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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화 괴도 도팽(Dauphin) (8) - 법률 놀이
와야 할 충격이 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달리아는 조심스레 감았던 눈을 다시 떴다.
그런 그녀의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달리아를 내려찍으려 했던 칼날을 막아선 한 남자의 모습이었다.
“이만 멈추시지요. 억울하고 분통하신 그 마음을 어찌 이해한다고 말하겠습니까마는, 그 책임을 이 아가씨에게 돌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 익! 놔! 이거 안 놔!?”
노인은 남자에게 붙들린 손목을 떼어내기 위해 거의 온몸으로 발버둥을 치다시피 했지만, 그 성과는 팔을 조금 흔들리게 하는 정도가 전부였다.
노인은 방법을 바꿔, 남자에게 악을 써대기 시작했다.
“네가 뭔데! 대체 뭘 안다고 끼어들어!! 이년만 아니었으면 됐어! 이년만 아니면 그 개새끼는 벌을 받았다고! 그걸 막아낸 이년의 잘못이 아니면 누구 잘못인데!!”
“어르신, 방금 본인 입으로 말씀하셨으면서 어찌 남에게 답을 구하십니까.”
“뭐?”
노인의 말에, 남자는 태연히 답했다.
“누가 나쁘냐고 묻는다면, 그야 물론 말씀하신 ‘그 개새끼’, 그러니까 세무관이겠지요.”
주변 사람들이 헉, 하고 숨을 삼켰다.
악에 받친 노파가 미쳐 날뛰며 소리치는 것과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남자가 너무나도 평온한 말투로, 지극히 당연하다는 듯이 단언하는 것은, 설령 같은 내용이라도 그 충격이 전혀 달랐다.
사람들이 저도 몰래 주변을 살피는 와중에도, 남자는 태연히 말을 이었다.
“두 번째로 나쁜 게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겠군요. 영지의 최고 책임자인 영주라고 볼 수도 있겠고, 경비대의 대표인 중대장이나 세무관을 무죄로 판결한 법무관도 후보입니다.”
남자는 노파에게 차분한 태도로 설명했다.
“여기 이 경비병 아가씨에게 죄가 전혀 없다고 단언하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앞선 이들보다 그 죄가 많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아, 물론 이 아가씨가 복수의 대상으로서 앞선 이들보다 매력적인 측면이 없는 건 아니겠지요. 앞선 이들은 어르신께서 칼을 들고 달려드는 순간, 아니 처음 물바가지를 뿌린 시점에서 대뜸 어르신을 죽여버리겠지만, 이 아가씨는 그러지 않았거든요. 그런 의미에서는 제법 현명한 선택을 하셨습니다.”
노파의 주름진 눈이 파르르 떨렸다.
애써 외면하고 있던 사실을 지적받고, 노파는 다리에 힘이 풀린 듯이 그 자리에 무너져 내렸다.
전부 타올라 꺼져버린 촛불 같은 노파의 모습에, 주변 사람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혀를 차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 노파의 귓가에, 남자가 조용히 말을 덧붙였다.
“거기에, 도팽은 실패했을지언정 아직 붙잡히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 앞서 말한 ‘진짜 나쁜 놈’들이 차례차례 벌을 받게 될 텐데, 그 모습도 못 보고 떠나시면 너무 아깝지 않겠습니까?”
노파의 눈이 부릅떠졌다.
놓아버리려 했던 삶의 의욕을 다시 찾은 듯한 그 모습에, 남자는 어깨를 으쓱이며 몸을 일으켰다.
그 직후, 이 주변이 어수선한 걸 알아챈 듯한 경비들이 찾아와 소리쳤다.
“거기, 무슨 소란이냐!!”
경비병의 말에, 남자는 묘하게 굽실거리는 듯한 태도로 그들에게 답했다.
“아이고, 저 어르신께서 여기 이 아가씨한테 이것저것 담아서 선물하려고 하셨는데, 마음이 급하셨는지 넘어지셨습니다.”
“흐음.”
경비병의 시선이 주변 여기저기에 굴러다니는 과일들과 바닥에 주저앉아 황망한 얼굴을 하고 있는 노파, 그리고 머리에 토마토를 뒤집어쓴 달리아를 향했다.
평상복 차림인 달리아를 알아보지 못한 경비병이, 그녀에게 질문했다.
“사실인가?”
주변에 있던 점주들은 하나같이 긴장과 함께 침을 삼켰다.
평소 친근한 태도로 그들을 신경 써주던 달리아이지만, 그녀가 경비대의 소대장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이 바뀌진 않는다.
하물며 그냥 소대장도 아니고 요즘 한참 주가를 올리고 있는 그녀가 사실을 고백했다간, 노파는 물론이고 자칫하면 주변에 있던 자기들까지 괜히 엮여 험한 꼴을 볼 수도 있었다.
허나 달리아는 자기 정체를 밝히거나 노파의 행동을 고발하는 대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냥 어르신께서 실수하신 거니까, 신경 안 쓰셔도 괜찮아요.”
“…?”
달리아의 목소리를 들은 경비병은 순간 미묘한 얼굴을 했지만, 평소 경비대 안에서 활동할 때처럼 딱딱한 말투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냥 기분 탓이라 여긴 듯했다.
“으음, 그래 뭐, 별문제 없다면 됐다.”
경비병이 떠나간 후.
볼품없는 모양새가 된 달리아를 향해, 남자가 말했다.
“우선은 좀 씻으셔야 할 것 같으신데, 제가 머무는 곳이 마침 근처에 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함께 가시겠습니까?”
달리아는 잠시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레브루크에서 ‘상류층 구역’이라는 말은 이중적인 의미를 품고 있다.
사회적 지위든 부유함이든, 어쨌든 잘 사는 이들이 모여 사는 구역이라는 의미로 ‘상류층’이지만, 동시에 물리적으로 ‘강의 상류층’에 사는 이들이라는 뜻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레브루크는 도시 중심을 가로지르는 강과 그 강을 잇는 교량들로 이루어진 도시이며, 강의 상류 쪽에는 온갖 종류의 정수나 하수처리 시설이 갖춰져 제 기능을 다하지만, 강의 아래로 내려가면 갈수록 이러한 시설들의 규모와 관리 상태는 형편없는 수준으로 떨어진다.
그래서 레브루크에서 ‘구역’을 구별하는 방법 중 하나가, 그 구역에 있는 건물에 목욕 관련 시설이 설치되어 있는지 아닌지를 보는 것이다.
상류층에서는 몸을 씻는데도 물을 아낌없이 사용하기에 일정 크기 이상의 저택에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관련 시설이 있지만, 하류로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마실 물조차 귀해지는 만큼, 개인이 사는 집에 목욕 시설이 없는 건 물론이고 아예 공용 목욕탕조차 찾기 힘들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남자가 달리아를 데려온 저택은 대충 ‘상류층으로 인정받고 싶었던 중류층의 소망을 구현한 곳’이라고 할만한 장소였다.
전체적인 저택의 크기나 화려함은 상류층에 있는 온갖 호화찬란한 건축물들과 비교하면 작고 초라했지만, 적어도 목욕 시설만큼은 건물 규모에 비하면 조금 과하다 싶을 만큼 제대로 갖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머리 위로 비처럼 물을 뿌려주는 샤워기 같은 건, 솔직히 상류층 구역의 저택 중에도 없는 곳이 적지 않으니까.
-샤아아아아악.
머리 위로 쏟아지는 물을 맞으며, 달리아는 생각했다.
‘…너무 순순히 따라왔나?’
아무리 사정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여자가 남자 집에, 그것도 초대면에 곧장 따라가서 몸을 씻는다는 게 사회 관념적으로 그리 좋은 행동은 아니다.
아마 8소대의 부하들이 사정을 알게 된다면, 경계심이 부족하니 남자는 전부 늑대니 하며 호들갑을 떨어댔겠지.
그런데도 달리아가 남자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은 이유는 명확했다.
신세를 졌다면 적어도 그에 대한 감사 인사 정도는 제대로 하는 게 도리일 테니까.
거기에 뭐, 상대가 정말 그런 속셈이라면 그땐 그때 가서 볼 일이다.
맨손으로도 자기 몸 정도는 충분히 지킬 자신이 있으니까.
저벅.
샤워를 끝내고 옷을 벗어둔 장소까지 간 달리아는, 그 옆자리에 정중하게 개켜진 채로 놓아진 새 옷과 근처의 모래시계를 보고 눈을 껌뻑였다.
「─더러워진 옷을 세탁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건 오히려 친절이 과한 나머지 무례함이 되는 사태인 듯하여 그대로 놓아두었습니다. 옆에 있는 옷은 의류점에서 저렴하게 구한 것이니, 큰 부담 없이 사용해 주시길 바랍니다. 저는 갑작스러운 용무가 생겨 잠시 나갔다 오겠습니다. 모래시계가 다 떨어지기 전에는 돌아올 예정이니, 부디 조금만 기다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번듯하네.”
남녀 관계에 그리 예리하다고는 하기 어려운 달리아였지만, 아무리 그래도 여기서 말한 ‘갑작스러운 용무’라는 게 말 그대로의 뜻이 아니라는 걸 모를 만큼 둔하진 않았다.
초대면인 이성이 같은 집에 있는 상태로 옷을 갈아입거나, 몸을 씻은 직후 물기가 남은 모습 같은 걸 보이는 게 여성 입장에서 껄끄러울 수 있다는 걸 알고, 알아서 자리를 피해준 것일 터.
달리아는 잠시 본래 입고 있던 곳과 새 옷 중에 고민하다가, 결국 새 옷 쪽을 선택했다.
씻고 난 뒤에 다시 더러운 옷을 입는 찝찝함이야 그냥 참고 견디면 된다지만, 이렇게까지 정중한 태도로 호의를 베풀었는데 그걸 무시하는 쪽이 달리아에게는 더 어려운 일이었다.
의복의 크기는 눈대중으로 짐작한 것인지 달리아의 체격보다 조금 더 큰 편이었지만, 입는 게 불편할 정도는 아니었다.
사실 완벽하게 들어맞았다면 오히려 그편이 기분 나빴을지도 모른다.
몸가짐을 정리하고, 저택 중앙에 있는 의자에 앉아 기다리기를 얼마쯤.
모래시계가 다 떨어지는 것과 거의 동시에, 정문이 열리고 남자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달리아를 향해 멋쩍은 듯이 말했다.
“하하, 죄송합니다. 손님을 초대해 놓고 자리를 비우다니 꼴이 말이 아니로군요.”
“굳이 거짓말 안 하셔도 괜찮은데요.”
“거짓말이라니,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군요.”
“그러면 그런 걸로 알겠습니다.”
남자가 맞은편 자리에 앉는 걸 확인한 뒤, 달리아는 고개를 깊게 숙였다.
“방금은 정말 감사했습니다. 도와주지 않으셨다면, 여러모로 큰 곤란을 겪었을 거예요.”
“아뇨, 아뇨, 감사라니요. 그냥 제가 멋대로 참견했을 뿐입니다.”
남자는 손을 내저었다.
“저는 이 도시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만, 그런데도 당신과 8소대의 경비병들이 사람들의 안전과 평온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대가가 지키던 이들로부터의 비난이라는 건 아무리 그래도 납득이 가질 않더군요.”
“…그분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었을 거예요. 불만이나 한탄을 입 밖으로 내는 것조차 조심스러운 상황이었을 테니, 그 고통이 속에서 곪은 거겠죠.”
“그렇다고 해서 현장에서 최선을 다하는 이에게 윗사람들의 잘못까지 뒤집어씌울 이유는 되지 않습니다.”
남자의 단언은 거침이 없었다.
본인의 말에 절대적인 확신을 가졌기에 나올 수 있는 태도였다.
“그 어르신과 가족에게 상처를 주고 죽음으로 몰고 간 죗값은 당사자들이 직접 치러야 합니다. 당신이 대신 치를 것이 아니지요.”
그것은 달리아를 변호하는 말이었지만, 정작 달리아는 거기에 동의를 표할 수 없었다.
그녀의 표정이 조금 더 엄격해졌다.
“말씀은 감사합니다. 하지만 발언은 조금 주의하시는 게 좋아요. 도시의 귀족이나 관료들을 비판하고 비난하는 말은 그 자체로 모욕죄로 잡혀들어갈 수 있습니다.”
“호오, 이 도시의 법령에 그렇게 적혀 있습니까?”
“정확히는 비르카 왕국의 법입니다.”
“알겠습니다, 신경 써보도록 하지요.”
의외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남자의 모습에, 달리아는 어깨의 힘을 조금 느슨하게 했다.
하지만, 그건 너무 이른 행동이었다.
“그러면 몇 가지 질문해도 괜찮겠습니까?”
“제가 답할 수 있는 거라면 대답하겠습니다.”
“어르신의 딸을 욕보이고 죽음으로 몰고 간 죄는, 비르카 왕국의 법률상 어떻게 처리됩니까?”
“…….”
달리아의 눈가에 한순간 그늘이 졌다.
“귀족이 성실하게 세금을 납부한 영민을 살해할 경우, 3년의 징역. 혹은 왕국 금화 24개분의 벌금을 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세무관은 3년간 감옥에 들어가거나, 혹은 벌금을 냈습니까?”
“…어르신의 따님께서 세무관님께 변을 당했다는 증거는 확보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해당 사건은 단순 자살로 처리되었습니다.”
“과연.”
남자의 반응은 담백했다.
이미 예상했다는 듯한 그 모습에, 달리아 쪽이 수치심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면 말입니다, 만약 정말로 증거가 나왔다고 하면, 그 세무관은 벌금형을 택했겠지요? 아무리 그래도 감옥에 가는 것보단 그게 나을 테니까요.”
달리아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세무관이라면 그렇게 했을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그 벌금이라는 것 중에, 피해자나 그 유족에게 돌아가는 건 있습니까? 아니, 꼭 벌금이 아니더라도 유족에게 최소한의 보상은 이루어집니까? 영지 차원에서 위로금이 전해진다든가, 혹은 최소한 말뿐인 사과라도 이루어진다든가.”
“…영지에 따라서는 영주나 영주 대리의 개인 판단으로 그러한 은사가 주어지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적어도 법률상으로는 그런 내용이 없다는 거로군요.”
“……네.”
쥐어 짜내는 것 같은 목소리로, 달리아는 긍정했다.
남자는 흐음, 하고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세무관은 사르노스 백작 놈… 어음, 백작‘님’의 자제분이셨지요. 법률상으로 정해진 ‘벌금’이라는 건 그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한테 가는 걸 테고요.”
“네.”
“즉, 사르노스 백작의 자식이 사람을 죽였는데, 그 죽은 당사자나 유족에게는 어떤 보상도 이루어지지 않고, 가해자는 자기 돈을 부모한테 바치기만 하면 그걸로 사건은 종결. 맞습니까?”
“……. ……네.”
눈을 질끈 감고, 고해라도 하듯이 대답을 이어가는 달리아.
다음에는 대체 무슨 질문이 나올까 두려워하면서도 차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거나 화를 내지도 못하던 그녀의 귀에,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면 우리, 한번 놀이를 해봅시다.”
놀이.
그 생뚱맞은 단어에, 달리아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만약 당신이라면 어떤 식으로 법을 바꿀 건지, 망상이든 잡담이든 상관없으니 한번 떠들어 보잔 말입니다.”
“그게 대체 무슨…?”
지극히 평범한 외모를 지닌 남자는, 어딘지 모르게 악동 같은, 그녀의 기억 속 누군가를 떠오르게 하는 눈빛으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첫 번째 법률을 이렇게 정하겠습니다. 『남의 눈에서 눈물 나오게 만든 후레자식들은 정상참작이고 나발이고 전부 사형』!”
“뭐 이 새끼야?”
우울해서 죽을 것 같던 모습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달리아의 눈에 쌍심지가 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