미쳐 날뛰는 오우거가 마을로 향하는 걸 막기 위해서, 친절한 노부부가 살고 있던 오두막으로 오우거를 유인한다. 랄프 덕분에 위기를 넘긴 마을 사람들은 랄프를 영웅이라 칭송했지만, 정작 랄프 본인은 죄책감으로 괴로워한다. 당신은 랄프의 행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문제를 유심히 살펴보던 에리스는, 이내 어떤 사실을 깨닫고는 이의를 제기했다.

“잠깐, 이런 건 명쾌한 답이 존재하지 않는 문제잖아요.”

“괜찮습니다. 감상을 말하는 문제는, 내용이 적혀 있기만 하면 그게 어떤 것이든 정답으로 취급할 테니까요.”

“진심인가요?”

“이런 걸로 거짓말을 해서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상대의 진심을 파악하기 위해 에리스는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지만, 사서의 표정에는 얄미울 정도로 변화가 없었다.

에리스는 잠시 고민에 잠겼다.

문제의 난이도 자체만으로 따진다면 엄청나게 쉽다.

극단적으로는 단어 하나만 적어도 합격이 되는 셈이니까.

하지만.

‘…결국 보상을 가져오는 건 이 남자야.’

여태까지의 경험으로 봤을 때, 에리스가 그렇게 꼼수를 써서 통과한다고 해도 사서는 약속을 지킬 것이다.

대신 2층에 있는 책 중 에리스에겐 아무런 가치가 없는 별 잡스러운 물건을 가져오겠지. 그렇게 해도 약속 위반은 아니니까.

그렇다면 성실하게 대답하는 편이 좋은 보상을 받기에 유리한 행동이겠지만….

“으음.”

에리스는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책에 있는 특정 내용을 써넣으라고 하는 거라면 쉽다. 기억 속에 있는 정보를 끄집어내면 될 뿐인 일이니까.

하지만 이런 식으로 본인의 감상을 말하는 건 꽤 껄끄러운 일이었다. 기준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지, 이게 다 마도서를 위한 일이야.’

실력 향상의 기회가 코앞에 있는데 다소의 부끄러움 따위가 대수겠는가.

에리스는 애써 태연을 가장하며 입을 열었다.

“저는 주인공이 무척이나 어리석다고 생각해요.”

“호오, 어째서입니까?”

“만약 거기서 주인공이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오우거는 마을로 향했을 테고, 틀림없이 어마어마한 인명피해가 발생했을 거예요. 노인 두 명의 목숨과 마을 전체의 목숨은 비교할 것도 없죠. 주인공은 옳은 일을 했어요.”

“그것뿐이라면 그는 어리석은 게 아니라 현명한 사람이 됩니다만?”

“아뇨, 어리석어요.”

에리스는 단언했다.

“그토록 괴로워하면서도 주인공은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아요. 노부부의 유족에게 찾아가 보상을 하기는커녕, 혹여 자신이 저지른 일이 드러날까 두려워 노부부의 무덤조차 만들지 않죠. 그런 주제에 매일 밤 잠드는 게 두려워 술로 억지로 잠을 청하고요. 이래서야 이도 저도 아니잖아요?”

자신이 한 일이 올바르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당당히 가슴을 펴고 살아야 한다.

자신이 한 일이 잘못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죄를 갚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것도 저것도 하지 못하고 애매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어리석음이라며, 에리스는 혹평했다.

“과연.”

사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리스가 물었다.

“혹시 당신도 저와 같은 생각인가요?”

“아뇨, 전혀 다릅니다. 저는 오히려 주인공이 그런 짓을 저지르고도 자기가 영웅이라며 떳떳해 했다면 혐오를 품었을 터라. 하지만 그래서 더 좋군요. 서로 다른 의견을 비교해 보는 건 즐거운 일입니다.”

사서의 표정은 변함없이 무덤덤했지만, 그 눈매는 평소보다 살짝 부드러워진 듯했다.

“이번 보상과 다음 문제용 서적입니다.”

그리 말하며, 사서는 다섯 권의 책을 꺼내 에리스에게 내밀었다.

이론서 2권과 그 해례본. 마지막으로 소설 하나였다.

“뭔가 많네요?”

“진지하게 임하셨으니 그에 따른 보상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흥. 알고 있으니 다행이네요.”

코웃음을 치면서도, 에리스는 뿌듯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스승이 내준 어려운 과제를 무사히 완수하고 칭찬을 받았을 때 느낀 것과 비슷한 충족감이었다.

‘…아니, 아니지. 정신 차려. 애초에 이 상황 자체가 이상한 거라고!’

저도 모르게 길들여질 뻔한 상황에 기겁하며, 에리스는 사서를 째릿하고 노려보았다.

같은 강습소의 학생들이었더라면 자기가 뭐 잘못한 게 있나 싶어 덜덜 떨만한 눈초리였다.

“아, 덧붙여서 소설은 마지막에 읽는 걸 추천합니다. 그편이 공부하시는 데 방해가 덜 될 테니까요.”

다만 사서에게는 눈곱만큼도 통하지 않았다.

뻔뻔하고 맨들맨들한 저 얼굴에 한 방 먹여주고 싶다는 충동을 참으며, 에리스는 인사말조차 없이 도서관을 떠나갔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다음 방문 기대하겠습니다.”라는 인사가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

그날 밤.

“…책에 하자가 있으면 따지기라도 할 텐데.”

넘겨받은 책들을 확인하며, 에리스는 푸념 아닌 푸념을 내뱉었다.

이론서는 수준 낮은 강습소에서는 감히 다루지 못할 만큼 고차원적인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고, 해례본은 그 어렵디어려운 내용을 알기 쉽게 분해한 뒤 독자의 머릿속에 쏙쏙 집어넣어 주고 있었다.

빻지 않은 밀을 그냥 씹어서 먹는 것과 제분 작업을 거쳐 케이크로 만든 뒤 먹는 것의 차이라고 하면 이해하기 쉬울까.

스승과 함께 살던 시절 진짜 마도서들도 몇 권인가 본 적 있는 에리스였지만, 솔직히 어중간한 마도서보단 이 이론서 해례본의 가치가 더 높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마음 같아선 곧장 이론서에 파고들고 싶은 에리스였지만, 그녀는 일단 읽고 있던 책들을 옆으로 미뤄둔 뒤 구석에 있던 소설 한 권을 손에 쥐었다.

“공부에 방해가 될 테니 마지막에 읽는 게 좋을 거라고? 흥.”

참으로 싸구려 같은 도발이라며, 에리스는 비웃었다.

앞선 대여 때도 소설을 가장 먼저 읽은 에리스였지만, 그때도 첫날 수면 시간이 살짝 감소했을 뿐 다른 이론서를 탐독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그래 봐야 소설 한 권을 읽고 일희일비하거나 다른 행동에 영향이 갈 리가 없지 않은가.

에리스는 자신만만한 태도로 책의 첫 페이지를 열었다.

사냥모자와 코트, 파이프 담배가 인상적인 탐정 주인공.

그의 옆에서 감초처럼 함께하는 조수.

악의 카리스마를 내뿜는 라이벌.

주인공은 그대로 라이벌과 함께 폭포에 떨어져─

[─다음 권에서 계속.]

“…….”

에리스는 침묵했다.

아주, 아주 긴 침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