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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새벽.
몇몇 알바들이 아직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로 출근하는 걸 지나치며 방으로 돌아온 서예린.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직 아무도 깨어있지 않은 덕분에 조심스럽게 몰래 들어올 수 있었다.
‘허, 허리 아파아.’
결국 하룻밤을 쭉 지새우며 정사를 했던 탓에 하반신이 얼얼했다.
일단 좀 씻자는 생각에 냉큼 화장실로 들어가 씻고 나오니 같은 방의 유아린이 몽롱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아, 깼어?”
깜짝 놀란 서예린.
멍하니 서예린을 쳐다보던 유아린은 웅얼거리며 물었다.
“어디 다녀왔어?”
“아하, 그, 그냥.”
어정쩡하니 얼버무리려고 했으나 유아린의 시선은 거두어지지 않았다.
애초에 서예린은 밤늦게까지 혼자서 놀고 오는 그런 성격은 아니었으니까.
설득력도 없고, 일부러 대답하지 않는다는 것도 이미 눈치챘겠지.
“사실 우진이랑 있다가 왔어.”
“…….”
애매한 거짓말은 오히려 친구를 기만하는 행위라고 생각한 서예린은 대놓고 당당하니 밝혔다.
잠이 덜 깼던 유아린의 눈이 점점 커진다.
지금 서예린이 무슨 의미로 저런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 어…….”
분위기가 묘해졌다.
친구 사이에 있어선 안 될 긴장감이 차오르며 유아린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느꼈다.
자신이 먼저 시작한 건 알고 있다.
서예린과 최이서가 이미 김우진에게 마음을 품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상태에서 끼어든 거였으니까.
하지만 막상 이런 식으로 상황이 벌어지니 가슴이 먹먹한 것이 자신이 실수했던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사색이 된 유아린을 보면서.
서예린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가 뺨에 손을 살포시 댄다.
처음엔 싸대기라도 때리는 줄 알았지만 손길에는 온기와 친절함이 담겨 있었다.
“나는 후회하지 않을 거야.”
“…….”
“너도 잘 알잖아. 주변의 눈치만 보다간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는 거.”
무시인가?
처음에 유아린은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은 친구나 다른 건 신경 쓰지 않고 김우진에게 나아가겠다는 그런 의미인 줄 알았으나.
조심스럽게 자신을 끌어안아 주는 서예린을 느끼면서 유아린은 착각했다는 걸 깨달았다.
‘이건…….’
“그러니까. 너도 물러서지 마.”
응원이었다.
“후회하지 말자 우리. 아린아, 우린 계속 친구일 거니까…… 그러니까 서로 후회하지 말자.”
“…….”
“지금 한 사람이 양보하는 식으로 행동해봤자 결국 나중에는 관계에 금이 갈 수밖에 없어.”
그러니까 서예린은 차라리 지금 승부를 보자고 말하고 있었다.
우정을 유지하되, 포기하지 말자고 선언하고 있었다.
“지금 해볼 수 있는 데까지 다 해보자. 그래야 우리가 끝까지 친구로 있을 수 있을 것 같아.”
너는 어떻게 그게 가능해?
유아린의 목구멍에서는 그런 말이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았다.
자신은 김우진과 하룻밤을 지새우고 왔다는 서예린의 말을 듣는 순간, 몸속에서 질투심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는데 말이다.
‘자신감이 넘쳐서 그런 걸까?’
고등학생 때부터 수많은 사람들한테 관심을 받아왔고, 연예계에서도 러브콜을 자주 받아왔다.
대학에 와서도 1학년 영문과 여신이라며 유명했고, 골드원에서는 대한당 미모의 알바생으로 또 유명해졌다.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있으니까 너는 그렇게 당당할 수 있는 걸까?
문득, 유아린은 옛날의 자신이 떠올랐다.
사실 옛날이라고 해봤자 몇 달 되지도 않은…….
서예린에게 패배감과 질투심을 깊숙이 지니고 있어, 김우진에게 접근했던 자신을.
‘네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건.’
어찌 보면 이면에 깔린 절대적인 승리의 확신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
친구로 있으면서 몇 번이나 비교 당해왔던 유아린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남자였더라도, 본인보다는 서예린을 골랐을 거라는 걸.
꽉 끌어안아 준 품은 따스했다.
우정과 사랑을 동시에 놓고 싶지 않다는 서예린의 탐욕스러운 배려심도 이해는 되었으나.
오히려 그것이.
유아린에게는 절대적인 패배감으로 닿고 있다는 걸 서예린은 알지 못하겠지.
‘언제나 너는 이겨왔으니까.’
다행이었다.
안아줘서 다행이다.
일그러진 자신의 표정을 보여주지 않을 수 있으니까.
“고등학교 때는…… 내가 너무 미숙했던 거 같아.”
꽉 끌어안은 서예린에게 힘을 준다. 작게 속삭이는 유아린의 목소리에서는.
패배감과.
“이번엔 아니야.”
승부욕이 타오르고 있었다.
“한 번은 져.”
지난번 최이서랑 통화하기 전에도 비슷한 말을 했던 거 같다.
한 번은 질 수 있다.
한 번은 실수할 수 있다.
“두 번은 아니야.”
또다시 비슷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추악하게 친구 질투나 하면서 뒷공작이나 펼치던.
그런 유아린이 되고 싶지 않았으니까.
이번만큼은 유아린도.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아, 아린아. 아파!”
너무 꽉 끌어안아서 아프다고 호소하는 서예린의 목소리에 문득 짜증이 난 유아린은 좀 더 힘을 주면서 넘어뜨렸다.
“목이 쉰 것 같다아!?”
“흐, 흐히! 아악! 아, 아파요오!”
“웃어? 웃음이 나올 정도로 좋았니? 여기가 네 무덤이다 이년아. 유언이나 남겨라!”
“기무지인 섹x 조온나 잘해엥!”
미친년.
아무리 친구라도 해도 교정이 좀 필요해 보였기에. 유아린은 곧장 서예린의 허리를 다리로 감싸면서 이전에 너튜버에게 배웠던 기술을 시전했다.
“하, 항복! 항보옥 아린아! 아파요오!”
“아오! 서예린, 좋았냐? 응? 좋았어? 친구 버려두고 남자랑 자니까 좋았어어어?!”
“흐히힣, 조, 좋았어어어어억!”
“이거 웃는 거 봐라!?”
“힘으로 승부하다니 치사하다 유아리이이인!”
‘어우, 몸이 왜 이렇게 피곤하냐.’
서예린이랑 관계를 가지고 다다음날.
어제 쉬는 날이었기에 하루 종일 잠만 잤는데 이상할 정도로 피곤한 몸 상태.
다들 잠만 자니까 그런 거라면서 나한테 뭐라고 했으나, 나는 오히려 서예린한테 정기라도 흡수당한 게 아닌가 싶었다.
“김우진 얼굴이 좀 안 좋아 보인다?”
그런 나를 연영과 이서아가 팔꿈치로 툭 치면서 물어왔다.
겉으로 보기에도 티가 나는 건가?
솔직히 오늘 출근하는 거 진짜 힘들었다.
“피곤하긴 해.”
“커피라도 사줘? 진짜 안 좋아 보이는데?”
“됐다, 아까 마셨어.”
그리 말하고 카트를 끌고 객실로 올라간다.
최근 들어 골드원 호텔에는 여러 사건들이 줄줄이 겹치듯 일어나고 있었다.
알바생 성희롱으로 인한 고소 사건을 시작으로, 모기업 부회장이 찾아왔으며.
그 부회장이 직접 기묘한 각서를 뿌리고 있는 부장을 발견했고.
심지어는 부장의 뒤를 캐보니까 호텔 공금을 횡령 중이던 비자금 장부가 발견이 되면서 부장이랑 같이 공모하던 윗선들이 대거 잘려 나가게 되었다는 것.
이찬송 부장이라는 사람을 시작으로 줄줄이 소시지처럼 걸려 나온 게 참 웃기지 않은가.
큰형한테는 반쯤 내 덕분이니까 사례금을 보내라고 하니 고작 만 원 송금해 줬다.
아직도 큰형 졸졸 따라다니던 막내로 보이는 모양이다.
“하암.”
솔직히 몸은 피로했으나 마음은 좀 가벼운 느낌이었다.
내가 가진 혼란스러움이 좀 정리가 됐다는 느낌이랄까. 단순히 서예린이랑 하룻밤을 지새운 게 아니라 나름의 마음도 정리가 됐다.
오윤지를 사랑했던 건 거짓이 아니었고.
다른 여성들에게 마음이 쏠리고 있다는 것도 솔직하게 인정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단순히.
서예린이 이런 쓰레기 같은 나를 긍정해 주며, 받아주겠다는 말을 해준 것만으로도 혼란스럽던 마음이 편해진 기분이었다.
‘서예린도 이런 느낌이었나?’
익명69라는 자신의 존재를 받아들여 준 나를 이렇게 느끼고 있었다면.
그래, 좀 재수 없긴 해도 반할 만했던 것 같기도 하다.
실제로 지금 나는 의외로 서예린을 많이 의식하고 있으니까.
자신의 추한 본성을 눈치채고, 알아주며, 이해해 준다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에 대한 호감도가 쑥쑥 오른다는 건 인간으로서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다시 사무실로 내려오자 이번에는 유아린이 엘리베이터 앞에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
“…….”
잠깐의 정적.
아무 말도 없던 우리는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는 순간까지도 서로 멍하니 쳐다만 보고 있었다.
“크흠.”
어색하니 헛기침하며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오자 유아린이 졸졸 뒤를 따라온다.
뭔가 말이라도 하면 좋은데 아무 말도 없이 그냥 쳐다만 보고 있으니 괜히 내가 민망해졌다.
‘아마 알고 있는 거겠지.’
서예린 성격상 거짓말을 잘하는 편은 아니었고, 룸메이트로 같이 방을 쓰고 있다고 했으니까.
늦게 온 서예린을 이상하게 여긴 유아린이 캐물었으면 자연스럽게 상황에 대한 전말을 알게 됐을 거다.
‘어색하네.’
고백까지 받았으니 이런 상황은 좀 곤혹스러웠다. 내가 어떤 대답을 주기 어려우니까.
그때 이찬송 부장이 출근을 안 해서 기분이 좋은 과장이 사무실에서 고개만 내밀며 말했다.
“우진아, B동 가서 카트 좀 수거해 와라. 어제 새벽에 주문이 많이 들어가서 지금 카트가 쌓였다네.”
“알겠습니다.”
“누구 하나 같이 데려가라. 혼자 하려면 힘들 거야.”
그 말에 슬쩍 같은 알바들을 둘러본다.
바로 시선을 피하는 이서아와 일하는 척 냅킨을 접는 한봄.
저렇게까지 피하는 걸 보니 오히려 더 데려가고 싶어졌는데, 등에서 느껴지는 통증.
“또 딴 년이랑 있게?”
싸한 목소리로 나를 노려보는 유아린. 침을 꿀꺽 삼키며 나는 유아린이랑 같이 B동으로 향했다.
“잠깐 화장실 좀.”
중간에 화장실에 다녀온 유아린.
나는 별 상관하지 않고 잠시 기다렸다가 B동으로 향했다.
꼭대기 층부터 카트를 옮기는 편이었기에 같이 B동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고 있자니.
팔짱을 낀 유아린이 몸을 틀어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뭔가 하실 말씀이 있지 않을까요?”
“크흠.”
“계속 기다리고 있는데요?”
“아, 그게 있잖아.”
“닥쳐!”
말하려는 나한테 성큼성큼 다가와서는 바로 멱살을 낚아채는 유아린.
기세가 워낙 강렬했기에 나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었다.
“아주 좋으셨겠어요? 네? 예린이 가슴 막 만지작거리시고? 제 꺼는 좀 아쉬우셨죠?”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만…….”
“개새끼! 나쁜 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나를 엘리베이터 구석으로 내몰고는 몸을 돌린 유아린. 하지만 비키지 않아서 도망칠 수는 없었다.
삐진 듯 등을 보이고 있던 유아린의 몸이 살포시 내게 기대어온다.
누가 들어오면 어쩌려고 이러나 싶었는데 씩씩거리면서 뒤통수로 내 가슴팍을 때려댔다.
“아파!”
“후우, 짜증 나! 왜 이딴 새끼를 좋아하게 된 거지?”
“아니 누가 들으면 내가 꼬신 줄…….”
“꼬셨잖아! 꼬신 거잖아!”
그렇게 말하시면 그런 거겠죠.
입을 꾹 다물고 있어도 유아린은 비킬 생각이 없었다. 얘가 왜 이러나 싶었는데 갑자기 고개를 휙 돌리더니 살짝 붉어진 얼굴로 나를 올려다본다.
“무, 뭐 모르겠어?”
“뭘 몰라.”
무슨 소리인가 싶었는데 유아린의 엉덩이가 갑자기 과할 정도로 딱 달라붙어 온다.
“하지 마.”
또 성욕을 자극하는 행위를 하려는 건가 싶어서 살짝 밀어내자 유아린은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한숨을 내쉰다.
“김우진 정도면 알아챌 줄 알았는데.”
“뭘.”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뭔가 변한 건가 싶었으나, 골드원 유니폼인 하얀 셔츠에 검은 치마.
평소에 보던 거랑 크게 다르지 않았다.
슬슬 꼭대기 층에 도착하려하자.
부끄러움을 억지로 이겨내며 유아린이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내게 퍽 건네주었고.
“나도 할 수 있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냉큼 꼭대기 층에 내려버린다.
뭔가 싶어서 뒤따라 내리며 확인하자.
따스한 온기가 남아있는.
아리따운 삼각형의 형태를 지닌.
검은 팬티가 손에 쥐어져 있었다.
“…….”
그것이 유아린의 각오였다.
서예린과 밤을 지새우고 왔던 내게, 그녀가 자신도 할 수 있다면서 내민 각오.
‘아까 이래서 화장실에 다녀왔구나.’
잠시만.
그렇다면.
“검은 치마에…… 노팬티라고?”
“닥쳐! 부끄러우니까!”
저 멀리 카트를 끌고 오던 유아린이 얼굴을 붉히며 버럭 소리쳤다.
씰룩이듯 움직이는 그녀의 하반신으로 절로 눈이 갈 수밖에 없었는데.
유아린은 그런 내 시선을 받으며 계속 뭐라 뭐라 소리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