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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4 21:31:57 +09:00

12 KiB
Raw Blame History

“하암.”

하품하며 천천히 눈을 뜬다.

어느새 시간은 오후 4시 40분.

이미 4시에 퇴근했으나 서예린이 5시 퇴근이라서 직원휴게실 안마의자에서 쉬고 있는 중이었다.

‘슬슬 가야겠네.

5분 만에 대한당 앞에 도착해서 잠시 기다리고 있자 사복으로 갈아입은 서예린이 총총걸음으로 뛰어온다.

“왔구나!”

“오라며.”

지가 오라고 해놓고 무슨.

“어디 가려고 생각해 둔 곳 있어?”

그냥 놀자고만 했으니까 뭔가 다른 게 있나 싶었는데 서예린은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더니 내 손을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얼른 가자! 버스 온다!”

“버스?”

나는 그냥 한 말인 줄 알았는데 진짜로 어디 놀러 갈 생각인 모양.

여기는 산골이라 놀만한 게 거의 없을 텐데.

지난번에 룸메들이랑 시내에 있는 PC방에 가봤는데 20년은 된 PC방인 줄 알았다.

하지만 서예린과 같이 탄 버스는 시내로 나가는 게 아니라 호텔 부지를 순환하는 골드원 내부 버스였다.

“어디 가는데?”

“있어.”

“나 돈 없어.”

“돈 드는 거 아니니까 걱정 마.”

흥얼거리면서 가는 서예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우리는 버스에서 내렸고 도착한 곳은.

“……워터파크?”


술 마시고 필름이라도 끊긴 것처럼 멍하니 주변을 둘러본다.

수많은 사람들과 화려하게도 꾸며놓은 워터파크.

12월이라서 밖은 아직 추웠으나 실내 워터파크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중이었다.

골드원에서 일하는 직원이면 스키장이나 워터파크에 무료로 입장이 가능하다는 건 들었으나.

솔직히 내가 오게 될 줄은 몰랐다.

“허, 이게 무슨.”

수영복은 따로 돈 주고 빌렸다.

안타깝지만 그것까지 무료는 아니었던 모양.

남들한테 몸 보이는 게 싫어서 선택한 게 검은 래시가드에 반바지.

처음 입어보는데 수영복 입는 거보다 훨씬 괜찮았다.

영업이 9시까지라서 기껏해야 3시간 정도밖에 놀지 못하겠지만 사실 그거면 충분했다.

‘내일 쉬는 날이라 다행이네.

서예린도 아마 내일 쉬니까 이렇게 놀자고 제안한 게 아닐까?

‘…….

딱 달라붙은 래시가드가 마치 몸에 품고 있는 스스로를 향한 자책처럼 느껴져서 찝찝했다.

큰형의 말처럼.

나는 결국, 오윤지를 정말 제대로 사랑하지 않았던 게 아닐까?

이런 식으로 서예린이랑 놀러 오는 것에 크게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만약 정말로 아직 내게 미련이 남아 있었다면, 이렇게 여자랑 단둘이 데이트를 오지는 않았을 거다.

‘하지만…….

어지러운 마음이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고 있었으나.

“우지나!”

잔뜩 신을 내며 나를 부르는 목소리.

나와 똑같은 브랜드의 검은 래시가드를 입고 있는 서예린의 모습을 보는 순간 고민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느낌을 받았다.

서예린의 장점을 말하라고 한다면.

나는 정말 딱 하나밖에 말할 자신이 없었다.

예쁘다.

그게 끝이다.

그런데 중요한 건.

그게 너무 과하다는 거였다.

다른 것들이 아무렇지도 않아 보일 정도로.

“와…….”

그래, 내가 탄성을 내지르거나 뚫어져라 쳐다보면 서예린이 기고만장해질 걸 알고 있으나. 그럼에도 그녀는 눈으로 쫓을 수밖에 없는 매력을 품고 있었다.

예쁘기만 한 사람은 어디에나 있다.

매력적인 사람도 쉽게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예쁘면서도 매력적인 사람들은 쉽게 볼 수 없다.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TV 속에나 있으니까.

아까 가슴이 좀 커진 것 같지 않냐고 말할만했다. 딱 달라붙는 래시가드에도 몸매가 확실히 부각되는 걸 보면 말이다.

“머리 땋은 거 어때?”

좀 걸린다 싶었더니 일부러 머리를 땋아서 온 모양. 혼자서 어떻게 했나 싶었는데 직원분 중 하나가 도와주셨단다.

“예쁘네.”

그거 말고 다른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상큼한 미소는 폭력적이면서도 다소 강압적으로 내게 한 가지 반응만을 강요해 왔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히히!”

그게 좋았는지 냉큼 팔짱을 끼는 서예린. 그러고는 바로 워터슬라이드를 가리킨다.

“저거 운행시간 얼마 안 남았어! 빨리 가자!”

“그런 건 어떻게 알아?”

“서아가 남친이랑 지난주에 왔었다면서 자랑했거든. 그때 들었지.”

“걔는 남친이랑 싸우는 거야 잘 사귀는 거야?”

“말도 마. 이번에 남자친구가 또…….”

자연스럽게 얘기를 나누면서도 팔에서 느껴지는 서예린의 흉부 감촉을 애써 무시한다.

워터 슬라이드의 줄에 선 후에야 내가 방금까지 큰형과 윤지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다시 떠올렸다.

‘이거 뭔가 좀 무섭네.

팜 파탈이라고 하던가.

치명적일 정도로 매력적인 여성.

그게 딱 서예린이 아닌가 싶었다.

정작 본인은 별생각 없어 보이는데 그게 더 질이 나쁘기도 했고.

“이거 둘이 타는 거야.”

“어, 그래 보이네.”

워터 슬라이드를 가리키며 말하는 서예린. 옆에 안내 문구를 보니까 커다란 튜브에 뒷자리 앞자리가 나뉘어져 있다.

“내가 앞에 탈래!”

“맘대로 하세요.”

앞에 타나 뒤에 타나 똑같지 않은가.

워터 슬라이드 직원의 부러움과 시샘이 담긴 눈초리를 받으며 튜브에 탄다.

뒤에 앉아서 다리를 벌려야 했는데 이게 좀 묘한 게 앞사람이 내 다리 사이에 들어오는 식으로 앉게 되어 있었다.

“와! 재밌겠다!”

하지만 애처럼 즐기고 있는 서예린을 보니 방금까지 살짝 차올랐던 음란한 생각이 금세 가라앉았다.

순백색의 반응에 찬물을 끼얹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으나, 내 기대를 죽인 건 반대로 서예린이었다.

부웅!

워터슬라이드가 시작되자마자 바로 한 손을 놓고는 꼼지락거리며 등 뒤로 손을 움직인 서예린.

“……?!”

그녀의 작고 부드러운 손이 정확하게 내게 닿은 걸 느낀 순간 예열도 없이 바로 힘이 들어간다.

“흐.”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웃고 있는 게 딱 느껴졌다.

숨소리처럼 흘러나온 웃음소리에 맞춰서 손가락이 마치 처음 보는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아이처럼 불규칙하면서도 재빠르게 움직였다.

“너, 이……!”

하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다.

목소리에도 힘이 들어갔으나 저항의 의지가 사라지는 손길에 남성으로서 무기력함을 느낀다.

그렇게 생각보다 더 짧았던 시간이 흘러.

확 내려가는 슬라이드 안으로 빛이 들어오는 게 보였다. 드디어 끝에 도착한 것이었다.

풍덩!

워터 슬라이드가 드디어 끝나고, 풀 밖으로 나가야 했으나.

“재밌었다!”

“…….”

못 나가고 어정쩡하니 서 있는 나를 보면서 서예린은 입가를 가리면서 호들갑스럽게 비웃었다.

“꼴리셨어요?”

입술을 으득 물고 힘이 빠지길 기다렸으나 앞에 있는 여자가 계속 있으면 아무래도 빠지지 않을 것 같았기에.

“너 저리 가.”

투덜거리며 손짓하자 서예린은 비웃으며 냉큼 가버렸다.

왜 안 나가고 있나 이상하게 여기고 있는 안전요원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호흡을 가다듬자 겨우 힘이 풀려 밖에 나올 수 있었다.

‘휴우.

그 뒤도 비슷한 상황이 계속해서 벌어졌다. 같이 온천에 들어가도 서예린의 손은 가만히 있지 않았고, 파도풀에 들어가면 의도적으로 껴안아 매달린다.

사진을 보내지 못하게 하니까 이런 식으로 직접 몸으로 유혹하는 건가 싶었는데 딱 거기서 끝날 뿐.

자극,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는 않았다.

그게 묘하게 간질거리면서도 괜히 나를 시험하는 느낌이 들었으나 어쨌든 참아낼 수 있었다.

어쨌든 워터파크는 생각 이상으로 즐거웠다.

서예린이랑 같이 돌아다니면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시선을 받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런 시선들마저도 어느 순간부터는 그것마저 그냥 즐길 수 있게 되었던 것 같다.

“너무 짧았네.”

밖으로 나온 서예린은 어느새 어둑해진 하늘을 보면서 아쉬워했다.

워터파크 같이 즐길 거리가 많은 장소에서 고작 3시간을 놀았으니 아쉬울 법했다.

“어차피 쉬는데 우리 내일 또 올까?”

“횟수 제한 있잖아.”

직원은 무료이긴 했어도 계속해서 올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로 제한이 있었으니 내일 오려면 우리 돈을 지불해야 했다.

“그냥 돈 내고 오면 되잖아.”

“알바하러 와서 돈을 쓰는 건 좀 그래.”

한 푼이라도 아껴야 하지 않겠는가.

서예린도 진심은 아니었는지 워터파크에 굳이 집착하진 않았다.

다시 숙소로 돌아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와중. 나는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야.”

“응?”

오늘 찍은 사진을 한 장씩 넘기면서 검토 중인 서예린.

“너 나한테 상담해 준다고 한 거 아니었어?”

“…….”

표정이 따로 변하거나 하진 않았으나 화면을 옆으로 넘기던 손가락이 멈춘 걸 보면.

“야.”

혼내듯 부르자 서예린이 바로 팔짱을 끼면서 엉겨왔다.

“우리 맥주 마실까? 어때?”

애교로 넘기려고 하는 게 아주 요망했으나 결국 따를 수밖에 없었다.

치킨집에서 마시려고 했는데 C동 호텔 지하에 있는 치킨집은 오늘 정기휴무라며 문을 닫아버렸다.

“다시 밖으로 나갈 수는 없잖아.”

방금 숙소로 들어왔는데 또 나가는 건 우리 둘 다 싫었고, 시간도 적절하지 못했다.

어느새 10시.

“그냥 돌아…….”

쫑내자고 하려고 했으나 서예린이 좋은 생각이 났다면서 제안했다.

“우리 방 가서 먹을래?”

“싫어. 애초에 거기서 할 말은 아니잖아.”

유아린이 있는데 할 대화 주제는 아닌 듯싶었다.

“그럼 너희 방 가서 먹자!”

기다렸다는 듯 다른 방안을 내놓는 서예린. 굳이 오늘 얘기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막상 가슴 언저리에 남은 응어리가 얼른 해소됐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기에.

결국 나는 서예린과 함께 숙소로 들어갔다.

아직 잠들기엔 이른 시간이었기에 룸메이트들에게 서예린이 잠깐 있다가 간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음?”

방이 어둡다.

뭔가 싶어서 안으로 들어가 불을 켜고, 방을 확인했는데 아무도 없었다.

“뭐지.”

왜 아무도 없나 싶었는데 뒤에서 느껴진 인기척.

“아무도 없어?”

서예린이 따라 들어온 거였다.

“밖에서 기다리라니까.”

“나 보면 허락해 주시지 않을까 했지.”

얼굴에 꽃받침 하면서 웃는 서예린. 확실히 서예린 얼굴 보는 순간 싫었던 사람도 얼른 들어오라고 말해줄 법했다.

그것보다.

‘다들 진짜 어디 갔지?

숙소 단톡을 확인해 보려 핸드폰을 꺼내 드는 순간.

“음? 너희 이런 거도 마셔?”

거실 탁자에 놓여 있던 술병을 들고 온 서예린.

“……처음 보는 건데?”

처음 보는 와인은 앞으로 있을 무언가의 전조처럼 떨떠름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