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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Authored-By: Claude Opus 4.5 <noreply@anthropic.com>
2025-12-14 21:31:57 +09:00

14 KiB
Raw Blame History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남자들끼리는 싸우면 다 친구가 되는 거라고. 옛 선조들께서 말씀하신 건지 아니면 어디서 영화나 드라마에서 나온 대사인지 모르겠지만.

엄밀히 따져봤을 때, 아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긴 했다.

중요한 건 싸운 다음 친해지는 게 아니라 싸우는 거 자체가 아닐까?

왜냐면 지금처럼 상대방 대가리를 술병으로 깨부숴 버리려고 하면 싸우고 친해지는 게 아니라 서로 병원이랑 경찰서에서 볼 테니까.

“야아! 야 이 새끼야아!”

“어허! 진정 좀 해라!”

당장이라도 술병을 들고 표진호의 머리를 깨려는 찬우를 말려본다.

솔직히 찬우가 정하긴 했으나 이 집 삼겹살이 정말 너무 맛없어서 좀 당혹스러웠는데.

덕분에 삼겹살집에 손님이 우리밖에 없다는 게 역으로 다행이었다.

“내가아! 내가아 저 자식 때무네에에!”

술 취해 흥분해서 외치는 모습까지 잘생겼다고 해주기엔 아직 내 우정이 부족한 모양. 어쨌든 열심히 뜯어말리고 있는데 정작 타겟팅 된 놈은 술 마시고 울고 앉았다.

그래.

“흐어어어엉! 아리나아아아아!”

이 개자식, 상남자인 척 다하더니 그냥 질질 짜면서 울고 있다.

표진호라는 인물이 유아린과 정찬우에게 어떤 이미지인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내게는 그냥 호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느낌.

눈물 흘리면서 괴로워하고 있는 표진호를 옆에서 위로해 주고 있는 한강과 안현호를 보면서.

오늘 아주 괴로운 하루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겹살집에 있은 지 대략 두 시간 정도가 지났다. 된장찌개는 슬슬 식어가고, 고기도 딱딱했으나, 술잔만큼은 계속 촉촉하니 마르지 않았기에.

어느새 술병으로 도미노를 해도 될 정도로 쌓였고, 그만큼 주인아주머니의 표정에는 싱글벙글 웃음꽃이 피신다.

“야, 임마아아! 내가아아! 그거 말했냐아아? 예린이 좋아한다고오!”

옆에서 계속 나한테 말을 걸고 있는 한강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리고 어지럽다.

소주나 맥주 같은 걸로 잘 취하지 않는데, 워낙 많이 마신 탓인지 생각 이상으로 울렁거린다.

이미 안현호는 화장실에 들어갔다 안 나온 지 30분은 됐고.

“이 스끼야아아! 형이! 형이 말하잖아아!”

한강은 꽐라가 되어서는 꼰대 짓을 하고 있다.

“내가, 내가 말했나? 예린이 좋아한다고오오.”

어떻게 두 시간 만에 사람이 이렇게 등신이 될 수 있는 거지?

어색한 분위기를 풀겠다고 다 같이 쉬지 않고 들이키던 게 문제였던 것 같다.

차라리 나도 취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이렇게 꽐라가 된 사람들 챙기는 역할을 맡게 됐다는 게 싫다 못해 짜증이 났다.

“그러니까요오오!”

“진짜! 아리나아아! 사랑했다아아아!”

“끄으으으! 아리나아아!”

반대편에서는 아까까지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보이던 표진호와 정찬우가 서로 얼싸 끌어안고는 실연의 아픔을 공유하고 있는 걸 보며.

“쉬벌.”

살짝 혀가 풀린 건 느껴졌지만, 이제는 나도 모르겠다는 마음으로 그냥 소주병을 들고 입안으로 가글하듯 들이켰다.


“어우.”

깨질 듯한 두통이 몸의 적신호를 알리듯 나를 깨운다. 눈이 제대로 떠지지 않아서 이리저리 몸을 비틀어 봤는데 누가 눈에 접착제라도 붙여둔 것 같은 착각마저 들 정도.

발버둥 치듯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자 손에 걸리는 핸드폰.

가까스로 눈을 뜸과 동시에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자 이미 점심시간.

오늘 강의가 오후부터 있던 걸 생각하면 지금 당장이라도 뛰어가야 하는 게 맞겠지만.

‘안 돼. 포기.

오늘은 아무래도 자체적으로 휴강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이게 대학생이지.

어쨌든 익숙한 천장인 점은 다행이었다. 머리가 아작날 정도로 술을 많이 마셨는데 집까지 돌아온 내 스스로가 대견했는데.

서서히 잠이 깨면서.

“……이거 누구 핸드폰이야.”

뭔가 이상함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 시간을 확인하고 있는 핸드폰이 내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순간 퍼뜩 일어난다.

“우욱!”

갑자기 격하게 움직이자 치고 올라오는 현기증과 매스꺼움에 다급하게 화장실로 달려갔는데.

“이 새끼 뭐야!?”

변기 옆에서 널브러진 채로 자고 있는 안현호. 나는 녀석을 발로 차며 변기에 속을 게워 낸 후, 화장실을 나선다.

이제야 보이는 방안의 진풍경.

한강은 어디서 주워 온 건지 모르겠는 망사 속옷을 입은 마네킹을 끌어안은 채 자고 있었고.

표진호는 빨랫감처럼 창문에 걸쳐진 채로 축 늘어져 있다.

마지막으로 찬우는.

“……저거 누구야?”

처음 보는 대머리 아저씨랑 같이 끌어안고 자고 있는데…….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정리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대머리 아저씨를 제외하고 하나같이 머리에 까치집을 진 채로 다 같이 둘러앉은 방안.

숨을 쉴 때마다 술 냄새가 진동해서 숨을 참아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다 꺼져.”

분명 상황 정리를 해야 한다고 불러 모았는데 왜인지 나도 모르게 꺼지라고 본심을 말해버렸다.

“네가 붙잡았잖아.”

아직도 속이 매스꺼운지 얼굴이 회색빛인 안현호가 규칙적으로 호흡하려 노력한다.

“우리 다 간다니까 네가 길거리에 주저앉아서 너희 집에서 자고 가라며.”

“…….”

지난번에 여자애들한테도 똑같은 주사를 했던 전적이 있었기에 입이 꾹 다물어질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일단 정리 좀 해보자. 어제 삼겹살집에서…… 2차로 호프집 갔나?”

나도 기억이 애매해서 미간을 찌푸리며 묻자 옆에 있던 한강이 이마를 쓸어 넘기며 중얼거린다.

“헌팅포차.”

“아, 어쩐지.”

왜인지 찬우가 핸드폰을 꺼내 들며 한숨을 내쉰다.

“모르는 사람들한테 톡이 엄청 와있더라.”

슬쩍 보여주는데 새로운 친구만 13명이다. 하나 같이 찬우한테 잘 들어갔냐? 괜찮냐? 오늘 또 만나지 않겠냐? 이딴 문자 보내는데 핸드폰 박살 낼 뻔했다.

한강과 안현호도 비슷했는지 핸드폰을 슬쩍 보면서 미간을 팍 찌푸린다.

“…….”

나와 표진호만 핸드폰이 조용하다.

“아, 씨 연락.”

“연기하네.”

일부러 누군지 모르는 여자한테 연락 온 척해봤지만 통하지 않아서 그냥 입 다물기로 했다.

“다음은 어디 갔어?”

기억을 더듬으며 묻자 뜬금없게도.

“노래방 갔어.”

같이 자연스럽게 껴있는 대머리 아저씨가 답해줬다.

순간적으로 우리의 시선이 그분에게 쏠렸다. 30대 중반 정도로 보이시는 아저씨는 왜인지 찬우 옆에 찰싹 달라붙어 계셨는데.

“저기…… 근데 누구세요?”

내가 조심스럽게 묻자 아저씨는 방긋 웃으면서 답해주셨다.

“너희가 헌팅포차에서 꼬신 사람.”

“아, 씨발!”

“미친 새끼들아! 너희 뭐한 거야!”

“아! 주여! 아 주여어어어!”

여기저기서 탄식이 흘러나온다. 아저씨는 부끄러우신지 찬우를 슬쩍 잡으셨지만 찬우는 깜짝 놀라며 멀찍이 떨어진다.

“저, 저한테 왜 그러세요?”

“찬우가 여자는 이제 못 믿는다면서 나한테 같이 가자고 했잖아.”

“정찬우 미친 똥게이 새끼야! 꺼져! 우리 집에 다신 오지 마!”

“아니야! 아니라고! 아, 진짜 아니라고!”

벌떡 일어나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부정하는 찬우. 아저씨가 혹시 상처받지 않으실까 했는데 싱긋 웃어주신다.

“괜찮아, 하룻밤의 꿈도 나쁘지 않아.”

산전수전 다 겪은 빡빡이 아저씨구나.

당장이라도 쫓아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일단 꾹 참아낸다.

아무래도 아저씨가 그나마 우리 중에 가장 많은 걸 기억하시는 것 같았으니까.

“노래방 가서 뭐 했어요?”

조심스럽게 묻자 아저씨는 웃으면서 답해주셨다.

“군가만 한 시간 동안 내내 부르던데.”

군가?

여기 군대 다녀온 사람이 누가 있다고 노래방에서 군가를 부르고 지랄하겠는가 싶었는데.

“어? 뭐야?”

“뭐지 이거?”

동시에 비명을 지른 한강과 표진호.

  • 병무청 알림.

강한강 님, 표진호 님 동반입대 관련…….

병무청에서 동반입대 관련해서 자세하게 알려주는 문자가 와 있었다.

“동반입대를 한다고?!”

“내가? 얘랑?”

“축하해요.”

“하룻밤 만에 찐친 되셨네.”

나랑 안현호가 박수까지 쳐가면서 그대로 축하해줬다. 아무래도 어제 술 취하고 둘이 핸드폰으로 동반입대 신청한 다음 군가를 목청 터져라 불렀던 모양이다.

“다음에는요?”

아저씨랑 거리를 벌린 찬우가 조심스럽게 묻자, 아저씨는 슬쩍 구석에 있는 커다란 검정, 빨간 봉투들을 가리키신다.

“성인용품 가게 갔어.”

“거기는 왜 간 거야?!”

내가 짜증 내면서 소리치자 아저씨는 어색하니 답해주신다.

“그, 본인이 가자고 했어.”

제가요?

“여자한테 차인 게 뭐가 대수냐고. 어차피 혼자 다 해결할 수 있다고.”

“…….”

“가서 사고 싶은 거 다 사라고. 영혼의 단짝이 생각보다 멀리 있는 게 아니라고.”

“…….”

“섹x가 별거냐고. 넣고 흔들고 싸면 그게 섹x라고. 그니까 오x홀 사면 그게 섹x라고.”

순간적으로 네 사람의 원망스러운 시선이 내게 쏠려 들어왔다.

“크흠.”

어색하게 헛기침하며 핸드폰에 온 문자로 온 결제내역을 확인했는데.

  • 성인용품 스토어

김*진

773,500원

“씨발 도대체 뭘 샀는데 성인용품 샵에서 칠십만 원을 긁어! 미친 새끼들아!”

어이가 없어서 나는 성큼성큼 가서 안에 있는 물건들을 확인한다.

텐가만 무려 네 개.

콘돔은 박스로 사뒀고.

야시시한 속옷부터 시작해서 여성을 위한 진동 기구와 바이브 엉덩이에 들어가는 플러그 등.

“뭐야, 이건 벌레야?”

여성 성기만 똑 떼어놓은 기괴한 도구부터, 왜 산 건지 모르겠는 진동 딜도까지.

아주 미친 물건들이 줄줄이 소시지처럼 쏟아져 나왔다.

“저게 거기서 가져온 거였구나.”

자신이 끌어안고 잔 마네킹을 가리키면서 중얼거리는 한강. 아주 좋은 깨달음을 얻으셔서 좋겠다고 째려본다.

“너희 갈 때 오나홀 다 가져가라.”

보급품이다.

“찬우는 딜도랑 플러그까지 챙기고.”

“싫어!”

어쨌든.

이야기를 들어보니 성인용품 가게까지 간 다음 근처 편의점에서 맥주를 사서 우리 집에 왔다가 그대로 다들 픽픽 쓰러졌다는 모양이다.

아저씨의 설명을 전부 들은 나는 조심스럽게 요구했다.

“죄송한데, 가주실 수 있을까요?”

“아, 그럼. 나도 출근해야지.”

아저씨는 흔쾌히 웃으면서 일어나신다.

“뭐 이상한 짓 하진 않았으니까 걱정 말고. 나도 나름대로 신사거든.”

그리 말하며 현관문으로 가 윙크를 해주셨다.

“신나는 밤이었어, 친구들. 나중에 또 같이 놀자.”

쿵.

“뭔가 엉덩이 아픈 느낌인데.”

“대머리라서 안 씻고 그냥 가셔도 되는구나.”

“군대에 저런 선임 있으면 어쩌지.”

대머리 아저씨가 나가시고 우리는 한숨을 내쉬면서 자리에 주저앉았다.

어젯밤.

찬우는 대머리 아저씨와 비밀친구가 됐고.

강한강과 표진호는 동반입대를 하게 됐으며.

나는 성인용품 가게에서 70만 원을 긁었다.

“나만 승자인가?”

씨익 웃는 안현호.

능글맞게도 본인은 아무것도 실수 안 했다면서 좋아하며 핸드폰을 살펴보는데.

“…….”

갑자기 새파랗게 질리는 표정에 무슨 일인가 냉큼 달려가 바로 놀려줄 준비를 했고.

  • 발신: 최이서(73통)

“홀리.”

무려, 일흔세 번을 최이서에게 전화한 미친 기록이 안현호에게 남아 있었다.

“아, 아, 아니! 잠깐만!”

다급하게 최이서에게 다시 통화를 걸어봤으나.

  • 수신자에게 차단된 번호로…….

안현호의 연애에 있어 사실상 완전한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근데 전화하고 사고 친 건 안현호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나, 나도 아린이한테 다섯 번이나 걸었네…….”

그나마 안현호의 압도적인 통화 기록 덕분에 다섯 번은 귀엽게 느껴지는 정찬우.

“……나 일곱 번.”

옆에서 끼어든 표진호 덕분에 어젯밤 도합 열두 번의 전화를 받으신 유아린 양.

“시발.”

한강 선배는 서예린에게 했나 싶었는데 보니까 아주 골고루 해주셨다.

지금까지 사귀었던 여자애들한테 한 번씩 싹 전화를 돌린 기록을 보며 안현호를 제외하고 다 같이 웃어주었다.

“어휴, 병신들.”

차라리 내가 나은 수준이었다.

70만 원을 긁긴 했으나 그래도 사회적인 명예는 지키지 않았는가.

최이서 1통.

유아린 1통.

서예린 1통.

통화기록이 있었지만 반대로 발신이 아닌 수신이었다.

셋 다 통화를 했다는 점이 좀 불안하긴 했지만 말이다.

“해장이나 하러 가자!”

결국 최후의 승자는 나였구나 싶어서 방긋 웃으면서 핸드폰을 집어넣으려는 순간.

어젯밤 통화 기록의 맨 밑에 있어선 안 될 이름이 하나 보였다.

  • 오윤지

발신 전화, 3분 47초.