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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색 눈을 가진 아이
누가 봐도 악마 소환 의식으로 보이는 현장.
왜 내가 여기에 소환되었을까, 짐작 가는 바는……솔직히 너무 많아서 오히려 잘 모르겠다.
마계를 정복해 버린 것 때문일 수도 있겠고, 마왕을 죽이고 칼레온을 빼앗은 것 때문일 수도 있겠고.
그것도 아니면 그냥 탑에서 최초로 입장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내가 가진 어떤 조건이 마침 들어맞았을 수도 있을 거다.
이것도 억까라고 하면 억까인가. 내가 예외 상황에 놓인 게 한두 번도 아니다 보니, 이제 별로 신경은 안 쓰이긴 하는데.
아무튼 생각해 봐야 할 요소는 잔뜩 있다. 하지만 그 모든 요소에도 불구하고, 이 녀석은 죽여도 상관없을 거다.
“뭐, 뭐냐! 억제 마법진은 아직 작동하고 있을 터!”
내가 결계를 무시하고 나오자, 크게 당황하며 나불거리는 소환자. 단순히 움직임만 막는 결계가 아니었나 보다.
하지만 억제라고 해봤자 천계 전체에 퍼져있던 그것만 할까. 일개 마법사가 내 힘을 어떻게 억제하겠어.
지난 층의 짐승들도 무슨 디버프를 거는 게 있는 것 같았지만, 자연스럽게 저항 판정이 떴었고.
[구속의 마법진이 당신을 구속합니다- 저항하였습니다.]
[억제의 마법진이 당신을 억제합니다- 저항하였습니다.]
[봉인의 마법진이 당신을 봉인합니다- 저항하였습니다.]
이거 봐라, 지금도 바로 뜨네. 마법진만 세 개나 준비해 둔 모양인데, 급이 떨어지면 숫자가 많아도 의미가 없지.
“백 명의 순결한 처녀를 제물로 바쳐 연성한 마법진이 통하지 않는다니! 대체 얼마나 고위의 존재가 소환된 거지…?!”
가만히 있으니 개소리를 지껄이는 소환자. 이깟 쓰레기 같은 결계를 만들겠다고 사람 백 명을 죽였단 말인가.
하는 짓은 쓰레기 중의 쓰레기에, 재주까지 빈약하니 이만큼 혐오스러운 인종은 달리 없겠군.
-우드득!
나는 단검을 쥔 소환자의 손목을 가볍게 두 바퀴 정도 돌려서 뜯어냈다.
그대로 비명을 지르며 피를 흘리는 놈의 머리통을 인벤토리에서 꺼낸 메이스로 후려갈겼다.
으적, 골통이 말 그대로 박살 나며 놈은 즉사했다. 놈에게 붙들려 있던 어린애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아이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회색 눈동자가 흐릿하게 내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딱 봐도 무척 험한 꼴을 당한 것 같다. 아슬아슬하게 살아 있긴 하지만 상태가 보통 안 좋은 게 아니다.
겉도 별로 멀쩡하지는 않지만, 속이 완전히 엉망진창이군. 이건 살기 글렀겠어.
“하하하, 멍청한 길버트! 그러게 정석대로 계약진을 그리라고 말했건만! 저 모독의 짐승은 내가 차지하겠다!”
그러던 중, 소환자가 아닌 다른 놈들이 저마다 마력을 일으켜 뭔가를 전개하기 시작했다.
악마소환을 자행하던 놈들 아니랄까 봐 아주 콩가루구만, 이놈들도 싹 다 죽여도 되겠어.
나는 주저앉은 아이를 내버려두고, 무기를 장검으로 교체했다.
다수의 적을 상대할 때는 오러를 길게 확장해 쓸 수 있는 장검이 더 편할 거란 계산에서였다.
숙련도에 따른 차이 때문인지, 이렇게 평소에 쓰던 것과 비슷한 형태의 장검이 가장 오러를 씌우기가 쉽더라고.
[위압]
10층에서 손에 넣었던 위압 스킬을 광역으로 전개한다.
이건 마력을 흩뿌려서 적을 위축시키는 스킬인데, 그동안은 소모하는 마력량에 비해 효과가 약해서 잘 쓰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마력운용 방식을 한번 갈아엎고 오러를 익히면서 효율이 좋아졌으니, 이럴 때는 써봄직했다.
신체능력이 부족한 다수의 약한 적이 상대일 때 말이다.
-털썩, 털썩.
내 마력의 압박을 이기지 못한 몇 놈들이 거품을 물고 픽 쓰러진다.
다른 마법사들도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로 손을 벌벌 떨었다. 각자 전개하던 마법에 몇 군데 구멍이 났다.
집중력 수준 하고는, 형편없구만.
[신속] 스킬을 사용해 바로 파고들어, 가장 많은 마력을 갖고 있는 마법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놈은 제법 빠른 속도로 방어마법을 전개했지만, 오러는 그런 것을 모조리 무시하고 목을 날려버렸다.
그동안 마법사와는 싸워본 적이 별로 없었다. 이렇게 다수의 마법사를 한 번에 상대하는 건 아예 처음이기도 하다.
하지만 육체 단련의 정도가 형편없기 때문인지, 이놈들은 내 접근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이래서는 그냥 잡몹 무더기를 상대하는 것과 다른 부분이 없다.
-서걱!
길게 확장시킨 오러를 크게 휘둘러 주변의 마법사들을 모조리 베어냈다.
칼질 한 번에 최소 세 명이 휘말리고, 휘말린 놈들은 제대로 반응도 못 하고 그대로 썰려나간다.
18층의 수준이래봤자 이 정도인 거겠지, 이딴 것들은 백이 있건 천이 있건 똑같은 병풍이다.
정체불명의 악마소환자들을 전멸시키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업적 달성 : 혈사교 토벌]
**
마력감지를 전개해 주변에 다른 적이 더 없는지 살폈다.
범위 안에 다른 생명반응 없음, 딱 하나- 아슬아슬하게 목숨이 붙어 있는 어린아이만이 반응을 보이고 있다.
아마 이 혈사교인가 뭔가 하는 놈들이 인신공양에 쓰려는 목적으로 구해 온 꼬마인 것 같은데.
가능하면 살려주고 싶은데, 이건 이미 숨넘어가기 직전……아니, 이미 반쯤 숨이 넘어가 있다.
솔직히 내가 싸우는 도중에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신기하게 아직도 어찌저찌 살아 있네.
하지만 내가 가진 포션으로 치료하긴 힘들 것 같은데, 차라리 숨을 끊어줘야 하나.
“엄마……”
죽어가는 아이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냥 듣고 넘기기 힘든 말이었다.
그래, 사람된 도리로서 일단은 할 수 있는 데까지는 다 해보자.
인벤토리에서 망토를 꺼내 바닥에 깔고, 아이를 그 위에 눕힌 다음 포션을 꺼냈다.
내가 가진 것 중에서 가장 효과가 센 포션, 다만 이 포션에는 한 가지 부작용이 있다.
상처를 재생시키는 대신, 사용자의 기력을 소모한다는 것.
[초재생] 스킬을 보유하고 있는 나는 상관이 없지만, 잘못 사용하면 오히려 쇠약사를 유발한다.
특히 이렇게 숨넘어가기 직전의 꼬마라면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이 포션이 아니면 아예 살아날 가망이 없다.
엘릭서 같은 거라도 있다면 좋았겠지만, 지금은 낮은 확률일지라도 행운에 기대어 보는 수밖에.
-주르륵.
아이의 상처 난 몸에 포션을 꼼꼼히 바르고, 입가에 조심히 포션을 한두 방울씩 흘려 넣었다.
그에 더해 오염을 씻어주고 독을 해독하는 효과가 있는 [정화] 스킬을 사용해 준다.
아이는 입가로 흘러들어오는 포션의 감촉에 살짝 눈을 떴다. 나는 말했다.
“살고 싶으면 마셔.”
아이는 희미한 회색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며, 조금씩 목과 입술을 움직여 포션을 마셨다.
살고자 하는 의지는 충분한 것 같다. 그 의지가 기력이 되어 주면 좋겠는데.
환자를 돌보는 방법 같은 건 모른다. 하지만 기본적인 응급조치나 구호법 정도는 대충 알고 있다.
다크엘프 정찰대에 소속되어 있을 때, 알아두면 좋다며 가르쳐 주려는 이들이 있었으니까.
내 마력을 조금씩 불어넣어 포션의 효력을 가속하고, 아이의 기력을 보충해 준다.
“어휴……”
마법을 배울 생각에 기대하고 있었는데, 이게 뭐 하고 있는 건지.
**
이제 와서 생각난 건데, 이 정체불명의 집단을 전멸시키면 안 됐던 것 같다.
최소한 한 명 정도는 살려두고 이게 다 무슨 상황인지 물어봤어야 하는 건데, 싸우느라 그 생각을 못했네.
그뿐만이 아니라, 마법사 몇 놈을 살려서 이 꼬마를 살리라고 시킬 수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딴 수준의 마법사들이 뭘 할 수 있을까 싶지만, 대충 인신공양을 이용하면 뭔가 방법이 있지 않았겠어?
다른 마법사 몇 명의 목숨을 바쳐서 이 꼬마를 살린다거나, 뭐 그런 거.
아무튼, 아이의 치료를 시작하고 대충 십여 분이 지났다.
제대로 회복될 가능성은 정말 얼마 안 됐는데, 기적이라도 일어난 건지 아이는 잘 회복되었다.
완전히 멀쩡해진 건 아니지만, 아무튼 죽음의 위기는 벗어난 상태.
“……악마님이야?”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아이는 나를 보자마자 그렇게 말했다. 살려준 사람한테 말이 심하네.
뭔가 특별한 기믹이나 장치가 있어서 내가 악마로 보이는 건가……그건 아닌 것 같은데.
악마 소환 의식에서 소환되었으니, 생긴 거랑은 별개로 그냥 악마로 여기는 걸까.
“이상한 아저씨들이 악마님을 불러낼 거라고 했어……나를 써서 악마님에게 소원을 빌 거라고 했어.”
그러고보니, 이 애의 목숨을 이용해서 나를 종으로 삼겠다니 뭐니 했었지. 제물이었나.
“악마님, 내 소원도 들어주면 안 돼? 나, 엄마한테 가고 싶어……”
아이는 나를 악마라고 부르고 있지만, 악마한테 뭔가를 부탁하는 눈치가 아니다.
나이도 어리고, 혹시 악마가 뭔지 모르는 건가. 대충 소원을 들어주는 요정 같은 거로 생각하는 모양인데.
사람된 도리로서 일단 목숨을 구하긴 했지만, 이런 부탁까지 들어줄 의리는 없지.
[에픽 퀘스트 발생 : 회색 아이와 마법의 서]
내 눈앞에 대뜸 떠오른 이 푸르스름한 알림창만 없었으면 말이다.
“그래, 꼬맹아.”
잠깐이지만 마왕 소리도 들었으니까, 그냥 악마인 셈 치지 뭐.
꼬맹이 하나 엄마한테 데려다 주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