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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빙정의 냉기를 전부 채우려면 시간이 조금 남았다.
서준은 멍하니 빙정을 바라보다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보고 있으면 뭔가 뿌듯한 기분이 들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빙정 멍만 때리고 있으면 시간이 너무 아깝지 않은가?
남는 시간에 새로이 개척한 경지에 대해 고민해볼 심산이었다.
빙궁에서 밍기적대던 백설향이 들었다면 백서준의 정신 건강을 심각하게 걱정했겠지만, 이 자리에 백설향은 없었으니, 정신이상자 이서준은 무공에 대한 고찰을 시작했다.
‘이름을 또 새로 만들어야 되나?’
서준은 별 생각 없이 화경, 극마, 기신경, 화마경을 통합한 괴상망측한 경지의 작명에 대해 고민했다.
혼원경, 합일경, 남궁경… 은 좀 그렇고. 네 경지가 합해졌으니 사합경? 그것도 좀 이상하다.
‘그냥 나중에 할까.’
잠시 입술을 삐죽이던 서준은, 이내 아직 제대로 시작조차 하지 않은 고민을 털어내버렸다.
무학에 대한 고민을 때려치우려는 건 아니었다.
경지의 이름보다도 다른 고민이 필요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아니, 사실은 진작부터 고민했어야 하는 문제다.
자신의 영역, 이상향.
다른 화경들의 영역을 보고 있자면 스스로의 영역에 대해 의문이 든다.
그도 그럴 것이 이상향은 하나의 세계다. 태양이 있고, 달이 있고, 바다가 있고, 나무도 있고, 심심하면 뭐 하나 잡아다 추가하기도 하고.
본디 심상이라는 것이 정원 가꾸듯 부족한 게 보이면 채워다넣는 경우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 만큼, 서준은 그것에서 이질감을 느꼈다.
특히 국소전개가 그렇다.
팔한지옥? 말이 좋아 심상 중 일부를 뚝 떼어낸 것이지, 사실상 서준은 여러 개의 영역을 가진 것이나 다름없다.
‘좋은 거긴 한데.’
도대체 왜 나만? 하는 의문을 떨쳐낼 수가 없다.
그저 재능의 차이로 뭉뚱그리기에는 영 찝찝하다.
이상향이라는 하나의 세계. 그것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왜 자신만이 다른 이들과 다른가. 고민하던 서준은 스스로의 내부를 살폈다.
그의 의식이 천천히 깊은 곳으로 가라앉으며 내부의 소우주를 보았다.
나는 누구인가. 또 만마종주의 싹이란 과연 무엇인가.
눈앞에 펼쳐진 심상 속 세계는 드넓었다. 낮과 밤이 빠르게 스친다. 흐르는 강이 바다와 합쳐지고, 내리는 비가 강물을 채운다.
풀벌레 우는 소리, 금춘봉 뛰는 소리, 부는 바람에 흩날리는 매화, 문득 고개를 들어보면 하늘을 꿰뚫은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자라있다.
‘나는 단순히 만마종주의 싹에 불과한가?’
느닷없이 내던져진 화두가 풍랑을 불러일으킨다.
자신이 이루어낸 것. 그것을 진정 자신이 이루어냈다 할 수 있는가? 내가 아닌 나의 재능이 이루어낸 일이 아닌가?
영역에 대한 고찰로 시작한 고민은 다시금 흐름을 역행한다. 왜 나의 영역은 다른 이들과 다른가. 그저 재능의 차이에 불과한 것인가.
스스로 결론 내리길 재능의 차이로 뭉뚱그리기에는 영 찝찝하다 하였으나, 결국 고민의 종착지는 재능이라는 형이상학적인 무언가로 귀결한다.
영역 그 이전의 것. 내가 이루어낸 것. 그것을 이루어낸 것은 진정 자신인가?
내가 아닌, 나의 재능. 그렇다면 재능이라는 것은 나라는 존재와 분리하여 생각할 수 있는 개념인가?
만약 그렇다 한다면 나는 사실 스스로의 재능에 기댔을 뿐이 아닌가? 그렇다면 재능이 없는 나는 무엇일까.
고민이 깊어진다. 타고난 것. 나라는 존재를 이루는 무언가.
재능은 과연 부여받는 것인가? 그렇다면 누구에게서? 하늘, 아니면 부모?
인간이 태어남에 있어서 스스로의 의지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육신도, 정신도, 부모에게서 비롯되는 것.
그렇다면 진정으로 인간이 이루어내는 것이란 무엇인가.
재능이 그저 누군가에게서 받아낸 것이라면, 그와 마찬가지로 육신과 정신마저 스스로에게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면, 결국 나라는 존재는 무엇인가.
‘어이, 서삣삐.’
내면의 기가 춘봉이 엄지를 치켜든다.
‘스탑 띵킹. 쉽게 생각해 봐.’
서준은 내면의 기가 춘봉을 보았다. 탐스럽게 부풀어오른 볼따구가 보인다. 저 볼따구는 과연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저 귀여움, 외모. 그 역시 타고나는 것.
그것은 금춘봉의 것인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
자신은 이미 그 답을 알고 있다. 금춘봉의 귀여움은 그 자체로 고유한 것. 삼라만상의 진리와 맞닿은 하나의 절대 명제다.
외모 역시 재능이다. 타고난 것이나, 갈고닦아 한층 빛날 수 있다.
그 외모라는 것은 손재주나 기가 막히는 종이 비행기를 발가락으로 접어낼 수 있는 능력 따위와 근본적으로 전혀 다를 게 없다.(쓸모가 중요한 게 아니다.)
환골탈태한 금춘봉이 그 볼살만은 지켜냈듯, 그 귀여움은 단순히 타고난 것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것은 그녀의 노력과 시간, 운, 선택 따위의 여러 요소가 뒤섞여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타고난 비중이 크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건 원래 세상 이치라 어쩔 수가 없다.)
반례로 백설향이 있다.
그녀는 천성적인 집순이의 재능을 타고났으나, 궁주라는 무거운 책임이 그녀의 재능을 채 꽃피우지 못하게 했다.
(다시 말하지만 그것이 이로운 일인가 해로운 일인가는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만약 그녀가 빙궁의 우두머리라는 책임을 지니고 있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스승이라는 존재 없이도 스스로 제 재능을 활짝 꽃피웠을 것이다.
일류에서 그치는 집순이가 아닌, 진정한 화경, 혹은 현경에 다다른 지고한 집순이의 경지에 이르렀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재능이라….’
서준은 두서없이 펼쳐진 생각들을 가만히 살폈다.
제자리를 맴돌던 의미 없는 고민이 한 발짝 나아간다.
서준은 고개를 들어 심상의 밤하늘 속 찬란하게 빛나는 별들을 보았다.
세상 사람들은 밤하늘에 빛나는 별을 동경하면서도 미워한다.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서 빛나길 바라면서도, 그것을 끌어내리고 싶어한다.
무엇 하나 타고나지 않는 것이 없는 존재가 인간이다.
그들이 선망하고, 또 질시하는 재능이라는 형이상학적인 개념은 인간을 이루는 하나의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
스스로의 선택과 별개로 이미 타고난 것이며, 게임 계정을 새로 파는 것마냥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는 없다.
‘내가 말도 안 되는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혼자 하는 생각에 굳이 겸손 떨지는 않았다. 사실은 사실이다.
서준은 그러다 문득 뛰어난 재능을 타고난 이와 떼려야 뗄 수 없는 통속적인 말을 하나 떠올렸다.
‘운 좋게 재능을 타고났을 뿐이면서.’
운. 세상에 운이라는 것은 과연 존재하는가?
깊고 깊은 삼라만상의 진리 앞에 인간의 식견은 초라하기 짝이 없다.
그들이 운이라 칭하는 무언가는 보다 높은 곳에 존재하는 초월자들에게 있어 필연이요, 태생부터가 스스로 오롯할 수 없는 인간에게 재능이라는 것은 떼어놓을 수 없는 천형이다.
재능은 재능. 나는 나. 재능을 잃은 나는 나이되 그 일부를 잃은 나.
팔다리 한 짝이 떨어진 장애와 다를 것이 없다.
팔이 하나 뚝 떨어졌다고 이서준이 이서준이 아니게 되는 것이 아니듯, 세상 사람들이 무어라 정의하든 나는 나다.
‘어이, 서삣삐. 뭐 어쩌라는 거야.’
기가 춘봉이 바닥에 드러누워 머리를 긁적인다. 서준은 그녀를 보았다.
‘이제 알겠어, 기가 춘봉.’
역행하던 흐름이 다시금 순리를 따른다. 재능과 나. 다시 영역.
‘딱히 알 바 아닌 것 같아.’
뭐 어떻게든 되겠지. 내가 잘난 걸 어쩌라고. 서준은 기가 춘봉이 조언했듯 쉽게 생각했다.
‘영역 뭐 그거 한 서너 개쯤 있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남들과 조금 다르면 어떻고, 그 이면에 뭔가 대단한 진실이 숨어있다 한들 어떤가.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될 일이다.
이미 마음 속은 충분히 복잡하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하지 않던가. 내 마음 역시 그렇다.
복잡하게 얽혀 더 이상 알 도리가 없는 그것에 단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빵빵하게 부풀어오른 금춘봉의 볼따구요, 마음의 양식이 되는 남궁수아의 젖살이요, 인생 그거 뭐 살다 보면 어떻게든 된다는 사실 정도다.
그리하여, 태생부터 오롯할 수 없는 인간이 오롯할 수 있는 길은 오직 무학뿐이라.
나를 오롯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들을 때려부수다 보면 언젠가 오롯해지겠거니─ 과격하게 요약한 궤변을 마음 속에 품은 이서준이 번쩍 눈을 떴다.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내면의 기가 춘봉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게 뭔 개소리야, 서삣삐. 중간 과정이 없는 것 같은데?’
‘아니야, 기가 춘봉. 제대로 정리한 게 맞아.’
뭐 자신에게 사실 엄청난 출생의 비밀이 있다 한들 알 게 뭔가? 아무튼 남들보다 할 수 있는 게 많은 셈이니 좋은 게 좋은 것 아니겠는가.
자신의 재능에 의문을 가질 필요 따위 없다. 어쨌든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이니 ‘완전 럭키비키잖아?’ 하며 잘 쓰면 그만이다.
스스로를 의심하지 않는다면, 결국 자신을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은 외부의 힘뿐이라.
재능이니 뭐니 대충 그까짓 거 내가 잘난 것이요, 하고 퉁쳐버린 서준은 이제 자신을 위협할 것이라고는 자신보다 더 강한 누군가 정도밖에 남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러니 누구보다 강해지면 그곳에 해피 엔딩이 있다.
서준의 설명을 들은 기가 춘봉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걸로 치자, 서삣삐.’
‘그래. 또 보자, 기가 춘봉.’
서준은 기가 춘봉을 배웅한 뒤, 스스로의 안에 자리잡은 굳건한 기둥 하나를 의식했다.
스스로를 향한 확신이다.
그 거대한 나무가 가슴 속에 뿌리내린 채 각기 다른 경지들을 하나로 잇는다.
서준은 스스로 이루어낸 경지가 조금 더 안정된 것을 느꼈다.
그리고 덤으로 눈앞에 둥둥 떠있는 빙정의 충전이 끝난 것도 느꼈다.
“슬슬 가볼까.”
빙궁주가 부탁한 세 번째 일까지 모두 끝마쳤다.
본래 받기로 했던 백윤에 대한 정보는 이제 쓸모가 없어졌지만, 빙궁에는 여러모로 조금 미안한 감정이 있으니 헛고생이라는 생각까지는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당장 얻은 것이 크다. 새로운 경지. 새로운 깨달음.
서준은 스스로의 성장에 만족하며 다시금 북해빙궁으로 향했다.
“아, 안 된다…! 가긴 어딜 가려고! 아직 빙궁 청소도 같이 못 했는데…!”
이건 예상 못 했다.
서준은 당황스러웠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이미 금가의 멸문에 공조한 범인을 끌어낼 방법까지 전부 생각해둔 상황이다.
느닷없는 빙궁 청소는 그렇다 치더라도, 백설향이 이렇게까지 잉잉 울어대며 질척댈 줄은 몰랐기에 당장 무어라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니, 그….”
“나는 안다! 너, 이대로 떠나가면 다시는 빙궁에 오지 않을 생각 아니냐!”
딱히 그런 건 아니다. 굳이 다시 들를 생각까지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다시는 오지 않을 생각도 없었다.
서준이 데굴데굴 눈만 굴리고 있자 백설향이 서준의 옷자락을 콱 움켜잡았다.
“아, 알겠다! 특별히 잡일의 절반은 내가 맡도록 하마!”
“잡일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일이 있어서….”
“그러면, 금방 다시 돌아올 것이냐?”
백설향의 빤한 시선에 서준이 슬쩍 눈을 피했다.
“그건 글쎄….”
“이익…!”
백설향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차올랐다. 그녀는 서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대계가 시도조차 못 해본 채 박살이 난 것도 억울했다.
그래서 무심코 소리쳤다.
“나, 나는 우리가 친구라 생각했다…!”
딱히 의외일 것도 없지만 백설향은 친구가 없었다. 어릴 적부터 그 재능을 높이 평가받아 소궁주의 자리에 올랐고, 거의 평생을 무공에 매진했다.
시간이 흘러 궁주의 위에 오른 뒤에는 모두가 그녀를 경외했다.
그리고 경외는 친구와 영 거리감이 있는 감정이다.
그러니 빙궁의 무인들은 백설향의 친구가 되어 줄 수 없었다. 그들은 그저 빙궁주의 믿을 수 있는 수하가 되고자 했을 뿐이었다.
그게 싫었다.
친구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있던 백설향은 궁주로서의 고독한 생활이 아주 외로웠다.
그녀는 수하가 아닌 친구를 원했다.
그도 그럴 것이 같이 밥도 먹고, 밤새 수다도 떨고, 서로 편하게 아무 말이나 주고 받을 수 있는 관계라니?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지만 백설향은 친구가 생기면 같이 하고 싶은 일들을 조심스레 일기장에 적어놓고는 했다.
빙궁 청소라거나, 마을 탐방이라거나, 뭐 그런 것들….
그래서 백설향은 내심 요 며칠이 아주 즐거웠다.
친구. 친우. 이 얼마나 가슴 떨리는 단어란 말인가!
그런 와중에 하늘에서 뚝 떨어져내린 백서준은 백설향의 첫 번째 친구가 되어주었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백설향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백설향은 첫 친구를 잃을 위기에 놓였다.
그녀는 겨우 손에 넣은 친구를 떠나 보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
결국 지고한 경지의 무인이자, 칠사흑문의 한 축을 차지하는 빙궁의 주인이요, 빙백신공과 북명신공을 대성하여 그 내공량만큼은 천하에 따라올 자가 없다는 혹한의 절세고수 백 모 씨는 끝내 선언하고야 말았다.
“가, 가지 마라…! 원하는 게 있다면 전부 들어주마!”
마치 소꿉친구를 전학 보내는 아홉 살배기 꼬마 아이 같은 설혈요후(雪血妖后) 백설향의 모습에, 아직 인간의 마음을 지니고 있다 주장하는 소궁주 백서준이 답했다.
“흠, 그건 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