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dd 3 AI agents (writing, revision, story-continuity specialists) - Add 4 slash commands (rovel.create, write, complete, seed) - Add novel creation/writing rules - Add Novelpia reference data (115 works, 3328 chapters) - Add CLAUDE.md and README.md 🤖 Generated with [Claude Code](https://claude.com/claude-code) Co-Authored-By: Claude Opus 4.5 <noreply@anthropic.com>
16 KiB
#81화 사서 에른스트(Ernst) (2) - 열리지 않는 관의 사서
알드리지의 동쪽.
열리지 않는 관으로 걸어가면서도, 에리스는 의문을 품었다.
‘그런데, 왜 상회에서 도서관 같은 걸 만든 거지?’
적어도 에리스가 생각하기에, 도서관이란 돈을 벌기에 적합한 시설이 아니었다.
일단 책 자체가 비싼 물건이니 그걸 구매해서 가져다 놓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준비금이 필요한데, 정작 이를 회수할 방법은 도서관 출입 자체에 입장료를 받는 것 외에는 마땅치 않다.
책을 빌려주고 대여료를 받는다?
‘귀족들은 책을 사면 샀지 저렴하게 빌려보는 건 궁상스럽다고 꺼릴 테고, 어지간한 평민들은 신용이 없지. 꼭 본인이 악의를 품고 훔쳐 가는 게 아니더라도, 다른 이들에게 도둑맞거나 책을 훼손했을 때 손해 배상을 제대로 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으니까.’
고로 어지간한 국가의 ‘도서관’이란 교육 기관의 부속 시설로 딸려 있거나, 혹은 귀족이나 부호가 자신의 개인 서재를 민간에 개방하는 정도가 전부였다.
적어도 금전적 이익을 최대 가치로 삼는 상회에서 손을 뻗을 분야는 아니라는 뜻.
그나마 합리적인 이유를 떠올려 본다면, 알드리지 강습소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장기적인 이익 확보를 노렸다는 가설 정도였다.
어쨌든 국가 정책이 바뀌지 않는 한 강습소에는 계속해서 새로운 학생이 올 테고, 개중 일부는 지금 에리스가 그러하듯 도서관으로 발을 옮길 테니까.
뚜벅.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목적지에 도달한 에리스는 도서관의 외관을 살펴보았다.
적어도 겉모습은 크게 바뀐 것이 없다.
상회에서 모처럼 재개장을 했으면 외관도 화려하게 꾸미고 호객 행위도 해야 할 것 같은데, 건물은 놀라우리만큼 고요에 감싸여 있었다.
에리스는 반신반의하면서도 조심스레 입구로 손을 뻗었고, 도서관의 정문은 ‘열리지 않는 관’이라는 별명이 무색하게도 손쉽게 열렸다.
그리고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에리스는 무심코 탄성을 자아냈다.
에리스가 보았던 책과 관련된 공간 중 가장 거대하고 내용이 알찼던 것은 스승과 함께 방문한 적이 있던 라벨로시아 왕실 서고였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책의 향연은, 그 왕실 서고와 비교해도 그리 밀리지 않았다.
아니, 왕실 특유의 화려한 장식이나 웅장함이 없을 뿐, 순수하게 장서량만 따지면 오히려 이쪽이 더 압도하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에리스는 눈을 빛냈다.
단순한 시간 때우기만 되어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며 찾아왔지만, 이 정도 규모라면 희소한 마법 관련 서적 역시 있을지 몰랐다.
그대로 서고 쪽으로 다가가려 했던 에리스는 아직 입장료를 내지 않았다는 걸 떠올리고는 발을 멈췄다.
고개를 돌려 카운터 쪽을 바라보자, 한 남자가 의자에 앉은 채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곱슬거리는 금색 머리와 안경. 최소한의 예의라는 듯이 입은, 하지만 그다지 각이 잡힌 기색은 없는 정장.
날카로운 턱선을 지닌 얼굴은 미남이라고 평가하기에 부족함이 없지만, 그 눈매는 지나치게 차가워 함부로 말을 걸기를 주저하게 만든다.
아무리 생각해도 많은 사람과 얼굴을 맞대야 하는 접수처에 어울리는 외모는 아니었다.
심약한 이는 감히 질문조차 건네지 못한 채, 슬그머니 눈치를 보고 돌아가 버릴 터.
허나, 차라리 드세면 드셌지 심약한 것과는 거리가 먼 에리스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이야기였다.
그녀는 당당한 태도로 남자에게 다가가 입을 열었다.
“도서관을 이용하고 싶은데요.”
흘끗.
책을 보고 있던 남자의 눈동자가 에리스를 향했고, 에리스는 저도 몰래 물러날 뻔했던 다리를 애써 억눌렀다.
화살을 시선으로 바꾼다면 이런 느낌일까.
‘응시한다’보다는 ‘꿰뚫는다’라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날카로운 눈매였다.
“찾으시는 책이 있으십니까?”
정중하면서도 사무적인 말투.
일개 도서관의 사서를 상대로 일순간이나마 기가 눌렸다는 사실을 부정하듯, 에리스는 조금 날이 선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선은 천천히 둘러보고 싶은데요. 이용료는 얼마죠?”
“중부 동화 하나입니다.”
“…한 시간 기준인가요?”
“아뇨, 한번 들어오시면 나갈 때까지 추가 요금 없이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에리스는 말문을 잃었다.
터무니없는 바가지여서?
아니, 그 반대였다.
‘이만한 책을 준비해 놓고, 가격이 겨우 그거라고?’
저기 대륙 동부에서 대량의 종이가 유입된 이후로 전보다는 많이 나아졌지만, 그런데도 책은 여전히 비싼 물건이다.
헌데 이곳에서 받는 대여료는 알드리지의 물가 기준이라면 작은 빵 하나 정도의 가격이었다.
먹으면 사라지는 빵과 달리 책은 몇 번이나 다시 읽을 수 있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에리스가 보기엔 거의 자선활동에 가까웠다.
묘한 찝찝함을 느낀 그녀였지만, 아무튼 도서관 쪽에서 그렇게 받겠다는데 손님 입장에서 뭐라 하기도 애매하다.
에리스는 사람들이 흔히 애용하는 천 주머니보다 살짝 더 고급스러운 가죽 지갑에서 동화 하나를 꺼내 내밀었고, 이를 받아 든 사서는 담담히 설명을 이어 나갔다.
“도서관에서는 소란을 자제해주시고, 취식 역시 금지입니다. 도서관 내의 책을 외부로 반출해서는 안 되고, 읽은 책은 서고에 바로 꽂지 마시고 여기 카운터에 가져다주십시오. 찾으시는 책이 있거나, 별도로 질문하실 게 있다면 말씀하시고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사서는 다시 고개를 숙여 책 읽기에 몰두했다.
그 무덤덤한 태도에, 에리스는 헛웃음을 흘렸다.
수려한 외모, 뛰어난 실력, 대마법사의 제자라는 후광.
언제나 과하리만큼 많은 관심을 받아왔던 에리스에게, 사서의 무정하고 무심한 태도는 어떤 의미로 신선하기까지 했다.
뭐, 에리스로서도 나쁜 상황은 아니었다.
책을 보는 내내 옆에서 흘끗거리며 시선을 향하거나 묘한 수작이라도 부리려 한다면 그거야말로 피곤한 일이었을 테니까.
망설임 없이 카운터에서 눈을 돌린 에리스는, 도서관 구석에서부터 어떤 책이 있는지 쭉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뭔가 정리가 엄청 잘 되어 있네?’
역사, 기술, 문학, 예술, 자연, 언어, 사회, 철학, 종교, 총류.
여러 책들이 각자 테마에 맞춰 딱딱 분류되어 있었고, 또 같은 테마 내에서도 대륙 중부언어를 기반으로 순서가 매겨져 원하는 책을 찾기 수월하게 되어 있었다.
라벨로시아 왕실 서고조차 먼지가 쌓이지 않게, 책이 습기에 망가지지 않게 주의했을 뿐 이 정도로 철저한 분류 작업을 해놓지는 않았다.
낭비를 싫어하는 에리스에겐 무척 마음에 드는 합리성이었다.
‘그래도 뭐, 역시 마법 관련 테마는 없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평범한 책 한 권이 평민이라도 무리하면 어떻게든 손에 넣을 수 있는 물건이라면, 마법 관련 서적은 귀족이라도 쉽게 손에 넣을 수 없는 물건이니까.
이 넓은 도서관에 한두 권만 있어도 당첨이라고 할 만한데, 아예 테마를 따로 나눌 정도로 많은 책이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렇게 도서관을 쭈욱 살펴보던 에리스는, 이내 무언가를 확인하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도서관 구석.
구조적으로 봤을 때 아마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이 있을 공간이, 두꺼운 문으로 단단히 봉인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직원들의 휴게 공간이든, 창고든, 아니면 무언가 다른 용도로 쓰는 공간이든 간에, 가게 내에 손님이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이 있는 건 흔한 일이니까.
하지만 에리스는 그 문 앞을 쉽게 지나칠 수 없었다.
문 너머.
정확히는 2층에서 정체 모를 마력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가.
“저기, 잠깐만요. 이 위는 뭐죠? 혹시 위쪽에도 책이 있나요?”
에리스의 질문에, 사서가 다시 고개를 들어 답했다.
“예, 책이 있습니다.”
“그러면 올라가고 싶은데요.”
“안 됩니다.”
망설임조차 없는 즉답에, 에리스의 눈이 찌푸려졌다.
“어째서죠?”
“그곳에 있는 건 아직 미분류 상태의 마도서들이니까요. 실력이 부족한 이에게 함부로 공개했다가 사고가 나지 않도록, 확인 작업을 거친 후에 여기 1층에 배치할 예정입니다.”
마도서라는 말에 에리스의 눈빛이 한층 더 예리해졌다.
기척만으로도 어렴풋이 짐작은 했지만, 사서의 입으로 확언을 받으니 더욱 가만히 있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실력이 부족한 이에게 공개할 수 없는 거라면, 저는 상관없어요. 알드리지 강습소의 학생이니까요.”
알드리지 강습소는 평민과 귀족 모두를 위한 배움터다.
하지만, 강습소 인근 거리에서 거들먹거리며 놀러 다니는 건 대부분 귀족 학생이기 때문에, 민간에서는 알드리지 강습소에 다닌다=귀족이라는 인상이 강하다.
평범한 사서라면 이 말만으로도 태도를 바꾸기에 충분─
“그렇습니까? 하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겁니다.”
─하지 않았다.
에리스의 가면에 금이 갔다.
그녀는 무심코 험해지려는 표정을 애써 조절하며 말을 이었다.
“브라운 상회에서 당신의 상사가 뭐라고 할까 봐 걱정되는 건가요? 그렇다면 상사에게 연락해 주세요. 제가 직접 담판을 지을 테니까요. 당신이 책임을 져야 할 일은 없을 거예요.”
“이곳이 브라운 상회에서 운영하는 도서관인 건 맞습니다만, 도서관 내부의 일에 대해서는 저에게 전권이 주어져 있습니다. 고로, 말씀하신 행동은 실행해 봐야 별 의미가 없을 겁니다.”
내가 누구의 제자인 줄 알고 이러는 거냐고 따질뻔한 에리스였지만, 목구멍까지 솟구친 말을 어떻게든 견뎌냈다.
상대가 알아서 모시는 거면 몰라도, 겨우 이런 일에 팔아넘길 만큼 대마법사 델피나리스라는 이름은 값싼 것이 아니었으니까.
“당신에게 이 도서관의 전권이 있다면, 도서관 내의 책을 어떻게 다룰지도 당신의 마음대로라는 거 아닌가요? 저를 위로 올라가게 해준다면 약간의 ‘성의 표시’는 잊지 않죠.”
에리스는 아까 꺼냈던 지갑을 다시 한번 꺼내, 이번에는 아예 통째로 카운터에 내려놓았다.
사서는 그 지갑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이내 손을 뻗어 지갑을 움켜쥐었다.
그러면 그렇지, 하고 에리스는 코웃음을 쳤다.
사서가 손에 쥔 지갑을 그대로 되돌려 주기 전까지는 그랬다.
“…액수가 부족하다 이건가요?”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하지만 뭐, 손님의 의지가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죠, 라며 사서가 말을 이었다.
“하루에 한 번. 손님께서 제가 제출한 문제를 맞히신다면 2층에서 가져온 책 한 권을 건네드리죠. 본래 이 도서관의 책은 반출 불가지만, 내기에 승리해서 얻은 책은 다시 반납만 하신다면 바깥으로 가져가셔도 뭐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
에리스는 못마땅한 얼굴로 사서를 응시했다.
그리 마음에 드는 조건은 아니다.
하지만 여기서 힘으로 사서를 위협한 뒤 2층에 무리하게 침입할 만큼 그녀는 야만인이 아니었다.
“좋아요. 단, 엉터리 같은 문제로 저를 기만하는 거라면, 그땐 각오해야 할 거예요.”
“알겠습니다. 가급적 해답이 명쾌하게 떨어지는 문제로 준비해 보겠습니다.”
사서는 종이 하나를 꺼내 그 위에 펜으로 무언가를 끄적이더니, 이내 에리스에게 내밀었다.
에리스는 그걸 심드렁한 얼굴로 넘겨받았다.
‘이 문장을 적었을 때 작가의 심정을 대답하시오’처럼 대답을 이리저리 바꿀 수 있는 걸 문제나, ‘제가 오늘 아침 먹은 아침 메뉴는?’같이 상식 범위에서는 알아맞힐 도리가 없는 내용을 문제랍시고 낸다면 곧바로 항의할 생각이었다.
[Q. 아래에 그려진 두 마법진은 세부 사항은 다르나 동일한 효과를 지니고 있다. 마법진이 가진 효과와 서로의 차이점을 기술하시오.]
에리스의 반응은 다채로웠다.
처음에는 이게 무슨 헛짓거리냐고 따지려는 듯이 눈꼬리를 치켜올렸고, 다음에는 ‘응? 그럴듯한데?’라고 생각하는 듯 문제를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으며, 마지막에는 입을 딱 다물고 두 개의 마법진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러기를 약 5분 정도.
“…발열 마법진. A는 마력을 연료 삼아 불꽃을 생성하고, B는 전격으로 바꾼 마력을 물질에 통과시켜 그 저항으로 열을 발생시킨다. 마력 효율 면에서는 A가 우수하지만, 섬세한 온도제어와 안정성 면에서는 B가 뛰어나다. 맞나요?”
“정답입니다.”
사서의 선언에, 에리스는 뿌듯함과 의문을 동시에 느꼈다.
마법진이란 선의 각도 하나, 상형 문자의 종류와 배치 하나만 바뀌어도 효과가 극과 극으로 변할 만큼 섬세한 기술이다.
헌데, 방금 사서가 건네준 종이에 그려진 마법진은 적절한 촉매만 있다면 그대로 발동이 가능할 정도로 완벽했다.
그런 걸, 일개 사서가 그려냈다? 그것도 숨 한번 돌릴 만큼 짧은 시간에?
“당신, 정체가 뭐죠?”
“사서 에른스트라고 합니다.”
“그런 걸 묻는 게 아니에요.”
“그리 말씀하셔도, 이곳에서 저는 그저 사서일 뿐인 터라.”
사서는 매정한 태도로 그리 답한 뒤, 본인이 읽고 있던, 아니, 정확히는 바로 방금 완독한 책을 에리스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죠?”
“『조난을 당해 모든 선원이 사망하고 자신은 크론샤 대륙 다키렌 강 가까운 무인도 해변에서 28년 동안 홀로 살다 마침내 기적적으로 해적선에 구출된 아리안드 출신 뱃사람 로랜드 겜비슨이 그려낸 자신의 생애와 기이하고도 놀라운 모험 이야기』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엉터리 같은 책을 왜 저한테 주냐고요.”
“2층에서 가져온 책을 원하셨잖습니까?”
에리스는 순간 머리가 멍해지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그리고, 이내 분노했다.
“그,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저는 2층에 있는 마도서를 원한 거라고요!”
“그렇게 말씀하셔도, 애초에 내기에 ‘마도서’라는 조건은 단어 하나 들어가 있지 않았습니다만.”
사서는 무덤덤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새로운 책을 원하신다면 내일 찾아오시지요. 아, 덧붙여 ‘다음 문제’는 지금 들고 계신 그 책에서 낼 예정입니다.”
에리스가 ‘엉터리 같은 책’이라고 말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짓궂음이 가득 담긴 발언이었다.
그런 주제에 얼굴은 변함없이 차가운 무표정인게 더할 나위 없이 언밸런스했다.
그제야, 에리스는 어떤 깨달음을 얻었다.
‘이 남자, 진짜, 정말, 싫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