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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약간 멍하게 있는 경우가 잦았다.
내 스스로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멍한 느낌을 지우기가 힘들었다.
“정신 안 차려?”
그건 일하는 도중에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슬슬 아르바이트가 끝나갈 무렵이라서 빠졌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으나, 마음만큼 정신을 차리는 게 쉽지 않았다.
‘왜 이러냐.’
스스로에게 자문해 봐도 답답함은 여전했다.
답을 알고 있는데 딱히 고민하고 싶지 않은 거였다.
서예린 때문이겠지.
배우로서 일하고 있는 그녀를 보니까 이상할 정도로 동요하고 있는 내가 있었고.
그게 일종의 집착이자 소유욕이라는 역겨운 감정이라는 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전 여친한테도 이런 게 좀 있었으니까.
오윤지는 본인만 집착이랑 질투가 심한 것 같다고 나한테 투덜거렸지만.
사실 그때 나도 꽤나 오윤지에게 집착하고 있었다.
걔가 떠나고 내가 망가졌던 걸 생각해 보면 얼마나 집요했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감정을 서예린에게 느끼고 있다는 게…….
“뭐 하는데.”
멍하니 카트를 잡은 채로 있는 나에게 한마디 하는 유아린.
그나마 유아린이 최근 나를 편하게 해주는 사람이었다.
“일만 잘하던 애가 일도 못하게 됐으니 이제 어따 써먹냐.”
볼 때마다 계속 장난을 쳐댔으니까.
“간다, 가.”
카트를 끌면서 발을 분주히 움직인다.
하지만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면서도 머리의 복잡함은 가시지 않았다.
복잡함.
그래, 지금 상태는 딱 그렇게 정의되는 것 같았다.
머리가 매우 복잡한 것이 스스로를 향한 환멸감도 느끼고, 괴로움이나, 질투도 차오른다.
‘짜증 나네.’
자신이 싫은 적은 여러 번 있었다.
이번에도, 그런 수많은 자괴감들 중 하나일 뿐이다.
그렇게 애써 넘겨보기로 했다.
“이거 방 빼줘야 한다는데?”
퇴근 이후.
나와 유아린은 지난날 우리가 밤을 지새웠던 호텔 방에 와있었다.
형수님이자 큰형의 비서가 주고 갔던 방.
유용하게 쓸 수 있지 않을까 했으나 정작 유아린이랑 딱 한 번 쓰고 끝이었다.
아쉬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 방은 충분히 할 일을 해줬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방을 빼주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이건 어떻게 하래?”
안에 있는 성인용품들이 문제였지. 무슨 산처럼 쌓여있는 것들이 보고 있자니 혀가 내둘러졌다.
내가 묻자 유아린은 얼떨떨하니 뺨을 긁적이며 답했다.
“가지라고 하시는데?”
“…….”
이걸 뭐 어디다 쓰라고.
“일단 네가 가져갈 거랑 내가 가져갈 걸 나눠보자.”
내가 엄지를 척 치켜들며 말하자 유아린은 짜증 난다는 표정을 지으며 제안했다.
“그냥 다 버리면 안 돼?”
“대부분 포장도 안 뜯은 새 거잖아. 게다가 브랜드도 보니까 엄청 비싼 것들이 많아.”
“그걸 우진 공이 어찌 아시오?”
“…….”
못 들은 척하면서 괜히 아무거나 손에 잡아본다. 하필이면 말랑거리는 오나홀이라는 게 기분 더럽긴 했지만 말이다.
“근데 비싸긴 하겠다.”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동의하는 유아린.
나는 말캉거리는 오나홀의 촉감을 신기하게 여겨서 이리저리 휘두르는 데 여념이 없었다.
“부회장님 정도면 싼 걸 쓰진 않을 거 아니야.”
순간 내 몸이 우뚝 멈췄다.
무슨 소리냐고 유아린을 쳐다보자 어깨를 으쓱거리며.
“여기 본인들이 쓰려다가 우리 준 거잖아. 그러면 이것들도 썼을 수도…….”
“아, 씨발!”
큰형의 꼬추가 왔다 갔다 했을 수도 있는 오나홀을 바로 바닥에 던지면서 비명을 질렀다.
오, 시발.
세상에는 알아선 안 되는 심연이 있다더니 진짜였다.
내 앞의 성인용품이 쌓인 탑은 지어져선 안 되는 종류의 것이었다.
현대의 혼탁함이 쌓은 바벨탑.
“다 버리자.”
단호하게 내가 말하자 유아린은 약간 애매한 반응을 보였다.
방금 본인이 버리자고 해놓고 막상 이것들의 값어치를 알게 되니 좀 혹한 모양이었다.
“버리진 말고 일단 가져가 볼까? 중고나라 같은 곳에 팔 수 있잖아.”
“이런 걸 중고나라에서 산다고?”
새것들이 좀 있긴 해도 성인용품을 중고나라에서 파는 건 좀 그렇지 않은가.
유아린 본인도 다시 생각하니 어이가 없었는지 입을 꾹 다문다.
"아니, 근데 이걸 왜 우리가 처리해? 사용한 건 수갑 하나잖아!"
지난번에 유아린이랑 썼던 수갑을 들어 올리며 내가 외치자 녀석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몸을 비비적거리는 게 야릇했는데 무슨 유혹이라도 하는 줄 알았네.
덮칠 뻔했다.
“내가 큰형한테 얘기해 볼게.”
일단 이 사태의 당사자에게 바로 전화를 걸어본다.
우리가 막 자주 통화할 사이는 아니었지만 이런 건 확실하게 해둘 필요가 있었다.
연결음이 몇 번 울린 다음 들려오는 큰형 목소리.
- 요즘 전화가 잦구나. 또 무슨 일이냐.
바로 본론부터 꺼내라는 게 딱 큰형다웠기에 나 역시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거 방에 형이 즐긴 건 형이 치워야 하는 거 아니야?”
- 방?
“C동 호텔에 유아린한테 객실 카드키 준 거 있잖아. 909동. 여기 성인용품 쌓아뒀구만.”
-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진짜 모른다고? 그럼 형수는 이걸 누구랑 쓴 거야. 형수 바람피운 걸로 알아도 되는 거야? 엄마한테 바로 전화한다?”
- ……하지 마라.
“왜 본인이 쓴 걸 썼다고 말을 못 하지.”
- 안 썼다.
“그래그래, 안 쓰고 쌌겠지.”
- …….
“시발, 진짜네.”
이마를 탁 치면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앞에 있는 물건들이 불결하게 느껴졌다.
“아, 진짜 토하고 싶은데 일단 얘기는 끝내자. 어떻게 할 거야. 이거 가져가.”
- 네가 마음대로 사용하든가 팔아라. 어차피 태반이 쓰지 않은 물건들이다.
“딱 말해. 쓴 건 뭐야. 포장지 뜯은 건 다 썼어? 그것만 가져다 버릴게.”
- …….
“……넌 부회장 하지 마라.”
- 내 또래 중에서는 깨끗한 편이다. 여긴 애인만 기본 세, 네 명이야.
나쁜 놈들이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앞에 유아린이랑 눈이 마주쳐서 하지 못했다.
내가 연애 관련해서 누구 욕할 처지가 아니다.
- 그런데 배가 불렀군.
“뭐가 또.”
괜히 말 돌리는 거 봐라.
- 이제 어머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너한테 따로 지원해 줄 생각 없다.
응, 엄마가 형 몰래 쓰라고 용돈 조금 줬어.
비자금으로 쓰라고 몰래 주머니에 꿍쳐놨어.
- 그러면 그런 거라도 이용해서 팔아보는 거 어떻겠냐. 포장 뜯지 않은 물건들도 많다.
“결국 포장 뜯은 건 다 쓴 거라는 소리구나.”
- …….
마침 유아린이 포장 뜯은 거랑 안 뜯은 걸 차곡차곡 정리하는 중이었다.
“애초에 이런 걸 누가…….”
말하려다 문득.
“잠깐만 뭔가 가능할 것도 같다.”
그대로 전화를 끊은 후, 나는 찬우한테 전화를 걸어서 누군가의 번호를 받았다.
몇 분 후.
- 여보세요?
다소 중성적인 느낌의 목소리.
등골에 소름이 끼칠 것 같지만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면서 말했다.
“저 기억하시나요?”
- 아, 그럼 기억하지. 우리 그때 밤에 좋았잖아.
“제가 아니라 찬우랑 좋으셨죠.”
대머리 아저씨의 말을 정정하자 웃으면서도 부정하진 않으신다.
다행이다.
“혹시 성인용품 사시나요? 여기 비싼데 안 뜯은 것들 좀 있거든요.”
나중에 찬우한테 듣고 알았는데.
놀랍게도 우리가 샀던 성인용품 샀던 가게 사장님이 바로 대머리 아저씨였다.
아저씨 수완이 좋아.
술 취한 우리를 그곳으로 끌고 간 게 아저씨가 아닐까 살짝 의심도 해본다.
- 사진으로 찍어서 보내줄래?
“넵.”
유아린한테 나오라고 한 다음 사진을 찍어서 보내드린다.
반응은 격했다.
- 와우? 비싼 브랜드만 모여 있네? 저걸 정말 그냥 판다고?
“저희가 나름 정이 있으니까 좀 싸게 드릴게요.”
어차피 처치 곤란이다.
좀 싸더라도 일단 돈이 들어온다면 그게 좋은 거 아니겠는가.
- 근데 옆에 뜯은 것들은 뭐야?
“아, 그건 사용품들이에요.”
- ……네가 썼니?
왜 입맛을 다시는 것 같지.
좆같네.
“좆같네.”
- …….
“아, 죄송해요.”
- 아냐, 그럴 수 있지.
“근데 입맛 다시는 건 좀 선 넘은 거 아니에요?”
- 미안, 군침이 나와서. 내가 실수한 거 맞아.
사람이 매너라도 좋지 말았으면 그냥 시원하게 쌍욕 박았는데 그건 또 아니다.
“저는 아니고, 다른 사람이 쓴 거예요. 관심 있으세요? 사용품인데?”
- 누가 쓴 거니?
“……알면 뭐 달라져요?”
- 얼굴에 따라서 가격이 떨어질 수도 있고, 올라갈 수도 있지. 대충 0.5~ 1.5배 정도 차이?
“기다리세요.”
바로 형한테 전화를 건다.
“형, 내가 지금 대머리 게이 아저씨한테 형이 쓴 오나홀 팔려고 하는데 사진 좀 보내주라.”
- ……뭐?
“내가 지금 형이 사용했다는 더어어러운 성인용품을 팔려고 하는데 대머리 아저씨가 형 얼굴 보내주면 2배까지 쳐준다고 했거든. 근데 내가 형 사진을 핸드폰에 넣고 다니진 않아.”
- 하지 마라.
“안 보내줄 거야?”
- 보내줄 것 같나?
에휴.
“어쩔 수 없네. 그럼 형 회사 사이트 들어가서 거기 있는 부회장 사진으로 쓴다?”
- ……그냥 내가 치우마.
“이제 내 건데 뭔 소리야. 사진 안 보내면 끊는다.”
- 2배.
“고객님, 혀가 너무 길어서 중간에 가격이 올랐어요. 2.5배.”
- 장난치지 마라.
“네, 3배요.”
- 후우우우우.
“4배?”
- 2.5배로 타협하지.
“에휴, 됐다. 그거 받아서 뭐 하냐. 그냥 형 골려준다고 생각하고 대머리 아저씨한테 팔아야겠다.”
- ……3배.
“형아, 고마웡!”
- 오랜만에 욕 나오게 만드는구나.
“근데 협상 실력이 그거밖에 안 되는데 부회장을 하고 있냐. 접어라.”
- 이 개색…….
뚝.
시발 놈.
지난번에 나한테 막말했던 복수다.
“어떻게 하기로 했어?”
정리를 끝낸 유아린이 해맑게 웃으며 물어왔기에 엄지를 척 올리며 답해줬다.
“미사용품은 정가에서 좀 아래로, 사용품은 정가의 3배.”
“……거래가 어떻게 그렇게 되는 거야?”
도대체 무슨 소리냐는 유아린에게 나는 방긋 웃어주었다.
“소고기 먹으러 갈까?”
“소고기잉!”
방금까지 있던 의문은 싹 사라지고 소고기에 눈이 돌아간 유아린이 콧노래를 흥얼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