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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4 21:31:57 +09:00

12 KiB
Raw Blame History

우리는 해가 완전히 지고 나서야 숙소로 돌아왔다.

교단에서 제공해주는 저녁 식사는 꽤 맛있었다.

가끔 생각날 만하다.

로마 시내의 불빛이 창밖을 가득 채웠다.

잠깐이지만, 편린의 존재가 내 머릿속에서 지워지는 시간이었다.

옷을 벗어두고 나니, 방 안은 더없이 조용했다.

천여울은 창문을 잠깐 열어 바깥 공기를 들였다. 시원한 밤바람이 커튼을 스치며 방 안으로 스며든다.

그녀가 내 쪽을 돌아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눈빛에 알 수 없는 장난기가 비친다.

“슬슬 씻을까?”

“아니.”

나는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천여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직, 오늘은 끝나지 않았다.

우리에겐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밤 산책. 어때?”

이제 곧, 박물관의 조명이 꺼지고 거리가 한산해질 것이다.

슬슬 사람도 하나둘씩 없어질 시간.

천여울 역시 눈빛이 금세 기대감으로 바뀐다.

“산책? 이 밤에?”

“응.”

천여울은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나야… 좋지?”

그녀는 내 옆에 딱 달라붙어, 작게 물었다.

“근데, 어디 갈 건데?”

“우리 아까 갔던 곳. 박물관.”

“아… 거기 좋긴 했어.”

잠깐 시선이 섞였다. 나는 먼저 복도로 발걸음을 옮겼다.

복도 끝에는 늘 그렇듯, 수녀가 조용히 서 있었다.

우리가 다가서자 수녀는 이번에는 아예 먼저 나섰다.

“준비, 해드리겠습니다.”

그녀는 드디어 목욕을 준비해달라고 할 줄 알았는지, 자신 있는 표정으로 선언했다.

자못 결연한 표정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쪽은 아니었다.

“아뇨. 잠시, 산책 좀 하고 오겠습니다.”

“… 알겠습니다.”

천여울이 작게 웃었다.

“고마워요? 오늘 신세 많이 지네요.”

수녀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복도 끝으로 물러났다.

우리는 천천히 왔던 길을 되돌아가며, 박물관으로 향했다.

낮에 북적이던 인파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천여울이 옆에서 나지막이 말했다.

“진짜 아무도 없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관광객들이라, 전부 방으로 들어갔을 거야.”

늦은 시간까지 돌아다니는 걸 바티칸에서 허용하지 않는 것도 있고.

공원에서 박물관으로 연결되는 곳 까지도 사람이 없었다.

오직 우리 둘, 그리고 밤의 바람 소리.

박물관 입구에 도착했다.

외형만 보면, 또 하나의 성당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다.

달빛이 비치는 계단을 오르자, 대리석 석판이 홀로 조용히 우리를 맞았다.

하늘을 뚫려있지만, 조명은 이미 꺼진 지 오래.

달빛만이, 어둠 속에서 은은하게 석판을 비춘다.

고요하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천천히 석판 앞으로 걸어갔다.

뒤에서 들려오는 발소리, 천여울도 묵묵히 내 뒤를 따른다.

질문이나 궁금해하는 기색, 그런 건 없다.

우리는 석판 앞에 도착했다.

딱, 이럴 때 늘 드는 생각이 있다.

10년 전부터 해온 고민.

무언가를 전해줄 때, 무언가를 가르칠 때, 새로운 세상을 보여줘야 할 때.

그때마다 ‘과연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라는 고민이 밀려왔다.

세상에 드러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개념, 편린.

혹시라도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면, 혹은 내 진심을 오해하면 어쩌지 그런 두려움이 아주 잠깐 스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이 관계를 믿고 싶었다.

짧은 기간 동안 쌓아온 관계지만, 그 질만큼은 꽤나 단단했을 거라 믿는다.

그저, 허투루 쌓이진 않았으리라는 것을.

“천여울.”

그래서, 나는 천여울을 바라보며 조용히 물었다.

“나를 믿어?”

언뜻 보면 너무 갑작스러운 질문.

그러나, 내내 마음에 품고 있던 말이었다.

‘넌 나를 왜 그렇게 믿어?

그러면서, 손을 내밀었다.

지금만큼은, 솔직하게 묻고 싶었다.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혹은 지금껏 나를 수상하게 여기지는 않았는지.

천여울은 순간 눈을 크게 뜨더니,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숨을 고른다.

머리카락이 달빛에 젖어서 은은하게 빛난다.

그리고 조용히.

  • 꽈악.

천여울이 내 손을 잡았다.

말없이, 아주 단단하게 깍지를 끼워온다.

내밀지 않은 반대쪽 손까지 뻗으며 깍지를 껴왔다.

손끝에서 선명한 온기가 느껴졌다.

“무조건, 믿어.”

딱 두 마디.

두 마디였지만 충분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에, 손 한 번만 대볼래?”

깍지 낀 손 중 하나를 푼 천여울은 아무 망설임 없이, 조용히, 대리석 석판 위에 손바닥을 올렸다.

순간, 석판의 문양 사이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다.

그와 동시에, 천여울의 몸에서 힘이 조용히 빠져나갔다.

나는 쓰러지지 않도록, 품 안에 안아주었다.

의식을 잃는 와중에도, 천여울의 손은 끝까지 내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그 손끝의 온기가, 아직 남아 있다.

이제.

그녀만의 시련이 시작된다.


삼라만상의 이치.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일정한 원리와 질서에 따라 운행한다.

정해인. 그도, 언젠가 어렴풋이 깨달았을 것이다.

나약한 인간 하나가, 거대한 운행을 바꾸려 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

그 생각. 그 사실을, 아주 오래전부터.

알면서도, 계속 정신과 몸을 혹사해왔을 것이다.

가엾게도.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정해인이라는 별이 세상의 흐름을 거스르는 데에는, 명확한 한계가 있었다.

“죽인다 했지! 내가!”

천여울의 눈앞에서, 사도의 말석.

붉은 피의 거미, 메어리가 광분했다.

그녀는 천여울과 만나는 족족 머리가 뽑힐 뻔했고, 사지가 찢길 뻔했다.

이를 갈고 있었던 것은,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정해인은 최적의 용병술로 인원을 배치했지만… 이번에는 악신의 수가 반발짝 빨랐다.

천여울과 그녀가 이끄는 팔라딘은 점차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

“하하….”

천여울은 송골송골 땀이 맺힌 이마를 손등으로 닦으며 미소를 지었다.

입꼬리가 올라간다.

눈앞의 적은, 아무리 어림잡아 헤아려도 세 군단이 넘는다.

비정상적으로 많은 병력이 눈앞에 몰려 있다는 것은. 곧 다른 곳이 비었다는 뜻.

전력의 공백이 생긴 다른 전선에서, 동료들이 성과를 낼 것이다.

정해인이라면, 분명 눈치채고. 더욱 좋은 결과를 얻어내겠지.

그라면 반드시 그 틈새를 파고들어 더 큰 성과를 거둘 것임을, 천여울은 확신했다.

지금까지 너무 편한 길을 걸어왔다.

지금까지 살아남았던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늘 누군가는 쓰러졌고, 그게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이 때로는 죄책감으로 남기도 했다.

“충분해.”

천여울은 스스로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그녀의 목숨 하나, 바치는 정도로도 충분하다고.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숨이 가빠진다.

메어리의 흉포한 기척이 점점 더 가까워진다.

피로와 고통이 온몸을 자극하지만, 마음 한구석은 오히려 평온하다.

“안 됩니다. 성녀님!”

천여울은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자신을 막아서는 팔라딘 들을 밀쳐냈다.

앞으로, 조금 더 앞으로.

동귀어진(同歸於盡).

메어리와 함께 끝을 맞이할 각오가 섰다.

정작 대상은 광기에 찬 웃음을 터뜨리며 소리쳤다.

“드디어… 드디어…!”

그 뒤로, 다른 사도 둘이 그림자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 이 싸움은 비정상적이었다.

천여울은 양손에 힘을 주며, 마나를 짜내듯 끌어올렸다.

자신의 모든 회로를 태우는 마지막 폭발.

‘이 정도면, 충분….

그 순간이었다.

차가운 손길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기척도, 소리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순간, 메어리의 얼굴이 뒤틀리며 질색하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두려움, 불신, 그리고 절망이 섞인 표정.

“묵… 귀?”

묵귀?

그 이명은.

오직 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다.

천여울은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정해인이, 언제 왔는지 모를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손에 내력을 흘려 넣고 있었다.

내력의 흐름이 온몸의 혈도를 따라 번지며, 마력의 폭주가 거짓말처럼 잠잠해졌다.

정해인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그럴 필요 없어.”

정해인은 곧장 옆의 팔라딘을 바라봤다.

“데려가요.”

명령이 떨어지자, 팔라딘은 머뭇거리지 않았다.

순식간에 천여울을 붙잡아, 뒤로 후퇴했다.

‘어?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정해인의 내력이 혈도를 봉인해, 그녀의 힘을 완전히 묶어버린 것이다.

안 돼.

왜?

왜 여기까지 온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보다는 그가 더 인류에게 도움이 된다.

마음속에서 절규가 터져 나온다.

혀마저 굳어, 목소리조차 내지 못한다.

멀어져가는 정해인의 뒷모습.

이젠 되돌릴 수 없는 거리.

강하지만, 사도 셋을 상대로는 무리다.

분명, 반드시, 죽을 것이다.

  • 쾅!!!!!

전장이 폭발음으로 가득 찼다.

그게, 그녀가 본 정해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온몸에서 힘이 빠지고, 끝없는 무력감과 절망, 그리고 차오르는 눈물이 옷깃을 적신다.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의식이 점차 흐려졌고, 그녀는 어느 순간 눈을 떴다.

그리고 천여울은, 그녀가 병상이 아닌, 익숙한 자신의 방에 누워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천여울은 조심스럽게 이불을 걷고 일어났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바깥, 어두운 불빛 아래.

정해인이 조용히 지도를 붙잡고 있었다.

전선의 배치를 다시 손보고, 책상 위에 있는 말판에서 천여울의 이름이 적힌 말을 재빠르게 다른 곳으로 옮겼다.

아직, 전투는 시작되지 않았었다.

정해인은 천여울이 일어났다는 걸 알아챘는지 고개를 돌려 미소 지었다.

“일어났구나.”

천여울은, 정해인을 다시 만났다.

그리고 그게.

천여울이 처음으로 ‘회귀’를 기억해낸 시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