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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4 21:31:5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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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w Blame History

#140화 황태자 알론드(Alondre) (8) - 파워 밸런스 조절

벨라리아라는 영지는 절대로 꿈과 희망이 가득한 유토피아는 아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 적어도 치안이란 측면에서는 대륙 중부의 다른 국가들보다 우월한 곳이기는 했다.

외부와 고립된 분지 지형 특성상 여차할 때 도망칠 곳이 마땅치 않고, 반대로 외부에서 외적이 쳐들어올 염려도 적다.

사람 사는 곳이 다들 그러하듯 자잘한 범죄가 없는 건 아니었으나, 아예 범죄 그 자체를 생업으로 삼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이 근처는 위험한 녀석들이 매우 많지. 젊은 아가씨 혼자서 다니다간 큰일 나니까, 우리랑 같이 가는 게 어때? 응?”

“흐흐흐, 그래, 그래. 보답은 크게 필요 없으니까 안심하라고!”

따라서, 벨라리아 바깥으로 나온 그레이스가 처음으로 도적을 만나 느낀 감상은 다음과 같았다.

‘아니, 이게 진짜 나오네.

술집 아저씨의 넋두리나 흔들의자에 앉은 어르신의 나 때는 썰을 통해 도적이니 산적이니 하는 이들의 존재 그 자체는 들어본 적이 있는 그레이스였지만, 이야기로 듣는 것과 직접 체험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그레이스가 지금 본인들을 심령 스팟에서 진짜로 튀어나온 귀신 보듯 보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한 채, 도적들은 그 얼굴에 음흉한 미소를 띄웠다.

“이거, 아가씨가 겁을 먹었나 본데?”

“니놈 얼굴을 보면 그야 겁먹는 것도 당연하지!”

“너한테 나는 악취 때문에 그런 게 아니고?”

“그건 안 되겠는데. 이제부터 실컷 만끽해야 할 냄새인데 벌써 그러면 쓰나!”

처음 내뱉었던 최소한의 명분조차도 집어치우기로 했는지, 도적들은 저들끼리 껄껄 웃어대며 음담패설을 읊었다.

이미 그레이스를 자기들 손에 넣기라도 한 것 같은 태도였는데, 그레이스로서는 저들의 머릿속에 대체 뭐가 들었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아니, 어쩌면 아무것도 안 들었을지도.

상식적으로 여자 한 명이 동행인 하나 없이 인적 없는 길을 거닐며 여행을 하고 있다면, 그건 당연히 그만한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런 부분조차 고려하지 못하고 벌써 다 이겼다는 식으로 행동하는 걸 보면, 생각도 경험도 한없이 부족한 이들이 분명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할까.

그레이스는 잠시 고민했다.

사실 방법이야 많았다.

지금이라도 저들 발밑에 넝쿨을 자라나게 한 뒤 든든하게 포식할 식인 식물 이외에는 아무도 즐거워하지 않을 촉수물을 찍을 수도 있었고, 도시에서 했던 것처럼 존재감을 지워버린 채 그냥 빠져나가는 것도 가능했다.

그도 아니면 신성력으로 몸을 강화한 뒤에 물리적으로 따귀를 날려줘도 될 테고.

“음?”

그레이스의 시야 한쪽에 묘한 먼지구름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다.

곁눈질로 언뜻 살펴보기에, 그것은 마차였다.

다만 자세히 살펴보면 여러모로 뭔가 좀 기이했다.

일단 마차가 달리고 있는 길은 정비된 도로가 아니라 잡초나 자갈 따위가 가득한 풀밭이었다.

그런 곳을 달리고 있으면 마차는 제 속력을 내지 못하고 주춤거리거나 아예 멈춰버리기 마련인데, 어째서인지 저 마차는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쭉쭉 전진을 이어 나갔다.

거기에 속도도 심상치 않았다.

본디 마차라는 건 그리 빠른 탈것이 아니다.

제아무리 날래고 힘이 강한 말이라고 해도, 거대한 차체와 탑승객, 각종 짐의 무게를 견디며 달려서는 제 능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없으니까.

말의 품종이나 짐의 무게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평균적으로는 사람이 걷는 것보다 조금 더 빠른 정도.

하물며 지금 저것처럼 비포장 도로를 달린다면 속도는 더욱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게 정상이다.

헌데 저 마차는 그런 상식을 모조리 부정하듯이 거의 바람 같은 속도로 질주하고 있었다.

“응? 뭐야?”

“저기 뭔가 오는데?”

시시덕대던 도적들도 한발 늦게 마차의 존재를 감지했는지, 방금과는 달리 조금 긴장한 기색으로 시선을 돌렸다.

개중에는 혹시 모를 싸움을 대비하듯 무기를 손에 쥐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레이스는 거기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

지금은 그런 사소한 걸 따질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시각에 이상이 생겼나? 마차를 말이 아니라 사람이 끌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레이스는 몇 번이고 제 눈을 비벼봤지만, 그런다고 해서 보이는 게 바뀌지는 않았다.

그녀가 당황하는 사이에 마차는 그들의 코앞까지 도달했고, 이내 그대로 정지했다.

“후우.”

마차를 이끌고 있던 소녀가 가볍게 숨을 몰아 내쉬었다.

조금 앳된 느낌이 들 정도로 귀여운 얼굴상. 반짝반짝 빛나는 금안과 길디긴 흑색의 묶음 머리.

허리에 장신구처럼 칼 손잡이를 매달아 놓은 것이 인상적인 소녀는, 자기를 향한 벙찐 시선을 향하는 사람들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이더니 말했다.

“앗, 잠시만요. 지금 곧 나올 거예요.”

뭐가 나온다는 소리냐, 라고 되물을 필요는 없었다.

덜컥하는 소리와 함께 마차의 문이 열리더니, 그 안에서 빠져나온 또 한 명의 소녀가 땅에 발을 디뎠기 때문이다.

“흐응.”

다소 매정한 느낌이 들 정도로 차디찬 분위기. 속내를 알 수 없는 녹색 눈동자와 밝은 주황빛의 장발.

허리춤 홀더에 꽂아 놓은 커다란 책이 특징적인 소녀는, 손에 쥔 종이 다발을 펄럭펄럭 넘기더니 이내 어떤 페이지에서 손을 멈췄다.

“십자 흉터의 모리슨. 금품 갈취, 살인, 납치 및 강간. 노예 거래. 이건 뭐 사람인지 고블린인지 구분이 안 가네.”

“뭐, 뭐냐 네년들은!!”

주황 머리 소녀의 말에 화들짝 놀란 듯, 얼빠져 있던 도적 중 하나가 소리를 높여 으르렁댔다.

매끈매끈한 머리 측면에 턱 하니 그어져 있는 십자 흉터가 인상적인 도적이었는데, 분위기로 보아 도적들의 우두머리 역할을 하고 있는 듯했다.

검은 머리의 소녀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으음, 혹시 항복하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죄질이 많이 안 좋으셔서 처벌을 면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사형이 아니라 노역형 정도로 바꿀 수는 있을지도 몰라요.”

뺨을 긁적이며 말하는 소녀의 말에는 사뭇 진심이 담겨 있었지만, 도적들은 그걸 도발로 받아들인 듯했다.

“허, 듣고 있자니 내가 병신으로 보이나!! 뭣들 하냐, 조져!!”

두목의 호령에, 십여 명이 조금 안 되는 도적들이 일제히 날카로운 무기를 뽑아 들며 전투태세에 돌입했다.

그에 맞서는 검은 머리 소녀는 허리춤에 달려 있던 칼자루를 손에 움켜쥐었는데, 도적들은 그 모습을 보며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개중에는 손가락을 머리 옆에서 빙빙 회전시키며 비웃음을 드러내는 이들도 있을 정도였다.

“미친년이 돌아도 아주 단단히 돌았…?”

비아냥을 퍼부으려던 도적의 말꼬리가 급격하게 흐려졌다.

우우우우우웅!

짙디짙은 푸른빛의 오러가 가득 차오르며 존재하지 않는 칼날을 대신하는 모습은, 머릿속에 든 것이 별로 없는 이들이라도 본능적으로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 수 있을 만큼 어마어마한 임팩트를 지니고 있었다.

샤악!

오러로 만들어진 칼날이 허공을 가른 순간, 그 궤적에서 수많은 꽃잎이 흩날렸다.

이리저리 허공을 떠다니는 꽃잎은 의지를 지닌 것처럼 도적들의 무기에 접촉했고, 마치 지우개처럼 자신이 접촉한 만큼의 면적을 지워 날렸다.

한순간에 손에 든 무기가 무기였던 것으로 전락한 꼴을 본 도적들 대다수는 그대로 넋이 나갔고, 두목을 비롯해 눈치 빠른 소수만이 도주를 시도했으나, 그들은 결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펄럭.

[여기서는 같은 곳에 있으려면 쉬지 않고 힘껏 달려야 해. 어딘가 다른 데로 가고 싶으면 적어도 그보다 두 곱은 빨리 달려야 하고.]

주황빛 머리의 소녀가 지닌 책이 펼쳐지며, 수수께끼의 문구가 허공에 떠올라 이적을 자아냈다.

필사적으로 다리를 놀리는데도 제자리에서 옴짝달싹 못 하는 상황에, 도적들의 얼굴이 점점 새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대략 10초도 되지 않는 시간 만에 도적단 하나를 완전히 제압해 버린 두 소녀는, 고개를 돌려 그레이스를 바라보았다.

이걸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약간 고민하는 것 같은 그 시선에, 그레이스는 품에서 주섬주섬 지갑을 꺼낸 뒤 말했다.

“혹시 마차에 빈자리 있나요? 승차료는 낼 수 있는데.”

용사와 현자. 그리고 성녀의 첫 조우라며 영웅담에 그대로 적어넣기에는, 영 멋이 없는 한 장면이었다.


아이제른 제국. 수도 칼라스티아. 황태자의 거처 금운궁.

빤히.

루시드라는 황태자를 응시했다. 황태자는 서류 작업을 계속했다.

빤히.

루시드라는 황태자를 응시했다. 황태자는 열심히 도장을 찍었다.

빤히.

루시드라는 황태자를 응시했다. 황태자는 홍차를 마셨다.

빤히.

루시드라는 황태자를…

“…아 진짜! 더 이상 못 해 먹겠네!! 인간적으로 사람이 ‘나 할 말 있어요!’라는 분위기를 팍팍 풍기면서 얼굴을 쳐다보고 있으면, 거기에 대해 뭐라고 반응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어떻게 3시간 넘게 반응이 없는 건데!!”

검은 날개를 퍼덕이며 마구 성을 내는 루시드라.

그런 그녀의 말에, 황태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뜻이었나?”

“아니면 다른 사람 얼굴을 빤히 쳐다만 보고 있을 리가 없잖아!”

“그건 다소 편협한 단정이로군. 하루건 이틀이건 내 얼굴을 지긋이 바라만 보며 넋을 놓고 있는 상대는 그럭저럭 많다네. 그럴 기회가 별로 없을 뿐이지.”

“…….”

전직 대악마조차 ‘이 더럽게 재수 없는 새끼’라는 생각을 멈출 수 없는 발언이었다.

저 반질반질한 얼굴을 보고 있으면 제법 설득력이 느껴진다는 점이 더욱 짜증 났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라는 게 뭔가?”

“이번에 했던 거 말이야. 다음에도 반복할 생각이야?”

“흐음?”

황태자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건지 깨닫고 부정했다.

“아니, 본체와 분신의 교체는 어지간해선 없을 걸세. 사실 이번 것도 여러모로 무리를 거듭한 거니까 말이지.”

그는 제국의 황태자다.

스케쥴 대부분이 빽빽하게 가득 차 있고, 본래라면 혼자서는 길거리를 걷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입장.

당장 이 집무실만 해도 문 한 짝만 넘어가면 호위 기사와 하인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고, 집무실을 들락날락하며 새로운 일거리를 가져오는 신하들도 끊이질 않는다.

루시드라가 세 시간 동안 빤히 지켜보고 있다고 말했지만, 그건 루시드라가 다른 사람들이 들어올 때마다 적절하게 황태자의 그림자 속으로 기척을 숨겼기에 가능한 일. 실제로 둘만 나란히 있는 시간은 최장 1시간을 넘기 힘들다.

분신으로 다른 사람들의 눈을 속이며 본체가 바깥으로 돌아다니면 되는 거 아니냐고 할 수도 있지만, 이 역시 어려운 일이다.

제국에는 분신을 보는 순간 위화감을 감지할 수 있는 능력자들이 여럿 존재하고, 개중 둘은 아예 황태자의 스승들이다.

당장 이번만 해도 황태자의 정체를 눈치챌만한 능력자들과 동선이 겹치지 않는 시간대를 쥐어 짜내는 데 얼마나 노력을 거듭했던가.

루시드라의 공간 이동 능력을 적극 활용하고, 일주일 이상의 준비 기간을 거쳤는데도 본체로 활약할 수 있던 시간은 정말 한 줌에 불과했다.

괜히 황태자가 수호신 토벌 후 인사 한마디 없이 사라진 게 아니다.

“뭐, 그러면 됐어.”

황태자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루시드라는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그래서, 다음 분신은 어쩌려고? 저번에는 악마, 이번엔 신을 때려잡았으니, 다음에는 뭐 어디 야생의 초월자라도 쓰러트리려고?”

“제대로 된 초월자는 내가 직접 나서도 확실히 이긴다고 장담할 수 없거늘 어찌 분신으로 그런 일을 하겠는가. 애초에 한동안은 분신에 그리 많은 역량을 투자할 수 없네.”

황태자는 나른한 얼굴로 창밖을 응시했다.

“이번 바꿔치기는 어찌어찌 들키지 않고 넘어갔지만, 그래도 희미한 위화감 정도는 느낀 이들이 있을 걸세. 평소 이상으로 내 일거수일투족을 주의 깊게 살피는 눈이 많아질 테니, 한동안은 분신 쪽에 쏟을 리소스를 줄여야겠지.”

“그러면 곤란해지는 거 아니야?”

“애초에 모든 분신이 다 강할 필요는 없는 법. 적어도 세 번 정도는 무력이 아니라 다른 분야를 주무기로 삼아 역할에 충실해 볼 생각일세.”

“그러다가 어디서 콱 객사라도 하면?”

“그렇게 되지 않도록 노력할 생각이지만, 그건 그것대로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는가?”

태연히 그런 말을 내뱉는 황태자의 모습에, 루시드라는 아직 보지 못한 누군가들을 향해 조의를 표했다.

역시, 이 괴물 같은 황태자는 인간미가 다소 부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