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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진실 하나. 방구석 마법사를 인질로 잡아봤자 돈을 얼마 못 받지만, 귀족을 인질로 잡으면 돈을 많이 받는다.
그리고 그게 귀족들이 꼭 호위 기사를 데리고 다니는 이유였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기물을 정렬하는 여자에게서 시선을 떼고, 여자의 뒤에 선 남자를 흘긋 살폈다.
갈색 머리와 갈색 눈. 여자와 똑같이 제국에서 가장 흔한 머리카락과 눈이었다.
다만 저 남자의 머리카락과 눈은 진짜고, 여자는 변장일 것이었다. 마도구라도 썼겠지.
대체 누구길래 변장까지 하고 체스 클럽을 들락날락하는 걸까.
후작가 영애?
아니면 공작가?
황녀일 수도 있지만, 아닐 거다.
황가의 사람들이 얼마나 바쁜 줄 아는가. 그들은 24시간 내내 교육을 받았다. 이런 곳에서 놀 여유 자체가 없었다.
사실 나도 잘 모르지만, 황가잖아.
내 생각이 맞겠지.
아무튼.
눈앞의 여자가 고위 귀족의 영애라면 큰 실례를 한 게 됐다.
물론 지금은 변장 중이니 실례를 해도 괜찮았지만, 원한은 변장과 상관없이 쌓이지 않나?
리스크 관리를 해줄 필요가 있었다.
나는 입술을 뗐다.
“그럼 한 판 할까요?”
“좋아요.”
변장 영애는 가장 끝의 병사를 2칸 앞으로 옮겼다. 로얄 갬빗. 가장 강한 기물인 ‘로얄나이트’를 가장 빨리 진화시키는 오프닝이었다.
너도 이거야?
쉐이드 그레이프턴에서 만났던 도련님과 똑같은 오프닝을 즐겨 쓰는 변장 영애라.
이러면….
나는 가장 끝의, 암살자 앞의 병사를 한 칸 앞으로 옮겼다.
팬텀 어택. 굉장히 가볍고 공격적인 오프닝이었다.
다만 그만큼 손실률이 높아 안정적이지 못했는데, 그래서 안전성이 뛰어난 오프닝을 상대로 약한 모습을 보이곤 했다.
그래.
묵묵히 ‘로얄나이트’를 진화시키고 한 방 크게 때리는 로얄 갬빗에게 상성이 잡히는 오프닝이라는 뜻이었다.
접대 체스.
그것은 높으신 분 상대로 적당히 봐주며 게임을 하는 걸 말한다.
이 접대 체스의 핵심은 봐주는 중이라는 걸 상대가 모르게 하는 건데, 그러기 위해선 조절이 필수였다.
나 같은 경우 불리한 오프닝을 고른 후 평범한 수만 두는 방식을 즐겨 썼다.
여기서 중요한 건 몰입이었다.
정말 내가 평범한 수만 떠올리는 실력이 됐다고 메소드 연기를 펼쳐야 상대가 진심으로 기뻐했다.
내가 갑옷을 벗어 던지고 단검만 들자, 변장 영애는 기꺼이 성벽을 쌓아 올렸다.
나는 그곳으로 돌진했다. 광전사처럼 무모하게.
결과는 금방 나왔다.
당연히.
내 암살자가 변장 영애의 왕을 도륙 내버렸다.
“체스 광전사다.”
“생긴 대로 체스를 두는구만.”
주변의 웅성임을 들으며 나는 태연히 벌꿀주를 주문했다.
변수가 발생했다.
내 메소드 연기는 완벽했다. 정말 나는 지극히 평범한 수만 뒀다.
단지 그 지극히 평범한 수를 변장 영애는 버티지 못했을 뿐이었다.
살짝 더 하향 조정해야겠다.
나는 차분히 물었다.
“한 판 더 둘까요?”
이대로 끝나면 변장 영애는 패배의 기억만 남긴 채 체스 클럽을 떠났다. 원한 리스크를 지워버리겠다던 내 목표와 멀어지는 거다.
반드시 변장 영애에게 기분 좋은 승리를 안길 생각으로 내가 게임을 더 권하자, 변장 영애가 고개를 끄덕였다.
변장 영애는 이번엔 나이트 게임을 사용했다. 정석 중의 정석이었다.
나는 거기에 맞춰 매지션 디펜스를 썼다.
디펜스라는 이름이 붙은 것에서 눈치챘겠지만 수비적인 오프닝이었는데, 마법사라는 기물 자체가 기사한테 약해서. 보통은 기사의 공세를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그걸 변장 영애도 아는지 정석적으로 기사를 전개한다.
나 또한 정석적으로 수비 포석을 갖췄다.
그리고.
내 마법사가 변장 영애의 왕을 불태워 죽여버렸다.
“방금 기보는 역사에 남겨야 돼!”
“최종 변신을 마친 마법사를 희생해 일반 마법사로 체크 메이트라니!”
이상하다. 왜 또 이겼지.
분명 평범한 수만 뒀을 텐데.
이것보다 더 하향해야 돼?
변장 영애의 호흡이 가빠졌다. 당장 암살자를 불러 내 목을 쓱싹할 계획에 흥분한 게 분명했다.
안 돼. 이대로 가면 마법을 전부 익히지 못한 상태로 죽고 말아.
“한 판 더 하죠?”
“좋아요.”
변장 영애는 호흡을 고르고 매지션 게임을 사용했다.
나이트 게임도 그렇고 매지션 게임도 그렇고, 정석을 어지간히 좋아했다.
나는 그에 맞춰 가장 끝 병사를 두 칸 앞으로 옮겼다.
로얄 갬빗.
같은 후반 지향 오프닝인 매지션 게임에게 상성이 안 좋은 오프닝이었다.
자.
이번에야말로 패배하겠어!
“저 아가씨 일부러 상성이 불리한 오프닝을 전개한 후 상대를 숨도 못 쉬게 두들겨 패고 있어!”
“체스의 악마다!”
“괴물이다!”
게임의 결과는 굳이 말하지 않고 관전자의 반응으로 대신하겠다.
이제 와서 고백하면 내 접대 체스는 늘 결과가 안 좋았다.
내 메소드 연기는 완벽했지만, 별개로 항상 상대가 패배했다.
그래도 켈튼과 수련을 거쳐 강해진 터라 이번엔 될 줄 알았는데, 또 실패였나.
아쉬웠다.
“그래도 제 말이 맞긴 했죠?”
내가 웃으며 말하자, 변장 영애는 진실을 깨달은 사람처럼 몸을 부들부들 떨고는 나직이 대답했다.
“당신도 여자잖아요.”
“저는 성별을 초월한 역사상 최고 체스 플레이어니까요. 이레귤러는 표본에서 제외하는 게 규칙이랍니다.”
“이름이 뭐죠?”
“징크스예요.”
여기서 내 호구조사를 하는 이유는 뻔했다.
암살자를 보내기 위해서였다.
때문에 나는 적당한 가명을 뱉었다.
전생에 했던 유명 게임 캐릭터의 이름이니 이 녀석을 죽이기 위해선 차원을 넘어야 됐다.
“아가씨. 저 사람은 루이나입니다.”
허나 직후 뒤에 서 있던 남자가 끼어들었다.
그러자 변장 영애가 눈을 깜빡였다.
“루이나 님이라고요?”
“네. 이번 소문의 주인공입니다.”
“아! 악신의 사제와 싸웠다는!”
“정확히는 악신의 사제와 싸운 마법사의 제자입니다.”
“제자가 아니라 친구예요. 그리고 저도 싸웠어요.”
그나저나 내 이름은 어떻게 알지?
내 의문에 남자는 눈을 날카롭게 뜨며 말했다.
“연극을 하면서 온천수를 팔았으니까.”
크리스의 일인극이 큰 역할을 했구나.
확실히 크리스가 대상인의 자질이 있는 게, 자잘한 재능이 참 많았다.
그중 하나가 연기였는데, 이건 직접 봐야 됐다. 얼마나 잘했으면 사건을 직접 겪은 나조차 흥미진진하게 연극을 봤겠는가.
사실 각색을 너무 해 아예 다른 얘기가 돼 버린 바람에 흥미롭게 본 거긴 했지만, 그래도 연기를 잘하는 건 맞으니까. 넘어가자.
“루이나 님?”
“뭐든지 말하세요.”
“왜 가명을 쓰셨죠?”
“제가 습관적으로 가명을 쓰는 병이 있어서요.”
“그런가요.”
내 진실한 답변에 변장 영애는 체스 기물을 만지작거렸다.
그 우물쭈물한 모습에 나는 과거를 떠올렸다.
이번 생을 넘어 전생의 과거를.
저건 학창 시절에, 특히 반이 바뀌었을 때 주로 나오는 반응이었다.
친구를 사귀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친구가 되는지 모르겠고, 그걸 넘어 친구의 정의가 뭔지 고민하는 순간에 나오는 반응이라는 뜻이다.
아닐 수도 있다. 저걸 내가 직접 경험한 건 아니라.
나는 그런 사람보다 더 뒤에서 모든 걸 은밀히 관찰하는 역할을 주로 맡았었다.
지금 생각하면 나야말로 마법사가 아니라 암살자에 더 어울리지 않았을까?
그래도 마법을 배웠겠지만.
저 상태를 해결해 주는 건 쉬웠다.
나는 손을 내밀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즐거웠어요. 다음에도 종종 체스 둬요.”
“…네. 저도 즐거웠어요. 저는 타시아라고 해요.”
가명인가 싶었지만, 뒤의 수행원이 움찔거린 걸 봐선 진명이 맞는 듯했다.
나는 주변 신사들의 반응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 어떤 신사도 ‘무슨 무슨 가문의 타시아?!’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누군지 모르는 것이다.
생각보다 고위 귀족이 아닌가?
별 상관은 없었으나, 묘하게 김이 샜다.
아쉽네.
나는 들뜬 표정으로 클럽을 떠나는 타시아를 빤히 보다가, 파이프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런 취급을 받고도 친구가 되고 싶어 하다니.
어지간히 취향이 독특한가 보다.
담배 연기를 천장에 흘려보낸 나는 이내 천천히 질문했다.
“그래서 다음 분 있나요?”
“아가씨. 아…타시아 님. 무슨 생각입니까.”
헤이즈는 타시아의 옆에 붙으며 작게 속삭였다.
타시아는 거리를 걸으며 기분 좋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헤이즈. 그거 알아? 루이나는 나를 고위 귀족의 영애라고 생각했어.”
“정말입니까?”
“응. 반응을 보면 알아. 그런데도 그런 태도라니, 흥미롭지 않아?”
“하아.”
헤이즈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어렸을 때부터 별궁에 갇혀 지낸 탓일까. 타시아는 꽤 뒤틀린 취향을 가지게 됐다.
지금 이건 그 흔적 중 하나였다.
“타시아 님. 화염 마법사에 대한 격언을 아십니까?”
“화상을 입은 화염 마법사는 정신이 나갔으니 조심해라?”
“그건 사실 손이나 팔 따위에 화상을 입은 녀석들을 일컫는 격언입니다. 그 여자처럼 전신 화상은 애초에 논외입니다.”
“체스 실력도 논외고 화상도 논외네 루이나는.”
이미 흥미가 생겨버려서인지 루이나와 관련된 모든 말이 긍정적으로 들리는 타시아였다.
저 상태가 된 타시아는 아무도 못 말렸다.
틀렸다.
헤이즈는 고개를 젓고는 말을 꺼냈다.
“지금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만 인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건 나도 알아 헤이즈. 그래서 마지막으로 나들이 나온 거잖아.”
타시아는 체스 클럽을 한 번 돌아봤다가, 재차 걸음을 옮겼다.
“헤이즈.”
“네.”
“황궁으로 돌아가자.”
“루이나 님. 성배의 소재가 파악된 듯합니다.”
“그게 정말인가요.”
나는 입에 빵을 쑤셔 넣다 말고 놀랐다.
설마 진짜로 성배의 행방을 찾아올 줄은 몰랐다.
레온은 자리에 앉으며 말을 이었다.
“다만 소문이 진짜라면 주인은 이미 있습니다.”
“그럴 거 같았어요. 누가 소유주인가요.”
내가 궁금해 묻자, 레온은 테이블 위의 우유를 들이켜고는 낮게 읊조렸다.
“제2 황자, 이사크 에테르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