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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하인 세드릭(Cedric) (14) - 첫째의 비수

“…변함없이 지긋지긋할 정도로 화려하네.”

레드벨 후작의 저택.

레드벨 가문의 본가라고 할 수 있는 장소를 바라보며, 클라우디아는 눈을 찌푸렸다.

에체드령의 영주로 임명되기 전 십수 년을 살아온 공간이지만, 그녀는 이곳에 찾아오는 것이 영 껄끄러웠다.

고통스러운 기억이 많아서 그런 것은 아니다.

오히려, 행복한 기억이 많았기에 그러했다.

어머니가 살아있었을 무렵.

레드벨 후작이 ‘좋은 아버지’로서 행동하고, 그것을 진심이라 여겼던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노라면, 현재의 자신과 비교되어 비참한 기분이 들었으니까.

쉽사리 저택 안쪽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그냥 노려만 보기를 얼마쯤.

“제법 넓은 저택이로군요. 실로 관리할 보람이 있을 듯합니다.”

진심인지 농담인지, 가벼운 잡담처럼 건네져 온 말.

세드릭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땅에 달라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던 클라우디아의 다리가 급격히 가벼워졌다.

그녀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대꾸했다.

“천하의 레드벨 저택을 ‘제법’이라고 평가하는 건방진 하인은 너밖에 없을 거야. 부지 넓이로 따지면 왕가에 버금가는 곳인데.”

“아가씨는 장차 이곳보다 더 높고 넓은 곳을 바라보셔야 할 분이니, 하인인 저 역시 그런 마음가짐을 지녀야 하지 않겠습니까?”

“말은 잘해요. 말은.”

가볍게 투덜거리면서도, 클라우디아의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그렇다.

과거의 그녀와 지금의 그녀는 다르다.

지금의 클라우디아는 아버지의 사랑이 가짜였다는 걸 알고 토라진 어린아이가 아닌, 명백한 실적과 명성을 지닌 영주로서 이곳을 찾아온 것이니까.

가슴을 펼치고 턱을 치켜든 그녀는 그대로 위풍당당하게 저택 안으로 발을 들였다.

저택 안쪽에는 클라우디아보다 먼저 찾아온 선객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모습을 발견한 클라우디아는 성격 나쁜 미소와 함께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네. 미라, 에르빈.”

다부진 근육질 신체를 지닌, 외관만큼은 번듯한 청년의 얼굴이 불쾌하다는 듯이 일그러졌다.

언뜻 봐도 범상치 않은 재질의 드레스로 몸을 감싼 귀족 영애 역시 마찬가지였다.

“난 네 오라비다. 예의를 지키라고 몇 번이나 말했을 텐데, 클라우디아.”

“그래. 꼭 그렇게 가정 교육 못 받은 티를 내서 가문의 이름에 먹칠을 해야겠어?”

“예의? 가문의 이름에 먹칠?”

두 사람의 질책에도, 클라우디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코웃음을 쳤다.

같잖은 소리라도 들었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진짜 예의를 모르고, 진짜 가문의 이름에 먹칠하는 게 어느 쪽인지, 왕국 전체가 알 수 있게 해줄까?”

의미심장한 클라우디아의 말에, 두 사람의 눈동자가 아주 잠시 흔들렸다.

허나 두 사람 역시 정치가 호흡과도 같은 귀족 사회에서 오랜 시간을 거듭한 이들.

삼녀 미라는 태연한 얼굴로 되물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모르겠네. 우리 중 레드벨의 이름값을 제일 많이 까먹던 건 너 아니었니?”

진심으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말투와 표정을 보고서, 그녀가 이복동생에게 암살자를 보낸 범인이라고 추측하는 인물은 드물 것이다.

차남 에르빈 역시 그런 여동생의 태도에 동조했다.

“최근에는 영주로서 그럭저럭 활약했다고 들어서 조금은 기대했건만. 변함 없이 망나니 기질은 사라지지 않았구나. 부끄러운 줄 알거라.”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뻔뻔한 태도였지만, 사실 이들에게는 이들 나름의 계산이 있었다.

‘허세가 분명해. 그토록 막강한 전력을 보냈는데, 암살자들을 죽이지 않고 생포할 여력 같은 게 있었을 리가 없잖아?’

‘작전에 투입한 이들은 하나 같이 입이 무거운 자들이다. 쉽게 증언 같은 걸 할 리가 없지. 설령 정말로 증언했다고 해도, 여기서 인정했다간 죽도 밥도 안 돼. 무조건 잡아떼야 한다!’

이들의 판단이 아예 그릇된 건 아니었다.

본래 귀족 사회에서 진실이란 그리 중요한 게 아니고, 잘잘못이란 시도 때도 없이 뒤집히는 법이니까.

물론 클라우디아가 정말로 증인을 확보했고, 그걸 무기 삼아 휘두른다면 남매 역시 적잖은 출혈을 각오해야겠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클라우디아도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그들을 다소 배려해 주어야 했다.

다만, 한 가지.

이들이 착각하고 있는 게 있다면, 클라우디아는 본디 그렇게까지 ‘정치적’인 귀족 영애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아, 그러셔?”

클라우디아는 두 사람의 뻔뻔한 태도를 못마땅하다는 듯이 노려보고는, 이내 부채를 촤르륵 펼치며 입가를 가린 뒤 명령했다.

“너희들. 마차에 실어 온 그것들, 여기로 데려와.”

“알겠습니다.”

클라우디아의 말에, 그녀의 뒤를 추종하던 하인 중 몇몇이 걸음을 돌려 문밖으로 빠져나갔다.

처음에는 클라우디아의 의도를 알지 못하고 의아한 기색이었던 남매였지만, 이내 하인들이 어깨에 둘러메고 온 ‘그것’을 보고는 경악으로 눈을 부릅떴다.

도롱이 벌레처럼 단단히 구속된 채, 더 이상 저항할 기운도 없다는 듯이 축 늘어져 있는 남자들.

그들은 불안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이내 두 남매와 시선을 마주치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설마 암살자들을 본가로 데려오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남매는 그대로 얼어붙었고, 그런 그들을 향해 클라우디아가 선언했다.

“내 생각에는 얘들이 너희 두 명과 관계가 있는 것 같아서 이야기를 좀 하려 했는데, 너희가 잘 모르겠다면 어쩔 수 없지. 다른 곳에 쓸 수밖에.”

“다, 다른 곳?”

“아버님께 데려갈 거야. 감히 레드벨 가문의 혈족을 노리고 쳐들어온 놈들이니, 반드시 그 배후를 조사해서 철저하게 털어버려야 한다고. 내가 직접 하는 것보단 많이 해보신 분이 하는 게 더 능숙하지 않겠어? 응?”

남매는 말문이 막힌 듯이 어떤 대답도 하지 못했다.

이대로 후작의 손에 저들이 넘어가게 내버려 둘 수는 없다.

후작은 저들의 입을 반드시 열어젖힐 테고, 그러면 그들의 음모가 모조리 드러날 테니까.

그렇다고 저들을 보호할 수도 없다.

여기서 나서서 그들을 회수하는 것 자체가, 자기들이 범인이라고 고백하는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이, 이 미친년…!’

‘지금 우리를 대놓고 협박하겠다 이거야!?’

귀족 특유의 세련된 막후교섭 따위는 없다.

꼬우니까 한 번 엿 먹어보라는 듯한 막무가내식 윽박지르기에, 나름대로 산전수전을 겪었다고 자부하던 두 사람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천하의 레드벨 가문의 자식들을 상대로, 그 어느 누가 이런 식으로 선택을 강요했겠는가.

“더 할 말은 없는 것 같으니, 나는 가볼게. 나중에 봐. 볼 일이 있다면.”

“자, 잠깐만 기다려라. 클라우디아!”

“그, 그래! 오해, 오해가 있는 것 같아! 우리 이야기 좀 하자!”

결국 두 사람은 자존심을 굽히고 클라우디아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최악보다는 그나마 나은 차악을 택한 것이다.

그리고 그 모습은, 본가 가신들의 눈과 귀에 선명하게 새겨졌다.

‘…사실상 굴복한 모양새로군. 대놓고 소문이 퍼지진 않겠지만, 보는 눈이 이렇게 많으니 적어도 가문 내에서 아는 사람은 다 알게 되겠지.’

‘허어, 지나치게 거칠지만, 어떤 의미로는 지극히도 효과적인 교섭법 아닌가. 폭군 같은 기질도 사용하기에 따라선 무기가 되는 법이로군.’

왕국의 실세 중의 실세인 레드벨 가문의 가신쯤 되면, 정치적으로도 적지 않은 영향력과 식견을 지닌 이들이다.

자신의 손과 발이 멋대로 움직이는 걸 용납하지 않는 후작의 기질을 알기에 함부로 후계자 경쟁에 관여하거나 입을 열지는 않지만, 그 생각까지도 얽매둘 수는 없는 법.

그들이 판단하기에, 지금 이 순간 클라우디아는 사실상 차남과 삼녀를 가문 내 서열로 제쳐버린 거나 다름이 없었다.

결정적 암살에 실패하고도 이를 어물쩍 넘어가려 했던 대가를 치른 것이다.

“하하, 뭔가 소란스럽다 했더니만, 다들 여기에 있었구나.”

물론, 그렇다고 해서 클라우디아가 가문 내에서 최고의 자리를 차지했다는 뜻은 아니었다.

논외 취급인 후작이야 어찌 됐든, 레드벨 가문에는 차남과 삼녀는 ‘따위’로 취급할 수 있을 확고한 2인자가 존재했으니까.

온화하면서도 품위 있는 생김새의 귀공자, 아르민 레드벨.

그는 동생들 사이의 미묘한 분위기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천연덕스러운 태도로 그들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에르빈과 미라는 어둡던 얼굴에 희미한 화색을 깃들게 했고, 클라우디아는 노골적으로 눈을 찡그렸다.

“오랜만에 보는구나, 막내야. 소식은 자주 들었다만, 그래도 본인 입으로 듣는 것만은 못하겠지. 그동안 잘 지냈느냐?”

“…그럭저럭.”

“다행이군, 다행이야. 이 오라비의 걱정이 크게 줄어든 느낌이구나.”

짧은 단답에도 불구하고, 아르민은 딱히 개의치 않는 것처럼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철이 덜든 꼬마라도 보는 것 같은 자애로운 시선.

가신들은 그런 그의 모습에서 인자하고도 거대한 그릇을 연상했지만, 정작 클라우디아는 달랐다.

‘능구렁이 같으니.’

둘째나 셋째와 달리, 장남인 아르민은 클라우디아에게 직접적인 적의를 드러내거나 괴롭힘을 가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들의 행동이 과해지려 할 때쯤 나타나 중재를 해준 적도 몇 번이나 있었다.

그런데도 클라우디아는 장남 아르민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건 이성이라기보다는 본능적인 경계심이었다.

아르민을 보고 있노라면 레드벨 후작, 그것도 그녀의 어머니가 살아 있었을 시절의 얼굴에 가면을 쓴 후작이 곧잘 떠오르곤 했으니까.

날카로운 적의를 물 흐르듯 흘려보내면서, 아르민은 구속당한 암살자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들은 네가 데려온 것이냐?”

“그런데.”

“무슨 용무인지는 모르겠지만, 가주님께서 머무시는 거처에 저런 자들을 함부로 들이는 건 좋지 못한 행동 같구나. 우선은 저택 밖에 되돌리고, 후에 가주님의 허락을 받아 다시 데려오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밖에 놔둔 사이에 얘들이 사라지거나 입막음 당하면 어쩌려고?”

“이곳은 레드벨의 땅이다. 그곳에서 그런 흉행을 벌이는 자가 있다면, 그건 가주님을 무시하는 행동이 될 테니, 반드시 그 응보를 받겠지.”

평범한 정론처럼도, 은근한 암시처럼도 들리는 발언이었다.

차남과 삼녀의 경우 후자로 받아들였는지, 그들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클라우디아는 그런 남매의 모습을 확인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그래도 남들 보는 앞에서 이런 말이 나왔는데 감히 입을 막으려고 시도하진 못하리라 판단한 것이다. 시도하면 그건 그것대로 좋은 구실이 될 테고.

“다시 돌려놔.”

하인들에게 지시를 내리면서, 클라우디아는 세드릭과 눈을 마주쳤다.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듯이 순순히 명령을 수행하는 그의 모습에, 클라우디아는 이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느끼고는 안심했다.

그 모습을 잠시 눈여겨본 아르민은, 이내 사람 좋은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러면 식당으로 가자. 가주님께서는 달리 볼 일이 있어 조금 뒤늦게 참가한다고 하셨으니, 우선 우리끼리 먹으면 될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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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벨 후작 저택의 음식 수준은 무척이나 높다.

상인 귀족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매사에 계산적인 면모가 강한 레드벨 후작이지만, 그렇다고 부를 쌓는 것에만 집착하는 수전노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좋은 침구, 좋은 의복, 좋은 음식.

그는 일상적인 편리함이나 쾌락에 사치를 아끼지 않는 인물이었고, 그것을 증명하듯 식탁에는 온갖 종류의 식재료로 만든 다채로운 음식들이 가득했다.

허나, 클라우디아는 그 음식들이 맛있다고 느끼지 못했다.

‘세드릭이 해준 것들보다, 아니 그냥 주방장이 해준 것보다도 못하네.’

객관적인 식재료의 품질이나 요리사의 실력만을 논한다면 이곳 본가 쪽이 뛰어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굉장한 미식이라고 한들, 얼굴을 맞대기도 싫은 인간들과 한 테이블에서 나이프와 포크를 끼적이고 있으면 밥맛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에르빈. 둘째를 가졌다고 들었는데, 부인의 몸 상태는 괜찮으냐?”

“예, 형님. 저번에 보내주신 약재들 덕분입니다. 아내도 감사의 말을 전해달라고 하더군요.”

“하하, 뭐 그 정도를 가지고 감사씩이나. 미라, 최근 루디올 백작 부인과 자주 어울린다지?”

“네, 오라버니. 사교계 후배로서 여러 가지를 배우고 있어요.”

“한때 비르카 사교계의 여왕이라 불렸던 분이다. 부디 실례가 없도록 조심하거라.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고.”

커다란 테이블 위를, 희미한 식기 소리와 가족끼리의 말소리가 뒤덮는다.

사람조차 쉽게 입에 대기 어려운 곡물을 먹여 키웠다는 닭고기 스테이크를 썰어내면서, 클라우디아는 이 촌극에 언제까지 어울려야 하는지 새삼 지긋지긋함을 느꼈다.

어차피 후작 본인은 나타날 것 같지도 않은데, 그냥 대충 먹었다 치고 가버릴까.

그녀가 머릿속에 떠오른 행동을 진지하게 실행할지 말지 고민하던 그 무렵.

너무나 자연스럽게, 길거리를 걷다가 우스꽝스러운 구름이라도 봤다는 듯이 평온한 말투로, 아르민이 말했다.

“아참, 클라우디아. 왕가 쪽에서 네 중매를 서주고 싶다고 말하던데, 어찌 생각하느냐?”

“……. …뭐?”

너무나 뜻밖의 발언이었던 탓에, 클라우디아의 뇌가 그 내용을 인식하기까지는 제법 시간을 필요로 했다.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는 막내를 향해, 아르민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내가 2 왕자 전하와 자주 교류를 나누는 것은 알고 있겠지. 그 분께서 네가 아직 혼인은커녕 약혼조차 하지 않았다는 걸 들으시고는 크게 탄식하셨다. 왕국을 다스리는 일에만 몰두하다 보니, 정작 가족인 너의 일에 대해서는 무심했다고 말이야.”

가족? 누가?

어머니가 이 망할 집구석에 시집올 때, 제대로 된 혼수조차 없이 몸과 하인 몇 명만 보내고 입을 닦아버렸던 그 자식들이?

점점 싸늘하게 굳어가는 클라우디아의 얼굴과 달리, 아르민의 얼굴은 변함없이 온화했다.

“본디 귀족의 혼례란 가문의 어른이 결정하는 법이지. 가주님께서도 왕가 쪽에서 직접 주선을 나선다면 그 또한 복된 일이라며 이를 받아들이셨다. 덕분에 2 왕자 전하께서 아주 의욕이 넘치시더구나. 너에게 최고의 신랑감을 구해주시겠다며 호언장담하셨으니, 기대해도 될 것이다.”

클라우디아의 인내심이 남아 있던 것은 딱 거기까지였다.

와장창창!

“꺄악!?”

“윽, 클라우디아! 너 이게 무슨 짓이냐!!”

클라우디아가 식탁의 다리 하나를 걷어차다시피 하며 몸을 일으키자, 테이블 위의 음식들이 크게 흔들리고 일부 소스 따위가 반대편에 있던 남매에게 튀어 올랐다.

허나 클라우디아는 그들 따위에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아르민을 노려보며 외쳤다.

“당신이, 당신들이 뭔데 내 결혼을 마음대로 결정해!!”

옷자락에 튄 샐러드 소스를 쓴웃음을 지으며 바라보던 아르민이, 말썽꾸러기를 타이르듯 부드럽게 말했다.

“본래 귀족의 혼인이라는 건 그런 법이다. 나도 그러했고, 에르빈도, 미라도 그러했지. 이번에는 네 차례가 왔을 뿐인데, 어찌 그리 언성을 높이느냐.”

“싫어! 내가 너희가 주선하는 결혼 따위에 순순히 끌려갈 것 같아!?”

클라우디아가 쥐어 짜내는 음절 하나하나에는 온갖 종류의 격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그녀가 여태껏 노력해 온 이유가 무엇이었나.

뭣 때문에 이미지를 개선하고, 영주로서 민생을 살피고, 수많은 실적을 쌓으려고 했었나.

일개 상품처럼, 그녀의 어머니가 그러했듯 정략혼의 제물이자 상품으로서 팔려나가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이제 겨우 후작에게 인정을 받고 본격적으로 협상을 시도할 준비가 갖춰졌는데, 정작 후작의 얼굴은 보지도 못한 채 고작 장남 따위에게 이딴 이야기를 통보받는 이 상황을, 클라우디아는 도저히 납득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클라우디아를 향해, 아르민은 그저 선고했다.

“아무래도 착각하고 있는 듯하구나, 막내야. 주선하는 건 나나 가주님이 아니란다. 이 비르카 왕국의 왕가지.”

아르민이 말한 것은 거기까지였지만, 클라우디아의 귀에는 그 뒷 내용이 선명하게 들려왔다.

─아니면, 왕가의 뜻을 너 혼자서 뒤집어 보겠느냐?

그제야 깨달았다.

둘째와 셋째가 겨우 암살이 어쩌고 하는 방법으로 그녀를 공격하다 오히려 역습당하고 있을 때, 첫째인 아르민은 그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방법으로 그녀에게 회심의 공격을 가했다는 것을.

왕가의 부탁이란 것이 부탁이 아닌 명령이듯, 왕가의 선의란 선의가 아닌 강압이다.

2 왕자가 ‘선의’를 베풀어 ‘가문의 어르신’으로서 혼인을 주선했는데, 이를 클라우디아가 거부하거나 혼인을 파혼으로 이끈다면, 그건 곧 왕실에 대한 모독이 되는 것이다.

아무리 내부 정쟁으로 혼란한 왕가라고 해도, 그들이 이 나라의 엄연한 통치자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일개 영주 따위가 그것을 거부할 수는 없는 것이다.

클라우디아의 얼굴이 망연함으로 물들었다.

그녀는 지금쯤 하인들 용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을, 그 어떤 문제라고 간단히 해결해 줄 하인의 얼굴을 떠올렸다.

‘…세드릭,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