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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4 21:31:5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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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화 황태자 알론드(Alondre) (4) - 좋은 취미 생활을 위해서는 적절한 노력이 필요하다

『얌전하다』

  1. 형용사 성품이나 태도가 침착하고 단정하다.

  2. 형용사 모양이 단정하고 점잖다.

  3. 형용사 일하는 모양이 꼼꼼하고 정성을 들인 데가 있다.

[4. 황태자와는 인연이 없는 단어임. 이거 시험에 나옴.]

루시드라의 머릿속.

악마의 힘을 부여받은 사전이 그 표지에서 뻗어 나온 팔을 기괴하게 꺾어, 자기 페이지 한 부분을 집요하게 강조하는 듯한 이미지가 스쳐 지나갔다.

‘뭐지, 환영 주문인가?

루시드라가 그렇게 현실도피를 하고 있을 무렵, 황태자는 매우 진지한 얼굴로 개소리를 지껄여 대기 시작했다.

“모험가 베른의 삶은 훌륭했지. 거대한 재앙의 씨앗이 될 몬스터를 토벌하고, 사악한 리치의 음모를 분쇄하는 여정은 실로 내가 꿈꾸던 모험가의 표본과 같았네.”

“하인 세드릭의 삶도 나쁘지 않았네. 늘 모셔지기만 하다가 남을 모셔보는 건 제법 색다른 경험이었지. 내 취향대로 차를 끓이고, 내가 생각한 방식으로 청소를 하고, 좀 모자라고 미숙한 주인을 모셔보는 것도 즐거웠네.”

“허나, 이 또한 슬픈 천성이라고 해야 할지, 나는 특정 조직에 속하면 그 조직의 규율에 얽매이는 경향이 있어서 말이야. 그런 의미로 앞선 둘은 지나치게 얌전하고 상식적으로만 행동했던 것 같네.”

루시드라는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뭔가 해야 할 말, 하고 싶은 말이 차고 넘치도록 많은데 어느 것도 언어로써 형용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대마법사의 침묵 주문이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싶어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 또한 과거에 이름을 떨치던 대악마.

루시드라는 황태자의 강대한 대마법을 저항해 낸 뒤,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그래서, 다음에는 세계를 파괴하려고?”

“음? 허어, 역시 악마라서 그런지 발상이 사악하구먼. 어찌 취미 생활로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있겠나.”

“존재 자체가 사악한 인간이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자네가 그리 생각한다면, 자네 안에서는 그런 거겠지. 나는 생각의 자유를 인정하니, 그것까지 말리지는 않겠네.”

“#(^)^&^#@^@#!?!!”

머리를 엉클어트리며 절규하는 대악마의 절규를 배경음악 삼아, 황태자는 조용히 잔을 들어 홍차의 향을 즐겼다.

클라우디아의 취향에 맞춰 단맛을 강조하고 온도를 낮춘 홍차도 나쁘진 않지만, 섣불리 입에 대면 데일 정도로 뜨거운 홍차 쪽이 그의 취향에는 더욱 부합했다.

“아무튼, 그런 의미에서 다음 분신은 특정 조직에 소속되지 않은 독불장군 컨셉으로 가볼 예정이라네. ‘선’이라는 방침 그 자체는 유지하되, 세세한 방법은 그때그때 떠오르는 대로 움직이는 유쾌범! 음, 실로 즐거울 것 같군. 가끔은 절제와 자제라는 단어를 내려놓고 날뛰는 것도 스트레스 해소에 좋은 법이지.”

생각만 해도 흡족하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리는 황태자를, 퀭한 눈으로 바라보던 루시드라는 이내 어깨에서 힘을 뺐다.

“…그래, 어차피 피해 보는 건 내가 아닌데 뭐 어때. 안 그래도 미치광이인 녀석이 그나마 남은 고삐까지 풀어제끼고 날뛰면, 거기에 고통받을 애들 구경하는 재미는 있겠네.”

“구경이라니, 아마 자네에게 그럴 여유는 없을 것 같네만?”

“뭐?”

의아해하는 루시드라를 향해, 황태자는 지극히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졌잖는가, 내기.”

“…….”

루시드라의 눈이 데구르르 굴러갔다.

그녀의 눈꼬리가 급격하게 휘어지더니, 이내 그 얼굴이 요염하게 웃는 표정으로 변했다.

뭇 사내들의 애간장을 태울만한 극상의 미소였다.

“후후후, 그래,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어. 자, 당신에게 극상의 쾌락을 선사해 줄게. 우선 그 답답한 옷부터 벗고-”

“지금부터 자네는 내 새로운 신분 제작을 위한 기반을 만들어야 한다네.”

대악마를 돌보듯이 하며 황태자는 사뿐하게 본인의 용건을 말했다.

야릇한 분위기로 얼렁뚱땅 내기의 대가를 소모시키려 했던 계획이 망가지자, 루시드라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시, 신분 제작을 위한 기반이라니, 그게 뭔데?”

“모험가는 애초에 사람의 신분을 그리 신경 쓰지 않는 직종이니 맨몸으로도 업계에 뛰어들 수 있었지. 귀족 가문의 하인 역시 상대가 워낙 특이한 상황이라서 큰 배경 없이 일단 들어가는 게 가능했어. 허나, 매번 이런 요행을 바랄 수는 없는 일 아니겠는가?”

세계에는 다양한 직종이 존재하지만, 개중 순수하게 ‘능력’만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은 제법 제한된다.

어떤 부모 사이에서 태어나, 어떤 땅에서 어떻게 자라난 누군가.

이러한 프로필이 없으면, 애초에 발을 들여놓기조차 어려운 업계 역시 적지 않게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니 자네가 그 기반을 만들어줘야겠네.”

“자, 잠깐 기다려! 너 황태자잖아!! 그럴듯한 신분이 필요한 거면 그냥 밑에 애들 시켜서 만들면 그만이잖아! 왜 날 시키려는 건데!”

무려 대륙 최강국가인 제국이다.

마음만 먹으면 타국에 적당한 신분 하나 만들어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터.

편하고 간단한 방법을 놔두고 왜 굳이 자기를 부려 먹는단 말인가?

그런 루시드라의 항의를, 황태자는 간단히 받아넘겼다.

“그야 그렇게 황태자로서의 권력을 써버리면, 내 취미 생활이 다른 이들에게도 다 들켜버리지 않나.”

“이미 다른 애들한테 까발렸으면서 뭘 새삼스럽게 그래!?”

“블랑카에게는 ‘분신 마법이고 본체는 따로 있다’라고만 말했고, 클라우디아의 경우 내가 밝힌 게 아니고 그녀가 직접 알아낸 걸세. 엄연히 다르지.”

덧붙여 블랑카는 애초에 분신이라는 걸 믿지 않았고, 클라우디아 역시 분신이라는 사실은 몰랐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뭣보다 가족이나 지인들에게 감시당하면서 하는 취미 생활이라니, 악몽도 그런 악몽이 또 따로 없군. 최악의 경우, 아예 ‘기반 만들기’만을 위해서 분신 몇 개를 소모할 각오까지 하고 있었지만… 음, 마침 자네가 내기를 제안해 줘서 참 다행이야.”

악마라는 건 무릇 인간에게 ‘소원을 들어주마’라고 유혹하며 타락으로 이끄는 존재.

달리 말하자면 세상에 악마만큼 다방면으로 부려 먹을 수 있는 일꾼은 흔하지 않다.

하물며 그게 ‘대악마’라는 칭호를 지닌 악마라면, 일꾼 중에서도 특상품이라 할 수 있겠지.

“내, 내가 아직 힘 회복이 좀 덜 돼서.”

“마력이 필요한가? 내 직접 공급해 주지. 어차피 분신으로 소모하는 정도는 그리 많은 것도 아니거든.”

“아직 내가 현대 세계를 잘 몰라서, 이것저것 조사하고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릴 수도….”

“당장 내일 준비를 끝마치라고 할 만큼 나도 자비가 없지는 않네. 어차피 다음 D까지는 특별히 기반이 없어도 가능할 예정이고, 자네의 일 처리가 생각보다 느릿느릿하다면 E까지도 기다려 줄 수 있네. 그다음에도 결과를 못 내면 그건 계약 위반으로 보겠지만.”

“너, 너 말이야. 세상에 악마를 막 풀어주고 그래도 돼? 내가 막 세상을 타락으로 이끌고 깽판치고 그러면 어쩌려고?”

“흠.”

루시드라의 마지막 저항에, 황태자는 잠시 손을 입가로 가린 뒤 이내 툭 하고 내뱉었다.

“안심하게. 내 그래도 한때 취미 생활을 함께 즐긴 친우로서, 가는 길은 깔끔하게 보내주겠네.”

본인이 그럴 수 있다는 사실에, 한 치의 의심도 없는 선언이었다.

더욱 슬픈 것은, 루시드라 본인이 생각해도 이 인간이라면 실제로 가능할 것 같다는 점이었다.

“……하면 될 거 아니야, 하면!! 이 피도 눈물도 없는 황태자 새끼야!!”

루시드라의 눈가에 눈물방울이 맺혔다.

최근 눈물샘이 많이 약해진 악마였다.


황태자의 협력을 얻은 루시드라가 눈물과 함께 궁전 바깥으로 떠나간 뒤.

황태자는 황태자대로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비록 분신의 상태가 많이 안 좋았다고 해도, 클라우디아, 아니 후작의 혈마수에게 정체를 간파당한 건 내 미숙함이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군.”

그는 앞으로도 많은 분신을 만들어 낼 생각이었고, 개중에는 이번처럼 무리한 운용으로 인해 몸 상태가 나빠지는 이들도 나올 터였다.

그때마다 상대에게 정체를 간파당한다면 그토록 흥이 깨지는 일도 달리 없을 터.

“어쩔 수 없군. 부작용이 심하니 가급적 쓰지 않으려 했건만.”

황태자는 작게 한탄한 뒤, 이내 시종을 불러 명했다.

“서기관을 데려오게.”

“알겠습니다.”

시종은 우아한 동작으로 정중히 인사한 뒤 물러났고, 잠시 후 깔끔한 정장을 갖춰 입은 중년의 남성이,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부르셨습니까, 전하.”

“음, 예정에도 없이 갑작스럽게 불러서 미안하네.”

“아닙니다. 전하께서 부르신다면 언제라도 응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헌데, 혹시 올라간 서류에 무슨 문제라도 생겼습니까?”

“그건 아니고, 한 가지 부탁할 게 있어서 불렀네.”

“부탁이라니요.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그럼 명하지, 자네들이 처리 중인 서류 있잖는가, 전부 가져오게.”

“…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지만, 황태자가 서류작업을 한다고 해서 그가 세세한 글자 하나하나를 수정하고 숫자를 검산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황태자의 책상 앞에 올라가는 서류 중 대부분은 최종 결재만을 기다리는, 그야말로 도장만 찍으면 그걸로 끝인 서류가 대부분.

물론 중앙 집권형 권력구조와 넓은 영토의 환장할 콜라보로 인해 그 ‘내용을 읽고 도장을 찍는다’라는 행위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중노동이 되지만, 그마저도 아래쪽에서 하나하나 처리 도중인 서류들에 비하면 그 양은 훨씬 적다.

고로, 서기관은 무례라는 걸 알면서도 당황하며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호, 혹여 관심 있는 서류가 있으시다면, 그 내용을 알려주십시오. 최대한 우선해서 처리한 뒤 먼저 올리겠습니다.”

“그냥 전부… 아니, 됐네. 생각해 보니 내가 가는 편이 빠르겠군.”

“예!?”

서기관의 경악을 뒤로한 채, 황태자는 정말로 성큼성큼 나아가더니 금운궁 내 관료들이 한참 업무에 힘쓰고 있는 사무실로 쳐들어갔다.

인접 국가에서 수입해 온 마법의 검은 음료를 물처럼 마시며 서류의 산과 싸우고 있던 관료들은, 느닷없는 황태자의 등장에 문자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런 그들을 향해, 황태자가 말했다.

“오해가 없도록 미리 말해두겠네. 내가 지금부터 하려는 건, 한동안 내 개인 단련을 위해 시간을 마련하고자 하는 행동일 뿐, 절대로 그대들의 일 처리를 탓하기 위함이 아니네. 그냥 인생에 어쩌다 찾아오는 해프닝 같은 거라 여기고, 부디 가볍게 받아들여 주면 좋겠네. 이해했나? 이해했으면 서류들 가져오게.”

사실 황태자가 뭐라고 말하는 건지, 그가 왜 여기에 쳐들어온 건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관료들이었지만, 황태자가 당장 서류를 내놓으라는데 그 명령을 무시할 정도로 간 큰 이들은 없었다.

그들은 혹여 트집이라도 잡히지 않을까 벌벌 떨면서 서류를 내밀었고.

이내 턱이 빠져라 입을 벌렸다.

‘서류의 산이… 녹아내리고 있어!

‘아니, 저거 계산하는 거 숫자 하나라도 틀리면 안 되는 건데, 계산기도 안 쓰고 그냥 암산으로… 이게 왜 맞지?

‘일주일 치 업무가 최고 상사 손에서 사라진다. …아하, 내가 야근을 너무 많이 해서 꿈을 꾸는구나! 빨리 일어나야 해!

경악, 불신, 현실도피.

다양한 시선과 소리 없는 절규 속에서 관료 수십 명이 해야 할 업무를 모조리 끝내버린 황태자는, 그 상태 그대로 최종 결재까지 마친 서류를 서기관에게 넘기며 말했다.

“본래 관료 사회란 일이 없으면 허공에서 일을 만들어서라도 떠넘기는 법이니, 절대로 이 서류를 한 번에 황실로 올려서는 안 되네. 알겠나? 우리 금운궁은 맡겨진 업무를 일주일 동안 천천히 나눠서 처리한 거야. 그렇지 않은가?”

황태자의 시선에, 금운궁의 관료들은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일이 너무 많아서 천천히 나눠서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도 야근하겠다고 집에 연락하겠습니다!”

열정적인 대답에, 황태자는 흡족한 미소를 지은 뒤 떠나갔다.

남겨진 관료들은, 느닷없이 일주일 치 업무가 소멸해 버린 상황에 눈만 껌뻑거렸다.

물론 서류작업이라는 게 으레 그렇듯이 본래 예정된 작업과는 별개로 또 무슨 일이 올라오겠지만, 본래 처리해야 할 업무에 비하면 그 정도는 껌 씹기나 다름없었다.

처음 이틀 정도는 괜한 불안 증세에 시달리던 그들도, 황태자가 정말로 서류 처리 시간에 자기 단련에 몰두하는 중이라는 걸 확인하고는, 이내 입가에 훈풍 같은 미소를 띠었다.

눈 밑에 다크서클이 심하던 이들 몇몇은 아예 울먹거릴 정도였다.

“아…!”

대악마에게도 부하 관료들에게도 똑같이 눈가에 눈물을 맺히게 하니, 황태자의 은혜가 실로 하해와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