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py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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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KiB
탈락자들이 모여 있는 장소는 오히려 전투 현장보다 시끄러웠다.
백팀은 물론이고, 청팀 학생들까지 전부 정해인의 움직임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전황은 단순했다.
정해인이 유세린을 공략하느냐, 실패하느냐.
그 단 하나의 결과로 최종 승패가 갈리는 상황이었다.
“유세린 화이팅!!”
“정해인 화이팅!!”
양쪽에서 엇갈린 응원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누군가는 정해인의 움직임에 열광했고, 누군가는 유세린의 반격을 기대하며 두 손을 모았다.
그리고 마침내 승패가 결정 난 순간.
탈락자들이 모인 장소의 전광판에 결과가 떠오른다.
[시험 종료!]
[현재 인원]
[청팀 77명] VS [백팀 42명]
[점수 현황]
[4790점] vs [5110점]
[백팀 승리!]
“와아아아!!”
백팀 쪽에서 터져 나온 함성.
청팀은 그대로 허탈하게 주저앉는다.
서로의 희비가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강아린은 그 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화면을 올려다봤다.
“확실히… 훨씬 빠르지?”
그녀의 말에, 옆에 있던 천여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비교는 못해.”
강아린과 천여울의 대화였다.
그녀는 정해인의 성장에 대해 얘기 중이었다.
회귀 전과 이 시점의 그와 지금의 그를 비교하면….
지금이 압도적이다.
성장도, 속도도.
“…….”
그러던 천여울의 시선이 점점 집중된다.
백팀과 청팀이 각자 떠들며 승패에 환호하는 사이, 그녀는 조용히 화면 속 인물의 입 모양을 읽기 위해 입술을 오므렸다.
정해인과 유세린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었다.
전투로 인해 음향 장치가 손상됐는지 잘은 들리지 않았지만, 집중하면 또 들을만도 했다.
“미래를 약속한 사이입니다.”
천여울의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아….’
결국 정해인은 유세린의 질문에 대답해버렸다.
의미는 대충 안다.
물론 성적인 무언가는 아니고, 당연히 입단에 관련된 내용이겠으나.
그런데 문제는 지금 옆에 있는 사람이다.
이걸 들은 강아린이 또 얼마나 기세등등해질지를 떠올리자, 천여울은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유하나가 안 그래도 여행 때문에 기세가 등등한데 강아린마저….
심지어, 화면 속 정해인은 바닥에 드러눕더니 유세린의 옆으로 꼬물거리며 이동했다.
보통 강아린이라면 격한 반응을 보여야 정상이겠으나….
“…….”
그런데 조용하다?
천여울은 잠깐 당황했다.
조용히 고개를 돌려 그쪽을 바라봤다.
강아린은 마치 막 사랑을 자각한 십 대처럼, 두 손을 볼에 올린 채,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눈동자는 흔들린다.
“어떡해….”
강아린은 손바닥으로 볼을 쓸어내며 속삭였다.
그 모습에 천여울은 말없이 입을 다물었다.
평소의 그녀와 정반대인 의외인 모습에 벙쪘다고도 볼 수 있겠다.
“너 뭐해…?”
그러다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기말고사는 종료됐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숨이 조금 쉬어졌다.
시험이라는 건 늘 그렇다.
그게 크든 작든, 눈앞에 있으면 사람을 불편하게 만든다.
어쨌든 무언가를 증명해야 한다는 거니까.
잘하고 있어도, 혹은 못 하고 있어도 불안해지는 느낌.
그게 이제, 끝났다.
시험이 종료되자마자, 운영 측은 재빠르게 시상 준비에 들어갔다.
장내는 여전히 어수선했다.
청팀은 아쉬움에, 백팀은 환호성에.
탈락자들까지 뒤섞여, 시끌벅적한 열기만이 가득했다.
“고생했어어….”
백팀인 천여울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윤채하도 눈치를 보며 그 뒤를 따랐다.
“너희도 고생했어. 일로 와.”
나는 장난스럽게 손짓했다.
그 모습에 둘 다 환히 웃더니, 그대로 내게 달려왔다.
-
따악!
-
딱!
“읏!”
“악.”
두 사람의 이마에 딱밤을 하나씩 선물했다.
천여울은 살짝 더 세게. 왠지 면역이 생겼을 것 같아서.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얘가 가자고 했어!”
천여울은 곧장 윤채하를 지목했다.
그러자마자.
- 딱!
“으읏…!”
나는 망설임 없이 그녀의 이마에 한 번 더 딱밤을 날렸다.
왠지 거짓말일 것 같아서.
아니면 말고.
천여울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주저앉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어깨를 조심스레 움찔거린다.
그렇게 몇 초간 움찔거리더니, 다시 조용히 일어났다.
지금도 제법 얼굴이 붉은데, 이번엔 이마까지 발갛게 물들었다.
그런데도 그녀의 입꼬리는 살짝 올라가 있었다.
“… 화는 풀렸어?”
그때 옆에 있던 윤채하가 슬쩍 다가와 물었다.
“… 화는 무슨.”
그냥 좀 웃겼을 뿐이다.
“미안해. 이길 수 있을 줄 알았어.”
둘이 모였다면 충분히 가능할 거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사실 뭐, 나도 해볼 만하다고는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그 말은 삼켰다.
“정해인 학생~”
그때, 멀리서 교관의 목소리가 장내를 울렸다.
나를 찾는 듯했다.
“네?”
“시상식 시작해! 트로피만 들어줘!”
아무래도 트로피를 들게 되는 건 나였나보다.
[MVP 정해인]
전광판에 크게 박혀있는 이름.
살짝 낯간지러웠다.
뭘 이런 걸 또….
그렇게 셋은 나란히 걸음을 옮겼다.
백팀의 승리 세레모니를 위해 우리는 전부 모였다.
““정해인! 정해인!””
학생들이 내 이름을 연호한다.
이제는 축하받을 차례였다.
시험이 끝난 이후, 가온의 분위기는 평화로웠다.
온 부지에 여유와 해방감이 가득하다.
원래 어떤 학교든 시험 직후의 며칠, 그리고 방학까지의 그 공백은 너무나도 평화로운 법이니까.
중간과 기말을 합산해 최종 성적을 내는 시기.
교관과 교수들은 점수 정산과 순위 조정을 위해 분주했지만 정작 학생들에겐 아무 터치도 없었다.
“오늘도 자습입니다~”
교관은 한마디 말을 남기고 재빠르게 밖으로 나갔다.
‘이래도 되나?’
싶지만, 이래도 된다.
어차피 모든 진도는 이미 다 나간 후였으니까.
덕분에, 학생들은 가온 곳곳에서 쾌락을 찾아 몰려다녔다.
부지의 호수에서 수영하는 이도 있었고, 호숫가에 돗자리를 깔고 낮잠을 때리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요즘 학생들이 가장 많이 몰리는 곳은 따로 있다.
“또 그거 하러 가?”
“아니 재밌다니까. 빨리 가야돼. 자리 없어.”
여러 학생이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흥분한 얼굴로 어딘가로 향했다.
그 화제의 중심은 바로, 내가 속한 동아리방.
보드게임 동아리였다.
영광의 지원은 거짓이 아니었는지, 보드게임 동아리는 기말고사 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중에서도 단연 화제는, 신작 보드게임.
[THE ROUTE : 더 루트]
이름은 거창하지만, 쉽게 말해 이세계 가상현실 인생게임이다.
룰은 단순하다.
주사위를 굴려 내 말을 이동시킨다.
다만, 그 다음이 다르다.
플레이어는 각자의 루트대로 살아가게 된다.
용사의 길을 걷든, 마법사가 되든, 혹은… 용병을 하다 길을 잃고 떠돌게 되든.
모든 것은 플레이어의 선택, 그리고 운에 달렸다.
풀 시뮬레이션 기반의 몰입형 보드게임.
플레이어는 단지, 즐기기만 하면 된다.
나도 해보고 싶긴 했는데… 문제는 인기였다.
비어있는 방을 잡기가 어렵다. 인기가 워낙 많아서.
그러나 그때.
[RIN]: 보드게임 동아리원 정해인씨?
[belief_]: 어 왜?
[RIN]: 영광이 이번에 지원한 신작 게임 테스트 좀 해보자. 동아리원이니까 와야지? 점심 끝나고 동방으로 와~
강아린이 나를 호출했다.
“오.”
좋은 기회였다.
둘이 하는 것도 꽤 재밌을….
아니다 그냥, 이 기회에 다 같이 모여서 게임이나 해볼까?
어차피 시험도 끝났고, 앞으로도 함께 고생할 동료들이다.
실은 오늘 유하나와 하시온을 불러두긴 했다.
히든 상점에서 얻은 물약들.
하나하나 갖다주기가 귀찮아서 모이라고 했었다.
"장소만 바꾸면 되겠네."
나는 바뀐 장소를 유하나와 하시온에게 전송했다.
“여울아, 채하야. 가자.”
우리는 그렇게 동아리 방으로 향했다.
이제부터는 놀 시간이다.
강아린을 위한 깜짝 서프라이즈 멤버들도 함께.
보드게임 동아리방.
마치 보드게임 카페처럼 각 방이 독립된 구조로 나누어져 있었다.
우리가 들어간 방은 6인용.
거대한 방과 중앙의 원형 보드 테이블, 천장에는 고정된 프로젝터가 대기 중이었다.
“이거 받아.”
나는 도착하자마자 영약을 꺼내 그녀들에게 하나씩 건넸다.
“이게 모야?”
다들 궁금해하는 표정을 짓는 가운데.
시온이 가장 먼저 물었다.
“몸에 좋은 거고, 막 마시지는 말고 잘 갖고 있어. 내가 갖고 나오라고 할 때 갖고 나오면 돼.”
여기 있는 사람들은 전부 내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기 때문인지.
전부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 사람, 강아린만 빼고.
"영약 좋지… 좋은데… 대체 왜 둘에서 여섯이 된 거야?“
강아린이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사람 많으면 좋잖아.”
“……후우.”
툴툴거리면서도, 강아린은 테이블 밑에서 뭔가를 꺼냈다.
육면체의 금속 큐브.
표면에는 선명하게 제목이 쓰여 있다.
[THE ROUTE : 더 루트]
작동하면, 이 커다란 방 자체가 시뮬레이션 공간이 될 것이다.
“다들 이거 알아?”
강아린이 나머지 다섯 명에게 물었다.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이고 누군가를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어려울 건 없고… 그냥 시작하면 알게 될 거야.”
강아린이 툭 내뱉었다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근데, 하나 경고는 할게.”
그녀는 큐브의 옆면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그곳엔 [Prototype]이라는 작고 은은한 표식이 박혀 있었다.
“시중에 나온 버전은 몰입 상한선이 있어. 위험하니까, 일부러 감각 동기화를 줄여둔 거야.”
모두의 시선이 큐브에 쏠린다.
“근데 이건 달라. 아직 시중에 안 풀린 프로토타입이고, 감각 동기화 제한도 없어. 진짜 그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게 돼.”
“그게 말이 돼?”
옆에서 천여울이 반쯤 웃으며 물었다.
강아린은 피식 웃었다.
“직접 해보면 알게 될 걸? 왜 시판은 제한을 걸어뒀는지.”
그리고 마지막 한 마디를 덧붙였다.
“참고로… 이거는 성인용 게임이란 거 알아 둬.”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강아린이 큐브 상단의 버튼을 꾹 눌렀다.
“시작하자.”
어차피 이곳에 온 여섯 명 모두, 딱히 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나갈 생각은 없어 보였다.
- 우우우웅.
저음의 기계음과 함께 방 전체에 푸른 조명이 퍼졌다.
중앙 테이블 위로 투명한 홀로그램 보드가 펼쳐지고, 큐브 중앙에서 우아한 여성의 형상이 솟아올랐다.
모양새로 보건대, 일단 신적인 존재의 컨셉인 건 확실해 보였다.
이 게임의 시스템 여신 쯤 되는 느낌.
[여러분들은 선택받았습니다. 여러분들의 손으로 길을 개척하세요.]
“오…”
“우와…”
다들 생각보다 뛰어난 기술력에 감탄했다.
생각보다 본격적이다.
벌써 몰입이 되는 느낌.
[당신의 운명을 점칩니다. 수정구에 손을 올려주세요.]
그 음성과 함께, 눈앞에 수정구 하나가 공중에 떠올랐다.
“누구부터 할래?”
강아린이 묻자, 시온이 번쩍 손을 들었다.
“나!”
그리고 중앙의 수정구에 손을 올렸다.
수정구가 빛을 내며 우우웅 거리더니.
빛이 퍼지고, 수정구는 따뜻한 주황빛으로 물들었다.
[당신은 공작가의 막내딸입니다.]
“어? 공작이면 좀 좋은 거 아냐?”
시온이 양손으로 손뼉을 치며 감탄한다.
확실히 귀족이면 여러 가지 루트도 많을 것 같긴 하다.
“부럽다….”
누군가가 중얼거리자, 분위기가 금세 달아올랐다.
몇몇은 뚱한 표정이었으나 어느새 다들 몰입하고 있었다.
다음은 윤채하였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손을 올리자, 수정구가 곧장 검게 물들었다.
[당신은 흑마법사입니다.]
“뭐?”
윤채하가 굳은 얼굴로 수정구를 내려다봤다.
“… 내가 흑마법사?”
망연자실한 표정.
게임이 뭘 좀 아는 모양이다.
사람 잘 골랐다.
그리고 차례대로.
강아린.
수정구가 은회색 빛을 띠더니, 곧 안내 음성이 이어졌다.
[당신은 왕국의 기사입니다.]
그다음 천여울.
손을 올리자, 수정구가 맑은 하늘색으로 깜빡인다.
[당신은 하급 사제입니다.]
마지막은 유하나.
그녀가 손을 올리자 수정구가 갑자기 미친 듯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 윙 윙 윙.
다들 눈을 찌푸릴 정도로 강한 빛.
그리고 이어지는 메시지.
[축하합니다! 당신은 용사입니다!]
다들 동시에 유하나를 쳐다본다.
“… 좋은 거야 이거?”
유하나는 당황한 듯 웃으며 손을 뗐다.
그녀는 용사였다.
누가 봐도 가장 좋아 보이는 직업이었기에 다들 부러운 눈치를 보냈다.
“멋있는데?”
나는 그렇게 말하며 수정구로 향했다.
드디어 마지막, 내 차례였다.
슬슬 내가 무슨 직업일지 기대되는 상황.
나는 아무 말 없이, 수정구에 손을 올렸다.
- 우우우웅….
그러자 수정구가 초록색으로 물들었다.
초록색?
드루이드?
아니면 연금술사?
나는 부푼 가슴을 안고 안내를 기다렸다.
[당신은 농부입니다.]
“?”
나는 블루베리를 재배하는 농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