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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4 21:31:57 +09:00

12 KiB
Raw Blame History

“…….”

오늘은 수요일.

이미 시험 기간에 들어왔고, 시험만 벌써 세 개를 치렀다. 매 강의가 긴장되면서도 지치는 순간순간이었으나.

이번 강의만큼은 좀 편하게 늘어지듯 볼 수 있었다.

“Fuck you!”

강의실의 거대한 스크린 안에 있는 유아린이 중지를 치켜 올리며 욕을 쏘아댄다.

밑에 나온 자막부터 해서 구도랑 연출까지, 하나 같이 내 손을 타지 않은 게 없다는 점에 괜히 뿌듯함이 밀려왔고.

멍하니 화면을 보던 주희 선배도 슬쩍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잘 나왔다. 스크린으로 보니까 훨씬 괜찮네.”

“그러게요.”

영화 과제를 보는 마지막 날.

시험이 과제로 대체되었기 때문에 오늘이 마지막 강의임과 동시에 그냥 제출한 과제를 보는 시간이었다.

모든 작품을 다 틀어줄 시간은 안 되니까 일부러 성적을 잘 받은 것들을 틀어주신다고 했는데.

그중 하나가 우리였다는 점에서 이 강의는 성공적으로 수강했다고 봐도 되겠지.

주희 선배도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지어져 있는 걸 보니 다른 조와 비교해서 우리가 확실히 잘했다고 생각하신 모양이다.

“…….”

왼편에 있는 서예린의 반응도 보려고 슬쩍 고개를 돌렸는데. 녀석은 스크린 속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뭔가 문제가 있나 싶었는데 오히려 문제라기보다는 약간 감동받은 눈치랄까.

여주인공이니까 가장 많이 나오기도 했으니 느끼는 게 꽤 많겠지.

결국 마지막으로 흑막이던 유아린이 죽으면서 영화가 끝났고, 영상 시간을 늘리기 위한 엔딩크레딧이 올라오자 강의실에는 박수가 쏟아졌다.

교수님 역시 박수를 쳐주시더니 마이크에 대고 방긋 웃으면서 우리 조를 보신다.

“이 조는 조원들끼리 여러 사건사고가 있었다고 들었는데 그래도 다른 학우들한테 도움도 받으면서 아주 멋지게 과제를 제출했습니다. 제가 이 과제를 몇 년 전부터 냈는데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갈 수준이에요.”

교수님의 극찬에 한껏 마음이 부풀었다. 지난번에 술 마셔서 결석한 거 한 번만 아니었으면 A+를 받았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아쉬웠다.

“자, 그럼 다음으로…….”

물론, 다른 조가 있기에 칭찬이 길게 이어지진 않았으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했고.

슬쩍 고개를 돌려서 D라도 맞겠다며 출석한, 옛날 조원이던 여자 선배들을 보면서 웃어준다.

“저 씨발…….”

“하, 싸가지 없는 새끼.”

“선배한테 저게 뭐 하는 짓이냐?”

원래라면 우리랑 같이 참석해서 영화를 찍고 성적 잘 받아야 했는데.

나는 감사의 의미로 엄지를 척 치켜든다.

“……그거 중지야.”

“아이코 실수.”

옆에서 주희 선배가 내 작은 실수를 보면서 웃어줬다.

그렇게 강의가 끝나고.

“이번에 정말 고생 많았다. 아직 시험 기간이니까 이거 끝나면 내가 밥 한 번 사줄게.”

시험 기간이라서 안경을 쓰고 있는 주희 선배가 좀 색다르긴 했으나 굳이 짚지는 않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정신 못 차리고 있는 서예린이 따로 대답이 없었으나 선배도 굳이 말을 걸진 않았다.

“아참, 우진아. 골드원 가는 거 서류 다 준비했지?”

‘네, 그럼요.“

“그래, 방학 시작하고 일주일 정도 있다가 바로 출발하니까 미리 해둘 거 다 해둬라.”

“넵, 알겠습니다!”

바로 카리스마를 뿜어내신 주대장님은 어깨를 두드려주신 후, 가버리셨다.

“야, 서예린. 우리도 이제 가자.”

수요일은 초급일본어회화 강의가 있었고 서예린이랑 같이 듣는다. 이건 그나마 쉬운 시험이었기에 발걸음이 가벼웠다.

“아, 응!”

드디어 정신 차린 서예린.

강의실로 가는 도중 중간에 학교 안에 있는 카페에 들렀는데.

“우진아.”

혼자 웅얼거리듯 내 이름을 불러왔다.

“나 예전에, 배우 해볼 생각 없냐고 스카우트 받은 적 있다?”

“자랑하냐? 그래 보여.”

배우뿐이겠는가.

아이돌, 가수, 모델.

기타 등등.

뭐든 일단 서예린을 TV 화면으로 끌고 가려던 사람들이 차고 넘쳤겠지.

“그때는 절대 안 된다고 생각했거든. 나랑 아예 다른 세계라고 생각했어. 별 관심도 없었고.”

“…….”

“그, 근데 이번 과제 해보니까…… 무, 뭔가 좀 아쉽기도 한 것 같아.”

“흠.”

“도전이라도 해볼 걸 그랬나 싶은 생각이 조금 들었어.”

뭐, 그럴 수 있지.

누가 처음부터 거대한 영화관 스크린에서 나오겠는가. 단편영화나 동아리 활동 같은 거 하면서 점점 꿈을 키워가는 거겠지.

“아직 안 늦었는데?”

“…….”

“일단 너는 얼굴이 되니까 찾아가면 어느 한 곳은 받아주지 않을까? 연기 연습은 좀 해야겠지만.”

“그, 그런가?”

“그렇다고 지금 당장 가보는 건 좀 그렇고. 천천히 생각해 봐. 우리 아직 1학년이야. 시간 많다?”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는지 서예린은 방긋 웃으면서 내가 건넨 커피를 받는다.

“계산 내가 했으니까 계좌로 보내라. 알지?”

“쪼옵, 근데 우진아. 골드원은 무슨 소리야?”

카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며 묻는 서예린.

“음? 나 겨울방학에 알바하거든. 강원도에 골드원 호텔 알아?”

“……가챠 호텔?”

진짜 미쳤네.

“카지노 호텔.”

“그게 그거 아닌가, 쪼옵.”

커피를 마시면서 꿍얼거리는 서예린. 그런 꿍얼거림은 무시하면서 간단하게 설명해 줬다.

“우리 학교에 거기서 실습하는 애들 있다고 해서. 나도 거기 껴서 알바하기로 했어. 돈도 많이 주고, 숙식도 다 제공된다고 해서.”

“……얼마나 가는데?”

불안하단 표정으로 서예린이 나를 쳐다본다.

“두 달? 거의 방학 내내 있다고 봐야겠지.”

기껏해야 시작했을 때 일주일, 끝나고 일주일 정도 쉴 수 있지 않을까?

그러자 서예린이 펄쩍 뛰면서 외친다.

“뭐야?! 그럼 나는?!”

“넌 뭐.”

“방학 때 너희 집에서 상주하려고 했는데?!”

상주하면서 뭘 하는지 굳이 묻진 않는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행히도 사람이 없다.

“적당히 해라.”

“뭘 적당히 해! 한 번밖에 안 했으면서! 너, 우리가 무슨 관계인지 자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없다.

시발 그게 뭔데.

“가기 전에 시간 비워.”

“싫어.”

“싫음 마라!”

쳇 하고 투덜거리면서 빠른 걸음으로 성큼성큼 앞으로 가버리는 서예린.

쟤가 왜 저러나 싶어서 멍하니 보다가 문득, 잊은 걸 떠올렸다.

“야! 커피값 보내!”

“쪼옵!”

내 외침에 빨대를 문 채로 후다닥 도망치는 서예린.

“야! 보내라고!”

“쪼옵! 공짜 커피 마시따아아!”


“야, 이거 봐.”

시험 기간에는 사람이 미친다는 걸 알고 있는가?

나는 그걸 잘 알고 있다. 왜냐면 내가 그럴 것 같으니까.

왜인지 우리 집에 와서 공부하고 있는 유아린이 내 어깨를 툭툭 치면서 벌떡 일어난다.

스트레칭한다고 몸을 이리저리 풀더니 뭐하나 싶었는데.

갑자기 한 손으로 벽을 짚고는 한쪽 다리를 천천히 올리는 게 아닌가.

결국 다리를 일자로 쭉 찢으면서 여유로운 미소를 보였다.

“개쩔지.”

“그거 뭐 어쩌라고.”

내가 저거에 무슨 반응을 해줘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대단하긴 한데 조금 야릇한 느낌도 들어서 일부러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런 내 반응이 맛이 없었는지 유아린은 표정을 구기면서 자세를 유지한다.

“이걸 보고 아무렇지도 않다고? 쩔잖아.”

“쩐다. 시험 기간에 개짓거리하고 있는 네 위기의식이 쩔어. 너 이번에 시험 잘 봐야 한다며.”

“하, 이 새끼 봐라.”

오히려 오기가 생겼는지 유아린은 이번엔 다리를 내리더니 내 매트리스를 옆으로 치운다.

“아, 뭐 하는데!”

“딱 봐라.”

그러더니 히어로 랜딩 포즈를 취하고는.

“싸이클론!”

갑자기 무슨 전대물에서 나올 법한 괴상한 기술명을 외치면서 윈드밀을 도는 게 아닌가!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나?

상식적으로 내 방에서 같은 과 여자 동기가 윈드밀을 돌고 있는 걸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진짜 풍차처럼 잘도 돌아가는 유아린. 얘가 시험공부를 하더니 드디어 미쳤단 생각이 들었는데.

‘쓰읍.

막상 보고 있자니 존나 멋지게 느껴졌다.

“어때? 개쩔지?”

“쩔긴하네.”

대답을 들은 후에야 윈드밀을 멈춘 유아린. 척하고 일어서더니 어지러움을 호소하며 휘청거린다.

그러다 옆에 있는 서랍에 손을 얹었는데. 거기에 우뚝 솟아 있는 텐가들을 보더니 어처구니없단 반응을 보인다.

“이걸 전시해놨냐?”

“애들한테 가져가라고 하는 거 까먹어서 꺼내둔 거야.”

“에휴.”

그러더니 갑자기 텐가를 빤히 보는 게 아닌가.

“음? 지난번에는 네 개 아니었음?”

“세 개인데?”

“아닌데? 빨간색, 파란색, 검은색, 흰색 이렇게 있었는데. 지금은 파란색이 없잖아.”

기억력 존나 좋네.

아니, 그걸 왜 기억하고 있는 거야.

“공부나 하자.”

의도적으로 말을 돌리려하자 유아린은 멍하니 텐가를 보더니 뭔가 깨닫고는 버럭 외쳤다.

“미친 새꺄! 너 하나 썼지?!”

“공부하자.”

“공부는 개뿔! 어디야! 어디에 숨겼냐?!”

“……공부하자고!”

“으휴.”

혀를 차며 본인 가방을 챙기는 유아린. 집에 가려는 건가 했는데 가방에서 꺼낸 건.

“……이거 돌려주러 온 거야.”

굵직하고 영롱한 보랏빛을 풍기는 딜도 그리고 한 박스나 되는 콘돔상자였다.

“그, 걸 네가 왜 가지고 있냐?”

내가 술 마시고 성인용품 가게에서 샀던 물건들이지 않은가.

유아린은 얼굴을 붉히더니 어색하니 설명을 시작했다.

“지, 지난번에 술 마실 때 예린이랑 이서가 챙겼더라고.”

아, 듣긴 했다.

셋이 술 마시는데 딜도 가지고 나라고 부르던 서예린과 콘돔숫자 세던 최이서.

그것들도 하여간 술 마시면 큰일 낼 녀석들이다.

‘……실제로 서예린이랑은 큰일이 났었구나.

뭐, 그건 넘어가고.

“그래서 그때 내가 걔네한테 하지 말라고 내 가방에 이것들 넣었었는데 깜빡하고 집에 가져갔네.”

“허어.”

장난으로 하고 싶은 말이 목끝까지 올라왔으나 하면 선 넘는 것 같아서 그냥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자니.

“아, 안 썼어!”

유아린은 딜도 끝을 잡고는 나를 겨누면서 버럭 외쳤다.

“안 물어봤어.”

“씨이!”

괜히 찔린 유아린이 정말 썼는지 안 썼는지 모르겠고 관심도 없다.

갑자기 좋은 생각이 났다면서 냉큼 텐가를 낚아채는 유아린.

“야, 하지 마.”

“서로 짝 찾았네.”

텐가에 딜도를 꽂아 넣고는 흡족하게 웃는 유아린을 보고 있자니 어지럽기까지 했다.

시험 기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